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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올챙이 시절

요새도 MBTI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하는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우리가 검토했던 회사 자료의 팀 슬라이드에 각 팀원의 MBTI가 보일 정도로 이게 유행했을 때가 있었다. 나는 MBTI를 맹신하진 않지만, 나름의 과학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MBTI 풀 버전을 2005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할 때 처음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내가 E 성향이 강했는데, 그동안 이게 I로 바뀌었고, 요샌 나는 아주 행복한 I의 삶을 살고 있다. 성향이 I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바빠서 그런지, 나는 외부 활동을 잘 안 하고, 사람들을 잘 안 만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아는 사람들과 친구들은 자주 만나지만, 새로운 사람들은 되도록 잘 안 만난다.

그래도 예외를 두고, 가능하면 시간을 만들면서 꼭 만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제 막 본인의 이름으로 VC를 시작해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투자자들, 그리고 우리가 투자는 안 했지만,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이다.

이제 첫 번째 펀드를 만들고 있는 VC들을 보면 내가 12년 전에 스트롱 1호 펀드 만들 때가 생각난다. 남의 돈을 받는 건, 그때도 어려웠고 지금도 어렵고 앞으로도 항상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우린 이제 5호 펀드를 만들고 있는데, 1호 펀드보다 규모만 커졌지 돈 모으는 건 항상 더럽게 어렵다. 그런데 성적이 전혀 없는 첫 번째 펀드를 만드는 VC를 뭘 믿고 누가 돈을 줄까? 그래서 나는 이런 분들을 보면, 우리가 첫 번째 펀드 만들 때가 많이 생각난다. 그때 참 힘들고, 외롭고, 서럽기도 했는데, 그나마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나보다 먼저 이 힘든 길을 지나왔던 선배 VC들의 격려와 조언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원래 처음엔 힘든데, 계속 지치지 않고 하다 보면 더 쉬워질 거야.” , “그래도 너는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훨씬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 “원래 펀드 못 만들 것 같아도, 계속하다 보면 다 하게 된다. 그냥 시간이 걸릴 뿐이야.” 뭐, 이런 말들이었는데, 그땐 이 조언들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른다.

근데 참 웃긴 게, 나도 이제 시작하는 후배 VC 분들을 만나면, 12년 전에 내가 들었던 말과 거의 동일한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이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걸 내가 이미 경험했다면, 가감 없이 모든 경험을 다 공유하고, 가능한 선에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소개해 주고 연결해 준다. 그래서 이분들이 힘든 길을 가는데 조금이나마 위안과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한다.

음악 분야에서 스타트업하는 창업가들에게도 내가 아주 오래전에 뮤직쉐이크를 하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점들을 아주 솔직하게 공유해주고 이들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평화를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나도 15년 전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완전히 아무것도 모를 때 이미 그 길을 걸었던 선배들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출장에서 수년 동안 내가 알고 지낸 잠재 투자자를 만났다. 유명하고 큰 투자자인데, 누구나 다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서 아주 바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내가 미국에 올 때마다 연락하면 항상 시간을 만들어서 나를 만난다. 시간이 많을 땐 밥도 같이 먹고, 정말 바쁘면 15분이라도 짧게 시간을 내서 얼굴이라도 본다. 나를 볼 때마다 20년 전에 본인이 투자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난다고 하면서 원래 남의 돈 받는 건 무지하게 어려운데, 그래도 스트롱은 아주 잘하고 있다는 큰 격려의 말을 해줬다. 그리고 본인도 시작할 때, 이렇게 만나서 긍정의 말 한마디 해주는 선배 투자자들이 정말 고마웠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바쁘지만, 내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서 왔는지 기억하자는 다짐을 한다. 나는 아직 개구리로 완벽하게 변신하진 못했지만, 올챙이 시절은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애송이 시절이 있었고, 누구나 다 올챙이를 거쳐서 개구리가 된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절대로 잊지 말자는 다짐을 오늘도 해본다.

불평하지 않는 길

작년 말에는 지금쯤 되면 경기가 좀 회복되고, 투자 시장에 활기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내가 요새 체감하는 건, 아직 정상화되려면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아니면, 지금 이 불경기가 어쩌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뭔가 느낌이 좋진 않다.

우리 같은 투자자도 이런 느낌인데, 매일 힘든 사업을 해야 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은 오죽하랴. 정말 요새 죽을 맛이다. 특히, 자금이 떨어져서 펀딩을 해야 하는 대표들은 정말 살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투자사 대표들에게 런웨이가 12~18개월 정도 있으면, 웬만하면 펀딩하지 말고 사업에 집중하고, 나중에 수치들이 더 좋아지면 그때 투자유치를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래도 돈이 다 떨어졌으면, 경기랑 상관없이 투자를 받아야 한다. 우리 투자사들도 요새 펀딩하고 있는 곳들이 많긴 한데, 모두 다 힘들어하고, 회사가 원하는 투자 조건과는 한참 동떨어진, 그냥 주는 대로 받는 전략으로 가는 곳들도 많고, 우리도 기투자자로서 이런 조건이라도 투자받을 수 있으면 받아서, 일단 살아남으면서 버티자는 스탠스다.

이 중에서도 특히나 힘들게 투자유치를 하는 회사가 몇 군데 있다. 일단 펀딩 하는데 걸린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 길고, 투자를 커밋했던 VC들이 시간이 지연되면서 슬그머니 말을 번복하고, 이미 최종 투심까지 가서 결정된 곳들도 갑자기 정말 미안한 사정이 생기면서 취소되고,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확신을 갖고 후속 투자를 준비하던 기존 투자자들도 하나둘씩 말이 달라지고 있다. 대부분 6개월 정도 힘들게 투자유치를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면 대표는 지치면서 번아웃되고, 런웨이가 없어지니 직원들도 불안해하면서 어떤 분들을 퇴사하고,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펀딩 전략을 새로 만들고 있다. 이 와중에 어떤 곳들은 투자자들과 이야기가 아주 잘 되고 있었는데, 같은 분야의 경쟁사가 상대적으로 낮은 밸류에 투자를 받으면서 그동안 합의됐던 밸류에이션이 조정되고 있고, 어떤 곳은 동종 업계의 회사가 상장했는데, 상장 후 주식가격이 형편없이 떨어지면서 다시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 같은 기존 주주들도 정말 힘이 빠지는데,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대표는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그냥 남 탓하면서 욕하고,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창업가들의 잘못은 아니다. 우린 잘하고 있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에 유동성이 부족해서 투자받는 게 힘든 것이다. 우린 잘하고 있는데, 동종 업계의 다른 회사가 잘 못 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는 것이다. 갑자기 투자자가 투자 결정을 철회한 것도 대표의 잘못이 아니다. 이건 그 투자자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을 탓하고, 불평해도 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이들은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건 본인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그냥 또 다른 방법을 찾는다. 불평하지 않고 그냥 또 길을 찾는다.

나도 이런 힘 빠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새로운 펀드를 만들면서 너무 많은 거절을 당하고, 꼭 돈을 줄 것 같았던 투자자가 결국엔 투자하지 않는다. 동시에 우리가 투자한 너무 많은 회사가 망한다. 꼭 잘될 것만 같았던 회사들이 잘 안되고, 안 될 것 같았던 회사는 항상 잘 안된다. 이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이로 인한 피로감이 쌓일수록 자신감이 떨어진다. 정말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실은, 이런 상황에서 나는 그냥 이래저래 불평만 하고 싶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쁜 놈들이고,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는 핑계를 대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이나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나 모두 불평하는 데 익숙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거절당하고, 자주 넘어지지만, 그럴 때마다 불평하지 않고 다시 일어난다. 다시 일어나서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불평이라는 옵션이 없는 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