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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1인(=버티기)

우리는 분기마다 투자팀 전원이 모여서 현재 살아 있는 포트폴리오를 검토한다. 각 멤버는 담당하는 회사의 기업 가치가 현실적인지를 판단하고 만약 현재 상황 대비 기업 가치가 너무 높다고 판단되면 우리가 선제적으로 회사 가치를 감액한다. 예를 들면, 가장 최근 투자를 기업 가치 100억 원에 받았다면, 서류상 이 회사의 적정 기업 가치는 100억 원으로 기재하는데, 만약에 이 가치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50억 원과 같은 더 낮은 가치로 감액한다.

만약에 투자사가 사업은 영위하지만, 담당하는 분이 이 회사는 그냥 이렇게 가다가 망할 것 같다고 판단하면 아예 손실 처리한다. 위의 예시를 그대로 사용해 보면, 서류상 회사의 적정 가치는 100억 원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가치를 0원으로 수정하고, 이 회사는 손실 처리한다.

우리와 비슷하게 적극적으로 감액하고 손실 처리하는 VC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게 이 생태계의 모든 이해관계자를 위한 건강한 프로세스라고 생각한다. 회사의 기업가치가 그 회사의 실제 비즈니스 상황을 현실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이걸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게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우리의 투자자들을 위해서도 좋다는 게 스트롱의 생각이자 원칙이다.

이런 적극적인 감액과 손실 원칙을 고수하다 보니, 어떤 분기엔 10개의 회사를 감액하고 손실 처리했다. 손실 처리한 회사 중 정식으로 폐업한 곳도 있지만, 아직 버젓이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곳도 있다. 전에 내가 이런 우리의 프로세스를 다른 VC와 공유한 적이 있는데, 이 분이 완전히 기겁하면서 회사가 망하지도 않았고, 더 낮은 밸류에 투자받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렇게 자기 살을 깎을 필요가 있냐면서 깜짝 놀랐다. 이 분이 정확히 사용했던 표현은 “자해”였는데, 본인이 이렇게 스스로 회사의 가치를 감액하거나 손실 처리하면 – 즉, 자해하면 – 이걸 본인도 못 견디고, 몸담은 VC의 임직원 분들도 못 견딜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이 분의 회사는 투자 손실이 발생하는 건 정말 끔찍하게 두려워하고 손실이 조금이라도 발생하면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디는 게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돈을 잃는 걸 견딜 수 없다면 투자를 하면 안 된다. 내가 운에 대한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투자는 운의 영역이 크고 실력이 약간의 조미료 역할을 하므로, 아무리 투자를 잘해도 돈을 잃을 수 있고, 언젠가는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얼굴에 펀치 맞는 게 너무 싫고, 내 얼굴이 못생겨지는 걸 견딜 수 없는데도 복싱을 직업으로 하는 것과 비슷하다. 천재 복서라도 언제나 얼굴에 펀치 맞을 수 있고, 많이 맞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얼굴에 펀치 맞는 걸 못 견디면 복싱하면 안 된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가 너무 싫고, 항상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야 하고, 이 계획과 예측에서 조금이라도 일이 어긋나는 걸 견딜 수 없다면, 스타트업하면 안 된다. 그 무엇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예상치 못한 서프라이즈로 하루가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투자든, 사업이든, 복싱이든, 그냥 계속 버티면서 ‘경기’를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 손실이 엄청나게 발생하고, 이에 따라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매일 경험해도 버티면서 계속 투자해야 한다. 얼굴에 펀치를 너무 많이 맞아 피범벅이 돼서 너무 아프고 괴롭더라도 버티면서 계속 펀치를 날려야 한다. 너무 많은 서프라이즈로 과연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지 걱정되고, 아직 출근도 안 했는데 이미 공황 상태가 됐더라도 일단 버티면서 계속 일을 쳐내야 한다.

결국 남들이 다 쓰러지고 나가떨어져도 계속 투자, 경기, 사업을 하는 최후의 1인이 돼야 한다. 영어에서는 이 상태를 표현하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멋진 말이 있다.

“The name of the game is to stay in the game”

계속 투자하면서 결국엔 발생한 손실 이상을 버는 게 잘하는 투자이고, 계속 펀치 날리면서 결국엔 맞은 펀치보다 더 많이 상대방을 때리는 게 잘하는 복싱이다.

크립토는 끝났다

내 블로그를 10년 이상 읽었던 분들이라면 내가 얼마나 블록체인과 Web3, 그리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대한 포스팅을 많이 했고, 크립토와 그 기반이 되는 기술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인 생각을 했는지 알 것이다. 스트롱은 2013년도 한국 최초의 비트코인 거래소 코빗에 투자했고, 그때부터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에 대한 내 관심과 사랑이 시작됐다. 이후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 시장에는 엄청 많은 변화와 up/down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유일한 up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가격이고, 대부분은 좋지 않은 down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이 시장에서 ICO, NFT, Web3 등과 같은 기술거품이 생겼다가 터지길 반복했고, 같은 기간 동안 우린 Sam Bankman-Fried와 권도형 같은 사기꾼들의 상승과 몰락을 목격했다. 하지만 나는 2024년도까지는, 이런 사건/사고는 새로운 기술 기반의 생태계가 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했고, 계속 Web3 기술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발전과 혁신을 믿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싶다. 크립토는 이제 끝났다는 걸. 물론, 이건 이 분야의 비전문가인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오랫동안 이 분야만 봤고, 이 분야만 연구했고, 이 분야에만 투자한 분들은 – 그런데 솔직히 이런 사람들이 요새도 있는진 잘 모르겠다 – 나와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수박 겉핥기식의 얕은 지식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 최근 몇 년 동안 이 분야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져서 최신 기술, 제품, 트렌드에 대한 감이 별로 안 좋다는 건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섹터가 10년이 넘었고, 10년 동안 정말 많은 투자가 집행됐고, 유행 당시 가장 똑똑하다는 많은 분이 이 분야에서 창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온 제품이 거의하나도 없다는 건 이 섹터는 제대로 된 산업으로 성장하기 힘들다고 해석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이 시점에도 이 분야에서 뭔가 하는 사람 중 아직도 내가 만난 다수의 창업가가 이상하다는 건, 이 섹터가 발전은커녕 오히려 퇴보한다는 결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

이젠 Web3와 AI가 결합해서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주장도 있다.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본인들도 그렇게 안 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 계속 내러티브를 그때의 유행에 끼워 맞추면서 “이번엔 정말 다르다”라는 주장을 한다. 솔직히 나도 이번엔 정말 달랐으면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크립토와 Web3는 영원히 메인스트림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비트코인도 engineered money가 되진 않을 것이다. 이미 이건 실패했다. 하지만, 금과 같은 자산으로서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서 없어지진 않을 것이고 어쩌면 그 가격은 더 오를지도 모른다.

Bye bye 크립토, 블록체인, Web3, 그리고 관련된 모든 내러티브들. 크립토는 끝났다.

약해지는 게 강해지는 것이다

작년 말에 내가 2026년도에 대해 예측했던 게 있다. 올해는 시장에 돈이 더 풀려서 전반적인 스타트업 생태계가 서서히 리바운드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실은, 이 예측을 하나씩 확인해 보면 틀리진 않았다. 시장에 돈이 정말 더 많이 풀렸고, 스타트업 생태계가 빠르게 리바운드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다 느끼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만 보면.

하지만, 뚜껑을 열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많이 다른 그림이 보인다. 일단 돈이 시장에 많이 풀린 건 맞고, 과거 대비 그 규모에 최소한 영이 하나 더 추가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AI 관련 회사에 집중적으로 – 너무 집중되다 못해, 걱정될 정도로 많이 – 투자되고 있다. 2026년 Q1만 해도 전 세계 벤처 투자금의 70% 이상이 AI 회사에 투자됐고, 더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자금이 단지 4개의 AI 스타트업으로 들어갔다. 그 외의 산업은 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소외되고 있다. 우리가 많이 투자하는 플랫폼, 이커머스, 브랜드와 같은 분야에서 사업하는 창업가들은 돈이 시장에 없을 때나, 지금과 같이 넘쳐흐를 때나, 펀드레이징은 여전히 잘 못 하고 있고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벤처 투자 시장이 양극화되면서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던 창업가들의 현타는 더 자주, 그리고 더 크게 오고 있는데, 이게 심해지면 불안장애와 공황장애로 이어진다. 솔직히 스타트업하는 분 중 불안장애와 공황장애에 시달리지 않는 분을 나는 거의 못 만나봤을 정도로 누구나 다 경험하지만, 이게 쌓이면 정말 괴롭고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심해진다. 이 시점까지 오지 않는 게 가장 좋지만,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불안장애가 심각해지면 적극적인 치료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 이 선을 넘으면 그땐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어두운 길로 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다시 밝은 쪽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 노력, 그리고 돈이 들기 때문이다.

불안과 공황장애와 오늘도 싸우고 있는 창업가분들에게 내가 드리고 싶은 조언이 있다. 바로 약해지는 게 강해지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고, 내 경험을 살짝 공유하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매일 불안을 느낀다. “장애”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불안이라고 하는 이유는 25년 넘게 내 안의 불안과 공황을 다루다 보니, 이제 불안이 불안장애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몸이 알아차리고 스스로에게 적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나는 알아서 불안장애 단계로 넘어가지 않게 그동안 연습하고 사용했던 나만의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내 안의 불안과 공황을 나름 잘 다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내가 이런 불안 증세를 경험했을 때가 기억나는데 그땐 정말 당황스러웠다. 사무실에 있는데 갑자기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서 호흡곤란 증상이 와서 나는 심장마비가 온 줄 알고 깜짝 놀랐고, 이렇게 당황하고 놀라니까 더 불안해졌다. 얼마나 놀랐냐면, 스스로 정신없이 뛰어서 응급실에 갈 정도였다. 의사가 여러 가지 검사를 하더니 대뜸 나한테 하는 질문이, “Is something going on in your life these days?(요새 무슨 일 있나요?)” 였다. 2008 – 2009년도 뮤직쉐이크 시절이었는데, 사업도 잘 안되고 현금이 1년 동안 고갈돼서 완전 거지였던 시절이다. 그래서 요새 하는 일이 잘 안돼서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했고, 의사는 내가 겪는 증상이 불안으로 인한 공황발작이라는 진단을 내려줬다.

이 말을 들었을 땐, “panic attack(공황발작)? 그게 뭐지?”라고 스스로 물어볼 정도로 나에겐 생소한 개념이었고, 솔직히 내가 이런 불안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더 충격받았던 것 같다. 그 이후 며칠 동안 공황발작이 올 때마다 너무너무 괴로워서,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공황발작이 더 무서운 건지, 나도 사람이고 나도 고장 날 때도 있다는, 내가 한심하게 생각했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게 더 무서운 건지 구분이 잘 안 가서 계속 망설였다.

며칠 후 내 오랜 친구이자 뮤직쉐이크 동료였던 루크에게 나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런 약한 모습 보여서 정말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성숙하지 못했던 생각으론, 불안장애도 괴로웠지만, 나약한 인간으로 보이는 건 더 괴로웠다. 그런데 그때 루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기홍아, 약함에 대한 이런 솔직함이 너의 강함이지.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네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항상 그랬듯이 싸워서 이기고 다시 복귀해라.”

그리고 그날 저녁 와이프에게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냉정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더 충격받았을 텐데, 오히려 덤덤하게 루크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 약함을 인정하는 자세, 그게 오빠의 불안과 공황을 극복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야. 이럴 땐 약해지는 게 강해지는 거야.”

이런 말들이 나에게 당시에 엄청 큰 힘이 됐고, 이후에 더디고 힘들었지만, 서서히 불안과 공황장애를 극복다스릴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았다. 요새도 가끔 너무 불안해지면 나는 나의 나약함을 일단 인정한다. 그래야지만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주위에 도움을 구할 수 있다.

힘들면 힘들다고 인정해라. 나도 사람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나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라. 내가 약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 그게 바로 내가 강하다는 증거다. 오늘도 약함과 강함이 공존하는, 조금 덜 불안한 하루가 되길.

결승점

10년 전에 큰 비전과 야망을 갖고, 잘 다니던 대기업에서 퇴사하고 창업했는데,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 초라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2012년도부터 투자를 시작했고, 당시에 투자한 회사는 대부분 망하거나 엑싯을 했지만, 아직도 꾸준히 사업을 영위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투자한 회사 중 이제 사업한 지 거의 10년이 되는 곳들도 생각보다 많다. 최근에 이렇게 사업 시작한 지 10년 정도 되는 투자사 대표님들을 몇 분 만났는데 이분들과 대화하면서 내가 느낀 점들, 그리고 이들에게 내가 드렸던 조언과 생각에 대해서 몇 자 적어 보고 싶다. 참고로, 모두 따로 만났는데 괴로워하는 점들이 비슷했고 대부분 자존감과 자신감에 대한 고민, 그리고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해 스스로 의문하고 있었다.

창업한 지 10년 됐는데, 사업이 잘 되는 분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성장도 좋고, 투자도 많이 받았고, 돈도 잘 버는 오래된 창업가분들은 사업을 더 키우고 싶어 하고, 제품, 매출, 사람에 대한 고민과 스트레스는 끊임없이 있지만, 이들은 그래도 사업의 존재 이유에 대한 걱정은 안 한다. 그리고 사업이 너무 안되는 분들에게도 해당 사항이 없다. 이들은 그냥 폐업하면 된다. 누가 봐도 잘 안되는 사업이라서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경우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분들은 10년 사업을 했고, 수억 ~ 50억 원 정도 매출을 만들어서 회사의 손익은 어느 정도 맞췄지만, 성장의 기울기 자체는 별로 가파르지 않는, 그런 창업가들이다. 이들이 사업을 시작했을 땐, 5년 안으로 수천억 원 대의 기업, 또는 유니콘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시간이 가면서 나름 시장에서 인정받으면서 고객이 돈을 내는 제품을 만들었고, 매출도 발생하지만, 이 속도로 가면 그냥 근근이 먹고 사는 중소기업이 될 것 같은 게 거의 확실하다는 걸 본인들도 알고 있다. 저돌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대부분의 창업가에겐 이런 현실만큼 괴로운 건 없을 것이다.

특히 남과 비교당하고 비교하기 좋아하는 한국은 이런 현상이 더 심하다. 나랑 10년 전에 같이 창업한 친구는 이미 10조 원짜리 기업을 만들었거나, 나보다 훨씬 더 늦게 나랑 비슷한 사업을 시작한 다른 어린 창업가는 이미 우리보다 투자도 많이 받았고 성장도 가파르다면 자신을 계속 남들과 비교하면서 소위 말하는 현타를 매일 느낀다. “도대체 나는 뭘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매일매일 하면서 방황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매일 스트레스 받으면서 사업하는 대표들이 우리 포트폴리오에 꽤 많다. 이 중 어떤 분은 그동안 10년 했던 사업과는 상관없는 다른 제품을 만들면서 테스팅하고 있었다. AI와 관련된 제품이었는데, 내가 봤을 땐 경쟁력이 없고 그동안 이 회사가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서 성공 확률이 낮다고 생각했다. 굳이 왜 이 시점에 이런 제품을 만드는지 이야기해 보니, 그 고민의 근원은 위에서 말했던 오랫동안 더딘 성장으로 인한 불안감이었다.

성장이 너무 더뎌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을 쳤고, 주위를 돌아보니 1년도 안 된 AI 회사의 기업가치가 10년 사업한 본인의 회사보다 수십 배나 높다는 걸 보고 본인도 빨리 뭔가 다른 걸 해서 더 성장해야겠다는 급한 마음 때문에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걸 AI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바이브 코딩을 해보니까 껍데기는 어느 정도 쉽게 만들 수 있어서 이 분야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면 뭔가 대박 나는 제품이 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은 처음에 이걸 왜 하는지 물어봤을 때, 원래 본인이 창업했을 때의 비전이 이런 거였고, 지금 만드는 제품은 그 비전에 조금 더 가까이 가기 위한 디딤돌이고, 요샌 AI 툴이 워낙 잘 나와서 드디어 원래 하고 싶었던 그 제품을 만든다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했다. 계속 질문하고 대화를 해보니, 결국엔 너무 오랫동안 정체된 사업을 하다 보니 불안하고, 자존감 떨어지고, 답답해서 그냥 다른 돌파구를 찾다 AI가 대세이니 이 파도를 좀 타서 나도 돈 좀 벌어보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10년 동안 뚝심 있게 매출을 만들고 손익도 맞춘 분이 왜 이런 외부 노이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의아해했지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더디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10년 운영하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분에게 두 가지 생각을 말씀드렸다.

일단 이 시점에서 큰 피봇을 하려면, 정말 잘 피봇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회사의 성장은 대표이사의 성에 안 차지만,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있고 현재 회사의 현금 창출 능력은 전 직원을 먹여 살릴 수 있는데, 굳이 이걸 버리고 다른 걸 하는 이유가 뭔지 잘 고민해 보라고 했다. 그냥 AI로 누구나 다 모든 걸 만들 수 있기 때문에 – 즉, 그냥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건지 – 아니면 정말로 이걸 우리가 해야 하는 거라서 하는 건지, 이 두 개를 잘 구분해 보라고 했다.

두번째는 – 그리고 나는 이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결국엔 누가 더 좋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진 결승점에 도달해서 시합이 끝난 후에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10년째 마라톤을 하고 있고, 아직 결승선은 보이지도 않지만, 달리기할 땐 순위가 계속 바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첫 10km는 혼자서 독주하다가 넘어져서 탈락할 수도 있고, 어떤 회사는 거북이 같이 느리지만 마지막 5km를 미친 듯이 달려서 1등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결승점 바로 앞에서 쥐가 나서 꼬꾸라질 수도 있다. 맘에 안 드는 성장을 하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회사는 우리가 만든 제품을 1년에 10억 원 이상 팔고 있는, 솔직히 굉장히 자랑스러운 회사라는 말씀을 드렸다. 이 분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내 진심이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 중 기업가치가 엄청 높은 회사도 있지만, 솔직히 위에서 말한 회사처럼 흑자를 만드는 회사는 우리의 300개 포트폴리오 중 내가 머릿속으로 다 기억할 정도로 그 수가 적어서, 본인은 회사의 성장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내가 봤을 땐 대단한 창업가이다.

이런 상황에 부닥친 창업가들이 꽤 있다. 회사는 굴러가는데 엄청난 성장은 못 하고 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대단한 기업가치에 큰 투자를 받을 상황은 아니고,,,그리고 이 고민과 생각을 매일 하다 보니 공황 상태에 빠진 창업가들을 요새 많이 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잘 뛰었으면 결승점까지 잘 뛰어서 시합을 끝내보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사업은 결국 돈을 벌어서 흑자를 만드는 것이고, 결국엔 돈 버는 놈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다. 엄청난 마이너스를 만들면서 밸류에이션만 키우고 투자만 받는 사업은 결승점에 도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피봇 전문가들

AI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창업의 벽을 낮췄다는 점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기반 창업가들은 과거에는 – 이렇게 ‘과거’라고 쓰면 마치 굉장히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불과 1~2년 전 – 본인이 직접 개발을 하거나, 개발이 가능한 인력과 같이 사업을 해야 했고,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최소 5명의 개발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 등과 같은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풀스택 코딩을 못 해도 기본적인 제품을 만드는 게 가능해졌고, 앞으로 이 기술의 발전은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우리도 요새 만나는 팀들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거나 다른 회사에서 개발 경험이 풍부한 인력으로 구성되기도 했지만, 개발 배경이 없이 본인이 직접 여러 가지 AI 툴로 기본적인 제품을 만든 일인 창업가들도 꽤 있다.

하지만, 아직 AI는 과도기를 거치고 있기 때문에 투자자가 봤을 때 아쉬운 점도 많은데, 전에 내가 AI가 창업 생태계에 가져온 부작용에 대해서도 쓴 적이 있다. 요새 내가 더 많은 팀을 만나면서 AI가 이 생태계에 가져온 안 좋은 점을 하나만 더 꼽자면, 바로 너무 잦은 피봇팅이다.

우리 투자사 중 잘된 곳들을 보면 절반 이상이 몇 번의 피봇을 거친 후에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기 때문에 나는 원래 피봇팅을 옹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AI가 대중화되기 전의 스타트업이 피봇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 돈, 그리고 인력의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막상 피봇을 하기 전에 창업가는 꽤 많이 고민해야 했다. 일단 현재 하는 사업이 안되는 이유를 꼼꼼하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이후 이 사업이 아니라는 결정을 했다면, 어떤 다른 아이디어나 제품으로 피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공부와 조사도 매우 꼼꼼하게 동반돼야 했다. 그리고 항상 한정된 자원을 기반으로 사업하기 때문에, 피봇할 때마다 발생하는 switching cost를 고려해야 했고, 이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너무 잦거나, 너무 많은 피봇팅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그런데 AI가 발전하면서 피봇팅 공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1년 동안 5번 만난 창업가가 있는데, 5번 만날 때마다 5개의 완전히 다른 제품과 사업을 나에게 피칭했다. 피봇할만한 아이템도 AI에게 물어보고, 그 제품을 AI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꽤 쉽게, 꽤 잘 만들어준다. 뚝딱하고 만든 제품을 출시하고, 며칠 동안 반응을 본 후에, 아니다 싶으면 AI에 다른 아이디어를 달라고 하고, 또 이 아이디어와 관련된 제품을 AI의 도움을 얻어서 만든다. 제품 설명, 비즈니스 모델, 가격, GTM, 중단기 마케팅 전략 등 사업의 모든 것을 AI에게 물어보면 그럴싸한 전략과 계획을 자판기같이 금세 뱉어준다. 그리고 이 제품도 아닌 것 같으면 계속 AI의 도움으로 새로운 제품, 새로운 시장, 새로운 가격, 새로운 전략으로 피봇팅 한다.

AI를 활용하니까 뭐든지 할 수 있고, 피봇팅이 너무 쉬워졌는데, 솔직히 나는 이게 좋은 현상인진 잘 모르겠다. 코딩을 몰라도 누구나 다 아이디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제품화하는 게 상당히 쉬워졌고, 만약에 이게 잘 안되면 또 언제든지 새로운 아이디어로 피봇하면 된다는 생각이 고착되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내 생각을 공유하자면, 제품을 만드는 것과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드는 건 아직도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제 다양한 AI 툴로 MVP보다 수준 높은 제품을 만드는 장벽이 거의 없어졌지만, 오히려 지속 가능한 장기적인 사업을 만드는 장벽은 더 높아진 것 같다. 다른 제품으로 피봇하는 게 너무 쉽다 보니 끈기와 인내심이라는 건 이제 과거의 근성이 되어버렸고, 내가 최근에 만난 젊고 똑똑한 창업가들은 대부분 AI로 만든 제품을 돈을 버는 사업이 될 때까지 반복과 테스팅을 이젠 잘 안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런 이유로 인해 AI로 간단한 제품을 만들고 며칠, 몇 주 테스트해 보고, 안 되면 또 피봇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이 시점에서 조금만 더 끈기를 갖고 한 우물만 파는 창업가들이 오히려 더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을 요새 참 많이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