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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봇 전문가들

AI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창업의 벽을 낮췄다는 점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반 창업가들은 과거에는 – 이렇게 ‘과거’라고 쓰면 마치 굉장히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불과 1~2년 전 – 본인이 직접 개발을 하거나, 개발이 가능한 인력과 같이 사업을 해야 했고,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5명의 개발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풀스택 코딩을 못 해도 기본적인 제품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고, 앞으로 이 기술의 발전은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도 요새 만나는 팀들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거나 다른 회사에서 개발 경험이 풍부한 인력으로 구성되기도 했지만, 개발 배경이 없이 본인이 직접 여러 가지 AI 툴로 기본적인 제품을 만든 일인 창업가들도 꽤 있다.

하지만, 아직 AI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가 봤을 때 아쉬운 점도 많은데, 전에 내가 AI가 창업 생태계에 가져온 부작용에 대해서도 쓴 적이 있다. 요새 내가 더 많은 팀을 만나면서 AI가 이 생태계에 가져온 안 좋은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바로 너무 잦은 피봇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잘된 곳들을 보면 절반 이상이 몇 번의 피봇을 거친 후에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기 때문에 나는 원래 피봇팅을 옹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AI가 대중화되기 전의 스타트업이 피봇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 돈, 그리고 인력의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막상 피봇을 하기 전에 창업가는 꽤 많이 고민해야 했다. 일단 현재 하는 사업이 안되는 이유를 꼼꼼하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이후 이 사업이 아니라는 결정을 했다면, 어떤 다른 아이디어나 제품으로 피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공부와 조사도 매우 꼼꼼하게 동반돼야 했다. 그리고 항상 한정된 자원을 기반으로 사업하기 때문에, 피봇할 때마다 발생하는 switching cost를 고려해야 했고, 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너무 잦거나, 너무 많은 피봇팅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AI가 발전하면서 피봇팅 공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1년 동안 5번 만난 창업가가 있는데, 5번 만날 때마다 5개의 완전히 다른 제품과 사업을 나에게 피칭했다. 피봇할만한 아이템도 AI에게 물어보고, 그 제품을 AI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꽤 쉽게, 꽤 잘 만들어준다. 뚝딱하고 만든 제품을 출시하고, 며칠 동안 반응을 본 후에, 아니다 싶으면 AI에 다른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고, 또 이 아이디어와 관련된 제품을 AI의 도움을 얻어서 만든다. 제품 설명, 비즈니스 모델, 가격, GTM, 중단기 마케팅 전략 등 사업의 모든 것을 AI에게 물어보면 그럴싸한 전략과 계획을 자판기같이 금세 뱉어준다. 그리고 이 제품도 아닌 것 같으면 계속 AI의 도움으로 새로운 제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가격, 새로운 전략으로 피봇팅 한다.

AI를 활용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고, 피봇팅이 너무 쉬워졌는데, 솔직히 나는 이게 좋은 현상인진 잘 모르겠다. 코딩을 몰라도 누구나 다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제품화하는 게 상당히 쉬워졌고, 만약에 이게 잘 안되면 또 언제든지 새로운 아이디어로 피봇하면 된다는 생각이 고착되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내 생각을 공유하자면, 제품을 만드는 것과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건 아직도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제 다양한 AI 툴로 MVP보다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드는 장벽이 거의 없어졌지만, 오히려 지속 가능한 장기적인 사업을 만드는 장벽은 더 높아진 것 같다. 다른 제품으로 피봇하는 게 너무 쉽다 보니 끈기와 인내심이라는 건 이제 과거의 근성이 되어버렸고, 내가 최근에 만난 젊고 똑똑한 창업가들은 대부분 AI로 만든 제품을 돈을 버는 사업이 될 때까지 반복과 테스팅을 이젠 잘 안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AI로 간단한 제품을 만들고 며칠, 몇 주 테스트해 보고, 안 되면 또 피봇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이 시점에서 조금만 더 끈기를 갖고 한 우물만 파는 창업가들이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요새 참 많이 하게 된다.

두더지 잡기

우리도 이제 투자를 시작한 지 14년 차가 되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분야의 회사에 투자했고, 상상했던 것보다 어떤 회사는 너무 잘하고 있고, 또 반면에 어떤 회사는 너무 못하고 있다. 스타트업이 참 재미있는게 – 옆에서 보는 사람은 재미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업하는 사람은 피가 마르지만 – 오랜 시간을 두고 보면 같은 회사가 너무 잘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너무 못하는 회사가 될 수도 있고, 사업을 오래 할수록 이 두 개의 up and down이 계속 반복된다.

얼마 전에 이제 사업한 지 10년 된 스타트업 대표님과 점심을 먹으면서 이 회사의 화려한 업앤다운에 대해서 웃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특히 우리는 이 회사의 첫 번째 투자자였고, 회사의 부흥과 몰락을 모두 꽤 가까운 위치에서 봤기 때문에 더 개인적이고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솔직히 이 회사의 부침을 보면서 사업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배웠고, 특히 대표와 회사의 경영진이 이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여러 번 망할 뻔한 고비를 어떻게 넘기는지 가까운 곳에서 보면서 간접적이지만 나 스스로의 내공을 많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는 보병과 이 모든 걸 멀찌감치 떨어진 사령부에서 편안하게 보고 받거나 모니터를 통해서 전쟁을 보는 행정병이 같은 전쟁이라도 보고 느끼는 게 많이 다르듯이, 실제로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이 온몸으로 경험하는 회사의 업다운과 이를 옆에서 간접적으로 보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경험하는 회사의 부침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사용했던 용어가 있는데 바로 ‘두더지 잡기’였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 회사의 실제 예시로 이야기해 보자. 회사가 가장 저점에 있었을 때, 그동안 벌여 놓은 사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검토해 보니, 제대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같이 개판이었다. 돈을 벌수록 마이너스가 커지는 말도 안 되는 수익모델이 너무 오랫동안 돌아가다 보니, 제품도 경쟁력이 떨어졌고, 이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경쟁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는 개판지수가 가장 높은 사업들을 나열한 후, 가장 심각한 사업부터 하나씩 분석하고, 해부하고, 해체하고, 수술하고, 그리고 다시 봉합하는 작업을 고통스럽게 했다. 사업이 망가지는 건 금방인데, 그 망가진 사업을 다시 심폐 소생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나는 이때 많이 배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똑똑한 팀이라서 결국 이 사업은 어느 정도 정상궤도로 올렸고, 그다음으로 개판인 사업을 비슷하게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건, 이미 고쳐놨다고 생각했던 사업이 손을 떼자마자 바로 또 망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패턴이 계속 반복됐고,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즉, 한쪽을 고친 후, 다른 망가진 쪽을 보면, 고쳐 놓은 부분이 또 고장 나는, 마치 우리가 오락실에서 하는 두더지 잡기 게임과 비슷했다.

어떻게 하면 두더지 잡기 게임을 안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사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모든 게 수시로 변하고, 여기저기 고장이 나면서 계속 탈이 날 것이다. 그때마다 고장 난 부분을 수시로 고쳐야 하는데, 아마도 하나를 고치면 또 하나가 고장 나고, 그걸 고치다 보면 원래 고쳤던 게 또 고장 나고,,,이 짜증 나는 주기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두더지 잡기 게임을 멈출 순 없으니까, 그 누구보다 이 게임을 잘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이기려면 항상 긴장해야 하고, 항상 모든 걸 감시해야 하고, 두더지가 올라오는 그 순간 아주 빠르고 힘차게 망치로 칠 수 있는 체력이 있어야 하고, 이걸 계속 반복할 수 있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사업도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건, 항상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열심히 그 누구보다 더 많은 두더지를, 더 빠르게 잡을 수 있길.

용기가 복리처럼 불어날 때

지난 2년은 대부분의 창업가에겐 20년 같이 느껴졌을 정도로 길고,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투자사 중에서도 남들보다 월등하게 잘하는 곳도 있지만, 이런 회사들은 아웃라이어이고, 대부분 정말 배고프고, 춥고, 스트레스 가득 차고, 하루가 이틀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창업가라는 왕관의 무게를 버텼다. 이 중 이젠 사라진 스타트업도 꽤 있고, 잘 살아남아서 이제 다시 성장의 준비를 하는 곳들도 있지만, 대부분 아직 데미지에서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 이제 바닥에서 서서히 회복하고 있는 창업가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여전히 전반적인 분위기와 기조는 긍정적이어서 나에게는 희망이 보인다. 원래 내가 아는 좋은 창업가들은 고비를 잘 참고, 포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런 초긍정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나 같으면 저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고개를 들고 현실을 직시하면서, 매일매일 크고 작은 불을 태연하게 끌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본다. 최근에 이런 창업가들을 보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하나의 단어는 바로 ‘용기’라는 단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은 절망적인 순간에 이런 대단한 용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이런 창업가 몇 분과 이야기를 해보고, 여러 가지 기사와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나만의 개똥 답안이 완성되긴 했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그중 기억나는 최악의 상황이 대부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이런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 이들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봤던 또 다른 이면은, 바로 이 최악의 상황이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라고 할 정도로 희망적이진 않았지만, 실제로 걱정했던 것처럼 정말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죽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항상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다 보면 또 어떻게 길을 찾고, 잘 극복해서 살아 남는 경우가 꽤 많았다는 것이다.

최악이라고, 정말 망할 수 있겠다고, 정말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을 어찌어찌해서 살아 남으면, 여기서 말콤 글래드웰이 정의한 용기가 작용하는 것 같다. 글래드웰이 정의한 용기에 대한 포스팅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데,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힘든 상황에서 자신을 용감하게 만드는 용기는 선천적인 게 아니다. 굉장히 힘든 상황을 극복했는데, 되돌아보니 이 상황이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고 느낄 때, 그때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게 용기이다.”

스타트업을 하다보면, 위에서 말 한 최악의 상황이 계속 발생한다.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오고, 고비가 올 때마다 실은 그 심각함과 나쁜 정도는 배가된다. 고비가 올 때마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는 걱정을 하지만, 어찌어찌 죽지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하고, 상황을 극복하고 뒤 돌아보면 또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생각이 몸에 학습되면서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용기에도 복리가 적용된다.

이렇게 용기에 복리가 적용되면 초인이 된다. 슈퍼맨 같은 초인이 아니라 어려움과 장애물에 초인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그런 강하고 용기있는 초인 말이다.

힘들다. 바쁘다. 피곤하다. 어쩔 땐 정말 죽을 것 같다. 나도 이런 기분이 드는데, 초기 스타트업 창업가는 오죽하랴. 하지만, 내일 하루 더 싸우기 위해서 오늘 죽지 말고 버티자. 버티면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마다 용기가 복리로 쌓일 것이다.

정치적 사업

미국 출장 중에 어떤 미국 VC가 혹시 스트롱이 이런 회사에 투자 관심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 분은 우리가 어떤 전략으로, 어떤 시장에, 어떤 조건으로 투자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딜을 공유해 준 것 같다. 희토류 관련 사업을 하는 미국 회사인데 현재 약 3조 원 밸류로 여러 VC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투자하기엔 너무나 비싼 회사였고, 분야도 좀 그렇고, 시장도 한국이 아니라서 듣자마자 바로 패스이긴 했는데, 그냥 희토류 시장 자체가 좀 궁금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15분 정도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희토류 시장의 90%가 중국에 있어서 우리가 이야기하던 이 3조 원 밸류의 회사는 남은 10%의 시장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현재 실제 매출은 전혀 없고, 예약된 매출만 있다는 것이었다. 예약된 매출이란 중국과 미국의 마찰 때문에 미국 정부가 희토류 확보를 위해서 이 회사를 엄청나게 밀어주고 있어서 미국 정부로부터 부킹?된 매출이다. 나는 이 사업이 과연 잘 될지, 그리고 매출 0원인 회사의 기업가치가 3조 원이라는 게 말이 되는지, 도대체 이 회사에 이미 커밋한 투자자들은 누구이고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짜 궁금하긴 했다.

미래에 예약된(=부킹된) 매출이 발생하는 영역에서 사업하는 우리 투자사들도 있는데, 이 부킹이 된 매출 중 실제 매출로 전환되는 금액은 대부분 0이거나 매우 작다. 아마도 위에서 이야기한 희토류 회사는 미국 정부로부터 부킹된 매출이라서 전환율은 조금 더 높을 것 같지만, 현재 미국 정부가 하는 걸 보면 이 또한 불확실성 투성이다.

이런 사업을 우리는 정치적인 사업(political business)이라고 한다. 상업적인 사업(commercial business)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사업이고, 조금 더 쉽게 풀어 설명하면 제대로 된 사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국과의 마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밀어주는 분야라서 갑자기 떴고, 주목받는 사업이라서 이런 회사에 3조 원 밸류에이션에 돈을 쏘는 투자자도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미중 관계가 좋아지거나, 또는 미국 정부의 희토류에 대한 기조가 바뀐다면 하루 만에 망할 수도 있는 그런 사업이다.

한국에서도 가끔 이런 사업을 하는 창업가들을 만난다. 자생할 수 있는 기술, 제품, 서비스는 없고 정부의 기조 때문에 운 좋게 큰 계약을 하거나 큰 매출을 만드는 정치적인 사업이 실은 한국에도 꽤 많다. 워낙 한국 정부가 과감한 드라이브를 많이 걸고, 특정 분야가 뜬다고 하면 이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면서 온갖 정부 과제와 보조금이 갑자기 생기기 때문이다.

창업자나 투자자도 본인들이 하는 사업과 투자 검토하는 사업이 정치적인 사업인지 시장의 논리로 돌아가는 상업적인 사업인지 잘 구분해야 한다. 관건은 이 사업에서 정치적인 부분이 없어져도 자생할 수 있는 제품, 매출, 그리고 고객을 보유하고 있는 사업인지 여부다.

숫자의 인플레이션

얼마 전에 미국에 한 10일 정도 갔다 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꽤 많은 업계 분과 투자자들을 만나서 요새 미국 tech 시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보다 훨씬 큰 투자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딜들을 보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들을 수 있었고, 동시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이 글에서는 우리 같은 VC는 창업가에게 엄청 많이 배운다고 했는데, 이건 배움의 절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 같다.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투자할 수 있게 소중한 자금을 제공해 주는 우리의 LP들에게 배우는 것 같다.

아무래도 미국 벤처투자자들과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주제는 올해 예정된 스페이스엑스, 오픈AI, 그리고 앤쓰로픽의 IPO였는데 이 세 회사가 원하는 기업가치 총액은 거의 $3.5 trillion이다. 스페이스엑스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기업가치가 $1.5T인데 이는 한국 GDP의 4분의 3이다.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이고 나도 이 일을 하면서 꽤 큰 금액에 대해 이야기하고 billion이라는 단어도 가끔 말하지만, trillion은 입에 담기조차 부담스러운 단위이다.

요새 이 시장에선 billion과 trillion이라는 단위가 너무 남발되고 있고, 내가 느끼는 걸 영어로 표현해 보면 “$100 billion is the new $100 million(이제 1,000억 달러가 과거의 1억 달러다.)”이다. 솔직히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의 대형 VC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VC가 $10B 밸류에 투자유치를 하는 회사들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일단 한화로 15조 원이라는 기업 가치 자체가 너무 컸고, 이 밸류에 투자하면 정말로 돈을 벌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앞섰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비싸다는 불평을 계속하면서 아주 꼼꼼하고 깐깐하게 실사하고, 여러 번 고민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몇 년 전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유니콘 회사가 Stripe과 ByteDance였는데 가장 고점을 쳤을 때가 아마도 $100 B 정도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 두 회사가 시장에서 펀드레이징을 돌 때, 회사를 소개해 주는 기존 주주들도 약간 민망해하면서 딜을 공유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하면 본인들의 포트폴리오지만, 본인들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게 비싼 것 같고 $100 B이라는 금액 자체가 너무나 큰돈이라서 감이 잘 안 잡혔던 것 같다. 그런데 요새는 상황이 완전히 반대다. $100B은 마치 과거의 $100M 같고 – 실은 $100M도 우리같이 작은 투자자에겐 너무나 큰 돈이다 – 스페이스엑스의 구주를 $1T에 구매하고 싶다는 투자자들도 충분히 있다는 소문은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시장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 누구도 오픈AI와 앤쓰로픽이 $1T이라는 숫자를 이야기할 때 비싸다는 이야기를 안 하고, 그 비싼 가격에 사면 누군가는 더 비싸게 살 사람이 있다는 생각으로만 – 이건 전형적인 바보들의 이론이다 – 이런 비싼 딜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요샌 그냥 이 정도 가격을 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린 것 같다.

지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절대 금액의 의미 자체가 희석되어 숫자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숫자의 인플레이션이 아니라면 정말로 이 세상에 몇 년 전 대비 돈이 그렇게 많아졌을까? 종이 상으로는 많아졌을 수도 있지만, 정말로 $100B이라는 돈을 마치 $100M 같이 취급할 정도로? “이걸 더 높은 가격에 사는 다른 바보가 있다면, 현재의 가격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략은 거품 시장에서 우리가 과거에도 몇 번 봤던 현상인데, 더 이상 더 높은 가격에 사는 바보들이 없어진다면 – 그리고 생각보다 빨리 없어질 수도 있다 –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 아닐 것이다. 특히나 금액이 이렇게 커진 상황에서 시장이 무너지면 정말 전세계적인 재앙이 될 것이다.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보다 GDP가 15배나 높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대국이다. 그래도 미국의 로켓 회사 하나, 그리고 두 개의 AI 회사의 총 기업가치가 전세계에서 13번째로 잘사는 나라인 대한민국 GDP의 거의 두 배라는 건 잘 모르겠다. 내가 걱정하는 이 재앙이 제발 오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