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ategy

해답은 등잔 밑에

미국의 아시아 식료품 이커머스 플랫폼 Weee!의 창업가 Larry Liu의 인터뷰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정말 재미있게 들었다. 마진이 낮고, 물류가 복잡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는 이커머스 사업을 하는 분들이라면 꼭 정청하시길 권장한다.

여러 가지 인사이트를 배울 수 있었는데, 내가 요새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반갑기도 했고,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일종의 안도감 또한 들었다. Weee!의 초기 사업 모델은 각 지역의 그룹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구매였는데, 초반에는 캘리포니아에서 빠르게 성장하다 어느 순간 이 지역에서 성장 곡선이 더뎌지자, 그 해결책을 지역의 확장에서 찾기 시작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으니, 같은 모델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해서 계속 성장을 유지하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처참하게 실패했다. 미국은 땅이 워낙 넓어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건, 마치 다른 나라로 확장하는 것과 비슷했고, 지역 확장에 필요한 비용은 너무 많이 들었고, 결과는 확장하는 지역마다 마이너스가 나는 말이 안 되는 사업이었다.

돈도 다 떨어졌고, 그나마 잘하고 있던 캘리포니아의 실적 또한 역성장하자, 경영진은 성장의 답은 다른 지역이 아니라, 가장 잘하고 있었던 캘리포니아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캘리포니아에서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객단가를 올리고, 더 빠른 배달을 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잘하는 아시아 식품 이커머스 플랫폼이 되는 게 위이이!의 성장 공식이지, 이 해답을 다른 지역에서 찾는 시도 자체가 방향성이 완전히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 확실하게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해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아시아 식료품 이커머스 플랫폼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내가 봐도 너무 많은 창업가들이 너무 먼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사업이 잘 안되면, 창업가들이 사업을 못 해서 그런 건데, 꽤 많은 분들이 한국이라는 시장을 탓한다. 그리고 본인들의 사업은 한국보단 외국에서 먹히는 모델이라고 하면서 외국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한국에서 돈 못 버는 사업은 절대로 외국에서도 돈 못 번다.

특정 버티컬에서 사업을 하다가 뭔가 잘 안되면, 자꾸 해답을 다른 버티컬에서 찾으려고 하는 창업가들도 있는데, 한 버티컬에서 못 하면, 다른 버티컬에서도 못 한다. 물론, 항상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내 경험상, 사업의 실마리는 가까운 곳에 있다. 즉, 등잔 밑을 더 열심히 봐야 한다. 더 고민하고, 더 연구하고, 더 많은 고객을 만나고, 더 뾰족하게 들어가 보면 주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등잔 밑을 먼저 밝힌 후에, 다른 곳을 밝히는 게 정답이다.

스케일은 우리의 적

우린 계속 누군가에게 돈을 받아서, 이 돈을 스타트업에 투자하는데, 펀드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을 LP(Limited Partner)라고 한다. 스타트업이 새로운 라운드를 진행할 때마다 기존 투자자들도 참여하지만, 새로운 투자자도 필요하듯, 우리도 새로운 펀드를 만들면 기존 LP도 재참여를 하지만, 어떤 분들은 사정상 참여하지 못하고, 어떤 분들은 예상보다 투자금이 줄어서, 우리도 항상 새로운 투자자와 만나서 돈 달라고 열심히 설득한다.

기관 LP들은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을 관리하는 큰 투자자들인데, 이들이 우리에게 가끔 펀드 규모에 대해서 지적한다. 스트롱 괜찮은 것 같은데, 본인들의 최소 투자금액 대비 스트롱의 펀드가 너무 작아서 혹시 펀드 규모를 더 키우면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전에는 항상 갈등하고 고민했다. 더 큰 펀드를 만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규모를 키우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LP가 투자한다는 생각을 하면, 벤처투자하는 사람이라면 귀가 솔깃해질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고민을 상당히 깊게 했다.

그런데 요샌 누가 이런 질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우린 펀드 규모를 더 키울 계획이 없으니까 그냥 당신들이 작다고 생각하는 현재 펀드에 투자하든지, 아니면 그냥 안 하든지 결정하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펀드가 크면 좋은 점이 많다. 일단 투자의 폭이 훨씬 더 넓어진다. 더 큰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고, 시리즈 A, B, C 등 다양한 단계의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 그리고 운영보수 또한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다. 주로 전체 펀드 규모의 2%를 해마다 회사 운영 비용으로 사용하는데, 펀드가 더 크면 이 비용 규모 또한 늘어나서 더 많은 직원을 채용할 수 있고, 월급도 더 많이 가져갈 수 있다.

그런데 장점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봤을 땐, 우리같이 초기 투자하는 VC에겐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펀드 규모가 커지면, 이 펀드로 큰 수익을 내는 게 더 힘들어진다. 우리 첫 번째 펀드가 20억 원이 안 됐는데, 20억 원 펀드로 10배의 수익을 내는 거랑, 1,000억 원 펀드로 10배의 수익을 내는 건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된다. 즉, 펀드가 커질수록 큰 수익을 내는 게 더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런 숫자를 떠나서,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펀드가 너무 커지면 우리가 항상 하는 초기 투자만 하는 게 힘들어져서, 스트롱의 전반적인 철학과 전략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작은 펀드로 시작해서 새로운 펀드를 만들 때마다 계속 규모를 키우는 VC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어서 –  실은, 대부분의 VC가 여기에 해당된다 – 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데, 작은 펀드로는 작은 투자를 하다가 펀드 규모가 커지면 주로 작은 투자와 큰 투자를 동시에 다 한다. 모든 걸 훌륭하게 잘 소화하는 VC도 있지만, 초기 투자와 시리즈 B 투자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펀드가 망가지는 것도 나는 많이 봤다. 또한, 펀드가 커지면 이에 따라서 사람도 더 많이 채용해야 하는데, 조직이 커지면 사람과 사람의 마찰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우리 같이 lean and mean 전략을 취하는 VC에겐 상당히 악영향을 미친다.

벤처 생태계에 있으면 스케일(scale)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실은, 과할 정도로 이 말을 많이 한다. 나는 전에는 스케일이 무조건 좋은 줄 알았는데, 요샌 오히려 이 반대의 생각을 한다. 스케일은 우리의 적이다. 우린 우리가 하는 일을 더 잘해야지(better), 더 커져야(bigger) 하는 게 아니다. 너무 커지는 순간 많은 것이 망가진다.

이런 현상은 스타트업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투자를 너무 많이 받으면, 너무 많은 사람을 채용하고,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한다. 쿠팡이나 토스 같이 이런 스케일을 훌륭하게 소화한 회사도 있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스케일이 회사를 완전히 망치는 경우도 있다. 창업가들도 너무 스케일에 목숨 걸지 말고, 본인들이 하는 걸 더 크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스케일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스트롱에겐 스케일은 적이다.

플립(flip)에 대해

원래 한국 법인인데, 이 회사를 미국 법인으로 전환할 때 ‘flip’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동전의 앞면을 뒷면으로 뒤집는 것도 flip이라고 하는데, 한국 법인을 단순히 미국 법인으로 바꾸는 게 아니라, 한국 법인의 지분구조를 그대로 가져가면서 미국 법인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이 상황을 잘 반영하는 flip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우린 이 플립 과정에 대한 경험이 어느 정도 있다. 스트롱의 한국 투자사 중 한국 법인으로 설립됐고, 몇 년 동안 사업을 하다가 미국 법인으로 바꾼 곳들이 몇 군데 있는데, 모두 다 한국의 지분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플립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플립한 이유에 대해서도 내가 설명할 텐데, 처음엔 이렇게 플립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견은 없었다. 그냥 필요하니까 하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 가끔은 싱가폴 법인 – 플립 한다고 하면 일단 무조건 말린다. 꼭 미국 법인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면, 그냥 웬만하면 한국 법인으로 계속 가라고 하는데, 난 아직 초기 스타트업이 미국 법인으로 플립해야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들어보진 못했다.

일단 우리 투자사가 미국 법인으로 플립했던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해외 투자자에게 투자받기 위해서였다.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 회사 투자 경험이 없는 해외 VC들은 본인들이 한국의 자본 법을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국제 표준이 된 미국의 투자 계약서를 기반으로 미국의 법인에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 투자 금액이 많다면면 해외에서 투자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고려해 봐야 하겠지만, 요샌 플립을 요구하는 해외 투자자는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 자본 법은 다르긴 하지만, 한국이 미국의 계약 문구나 법을 많이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한국 법인이나 미국 법인이나 크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 그냥 사업 잘 하면, 한국 법인에도 외국 자본이 많이 몰리는데, 대부분의 한국 유니콘 회사들에 외국 주주가 있다는 게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아직도 미국 투자자들에게 투자 받기 위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한다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와 맥락은 같은데, 구체적으로 Y Combinator에 선발되면서 플립을 한 경우다. 몇 년 전만 해도 YC는 미국 법인이 아니면 투자하지 않았다. 외국 스타트업도 선발은 했지만, YC 배치에 합류하고 투자 받기 위해선 미국 법인이 필수였다. 최근엔 이 제도가 바뀌어서 일부 해외 법인에도 투자하고 있지만, 한국 법인은 포함되지 않는다. 싱가폴 법인은 YC의 투자가 가능해서, 요새 YC 선발된 한국 회사들은 미국 법인 또는 싱가폴 법인으로 플립하는걸 봤다봤다. 난 개인적으로 YC가 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전 세계 스타트업을 선발할 거면, 그냥 전 세계 법인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굳이 비싸고, 시간 들고, 돈 드는 플립을 외국계 창업가들에게 강요하는 건 서로에게 불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법인을 미국 법인으로 플립하는 건 너무 복잡하고 귀찮은 작업이다. 일단 한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 작업을 해야 하고, 동시에 미국의 변호사와 회계사와도 일을 해야 한다. 일단, 여기에서만 비용이 너무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계약서와 서류가 만들어 지는데, 이미 한국에서 투자받은 회사라면, 기존 주주들도 미국의 새 법인의 주주가 돼야 하므로 서명해야 하는 계약서가 상당히 많아진다. 미국 법인이니 당연히 모든 서류도 영문이고, 이 영문 계약서를 한국의 투자자들이 검토하는데 또 비용이 발생한다. 또한, 회사가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업가치에 도달했고,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면, 플립하면서 모든 주주들에게 세금이 발생할 수도 있고, 이 세금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또 변호사와 회계사들의 자문이 필요하다.

이런 귀찮고 비싼 과정을 통해서 미국 법인으로 플립을 했는데, 몇 년 후에 다시 한국 법인으로 재플립/역플립(=re-flip/back-flip) 하는 경우도 우린 경험한 적이 있다. 후속 라운드에 투자한 한국 투자자들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플립도 그랬지만, 이 리플립은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웬만하면 플립하지 말라고 이렇게 내가 조언해도, 굳이 미국 법인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창업가들이 많다. 이분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 대한 내 생각도 간략하게 추가해 본다:
1/ 해외 투자 유치 – 한국 회사라도 사업만 잘하면 외국 VC들이 투자한다. 위에서 이미 이에 대해서 말했다.
2/ YC 또는 다른 외국계 액셀러레이터 선발 – 이건 창업가들이 판단하면 되는데, 굳이 이전 라운드보다 더 낮은 기업가치를 받아 가면서 YC 배치에 합류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요샌 이런 액셀러레이터를 거치지 않아도 웬만한 지식과 경험은 한국에서도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
3/ 미국 시장 공략 – 우리 사업이 한국보단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거라면, 그리고 우리의 고객 대부분이 미국에 있다면, 미국 법인이 훨씬 더 유리하다. 나는 이 논리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 논리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이제 시작하는 회사들이고, 플립을 해도 서류상 법인만 미국 법인이지, 대표를 포함한 모든 팀원들은 물리적으로 한국의 자회사에서 일하는 구조이다.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 미국 회사라면 미국에 대부분의 핵심 인력이 있어야 하고, 이들이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껍데기만 미국 법인이고, 모든 핵심 인력이 한국에서 일해서 두 개의 법인을 유지하는 건 불필요한 돈 낭비, 에너지 낭비이다. 이런 분들은 나중에 정말로 미국 시장 진출할 체력이 만들어지면, 그때 플립하는 걸 권장한다.

물론, 이 내용들은 오롯이 내 경험에서만 나온 것이다. 플립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고, 못 본 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게 있다면 댓글로 본인들의 생각도 공유해주면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계속 지는 싸움

얼마 전에 스트롱 같이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꽤 많은 투자를 하는 친한 몇 분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엔 우리가 하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각자 투자한 회사와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글로벌(=미국) 시장 진출 관련 대화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시장을 오랫동안 관찰한 투자자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에 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역시나 모두의 관점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흥미롭고 배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시도하지 말고, 일단 한국에서 잘해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서 내가 자주 하는 비교가 야구 선수 박찬호와 류현진 이야기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한 후 LA 다저스로 입단하면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한국에서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류현진 선수도 매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했는데, 박찬호 선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약 10년 동안 프로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최고의 투수가 됐고, 한국 시장을 제패한 후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박찬호 선수는 한국을 스킵하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류현진 선수는 국내 시장에서 1등을 먹은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 둘 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 사례를 스타트업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바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후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듯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하나의 성공 공식이란 없다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샌 내 생각이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나는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한국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서 돈을 확실히 번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류현진 선수의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상당히 많다. 창업하자마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서 product market fit을 이제 찾았고, 수치들이 나쁘지 않은데 훨씬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대표님들 모두를 적극적으로 말린다. 이제 시작하는 팀이나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팀이나, 모두 다 돈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수치가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들이고, 투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돈을 못 버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미국에서는 초기 몇 년 동안은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즉, 스스로 손실을 한 4배로 증가시키는 매우 멍청한 전략이다.(미국은 한국보다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이너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도 또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왜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무모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면, 절대로 이기는 회사를 만들지 못하고, 싸우는 싸움마다 무조건 지고, 결국 금방 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의 싸움을 이기고 – 즉,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라 – 그 이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대표의 쓸데없는 야망이나 욕심 때문에 계속 지는 싸움을 하지 않길 바란다.

포화된 시장은 없다

수년 동안 Guy Raz의 팟캐스트 ‘How I Built This(HIBT)’를 운동할 때, 그리고 이동할 때 듣고 있다. 전에 내가 이런 포스팅을 했는데, 이분 같이 팟캐스트 진행을 잘하는 사람을 나는 못 만났다. 얼마나 잘하냐 하면, 내가 Guy의 톤, 그리고 질문 유형을 외워서, 누군가를 인터뷰하거나, 우리 포트폴리오 미팅에서 fireside chat을 할 때마다 비슷하게 또는 그대로 적용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Liquid Death의 창업자 Mike Cessario의 HIBT 팟캐스트를 들었는데, 역시 명 팟캐스트였다. 마케팅, 컨슈머 제품, D2C, 포화된 시장 등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Liquid Death는 세상에서 가장 경쟁이 심하고, 포화됐고, 공룡과 같은 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시장에서 7년 전에 창업해서 연 매출 1,000억 원 이상 하는 스타트업인데, 바로 물을 파는 회사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물처럼 플라스틱이나 유리병이 아닌 캔에 담아서 팔고,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마치 술이나 에너지 드링크와 같은 디자인과 패키징을 사용한다.

이런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냐 하면, 이 창업자가 어느 날 야외 음악 축제에 갔었는데, 이 축제를 스폰서하는 에너지 드링크 회사 Monster Energy가 현란하고 화려한 몬스터 에너지 드링크 캔에 물을 넣어서 제공하는 걸 보고 번뜩이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단순한 물이지만, 맥주나 에너지음료와 같은 캔에 넣어서 판매하면, 이걸 마시는 사람들은 마치 술을 먹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아주 재미없고 심심한 물도 재미있고 쿨 해 질 수있다는 걸 그 축제에서 보고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Liquid Death는 창업 첫날부터 본인들은 물을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라 아주 기발한 마케팅으로 시장을 건강하게 자극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회사라고 포지셔닝을 했는데, 이 전략이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물이 아니라서 물이 알프스 산맥에서 떠왔던, 미국의 호수에서 떠왔던,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마이크 사장에게 중요한 건 브랜드였고, Liquid Death라는 브랜드가 시장에서 어떤 이미지를 만들 수 있고, 캔을 따서 이 물을 마실 때 어떤 느낌을 소비자들이 받을지가 이들이 스타트업으로써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였다.

우리도 D2C와 소비재 스타트업에 상당히 많이 투자했다. 요샌 이 분야를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피하지만, 우린 꾸준하게 검토하고 투자하고 있다. 이 시장을 단순히 대규모 자본이 없으면 마케팅도 못하고, 대량 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만들지 못해서 성공할 수 없다는 시각으로 보면, 이제 시작하는 스타트업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못한다. 이미 웬만한 소비재 시장은 돈이 너무나 많은 대기업들이 꽉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장을 재치 있고 창의적인 브랜딩이 이기는 시장이라고 보면 나는 스타트업이 충분히 대기업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Liquid Death도 물의 성분, 생산, 보틀링, 공급망 등으로 대기업과 겨루는 건 처음부터 의미가 없다고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미국의 물 시장을 꽉 잡고 있는 대기업들이 훨씬 더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코카콜라가 150년 걸려서 만든 거대한 시장을 아주 재치 있고 튀는 브랜딩으로 5년 만에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로 5년 만에 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

이 팟캐스트의 핵심 주제는 포화된 시장이다. 실은, 전 세계에서 가장 포화된 시장 중 하나가 바로 물 시장인데, 이 시장에서 Liquid Death는 엄청난 브랜드를 만들면서 성장했다.

포화된 시장이라는 건 없다. 단지 포화된 우리의 편견, 의심, 그리고 두려움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