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Kihong Bae:

글로벌 벤치마크

투자자들이 스타트업을 검토할 때 물어보는 공통 질문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이 중 하나가 글로벌 벤치마크에 대한 질문이다. 특정 스타트업이 혹시 벤치마킹하고 있는, 이미 시장에서 잘하는 서비스나 제품이 있는지, 그리고 조금 더 확장해서 국내 벤치마크도 좋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잘하는 글로벌 벤치마크가 있는지를 VC들이 자주 물어본다.

이 질문을 하는 배경은 대략 다음과 같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라서 투자자마다 다를 수 있다.

일단 투자자에게 서비스가 생소해서 시장성이 있는지, 시장성이 있어도 어느 정도 성장 가능성이 있는지 잘 파악할 수 없을 때 이런 질문을 많이 한다. 만약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제품이 존재하고, 잘 사업하고 있다면, 투자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장성과 성장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면, 우리가 투자한 운전선생이라는 서비스가 있다. 주변의 운전학원을 찾고 예약하는 서비스인데, 겉으로만 보면 시장성에 대해선 의문을 품게 하는 제품일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갸우뚱했지만, 창업가를 만나고 너무 좋았고, 이미 프랑스에 이와 비슷한 사업을 하는 Ornika라는 유니콘 스타트업이 있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앞으로 운전선생이 어떻게 발전하고 성장하면 될지에 대한 조금 더 뚜렷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위에서 내가 검토하는 서비스의 시장성과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어느 정도”만 해결해 줄 수 있다고 한 이유는, 글로벌 벤치마크가 존재해도 그 서비스를 대부분 국내 VC들이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그 벤치마크 서비스를 VC들이 연구하고 공부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잘 된다고 한국에서 잘 된다는 보장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대형 글로벌 서비스가 있으면 VC들의 검토가 전반적으로 좀 쉬워지긴 한다.

이 포인트랑 직결되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이미 비슷한 서비스를 잘하는 글로벌 유니콘 기업이 있으면, VC들의 내부 투심위에서 이 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승인받는 게 조금은 수월해진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아직 그 어떤 시장에서도 증명되지 않은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승인하기보단, 이미 비슷한 사업으로 유니콘이 된 글로벌 벤치마크 스타트업이 존재하고, 이 회사가 특히나 Sequoia, a16z나 Benchmark 같은 곳으로부터 투자를 받았다면, 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투심위에서 승인받는 게 더 쉽다. “이미 유럽에는 이 컨셉을 기반으로 3조짜리 유니콘을 만든 회사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소 1조 원짜리 비즈니스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주장을 그냥 상상력을 동원한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감을 동원했기 때문에 담당 심사역도 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글로벌 벤치마크가 있는지, 이 회사는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 어떤 곳으로부터 투자받았는지, 제품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이런 걸 창업가가 알고 있다면, 이분이 시장 조사를 나름 면밀하게 했다는 의미이고, 이런 태도는 투자자들에게 조금 더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이런 서비스의 존재에 대한 기사를 읽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본인들이 벤치마킹할 수 있는 유니콘 기업을 A to Z로 알고 있는지는 자세와 태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글로벌 벤치마크 유니콘 스타트업이 있고, 이 스타트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면 투자받을 확률이 더 높다는 내용 같은데, 그건 아니다. 외국에서 아무리 우리와 같은 서비스로 10조짜리 유니콘이 탄생했다고 해서 한국에서도 그 서비스가 잘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결국엔 다른 팀이 다른 시장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하는 건데, 이런 환경에는 너무나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글로벌 벤치마크의 존재 여부는 투자의 가능성이나 성공의 가능성과 비례하지 않는다. 하지만, 창업가가 눈과 귀를 활짝 열어놓고 시장을 계속 보고 있다는 면에는 긍정적인 시그널을 VC들에게 보낼 수 있다.

재택근무, 사이드잡, 그리고 떨

최근에 미국에 2주 넘게 출장을 갔었다. 한국은 이제 대부분의 직장이 재택근무를 끝냈거나, 그 빈도를 줄이고 있는데 미국은 아직도 많은/대부분 회사가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다. WFH(Work From Home)가 이젠 복지가 아니라 아예 하나의 문화와 시스템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고 채용 공고를 보면 “3-2” , “4-1”과 같은 문구를 흔히 볼 수 있는데, 3일 출근-2일 재택, 4일 출근-하루 재택, 뭐 대략 이런 의미이다.

스트롱도 팬데믹 기간에는 재택근무를 했고, 이땐 어쩔 수 없이 WFH의 기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택근무를 옵션으로 하고 출근을 기본으로 바꿨다. 이젠 기본적으로 모두 다 출근하고, 상황에 따라서 재택근무 하는 체제로 돌아왔는데, 생산성이나 집중력 면에서 훨씬 좋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이건 그 어떠한 데이터를 참고한 적도 없는, 100% 내 개인적인 의견인데, 재택근무를 회사의 기본방침으로 바꾸면서 미국 회사들의 생산성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결국엔 미국 전체의 생산성 문제로 확산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나는 6개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많은 회사를 만났고, 서부/중부/동부 직장인들의 업무 패턴을 살짝 볼 수 있는 경험을 했는데, 지역, 나이, 직군에 상관없이 공통으로 발견한 요소는 ‘사이드잡’이다.

모든 미국의 직장인들이 본인들이 월급을 받는 풀타임 직업 외에 사이드잡 한두 개는 기본적으로 하는 것 같았다. 이건 고액연봉자들도 마찬가지다. 돈은 풀타임 직장에서 벌고, 평소에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한두 개씩 몰래 하고 있는데, 이걸 가능케 하는 게 재택근무이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서, 꼭 해야 해서 사이드잡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거라는 말을 하는데, 이런 태도는 많은 걸 말해주고, 이런 직원들이 있는 회사의 장래는 그렇게 밝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일하므로 언제든지 그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없이 사이드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은, 이 분야에서도 좋은 스타트업들이 나오고 있는데,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직장인들을 위한 사이드잡/긱플랫폼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특징은 쉬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회사에 나오면 전반적인 분위기와 peer pressure가 있어서 적당한 선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집에서 혼자 일하면 마음대로 놀고, 쉴 수가 있다. 여기에 이번에 내가 또 목격했던 건, 빠르게 합법화되는 마리화나인데, 상당히 많은 직장인들이 집에서 마리화나를 피는 걸 봤다. 중독성이 담배보단 약하다곤 하지만, 마리화나를 핀 후에, 이 정신으로 다시 바로 업무로 돌아가서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너무 많은 직장인들의 농땡이, 사이드잡, 그리고 레크리에이셔널 마리화나는 미국 기업들의 생산성을 떨어뜨릴 것인고, 내가 이야기했던 어떤 CEO들은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재택근무 옵션이 없으면 요새 젊은 친구들 채용하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옵션을 제공해야 하고, 이제 재택근무는 옵션이 아니라 영구적인 고용 형태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미국 대표들이 매우 많았다. 이분들 중 일부는 오히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메타와 같이 tech를 이끄는 대기업들이 재택근무를 완전히 없애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 말이 anti-근로자 발언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한국같이 일찌감치 재택근무를 없앤 국가들이 생산성의 경주에서 이번 기회에 미국을 뛰어넘길 바란다.

B2B 이탈 방지

기업에 판매하는 B2B SaaS 제품은 기업에서 기꺼이 돈을 낼 수준까지 완성도를 올리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리도 30개가 넘는 B2B SaaS 회사에 투자했는데, 대부분 회사는 제대로 된 베타 제품을 만드는데 6개월에서 12개월이 걸린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제품을 일반적인 B2C 제품같이 유료 온라인 마케팅을 한다고 고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영업해야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영업해서 첫 번째 고객을 확보하는 데에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우리 투자사들의 경우, 첫 번째 유료 B2B 고객을 온보딩하는데 평균 3개월~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제품을 개발하고 첫 매출을 만들기까지 거의 1년에서 1년 반 정도가 걸리는데, 이 기간에 없는 살림으로 생존하는 건 매우 어렵다.

많은 B2B SaaS 회사들이 이렇게 늦게 발동이 걸리고, 아주 천천히 성장하지만, 나름 좋은 면도 많다. 일단 기업을 대상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한 번 고객이 되면 웬만하면 이탈이 없다. 또한, 기업들이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라서 불경기라도 계속 사용할 확률이 높고, 예측할 수 있는 꾸준한 매출을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이 B2B SaaS 사업의 매력이라서 시간과 인내심이 많이 필요함에도 오늘도 많은 창업가들이 이 분야에서 좋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고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서 기업 소프트웨어는 이탈이 쉽게 발생하지 않지만, 최근에 초기 B2B SaaS 스타트업이 골치 아파하는, 그리고 내가 요새 이 분야에서 목격하고 있는 이탈 현상이 있다.

많은 B2B SaaS 스타트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one stop B2B 솔루션인데, 아마도 SAP, 오라클, 또는 세일즈포스를 많은 창업가들이 벤치마킹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처음부터 이런 대형 기업용 솔루션을 만들 순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B2B SaaS 창업가들은 아주 좁고 날카로운 기능 위주의 제품으로 micro-vertical을 공략한다. 예를 들면, ERP, SCM과 CRM 제품이 제공하는 이미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용 솔루션에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기능 중 하나인 연락처 관리, 이메일 관리, 영업 대시보드 관리나 문서 관리만을 위한 작은 버티칼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회사원들이 몇 가지 작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나름 시장에서 인지도가 생기고 돈을 내는 기업 고객이 생긴다.

여기까진 좋은데, 이런 기능 위주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고객 입장에서는 회사 일을 잘하려면, 여러 가지 작업을 잘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 스타트업들이 개발해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능을 유료로 사용하는데, 언젠간 모든 기능들을 연동하고 통합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A 스타트업의 캘린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B 스타트업의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C 스타트업의 알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 모든 소프트웨어를 통합해야지만 사용자의 회사 생활이 편해지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정 기능을 만드는 초기 스타트업은 그 기능은 누구보다 완벽하게 만들지만, 다른 제품들과의 통합에 있어서는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B2B SaaS 고객은 결정을 해야 한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업무에 필요한 중요한 기능을 잘 만드는 스타트업의 제품들을 여러 개 사용하고 있고, 각 기능만을 보면 품질이 월등해서 만족하지만, 모든 제품이 각자 따로 돌아가면서 통합이 안 되니 오히려 생산성은 저하 되는 걸 느낀다. 특히 이미 레거시 ERP나 CRM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회사라면, 오래된 코드와 새로운 코드의 통합은 더 어렵다.

여기서 많은 B2B SaaS 스타트업 고객들의 이탈이 발생하는 걸 요새 자주 본다. “너무 좋은데 우리 기간계 시스템과 통합이 안 돼서요.” , “제가 작은 스타트업들의 제품을 정말 많이 사용하는데요, 다들 통합이 안 돼서 그냥 옛날에 사용하던 엑셀이 더 생산성이 좋은 것 같아요.” , 뭐 이런 피드백을 굉장히 많이 듣고 있다.

어렵게 확보한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가 너무나 월등하기 때문에, 다른 제품들과 통합이 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제품을 만들면 된다. 이 정도의 제품을 만들었다면, 이 기업 고객은 아마도 평생 우리의 고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제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른 B2B SaaS 제품과의 연동과 통합을 감안해서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다른 제품들을 잘 연구하고 공부해서 고객사가 직접 연동할 수 있는 다양한 API를 제공하면 앞으로 통합성의 문제 때문에 이탈하는 고객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개발하고, 더 어렵게 확보한 기업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선 아주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다른 제품과의 연동과 통합은 더 중요하다. 안 그러면 결국엔 모두 다 이탈해서 원래 사용하던 아주 오래되고 구닥다리지만, 업무를 위한 많은 기능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제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르는 걸 모르는 것

코로나 기간 우린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로봇을 만들고 있는 Roboligent라는 한인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서비스 자동화 분야의 로봇을 만들고 있는 회사인데, 이 회사의 창업가인 김봉수 대표님은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직접 100% 다 만들고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 투자하고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 전에 오스틴에 가서 로보리젠트 팀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동안 이 회사의 첫 번째 로봇인 Optimo Regen을 – 재활 치료를 돕는 로봇 – 줌과 동영상으로만 봤는데, 내가 직접 휠체어에 앉아서 로봇의 도움으로 모의 재활 치료를 해보니까 이 팀이 얼마나 적은 인력과 자본으로 얼마나 대단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로봇 스타트업은 다른 회사의 로봇 팔을 구매해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이 팀은 모든 걸 직접 다 만들었다.

돈이 별로 없는 스타트업이라서, 창고형 사무실에서 직접 부품을 3D 프린터로 출력해서 조립하는데, 마치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가 직접 로봇을 만드는 작업실 같은 분위기가 나서 로봇 공장을 견학하는 어린이같이 들뜬 마음으로 미팅을 했다.

김봉수 대표님은 UT 오스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바로 이 회사를 창업했는데, 본인도 이 로봇을 만들 수 있을지 잘 몰랐다고 한다. 그냥 계속 만들다 보니 아주 훌륭한 제품이 만들어졌는데, 나같이 공학은 공부했지만, 직접 한 번도 뭔가를 만들어 보지도 않았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봤을 땐, 너무나 대단한 창업가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 최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대규모 시장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스타트업이 꽤 많이 있는데, 이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Roboligent의 김봉수 대표님과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많이 들었다.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했는데, 진짜로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시작했더니 진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그리고 이분들과 더 깊게 이야기를 해보고, 이런 이야기를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창업가들은 본인들이 잘 모른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걸 시도했고, 벽에 부딪혔을 때도 이게 벽인지 모르고, 계속 새로운 방법을 찾다 보니 해결책을 찾게 됐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모르는 걸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런 걸 주제 파악이라고 하고, 나도 이걸 엄청나게 강조하고 다닌다. 하지만, 가끔, 어떤 경우에는 모르는 걸 아예 모르는 게, 그 누구도 모르던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나는 요새 가끔 소규모의 기적들을 직접 목격하고 있고, 그럴 때마다 이 일에 대한 애정, 그리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들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오늘도 본인이 모른다는 것을 잘 모르고,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작은 기적들을 만들고 있는 창업가분들 파이팅이다.

24시간 피칭

지난주에 미국 출장을 갔는데, 정말 오랜만에 실리콘밸리에 며칠 있었다.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샌프란시스코 공항까지 우버를 탔는데, 이 우버 기사가 엄청 수다스러운 백인 아저씨였다. 내가 타자마자 실리콘밸리 지역은 아주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빨리 이 동네를 벗어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무슨 말인지 물어보니, 너무 많은 VC들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그리고 공항 가는 내내 벤처캐피탈, 스타트업, 매크로/마이크로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많이 시끄럽긴 했지만 – 우버 기사분이 특수 분야에 대해서 이렇게 해박한 것에 놀랐고, 역시 우버 기사님들의 성향이 그 동네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 나에게 “Are you in the VC industry by any chance?”라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하면 너무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냥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무역업무를 하고 있다고 했고, 이분의 VC/스타트업 독백은 계속됐다. 조용히 가긴 글렀다는 생각에 나도 그냥 가벼운 대화를 하기로 했고, 몇 마디 나누면서 꽤 재미있는 사실들을 알게 됐다. 나이는 한 50대 중반 추정, UC 버클리 다녔는데 졸업은 안 했고, 데이터베이스 회사에 취직해서 세일즈를 오랫동안 했다고 한다. 그리고 로봇과 자동화 분야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이 분야에서 창업하기 위해서 관련 전공책들을 보면서 스스로 로보틱스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웠고, 현재 창고 자동화 로봇 분야의 회사를 창업했는데, 돈이 없어서 펀딩을 하는 동안에 먹고 살기 위해서 우버 기사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세일즈를 오래 해서 그런지 정말로 말을 잘했고, 상대방을 혹하게 하는 면도 있었다. 본인이 만들고 싶어 하는 회사의 글로벌 벤치마크는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Symbotic이라는 상장 회사인데 이 회사의 기술, 비즈니스, 펀딩 현황을 모두 줄줄 외우고 있었다.(귀찮아서 팩트체크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랑 이야기하면서 중간 중간에 본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꽤 흥미로운 사람이긴 했다.

내가 이분한테 하루에 손님들이 꽤 많을 텐데 모든 손님들에게 이렇게 에너지 넘치게 당신의 스토리와 회사에 관해서 이야기하는지 물어보면서, 마치 투자자에게 피칭(pitching)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 분은 내가 정확하게 봤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는 워낙 돈 많고 투자하는 VC나 개인들이 많아서, 승객을 태우면 이 사람이 투자자일 확률이 30%가 넘기 때문에, 본인은 24시간 피칭하는 자세로 우버에 임한다고 했다. 바쁘고 약속 잡기 힘든 VC들이 내 차에 타면 이동 시간만큼은 오롯이 본인이 이들에게 피칭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자받을 때까지 언제든지 피칭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희망찬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바로 전에 인생 쏟아내기라는 포스팅을 올렸는데, 이분이 매일 매일 인생을 쏟아내고, 다시 채워넣기를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 같다. 우리는 투자하지 않겠지만, 이런 끈질기고 긍정적인 자세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언젠가 투자자와 좋은 접점이 생겨서 본인이 원하는 사업을 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길. 그런데 공항 오는 내내 너무 시끄럽긴 했는데, 내가 VC라고 말을 했으면 아마도 제시간에 비행기를 못 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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