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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는 방법을 찾는다

2월 26일 엔비디아가 4Q 실적 발표를 했다. 이렇게 큰 회사가 아직도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면서 AI 시장을 장악하는 동시에 스스로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출장 중이었는데, 호텔에서 CNBC의 실적 발표 후 젠승황과의 인터뷰를 봤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 젠슨황의 자신감, AI가 가져올 큰 변화 등이 그대로 느껴지는 인터뷰 내용이었다.

젠슨은 일도 잘하고, 영어도 완전히 미국인처럼 유창하게 하고, 자기 관리도 철저해서 언론에 나오면 항상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 CEO라고 생각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항상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소프트웨어는 알아서 방법을 찾는다(software finds a way)”

대충 무슨 말인진 모두 다 알 것이다. 엔비디아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GPU 칩을 만드는 하드웨어 회사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엔비디아는 소프트웨어 회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설명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일찍이 GPU를 만들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너무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지난 30년 동안 GPU 하드웨어에 대한 독보적인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했다. 실은, 이 하드웨어 경험만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텐데, 여기에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실력도 그동안 연마할 수 있었다. 결국엔 하드웨어를 잘 구동 시켜서 같은 환경에서 더 높은 성능을 뽑기 위해선 소프트웨어가 더 중요하다는 걸 그동안 배웠기 때문에, 내가 여기저기서 듣기로는, 엔비디아의 높은 기업가치는 하드웨어보단 이런 소프트웨어 실력 덕분인 것 같다.

하드웨어는 한 번 만들면 고치기 힘들고, 그 구조 자체가 경직되어 있어서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반면에, 소프트웨어는 추가 비용 없이 초기 버전을 얼마든지 수정하면서 비약적인 개선이 가능하다. 유연한 소프트웨어는 물과 같이 흐르면서, 물리적으로 제한된 하드웨어, 나라마다 다른 산업적 규제, 그리고 계속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기술을 진화시키고 최적화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제자리를 항상 찾아간다.

그런데, 젠슨의 이 말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서 해석해 본다면, 아마도 이분은 항상 방법을 찾는 소프트웨어를 찬양한 게 아니라, 이 소프트웨어를 직접 만드는 엔지니어들을 찬양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 창업가분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면, 항상 많은 걸 배우면서 느끼는데, 역시 가장 놀라운 건 이들의 생존력과 적응력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아도, 이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사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서 찾는다. 내가 이런 분들을 보고 바퀴벌레 같다는 존경의 비유를 자주 하는데,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공간에 바퀴벌레를 가두어도 결국엔 방법을 찾아서 탈출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큰 위기에 봉착해서 더 이상 길이 안 보이는데, 우리의 창업가들은 무조건 방법을 찾는다.

이런 사람들이 만든 소프트웨어는 젠슨이 말 한대로, 불가능을 가능케 할 것이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 것이다. 나는 젠슨의 인터뷰를 보면서, 이분이 엔비디아의 뛰어난 소프트웨어를 칭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뛰어난 엔지니어들을 찬양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은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고 투자하는 창업가들이야말로 항상 알아서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주 52시간 근무제의 열렬한 옹호자이거나, 워라밸을 맹신하는 분들은 이 글의 내용이 매우 불편할 겁니다. 악플을 쓰시려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각별히 주의 바랍니다.

얼마 전에 포스팅한 글과 같이 올해는 걱정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글로벌 매크로 경기도 안 좋지만,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은 특히 많은 한국 스타트업과 우리 같이 한국에 투자하는 VC들의 발목과 손목을 꽉 잡을 것이다. 실은,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어차피 5년 이후를 보고 지금 대폭 할인된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으로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해서 계속 긍정적으로 투자는 하지만, 여러 가지 외부 요인들이 벤처 시장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내가 더 걱정하는 게 있는데, 이건 바로 한국 직장인들의 근면, 성실함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외국 투자자들에게 우리가 한국의 장점으로 항상 강조하는 건 바로 한국인들이 그 어떤 민족보다 똑똑하고, 여기에다가 남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는 거였는데, 아직도 이 말은 대부분 맞지만, 한국인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는 걸 외국인들에게 강조할 때 점점 더 나 자신이 자랑스럽지가 않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대기업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삼성이나 LG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내 친구들이나 지인들 말을 들어보면, 어차피 이 회사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다 하니까, 나머지는 그냥 일주일에 52시간만 일하면 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마인드에 전혀 동의하지 않고, 이렇게 회사가 돌아가니까 대기업들이 현상 유지는 하지만, 과거와 같은 발전이 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가장 큰 걱정은 우리가 투자하는 스타트업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은 스타트업의 임직원분들이 일을 너무 안 한다는 것이다. 요샌 평일 오후 6시 이후에 불이 켜진 스타트업 사무실이 거의 없고, 주말은 당연히 아무도 안 나온다. 내가 공개적으로 자주 말하는데,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보다도 요새 스타트업 사람들은 일을 안 하는 것 같다. 이건 정말 문제가 많다.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나는 1년 365일 일한다. 주말에도 일하고, 오전, 오후, 밤늦게까지 일한다. 투자자도 이렇게 일하는데, 우리가 투자하는 스타트업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아는 그 어떤 스타트업도 나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창업가들은 오래, 열심히 일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반박하고, 정말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에 5시간만 일해도 할 일은 다 한다고 한다. 나도 한때는 이 말을 믿었지만, 이젠 안 믿는다. 일단, 이런 말을 하는 창업가들의 회사의 실적이 이런 나의 믿음을 증명한다. 대부분 형편없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내가 강조하지만, 초기 스타트업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질 수밖에 없는 경기를 하므로, 효율적으로 일하는 건 기본이고, 여기에다가 무조건 오래 일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회사에 오래 있어야 하고, 업무에 투입하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 이렇게 해도 95%의 스타트업은 경기에서 지고 망한다.

어디서부터 한국의 이런 근면성실함이 망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국가적으로, 대대적으로 고쳐야 하는 악성 코드이자 버그다. 주 52시간 꼬박 지키고, 워라밸 다 챙기면 우린 국가적으로 계속 후퇴할 것이다. 그동안 쌓아놓은 체력이 있어서 그나마 한국의 위상을 지키고 있지만, 덜 일 하고, 더 많이 노는 문화와 태도가 아예 정착되면 한국은 유럽이 가고 있는 길을 그대로 가게 될 것이다. 꽤 강대국이었던 유럽 대부분 국가는 아주 빠르게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데, 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유럽인들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일은 더 안 하고 정부에 요구하는 건 더 많아지면서, 이들은 여름휴가를 한 달 이상 가고, 세 시간 점심시간에 와인 한 병씩 먹으면서 삶의 질이 좋다고 하지만, 이건 오래 가지 못한다. 나라가 망하면 삶 자체가 없어지는데, 이걸 모르는지 아니면 그냥 될 대로 돼라 마인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은 “실리콘 밸리는 워라밸의 천국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분들 중 그 누구도 실리콘 밸리의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다. 그냥 ~카더라 소문만 듣거나, 실리콘 밸리에서 3개월 연수 다녀온 사람들이다. 실리콘 밸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곳이고,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나라다. 겉으로 보면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 사람들이 설렁설렁 일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한다. 그렇게 안 하면 한국과 다르게 바로 해고당하기 때문이다. 원래 최고의 강대국인데, 이렇게 모두 다 열심히 일하니까 미국은 더욱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잘 사는 나라가 더 잘 살기 위해선, 국민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한국도 이젠 잘 사는 나라의 대열에 끼기 시작했는데, 모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스타트업은.

희망의 실종

2022년 하반기에 많은 분들이 나에게 앞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이고, 언제쯤, 이 불경기가 회복될지 물어봤다. 물론, 나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미래학자도 아니라서 잘 모른다고 했지만, 속으론 2024년 상반기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보면, 그냥 2024년 상반기엔 좋아지지 않겠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2023년 상반기가 되자, 여러 가지 분위기와 정성적인 지표는 – 예, 해외 투자자들과의 이야기와 느낌 – 2024년 경기도 매우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게 너무나 명확했다. 그래서 내가 했던 말을 번복하고, 2025년이 돼야 시장의 상황이 더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작년 사사분기에, 이런 내 생각에 한 번의 전환이 더 있었고, 내 말을 한 번 더 번복했다. 2025년은 어쩌면 우리가 스타트업을 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한국은 그동안 국제적인 이미지가 너무 좋았고,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국가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외국인들에게 항상 자랑스럽게 주장했던 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 중 정치적으로 안정된 국가라는 점이었고, 둘째는, 한국은 그나마 다른 아시아 국가보다 USD에 대한 환율이 강한 국가라는 점이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내가 완전히 양치기 소년이 됐다. 어쨌든, 이 좋지 않은 세계 경제 상황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인 한국은 힘든 한 해를 보낼 것이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 그리고 우리 같은 투자자 모두 아주 힘든 한 해를 경험할 것이다.

2025년에는 사라지는 회사들이 정말 많을 것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너무 다 힘들고, 이미 폐업 준비하는 대표들이 내 주변에도 너무 많아지고 있다. 가장 먼저 문 닫을 회사들은 원래 2024년도에 폐업을 해야 했는데, 2025년은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오로지 이 희망 하나로 작년 한 해를 버틴 회사들이다. 이들의 희망과는 달리 2025년도 크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매출은 작고, 돈은 없고, 직원들은 하나둘씩 해고되거나 나갈 회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 더 이상 희망으로 버틸 수 있는 체력과 돈은 없다.

펀딩 시리즈 스펙트럼의 다른 극에 있는 유니콘 회사들도 많이 망하거나, 아니면 유니콘 왕관을 스스로 내려놔야 할 것이다. 돈도 못 벌고, 마이너스만 만들고 있는 유니콘들이 꽤 많은데, 이들이 작년 한 해 유니콘 밸류에이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들도 2025년은 시장이 더 좋아져서 다시 한번 유니콘 밸류에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힘든 2024년을 버텼을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 회사에 마지막으로 투자한 VC들이 어떻게든 기업 가치를 유지해서 본인들 투자에 손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이 회사들을 하드캐리 했는데, 더 이상 이걸 할 순 없을 것이다. 실은, 이 VC들도 2025년에 대한 희망을 품고 힘든 2024년을 보냈는데, 더 이상 이런 희망으로 버틸 순 없을 것이다.

2025년에는 스타트업만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 투자하는 VC들도 돈이 없어서 활발한 투자를 보긴 힘들 것이다. VC들도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투자해야 하는데, 이들에게 돈을 주는 LP들이 매우 보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서, 펀드를 만드는 게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큰 도전이자 과제다. 돈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이 여러 면에서 막혀 있는 게 VC나 스타트업의 2025년도 현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근대 벤처업계 역사상 최악의 한 해가 될 것이다. 인생 최고 공포의 롤러코스터 라이드가 될 것이니까, 안전띠 꽉 조이고, 허리띠는 더 꽉 조여야 할 것이다.

운동은 합법적인 마약

우리 집에서는 한강이 아주 잘 보인다. 마루에서는 한강의 동쪽이 보이고, 다른 방에서는 강북과 강서의 뷰가 꽤 잘 보인다. 우린 재택근무를 아예 안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스트롱의 재택근무 제도에 관해서 물어보면 나는 “재택근무 가능한 날은 토요일과 일요일이다”라는 말을 한다. 농담이지만, 실은 이건 나에게 내가 스스로 적용하는 근무 시스템이다.

올해 쓴 글 중, 열심히 일하는 내용에 대한 포스팅이 몇 개 있었는데 이건 스타트업 분들에게만 하는 말은 아니고, 나 스스로에게 항상 강요하는 내용이다. 올해 나는 일을 하지 않은 주말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건 아니고, 자랑하려고 하는 말도 아니다. 그냥 그 정도로 바빴고, 할 일이 많았고, 주말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매일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는 의미다. 불평하지도 않았고, 불평하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나는 이렇게 바쁘게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점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평일 아침 일찍, 밤늦게, 그리고 주말은 집에서 일했는데, 사무실로 사용하는 방에서 고개만 왼쪽으로 돌리면 한강의 멋진 뷰가 보이는데, 최근 몇 달 동안 창밖을 오랫동안, 멍하게,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시간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돌고 도는 잡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불안감이 온몸을 감싸는 걸 계속 경험하고 있다. 막상 그 불안함의 원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종이에 써보면, 특별한 원인은 없다. 업무의 강도가 높아지고, 출장을 더 많이 가고, 지켜야 할 데드라인이 더 많아질수록 몸이 견뎌내야 하는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넘어가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다.

이런 부정적인 신호가 올 때마다, 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움직인다.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아주 격렬하게 움직인다. 아파트 지하에 있는 헬스장을 가장 자주 이용하고, 그다음으로 자주 이용하는 건 아파트 계단이다. 여름에는 한강에서 뛰기도 했다. 루틴에 따라서 웜업하고 웨이트를 반복적으로 들거나 35층 아파트 계단을 세 번 반복해서 오르면 다시 몸과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생각만 해도 도망가고 싶었던 힘든 문제들을 아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해결할 수 있는 에너지가 다시 충전되는데, 이게 참 신기하게도 몸을 더 과격하게 움직일수록 더 많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긴다.

올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일을 했고,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더 많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운동을 했다. 중간마다 책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읽었다. 엄청난 불안감과 스트레스의 한 해였지만, 역설적으로 엄청난 운동과 움직임의 한 해여서 더 건강해졌고, 더 많은 에너지로 몸을 지속적으로 충전할 수 있었다.

나는 마약을 해본 적이 없지만, 움직임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에 의하면 격렬한 운동을 할 때 뇌가 느끼는 신호를 분석해 보면 마치 아주 센 마약을 몸에 투입했을 때 뇌가 느끼는 쾌락과 똑같다고 한다. 마약은 몸과 정신을 완전히 파괴하는 인류에서 없어져야 하는 불법 약물이다. 하지만, 해 본 사람은 그 누구나 인정하는, 100% 합법적인 마약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운동’이다.

너무 힘들어서 온몸이 내 발밑에 있다고 느껴지거나, 정신이 저 땅 밑에 있는데 도저히 다시 주워 담을 엄두가 안 나거나, 숨쉬기도 힘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면, 지금 당장 나가서 몸을 움직이고 격렬한 운동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주변에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운동을 권장하고, 더 나아가서 같이 운동해라. 나도 좋고, 그 사람도 좋고,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세상에서 가장 건강한 마약이다.

운동은 특별히 돈도 안 들고, 감옥에도 가지 않는 합법적인 마약이다. Exercise will save you.

평등한 자본금

올해 나는 꽤 많은 책을 읽었다. 보통 일 년에 50권을 목표로 정하고, 지난 5년 동안 매해 50권 정도의 책을 읽었는데, 올해는 60권을 돌파해서 기분이 참 좋다. 60권 이상 읽은 자랑은 다음 포스팅에서 해보려고 한다.

어제 올해 62번째 책을 완독했는데,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씨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였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구글스타트업캠퍼스에는 작은 사내 도서관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책 중 하나였고, 그동안 이 책이 진열된 건 여러 번 봤지만, 페이지 수가 조금 많기도 하고, 너무 익숙한 한국 기업 이야기라서 그런지, 선뜻 손이 안 갔다. 드디어, 11월 말,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대여했는데,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실은,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현대라는 기업은 한국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를 가도 현대가 만든 제품을 우린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대단한 기업이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 회사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주영 씨도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맨손으로 현대를 시작했다는 건 대부분 알지만, 이분이 어떤 철학과 원칙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했는지 아는 분들은 별로 없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으니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현대그룹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현대에 대한 건지, 아니면 정주영 씨에 대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스타트업 창업가와 그 회사를 동일시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겐 둘 다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반성도 많이 했다.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 한국인들은 존경하거나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기업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한국보단 항상 외국인 CEO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내가 일하는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들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고, 누구한테 얼마의 투자를 받아서 얼마나 단기간에 유니콘 기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셜 미디어에 자주 포스팅을 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의 CEO나 한국의 창업가들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다. 한국에도 대단한 기업과 이 기업을 만든 창업가들이 많은데, 우린 너무 밖에서만 좋은 role model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닌지 반성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내 등잔 밑이 참 어두웠다는 것이다. 정주영 씨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이분의 인생 자체가 현대였기 때문에 이 책은 현대의 창업 이야기이고, 그 어떤 창업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 이런 면에서는 나는 현대도 엄청난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세세한 서평을 쓰진 않겠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권장하고 싶다. 아마도 정주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조각조각 많이 들었겠지만, 이 분이 어떻게 현대를 창업했고, 현대가 어떤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고의 회사가 됐는지, 이 자서전을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하지만 가장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말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 평등한 자본금을 열심히 활용한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게 현대의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이 자본금을 그냥 잘 활용한 게 아니라, 정주영 씨는 정말 오지게 잘 활용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간이라는 평등한 자본금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부터 더 잘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