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12개월이 참 빨리 지나갔는데, 올해는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우린 올해도 창업가들 많이 만나고 있고, 투자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펀드도 만들고 있는데, 요새 워낙 경기가 안 좋아서 남의 돈을 받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매번 느끼고 있다. 특히, 미국 투자자들은 미국의 주식 시장이 워낙 좋고, 미국 VC들의 성적도 좋기 때문에, 그냥 미국에 투자하면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어서, 굳이 우리같이 한국 시장에 투자하는 펀드에 투자할 이유가 매우 강하진 않은 것 같다.
그래도 우린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정기적으로 해외 투자자들을 만나서 열심히 영업하고 있는데, 그동안 스트롱의 성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투자자들을 시원하게 설득하는 게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한 2~3주 외국 나갔다 다시 한국 들어올 때 빈손이면(=돈을 한 푼도 못 받음) 힘이 많이 빠지긴 한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외국 투자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당장 돈을 주진 않지만, 아주 기분 좋은 피드백을 주는 분들이 있었다. 처음 만나는 어떤 투자자가 악수하면서 “우리 이미 Strong에 대해서 들어봤어. Your reputation precedes you.”라는 말을 하는데, 먼 땅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으니까, 기분이 묘하게 좋긴 했다. 실은 이 말은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내 앞에서 이 말을 직접 했으니까 아마도 긍정적인 의미였을 거로 생각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스트롱의 평판은 익히 들었기 때문에 너희 믿을 만 한 거 알고 있어.” 정도의 의미일 것 같다.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투자를 엄청나게 잘해서라기 보단, 10년 넘게 크게 욕먹거나 나쁜 짓하지 않고 꾸준히 투자하고 있어서 들었던 것 같다. 평판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이고, 이 또한 내가 자주 강조하는 복리의 힘이 제대로 작용하는, 정량화하기 힘들지만, 우리 같은 VC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생/직장에서의 KPI가 아닐까 싶다.
투자하다 보면 성적표가 계속 왔다 갔다 한다. 누구나 다 아는 유니콘 회사에 투자해서 돈을 벌 수도 있고, 누구나 다 아는 대박 망하는 회사에 투자해서 돈을 잃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부침을 반복하면서도 자기만의 철학으로 투자를 꾸준히 해야지만, 투자자로서의 평판을 만들 수 있다. 그냥 계속 한 우물을 꾸준히 파다 보면,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할 수 있고, 오랫동안 사업을 하면서 살아남으면 항상 좋은 기회가 생기는 걸 나는 몇 번 경험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좋은 사업을 하면 평판이라는 게 조금씩 만들어진다.
이건 우리 같은 투자자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 주변에는 유행만 쫓아가면서 3년 만에 돈 좀 벌어서 엑싯하고 싶어 하는 창업가들도 너무나 많고, 이 중 똑똑하고 사업 잘하는 분들도 많다. 하지만, 스트롱이 투자하고 싶어 하는 창업가들은 최소 10년은 바라보면서 꾸준히 사업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유행에 너무 민감해서 한 우물을 못 파는 창업가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물론,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도 이런 분들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쉽게 사업을 하고 싶어 하고, 유행을 좇고, 피보팅을 끊임없이 한다. 물론, 이렇게 해서 잘 되는 경우도 가끔 봤지만, 대부분 그냥 맥없이 망한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평판이란 것 자체가 안 만들어진다.
한국에서도 이런 말을 요새 들었는데, 미국에서도 이제 창업가들이 일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본인을 홍보하고, 소셜미디어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야 하고,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고, 다른 회사에 개인 투자도 하고, 딴짓도 많이 해야지 사업도 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뭐, 누구나 다 자기만의 생각이 있지만, 나는 이 말에 별로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좋은 사업을 만든 모든 창업가는 절대로 딴짓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고, 사업가로서의 평판은 본인의 사업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제품과 고객에게 집착하고, 좋은 사람들을 회사로 데려오는데 시간을 쓰는 대신, 행사만 다니고 자기 홍보만 하면 초반에는 바이럴을 만들고, 어쩌면 펀딩은 크게 받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10년 이상 가는 사업을 만드는 창업가는 없었던 것 같다. 창업가나 VC나 펀딩을 크게 받거나 큰 펀드를 만들면 단기적으론 유명해지겠지만, 장기적인 평판을 만드는 건 좋은 사업과 좋은 투자이고, 이건 인내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복싱 연습을 열심히 해도, 실제 링 위로 올라가는 건 정말 어렵다. 하지만, 링 위에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건 링 위에서 12라운드 동안 계속 버티면서 싸우는 거다. 평판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