Posts by Kihong Bae:

즉각적인 결정

몇 달 전에 우리 내부 미팅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날 우리가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 충분한 데이터의 부족, 확신의 부족 등 –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그다음 주 미팅에서 결론을 내리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나는 그냥 당장 결정하고 끝내자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게 맞는 결정이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나는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뭔가 결정했다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결정이 틀리든, 맞든.

우리 인생은 크고 작은 결정의 연속 과정이고, 특히나 창업가들은 일반인보다 곱절이나 더 많은 결정을 해야 하고,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그 결정에 의해서 직접 영향을 받는다. 결정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데 최대한 많이 고민하고, 최대한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모든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한 후에 결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론적으론 맞지만, 현실적으론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창업가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는 ‘즉각적인 결정’인데, 아마도 초기 스타트업 창업가가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의 대부분이 그 결정을 위해 필요한 정보가 5%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더 고민하고 생각을 해도, 5% 이상의 정보를 얻는 건 쉽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시장 조사나 공부에 시간을 더 쓰면, 그나마 없는 옵션들이 모두 다 없어진다. 그래서 창업가에겐 결정의 질보단 결정의 속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빨리 결정하고, 만약에 그 결정이 틀리면, 다시 결정하고,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 하지만, 줄에서 가급적이면 떨어지지 않는 – 해야 한다. 틀린 결정을 하더라도, 이 결정을 빨리했다면, 그다음 결정을 할 수 있지만, 너무 느린 결정을 했고, 이게 틀렸다면, 해야 할 그다음 결정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MBA 과정 중 Decision Analysis(DA)라는, 결정을 과학적, 통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수업이 있는데 나도 이 수업을 상당히 재미있게 들었다. 하지만, 빠른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스타트업 대표에겐 비추하는 수업이다. 왜냐하면 현장에서는 의사 결정 분석을 하기 위한 인풋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냥 즉각적으로 결정하고, 또 즉각적으로 결정하고, 계속 이 과정을 반복하는 게 한 번 더 결정할 수 있는 옵션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솔직히 처음부터 맞는 결정이란 어차피 이 세상에 없다. 오히려 즉각적인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이 맞는 결정이 되게 운과 실력을 모두 다 한 방향으로 집중하는 게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정말로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걸 나는 여러 번 경험했다.

즉각적인 결정을 잘 못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너무 신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정을 하는 게 불편하고 거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하고 뭉개는 경우를 나는 너무 많이 봤는데, 이렇게 결정을 미루다가 회사가 망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험을 나는 몇 번 해봤기 때문에, 혹시 우리 투자사 대표님이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즉각적인 결정을 하라고 계속 압박하는 편이다. 불편함과 거북함을 무릅쓰고 지금 당장 결정해서 회사를 살리겠는가, 아니면 즉각적인 결정을 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은 조금 더 편하겠지만 회사가 망하는 걸 선택하겠냐고 말하면서. 솔직히 즉각적인 결정을 하지 않으면, 잠시나마 조금 마음은 편하지만, 이로 인해서 회사가 망하면 평생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가 할 수 있는 최악의 결정은 “일주일만 더 두고 보자”이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그렇게 오래 고민해야 하는 결정은 이 세상에 없다. 내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결정은 5분 안에 할 수 있다.

공부 좀 합시다

우린 고등학교 때까진 전 세계 그 어떤 민족보다 열심히 공부한다. 공부로 따지면 2등은 어떤 나라인진 모르겠지만, 그 양과 깊이로 따져보면 1등인 한국과 2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가 날 것 같다.

그런데 고등학교 이후엔? 책과는 담을 쌓고, 그렇게 열심히 하던 공부의 양과 질도 점점 평균 이하로 떨어지면서, 아마도 한국은 100위 권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든 안 하든, 공부량은 압도적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 패턴이 크게 변하지 않고 유지된다. 한국 성인의 연간 평균 독서량은 4권이 안 되고, 60%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데, 이건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를 통틀어 전 세계 최하위이고,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나 모두 코인 투자 같은 얕은 잡기 습득 외엔 거의 공부를 안 한다.

내가 종사하고 있는 이 스타트업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들은 정말 열심히 하지만 더 extraordinary 하게 일을 하거나, 더 extraordinary 하게 성장하려면 공부해야 하는데, 공부하는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본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얕은 경험과 지식은 있지만,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거나 제대로 뭔가를 알려고 하는 분들은 갈수록 유니콘처럼 희귀한 존재가 되고 있다.

창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사업, 고객, 직원이지만, 경쟁사에 대한 현황 파악도 잘하고 있어야 하고,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의 매크로 시장은 어떻고, 어떤 글로벌 벤치마크가 존재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한국의 창업가들과 이야기해 보면 같은 분야에서 비슷한 사업을 하는 회사나 서비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특히나 해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걸 자주 경험한다. 전에는 정보의 접근성이 낮아서 외국에는 어떤 비슷한 제품이 존재하고, 이 제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회사의 성장 전략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접하는 게 어려웠지만, 요샌 그냥 검색하거나 AI에 물어보면 웬만한 건 다 찾을 수 있다. 얕은 지식의 대명사인 나 같은 VC도 아는 유명한 미국의 회사와 서비스에 대해서, 이 분야에서 치열하게 사업하면서 유니콘을 만들고 싶다는 창업가가 본인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짜증이 난다. 공부를 전혀 안 하기 때문이다.

사업은 종합 예술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아야 하지만, 내 주변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내가 사업하는 영역에는 국내/국외에 어떤 플레이어들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책도 봐야 하고, 잡지도 봐야 하고, 한글과 영문 기사도 열심히 읽고, 팟캐스트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벤치마킹해야 할 제품이 있다면, 대충 겉으로만 보지 말고 되도록 이 제품의 모든 기능을 다 써봐야 한다. 그러면서 관련 기사, 책, 팟캐스트, 인터뷰 등을 하나씩 복기하면서 내가 속한 분야에 대한 큰 그림을 내 지식을 기반으로 하나씩 재구성하다 보면, 사업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두 고등학교 때 치열하게 공부했던 경험을 살려서 다시 공부 좀 해보자. 하지만, 제발 이런 콘텐츠를 NotebookLM이나 ChatGPT에 때려 넣고 요약본으로 학습하려고 하지 마라. 남의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데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흑백요리사, 흑백창업가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를 나는 아직 못 봤다. 아니, 안 봤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고 아마도 앞으로도 안 볼 것 같다. 전 세계적인 이목을 받았던 예능이고, 전 세계적으로 좋아하는 두 가지 감성에 집중해서 나름 성공했던 것 같다. 한국인 특유의 파생적 창의력을 기반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서바이벌 개념을 요리 쪽에 적용한 점과 요리 분야에도 흙수저와 금수저의 개념을 적용해서 이 또한 누구나 다 공감하는 계층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는 점이 참신했다. 참고로,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 모두 이런 계층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에 큰 글로벌 인기와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요리사가 발굴됐다. 이미 유명한 백요리사도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흑요리사들도 많이 발굴됐고, 이들의 식당은 이후에 줄 서서 먹어야 하는 곳이 됐다. 나는 그 어떤 식당도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맛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흑백요리사에 나온 쉐프의 식당은 안 가봤지만, 많은 곳이 즐거움의 비명을 지르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건 잘 안다.

근데 이들이 정말로 실력 있는 요리사일까? 정말 맛 있을까? 워낙 주관적인 판단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로 실력 있는 요리사는 이런 프로그램에 나올 필요도 없고, 나올 시간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방송을 통한 유명세에 연연하지 않고, 요리사로서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한다. 방송 출연할 시간에 메뉴를 하나라도 더 연구하고, 지금 팔고 있는 메뉴를 어떻게 하면 더 저렴하고 더 맛있게 고객들에게 팔 수 있는지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고객에게 한 접시라도 더 팔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건 나도 건너 들은 이야기라서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흑백요리사 출연을 거절한 쉐프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방송을 통해 유명해지기보단,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미디어를 타기 전에 일단 기본이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요리사의 기본은 음식의 맛인데, 이건 미디어에 나온다고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진짜 실력 있는 요리사는 이런 프로에 나올 필요도 없고, 나올 시간도 없다. 이들은 그 시간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지금의 그들을 있게 해준 고객들을 서빙하고, 매출을 만들고, 본업인 요리를 하고 있다. 이것 만해도 시간이 모자란다.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실은 이 말은 내가 창업가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고, 소셜 미디어나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손에 지문이 닳도록 강조하고 있다. 방송을 타거나, 스타트업 경진 대회에서 입상하거나, Forbes 30 Under 30에 선정되거나, 뭐, 이런 게 중요한게 아니다. 실은, 방송을 심하게 타거나, 국내외 모든 경진대회에 참가하거나, 유명한 미디어의 20 Under 20/30 Under 30/40 Under 40등의 리스트에 올라가는, 내가 아는 대부분의모든 창업가들은 솔직히 본인의 사업은 잘 못 한다.(그리고 이건 스트롱 창업가들도 마찬가지다). 가끔 내가 아는 창업가들이 본인의 유명세를 자랑하면 나는 속으로 사업이나 똑바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진짜로 사업하는 분들은 이런 방송에도 안 나가고 경진대회에도 안 나간다. 왜? 그냥 그런 거 할 시간이 없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아서, 하루 24시간도 모자라는데, 언제 딴짓할 시간이 있을까? 진짜배기 창업가들은 그럴 시간에 제품이나 제대로 만들고, 고객이나 한 명 더 만나고, 매출이나 100만 원 더 만들고 있다. 이런 패턴은 스타트업 행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거의 안 가지만, 흔하디흔한 스타트업 행사들 가보면, 항상 그 얼굴이 그 얼굴이다. 해야 할 일들은 안 하고,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면서 이 모든 게 결국엔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지만, 정말로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사업을 좀 먹고,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떨어뜨리고, – “우리 대표는 대회랑 방송만 나가면서 스타트업 대표 놀이만 하네” – 투자자들에게 누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창업가라고 생각한다면, 창업가같이 행동해라.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우리 제품을 사랑하는 고객을 만들고, 돈을 벌어라.

(꽤 중요한) 투자자와의 소통

전에 내가 ‘투자자와 소통하기’라는 글을 썼다. 우리가 일하는 분야는 워낙 페이스가 빨라서 과거에 맞다고 했던 내용이 현재는 완전히 틀릴 수도 있고, 과거에 틀렸다고 했던 내용이 현재는 완전히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6년 전에 썼던 이 글은, 과거에도 맞았고 지금은 더 오지게 맞는 내용이라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의 글을 한 번 더 쓴다.

우리 모두 인생과 직장에서의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고, 인생은 피드백이고 인생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특히, 스타트업 창업가라면,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고, 이 가장 중요한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대화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아마도 대부분의 창업가에게 물어보면 사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할 것이고, 이 사람들을 끈끈하게 본딩해줄 수 있는 건 소통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건, 내가 아는 많은 창업가들이 입으로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이걸 참 못 한다. 아니, 어떤 분들은 일부러 안 하는 것 같다. 특히, 내부 소통보단 외부 소통, 외부 소통 중에서도 투자자들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어떤 분들의 – 우리 포트폴리오 포함 –  커뮤니케이션 점수는 빵점이다.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은 잘 아실 텐데, 우린 워낙 많은 투자사가 있어서, 이들의 사업 현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회사를 매달 만나는 비현실적인 방법보단, 이메일로 월간 사업 업데이트를 받고, 이를 통해서 사업의 현황과 건강의 척도를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나는 매달 대표님들에게 사업 업데이트를 부탁하는데, 이걸 받는 분들은 징글맞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대부분의 스트롱 대표님들은 이렇게 투자자들에게 월간 사업 업데이트하는 게 습관화되어 있다. 언젠가 우리와 몇 개 회사에 공동 투자한 다른 VC가 “스트롱 포트폴리오는 월간 업데이트를 정기적으로 잘하네요. 그리고 그 내용도 형식적인 보고가 아니라, 대표님의 고민, 생각, 그리고 투명한 회사의 실적을 공유해줘서 너무 좋습니다. 훈련이 잘된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내가 여러 번 말했는데, 투자자와의 이런 정기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스타트업 생태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일단 회사가 투자를 받으면, 투자자들에게 사업 현황을 정기적으로 투명하게 공유하는 건 기본이자, 회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이 글을 보면, 너무나 당연한 거로 생각하겠지만,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창업가분들도 과연 본인의 투자자들과 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봐라. 안 그런 분들도 꽤 있을 것이다. 소통이 잘 안되는 사소한 문제가 나중에 엄청나게 커지고, 이게 서로의 감정싸움으로 번지면서 소송으로 가는 것까지 나는 본 적이 있다.

소통이 중요한 또 다른 점은, 이렇게 매달 투자자들과 사업 현황을 공유하다 보면, 그냥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빈도를 높이고, 정기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은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쪽에 원할 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대부분 그렇다. 투자자는 창업가에게 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에, 창업가는 싫든 좋든 투자자가 연락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돼야 한다. 반대로, 창업가는 본인이 선장인 배에 탄 투자자들이 배가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게 만들어야 하므로, 필요한 게 있으면 투자자에게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게 자정이든 주말이든 투자자는 무조건 연락이 돼야 한다. 다른 VC는 잘 모르겠지만, 스트롱 전체 팀은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이 연락하면 언제든지 연락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자주 연락을 안 하는 게 또 투자자와 창업가의 관계이다. 시간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이며, 이 부분을 서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창업가나 VC들도 비슷할 것 같은데, 아무리 서로 친해도 엄청나게 자주 만나거나 연락하진 않을 것이다. 이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어쨌든 사람은 자주 연락하고 봐야지 친해지니까. 그래서 월간 업데이트를 하면 매달 소통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매우 좋다. 우리는 이 월간 업데이트를 자세히 읽고, 우리의 피드백과 생각을 공유하고, 질문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상당히 많이 한다. 그러면 굳이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소식을 정기적으로 정하고, 포트폴리오의 사업 현황에 대해서 꽤 잘 숙지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을 만났는데,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거의 1년 반 전이였다는 걸 알게 된 후에 깜짝 놀랐다. 매달 이메일로 소통하다 보니, 거의 매달 만난 것 같았으니.

마지막으로, 투자자와의 소통이 정말 중요한 가장 실용적인 이유는, 정기적인 소통이 됐다면 회사가 어려울 때 투자자들이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개월 동안 사업 업데이트가 없던 대표가 금요일 저녁에 다급하게 연락이 와서 다음 달 나갈 월급이 없다고 하거나, 경쟁사에게 소송을 당했다고 SOS를 치면 우리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우리 투자사이니 당연히 같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우리도 이 회사가 그동안 뭘 했고, 현황은 어떤지, 그리고 대표님은 어떤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회사의 현황을 파악하는 데만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소통하면서 회사의 상황에 대해서 잘 공유했다면, 회사에 현금이 고갈되고 있다는 사실을 수개월 전부터 알아서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대표는 우리도 우리와 친한 다른 VC에게 선뜻 소개해 주는 게 망설여진다. 다른 VC한테 투자받은 후에 또 이렇게 연락이 잘 안될 텐데, 이건 스트롱과 내가 욕먹을 일이기 때문이다.

뭔가 우리가 대단한 걸 매달 요구할까? 그건 아니다. 우리가 포트폴리오 대표들에게 요구하는 건 다음과 같다:
1/ 회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KPI(매출, UV, MAU 등…)
2/ 영업, 마케팅, 유통, 제조 등 관련해서 특별히 나쁘거나, 좋았던 내용들
3/ 특이 사항
4/ full-time 임직원 수
5/ 지금까지 유치한 총투자 금액
6/ 현재 회사에 남은 cash 상황
7/ 스트롱에게(또는 다른 투자사들) 부탁하고 싶은 내용

이건 솔직히 제대로 된 회사, 제대로 된 대표라면 매달 결산하고 스스로 정리하고 고민하는 내용들이다. 그냥 이 내용이 정제되지 않은 포맷으로 편안하게 공유해달라고 부탁하는 정도이다.

이 글을 읽는 창업가들은 모두 본인들의 투자자들과 월간 업데이트를 공유하면서 소통하는 걸 적극 권장한다. 한 일 년 이상 꾸준히 하다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빈도와 질에 매우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고, 더 신뢰받는 대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잠수보단 거절

한국과 미국을 1대1로 비교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문화가 다르고, 사람들이 다르고, 교육 내용과 환경이 다르므로 살아가는 방식과 일하는 방식이 너무 다르다. 그래서 무조건 미국은 좋고, 한국은 나쁘다고 하는 건 정말 구닥다리 사고방식이다. 오히려 나는 요새 무조건 한국은 좋고, 미국은 나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물론, 이 또한 유연하지 못한 사고와 발언이다.

그래도 비즈니스 문화에서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못하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거절하는 문화다. 상대방이 나에게 뭔가를 간절하게 원하는데, 내가 못 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하기 싫다면, 그냥 거절하면 되는데, 이게 꽤 많은 한국 분에겐 참 어려운가 보다.

내가 못 하는 거면, 그냥 솔직히 내 능력이 안 되거나, 시간이 안 되거나, 뭐 여러 가지 합당한 이유를 – 상대방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나한테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는 – 대면서 그냥 못 한다고 하면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한국의 기업에서 일을 해 본 많은 분들이 실은 이것도 힘들어한다.
더 어려운 거절은 내가 할 수 있지만, 그냥 하기 싫을 때이다. 나도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다. 엄청 바쁘거나, 상대방의 부탁을 그냥 들어주기 싫거나, 아니면 그냥 굳이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 싫을 때가 있다. 상대방의 부탁을 그냥 들어주기 싫은 경우는, 그분이 미워서라기보단 그냥 잘 모르는 분이 불쑥 연락이 와서 뭔가를 해달라고 할 때다. 나한테 큰 도움이 되지도 않은데 굳이 내가 잘 모르는 분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고, 그냥 여기에 시간을 쓸 바에야 집에서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게 더 좋을 때가 있다.

나는 거절을 꽤 잘 한다고 생각한다. 실은 과거엔 나도 남들이 부탁하면 웬만하면 다 들어줬다. 한때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거절했을 때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는 걸 좀 두려워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해보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보단 어느 순간 남이 나에게 원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 이후론 의식적으로 모든 걸 거절하기 시작했다. 못 하는 건 그냥 못 하므로 못 한다고 하고, 하기 싫은 건 그냥 하기 싫어서 안 한다고 한다. 이렇게 너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꽤 많은 분들이 내가 인성이 나쁘고, 싸가지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그렇게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다. 심지어 전엔 어떤 분이 뭔가를 부탁했는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냥 못 한다고 했다. 그러자 이분은 일정이 안 맞는 줄 알고, 다른 여러 날짜를 제시했는데, 그냥 전부 다 못 한다고 하면서, 시간은 가능한데 내가 하기 싫다고 했다. 그 이후로 이분은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는데, 뭐,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 경험상, 오히려 이렇게 대차게 거절하는 게 상대방이나 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관계 유지 방법이다. 거절하는 사람으로서도 처음엔 불편하고, 거절당하는 사람으로서도 기분이 상할 수도 있지만 – 솔직히 나도 거절을 정말 많이 당하는데, 거절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기분이 상할 이유는 전혀 없다 – 결국엔 서로 깔끔하게 교통정리가 되고, 각자의 인생을 살 수 있고, 각자 그냥 move on 할 수 있다. 이런 분들은 오히려 평생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거절하는 걸 너무 힘들게 생각해서, 아예 상대방의 연락을 피하고 잠수 타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잠수타기는 최악의 한 수이다. 이런 분들은 본인은 ‘원래’ 상대방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고 하는데, 이건 개소리다. 그냥 본인들이 상대방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싫은 소리 하거나, 거절하면 상대방이 본인을 안 좋게 생각하는 게 걱정되는 이런 분들의 또 다른 특성은 남이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많다는 점이다.

나도 가끔 이런 분들을 만난다. 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연락이 끊기는데, 내 성격상 이렇게 연락이 안 되면 나는 계속 연락한다. 끝까지 잠수 타는 분들도 있지만 – 참고로, 나는 이런 사람들은 인간 취급 안 한다 – 대부분 몇 달 뒤에 다시 연락된다. 그리고 왜 갑자기 잠수 탔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은 “바빴어요” , “원래 내가 싫은 소리 못 하잖아요” 또는 “내가요?” 정도이다.

하기 싫으면 그냥 하기 싫다고 해라. 못 하겠으면 그냥 못 한다고 해라. 그리고 만약 거절하는 게 내가 미안해야 할 일이라면, 아주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해라. 특히 나 같은 사람한텐 그냥 대차게 거절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는 희망을 갖고 계속 귀찮게 하고, 계속 연락할 것이다. 어쨌든 절대로 잠수는 타지 마라.

잠수 타면서 오랫동안 마음이 불안한 것보단, 그냥 거절하고 그때 한순간만 살짝 미안함을 느끼는 게 스트레스 관리에도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