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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의 창업가

우린 지난 12년 동안 많은 회사에 투자했지만, 이 많은 포트폴리오와 같이 일하는 스트롱의 투자팀은 매우 작다. 나를 포함한 우리 투자팀의 규모는 딱 6명인데, 우리가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팀이 그렇게 많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냐 이다(실은 우리 내부에서는 “관리”라는 말보단 “지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어쨌든 우린 아주 lean 하게 일한다. 작은 팀이 엄청 많은 회사를 만나고, 현실적으로 힘들지만, 나는 욕심 같아서는 한국의 초기 스타트업을 전부 다 한 번씩은 만나보고 싶다. 요새도 우린 모두 다양한 팀을 만나고 있는데, 작은 투자팀이 많은 창업가들을 만나야 해서, 주로 첫 번째 미팅은 모두 각개전투 하고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나도 많은 창업가와 팀을 만났는데 이 중 어떤 창업가들과의 만남은 기억에 남아서 여기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이 창업가가 하는 사업은 좀 뻔한 사업이었다. 아마도 웬만한 VC들은 “또 이 사업이야?”라면서 어쩌면 만나지도 않고 패스할 만한 그런 사업이었는데, 심지어 수치도 별로였다. 솔직히 나도 그냥 자료만 보고 안 만날까 하다가, 그래도 팀은 젊고 똑똑한 것 같아서 한 시간 정도는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났는데, 역시 사업이라고 하기엔 제품도 없고, 수치는 전혀 없고, 전략도 특별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창업가는 정말 모든 걸 다 갈아 넣으면서 나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최근에 이렇게 열심히 본인의 사업을 나에게 설명했던 창업가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래서 미팅의 시작은 그냥 밋밋했지만, 이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집중하게 됐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됐다. 이미 여러 VC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고, 이 사업 절대로 안 된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피칭이라는 생각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료를 설명하고, 내가 중간에 이것저것 물어보면 혹시나 본인이 말실수할까 긴장하면서 말도 버벅거렸다. 중간마다 내가 이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조금 재수 없거나, 불편한 질문을 던졌는데, 최대한 화를 안 내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과 흔적들 또한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내가 제품 데모를 보여달라고 하니, 이미 만들어 놓은 10개 이상의 데모 계정 중 하나를 선택해서 열심히 불완전한 제품의 데모를 보여줬다. 이때, 오래전 내가 뮤직쉐이크 하면서 VC들에게 피칭했던 그 모습이 이 창업가에게서 보였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이분에게 빙의?가 된 것처럼 몇 초 동안 2008년~2012년으로 돌아갔었다.

우린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남이 만든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작은 플랫폼/커뮤니티를 제공했는데, 음악 관련 사업이다 보니, VC들에게 반드시 고품질의 음악을 들려줘야 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자를 만날 때는 항상 노트북과 최신형 BOSE 휴대용 스피커를 갖고 다녔고, 방금 언급했던 창업가처럼 여러 개의 계정을 미리 파놓고, 각 계정에 다양한 시나리오를 이미 심어놓은 후에 상황에 맞춰서 제품 데모를 했다. 그런데 정말 데모 귀신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중요한 VC와 결정적인 미팅에서 멋진 데모를 보여주고 싶을 땐 매번 노트북이 버벅거리고, 중요한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서, 나도 당황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땀을 뻘뻘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최근 했던 몇 미팅에서 만난 창업가들을 보면서 이런 오래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고,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과 생각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 나는 꼭 투자받고 싶었던 VC가 몇 군데 있었는데, 결국 이들 그 누구에게도 투자를 못 받았다. 당시 나는 창업가의 위치에서 속으로는 “제발 이 투자자는 나 같은 보석을 알아보고, 우리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봐 줬으면 너무너무 좋겠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미친놈처럼 피칭했었는데, 그걸 바로 내 앞의 창업가가 나한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앞의 창업가에게 우리가 투자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언제나 마음을 열어두고,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이분의 사업이 아무리 봐도 망할 것 같아도, 이 창업가의 한 시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듣고, 보고, 물어보고,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했다. 이 창업가의 눈에서 보이는 절박감과 초롱초롱함은 내가 오래전에 VC들에게 피칭할 때 수없이 어필하고 강조했지만, 그들이 무시하고 놓친 중요한 것들이니까.

바퀴벌레의 길

지난주 화, 수 이틀 동안 우리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조합원총회(AGM: Annual General Meeting)를 서울에서 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투자자분들이 많이 참석했고,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분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참 바쁘기도 했지만, 나도 재미있었고, 우리 모두 의미 있고 보람찬 48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행사에서 나는 해마다 스트롱벤처스가 그해에 했던 일들을 요약해서 투자자분들과 공유하는데, 이번 행사에서도 올해 좋았던 하이라이트와 별로 안 좋았던 로우라이트를 정리해서 발표해 봤다. 올해 내가 뽑은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우리가 투자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이었다. 12년 동안 우리의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과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incredible하고 extraordinary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내가 깊게 존경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이 없으면 스트롱이 존재할 수 없다.

올해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잘 버티면서 사업을 운영하는 우리 창업가분들을 나는 다시 “바퀴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실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바퀴벌레라는 단어가 혐오감을 준다고 싫어해서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우리 창업가들은 바퀴벌레 창업가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다. 물론, 엄청 좋은 의미에서.

바퀴벌레라고 하면 다들 싫어하지만, 이 곤충들은 대단한 특징을 몇 가지 가지고 있고, 신기하게도 우리 창업가들도 아주 비슷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강한 골격 – 바퀴벌레는 아주 견고하지만, 동시에 유연한 골격을 갖고 있다. 우리 창업가분들도 강한 정신력, 그리고 강한 체력을 갖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충격을 완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함도 있다.

2/ 강한 면역력 – 시간이 지날수록 바퀴벌레는 웬만한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우리 창업가들도 웬만한 어려움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갖고 있다.

3/ 강한 적응력 – 바퀴벌레와 창업가 모두 완벽하게 일치하는 속성이다. 바퀴벌레는 외부 환경에 따라서 DNA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실은 우리 창업가들도 외부 환경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목표와 비전은 명확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수정하고, 실행 방법을 계속 바꾸는 게, 마치 자신의 DNA를 외부 환경에 따라서 바꾸는 바퀴벌레랑 크게 다르지 않다.

4/ 강한 생존력 – 바퀴벌레는 오랜 기간 동안 음식이나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우리 창업가들은 음식이나 물 없이 살 순 없지만, 아주 적은 자원으로 매우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어쨌든,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바퀴벌레들은 머리가 날아가도 최대 일주일 동안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뭐, 사람은 이렇게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우리 창업가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5/ 강한 기동력 – 이건 내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바퀴벌레가 빠르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우리 창업가들도 엄청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가끔 이들보다 훨씬 더 돈과 인력이 많은 대기업도 이길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놀라운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바퀴벌레 창업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이다. 이들은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다시 찾아오고, 계속 성장한다. 지난 12년 동안 매일 매일 이런 바퀴벌레 창업가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대단하다는 생각과 존경심이 생긴다.

우리는 이런 바퀴벌레들을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이들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뒤에서 계속 푸쉬한다. 어떤 날은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앞에서 끌어준다. 하지만, 주로 이들이 뒤로 처지지 않고, 번아웃 되지 않게, 옆에서 같이 걷거나 뛰면서 응원해 준다. 나는 어릴 적 바퀴벌레를 정말 싫어했는데, 투자하면 할수록 이들이 대단한 생명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늘도 바퀴벌레같이 절대로 죽지 않고 허슬하는 한국의 모든 창업가들 파이팅하길. Never die!

남의 의견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말 한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 두 가지 중, 잡음을 잘 구분하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에 집중하자는 내용은 내가 요새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나 같이 남의 눈치 잘 안 보고, 남의 의견이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가끔은 내가 뭔가를 하거나 말할 때 “이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가는 곳마다 아주 두껍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새 의식적으로 남의 시선과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내 생각, 감, 의견에 100% 의존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남의 의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고, 정말로 경청해야 할 남의 의견과 조언만 듣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솔직히 이런 의견은 소수의 몇 명만 제공할 수 있다. 이 소수의 몇 명은, 본인들이 나에게 주는 조언, 충고, 그리고 의견의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고 본인들도 그 결과에 대해서 직접 책임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외의 다른 의견은 안 들으려고 노력하고, 꼭 들어야 한다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바로 흘리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뭘,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사냐고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살아야 한다.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 그리고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니까.

조금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본인이 직접 창업하지 않았거나, 현재 적을 두고 있지 않은 회사를 비정기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advisor’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요새 우리 주변에 ‘고문’ , ‘ advisor’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는 분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때 이런 분들은 본인들의 조언에 대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고, 여기에 크게 영향도 안 받는 분들이다. 왜 이런 분들에게 굳이 과한 비용을 지급하거나 돈보다 더 귀한 회사의 지분을 주면서 조언을 받는지 회사 대표들에게 물어봤다. 어차피 풀타임도 아니고, 파트타임 중에서도 슈퍼 파트타임 – 우리 회사를 포함해서 많은 회사의 어드바이저를 하고 있다 –  이고, 솔직히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야에서 오래 일을 했더라도 그건 오래전 일이고, 같은 분야에 있는 회사라도 우리 회사랑 다른 회사랑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차피 이전 경험을 재활용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내가 듣는 대답은, “이분들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요. 나보다 이 분야의 경험이 많고 네트워크가 좋아서,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이분들의 조언이 값질 것 같아서요.”이다. 이런 대표들은 이게 정말 맞는 건지 잘 판단하길 바란다.

우리는 살면서 계속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지 말지, 점심 식사는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부터, 100억 원 짜리 거래를 할지말지까지, 실은 우리 인생 자체가 연속적인 결정의 집합체이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셀 수 없는 결정의 결과를 뒤돌아보면, 안타깝게도 옳은 결정보다 틀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어차피 틀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할 텐데, 남의 의견을 참고해서 틀린 결정을 하기보단, 그냥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틀리는 게 훨씬 더 값진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의 의견이나 조언을 절대로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 판단해서 이 중 잡음을 구분하라는 의미인데, 잘 생각해 보면 남의 의견 중 대부분은 잡음이다. 중요한 결정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거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다. 결국엔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오롯이 내 의견만이 중요하다.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것들

내가 창업가들에게 가끔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요새 잠을 잘 자지 못하게 하거나,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요?”이다. 영어로 하면 “What keeps you up at night?”인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조금 어색하긴 하다. 내가 창업가들에게 항상 물어보는 게 아니라, 가끔 물어보는 이유는, 이 질문은 내가 첫 미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상대방을 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만나 본 후에 물어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우리가 그동안 몇 개월 동안 대화를 하고 있던 우리의 잠재 투자자가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나는 이 질문을 그동안 창업가들에게 해 왔었지만, 정작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몇 분 생각을 했었다. 요샌 내가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는 것들은 없지만, 현재 내 가장 큰 고민거리는 지금 만들고 있는 새로운 펀드를 빨리 끝내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보면, 펀드를 하나 새로 만드는 건 힘들고 지루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불가능한 건 아니라서, 이번 펀드도 그냥 시간이 걸릴 뿐이지, 결국엔 다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건 실은 일시적인 고민이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밤잠을 설치는 걱정과 생각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계속 초기 투자를 하면서 스트롱이라는 브랜드가 어떻게 하면 처음과 끝이 항상 같게, 계속 의미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인데,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초기 투자자로서 계속해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이다. 실은 영어로 말하는 게 제일 정확한데, “how do we continue to stay relevant?”이다. 너무 세상이 빨리 바뀌다 보니, 우리도 외부 변화에 맞춰서 빠르게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뻔한 말이지만, 결국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없는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항상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다. 이 또한 뻔한 말이지만, ‘원칙’이라는 말에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몇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 그리고 그 원칙을 둘러싼, 계속 바뀌어야 하는 변수들, 이 것들을 제대로 구분해서, 원칙을 변수랑 착각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우리를 존재하게 했던 것들을 계속 유지하는 고민. 이게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첫 번째 고민이다. 시장에서 의미와 영향력이 사라지면, 우리 같은 VC는 그냥 한 방에 훅 가는 것이라서 아주 심각한 고민이다.

두 번째는, 갈수록 늘어나는 남에 대한 신경과 관심을 끄고, 어떻게 하면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모든 생각을 집중할 수 있을까이다. 한국은 장점이 너무 많은 나라인데, 단점 또한 많다. 아마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단점은 모두 다 남을 만족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남의 목소리, 남의 의견,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이게 과해지면 본인의 목소리, 본인의 의견, 본인의 시선을 점점 잃어버리면서, 결국 내 인생을 불특정 다수의 남을 위해 살다가 죽게 되는데, 한국 사회가 이렇게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다. 틀린 결정을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된다는 말도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틀린 결정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본인의 생각보단, 항상 남의 의견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틀린 결정을 하더라도, 남이 결정해서 내가 틀리기보단, 그냥 내가 결정해서 내가 틀리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남이 아닌 나에게 모든 걸 집중하고 싶은데, 한국에서 투자하면서 이걸 지킨다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다.

며칠 전에도 자기 전에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잠을 약간 설쳤는데, 그래도 나쁜 고민이라기보단 좋은 고민이고, 뭔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좋은 점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리고 잠들었다.

당신이 뭐 하는지 알고 싶다. 다른 사람 말고.

우리의 투자사, 그리고 새로운 회사들과 미팅을 하다보면, 자주 나오는 주제가 경쟁사에 대한 이야기다. 사업을 하는 대표면 당연히 본인이 속한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대략 알고 있어야 하고, 이 분야에 다른 어떤 회사들이 있는지, 즉, 경쟁사는 누가 있고 이들은 뭘 하고 있는지 대략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가끔씩 내가 놀랄때가 있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본인의 생각과 전략, 그리고 우리 회사의 방향과 전략보다, 경쟁사에 대해서 더 관심이 많고, 나와 우리 회사, 그리고 우리 고객에 집중하기 보단 우리 경쟁사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나랑 이야기 해 본 우리 투자사 대표들은 잘 알 텐데, 소중한 시간을 쪼개서 하는 미팅을, 이 중요한 시간을 우리 이야기가 아닌, 솔직히 우리 사업과는 전혀거의 상관없는 다른 회사 이야기로 채우는 걸 정말 싫어한다. 언젠가 갑자기 시장에 출현한, 그래서 더 주목받고, 펀딩도 더 잘 받은 어떤 경쟁사를 우리 투자사 대표가 너무나 의식해서, 지금 자기 사업도 고쳐야 할 게 많은데 계속 경쟁사에만 집중하고, 경쟁사와의 따라잡기 게임만 하는 걸 보고 우리가 이런 줏대 없는 창업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지원하고 응원한 게 쪽팔려서, 이분에게 그냥 그 경쟁사로 가서 취직하라고 한 적도 있다. 나는 우리 투자사 대표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는데, 이분은 계속 남의 이야기, 그리고 남의 회사 이야기를 삼십 분 넘게 했고, 이분에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시간 낭비한 삼십 분이었고, 내 소중한 삼십 분 어떻게 할 거냐고 화를 엄청나게 내기도 했다.

경쟁에 대해선 나는 비교적 대놓고 이야기하는 편인데, 내가 봤을 때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경쟁사가 하는 일에 불필요한 관심을 보이면서, 불필요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너무 많은 대표들이 자기 사업에 대해서 신경 쓰는 시간보다, 경쟁사 동향 파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쓸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하다. 어떤 창업가는 경쟁사의 재무제표는 거의 줄줄 외우고, 이들이 지금까지 뭐 했고, 앞으로 뭘 할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데, 정작 본인이 하는 사업의 unit economics도 잘 모르고, 올해 지금까지의 매출과 비용도 정확하게 외우지 못해서, 그때그때 마다 노트북에서 숫자를 확인하면서 나랑 대화했다. 당연히 이 회사에는 투자하지 않았다.

전 세계 비즈니스의 역사를 보면, 경쟁사 때문에 망한 회사는 거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회사들이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오히려 경쟁에만 너무 집중해서 본인들이 어떤 회사인지 망각하고, 본인들의 고객에게 제대로 된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고, 본인들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경쟁사가 가격을 내리면 우리도 똑같이 가격을 내리고, 경쟁사가 연예인으로 홍보하면 우린 더 유명한 연예인으로 광고하고, 경쟁사가 새로운 기능을 출시하면, 우리도 똑같은 기능을 만들고, 이런 경쟁사에만 집중하는 사업을 하다 보면 결국 우리 비즈니스 자체가 희석된다. 그리고 내가 자신 있게 말하는데, 이건 회사가 망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혹시 나랑 미팅이 잡혀 있는 분이 있다면, 그 미팅에서 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당신이 창업한 회사는 어떤 회사인지 알고 싶다. 우리 경쟁사 대표가 어떤 사람이고, 다른 회사가 어떤 밸류에이션에 얼마를 받았고, 다른 사람과 다른 회사는 이렇게 하고 있다는 이야기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른 창업가와 다른 회사에 관심 있었다면, 나는 당신이 아닌 그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가끔 이사회나 주주간담회에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경쟁사 이야기만 하는 투자자들이 있다. 주로 본인들이 투자한 회사가 뭐 하는지엔 별로 관심이 없는 투자자들이고, 다른 투자자의 시간을 낭비하면서 이미 월간 리포트에 다 있는 내용을 계속 물어보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회사는 이렇게 하는데, 우린 왜 그렇게 못 하냐. 그 회사는 최근에 투자를 얼마큼 받았는데, 우리도 다시 펀딩해야하는게 아니냐. 이런 투자자들은 가능하면 빨리 주주명부에서 빼야 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그들이 그렇게 관심 두는 경쟁사에 투자하라고 해라.

창업가들은 외부에서 사람을 만나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자기 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고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기 팀원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제발 다른 사람, 다른 회사, 다른 경쟁사에 대해 신경 좀 끄고 본인이 하는 일에 집중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