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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과 제거의 중요성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에 대해서는 많은 책과 글이 시중에 널려있어서, 이걸 읽어본 분들이면 누구나 다 버핏의 대략적인 성향과 철학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이 블로그에서 여러 번 오마하의 현자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그런데 얼마 전에 버핏이 어떻게 우선순위를 설정하는지에 대한 을 읽었는데, 이게 매우 현실적이고, 바로 실행 가능한 것 같아서 여기 간략하게 공유해본다.

버핏의 전용기를 10년 동안 조종했던 파일럿 Mike Flint에 의하면 버핏이 직원들의 목표와 우선순위 설정하는 걸 도와줄 때 다음과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일단 버핏은 플린트에게 그가 직장생활을 통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25개를 나열해보라고 했다. 25개면 꽤 많아서, 플린트는 시간을 들여 생각하면서 25개를 써서 리스트를 만들었다.

25개 리스트가 완성되자, 버핏은 플린트에게 25개의 목표를 다시 한번 검토하고, 이 중 가장 중요한 목표 5개만 체크하라고 했다. 이 또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플린트는 곰곰이 고민하다가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5가지 목표를 선택했다. 가장 중요한 5가지 목표인 A 리스트와 체크하지 않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20가지 목표인 B 리스트, 이렇게 두 개의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플린트는 이 정도만 해도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의 보스인 버핏에게 A 리스트의 목표 달성을 당장 행동으로 옮기겠다고 했다. 그때 버핏이 그에게 물어봤다, “그럼 다른 20개의 목표는? B 리스트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상위 5개가 가장 중요하니, 이 5개에 집중할 겁니다. 나머지 20개는 우선순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중요한 편이니, 시간 날 때마다 이 20개 목표도 신경을 써야겠죠.”라고 플린트가 답하니, 버핏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요 마이크. 그렇게 하면 평생 발전이 없을 거예요. 당신이 20개의 목표에 체크하지 않아서, 이 목표가 B 리스트가 된 그 순간에, 이 20개의 목표는 이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되어 버렸어요. 당신의 5개의 목표 달성을 하기 전에는 이 20개 목표에는 신경도 쓰지 마세요.”

이걸 버핏은 ‘제거의 힘(Power of Elimination)’라고 한다고 한다. 최근에 일본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미니멀리즘 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면, 삶 자체가 더 쉬워지고 생산적이 된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조금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정할 때 버핏이 강조하는 건, 내 인생 목표의 B 리스트에 신경 쓰고 시간을 투자하는 걸 정당화 하는 건 쉽지만 – 어쨌든 내가 어느 정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 이렇게 하다 보면, 진짜로 중요한 A 리스트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항상 부족하므로, 절대로 인생에서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결국, 발전과 성공의 길에서 우리를 지속해서 탈선시키는 건 바로 우리가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다.

플린트의 6위 ~ 25위 목표는 그가 애정을 갖고 있는 일들이다. 실은, 그에게는 이 20개의 목표가 있는 B 리스트도 중요하긴 하다. 그래서 여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도, 죄책감을 느끼거나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탑 5개 목표의 A 리스트와 비교해보면, B 리스트는 오히려 피해야 하는, 집중을 방해하는 독소요소들이다. B 리스트에 시간을 보내다 보면, 5개의 중요한 목표를 절대로 끝내지 못하고, 시작만 하고 대충 끄적끄적 된, 절반도 완성하지 못한 20가지 프로젝트가 항상 To-do list에 남아있을 것이다.

굉장히 맘에 드는 우선순위 설정 방법, 그리고 시간을 활용하는 철학이다. 중요한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99개의 임무를 시작만 하는 것보단 훨씬 더 생산적이다.

냉정하게 제거하고, 가차 없이 집중해라. 어쨌든 세상에서 시간을 가장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한다고 알려진 사람이 하는 말이니, 한 번 정도는 귀담아들어도 될 듯.

관리가 필요 없는 회사

작년 한 해 동안 스트롱에서 꽤 많은 회사에 투자했다. 어떤 회사 투자소식은 미디어에 보도가 됐지만, 대부분의 투자 관련 소식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를 비롯해서, 어떤 VC가 몇 건의 투자를 했는지는 – 그리고, 투자를 많이 하냐, 적게 하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공식적으로 관리되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2020년도에 한국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한 VC 중 하나가 우리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8년 넘게 지금까지 우린 160개 이상의 회사에 투자했다. 5명도 안 되는 인력으로 투자하고 관리하기엔 너무 많은 숫자인데, 이게 실은 우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도 펀드레이징할때 잠재 출자자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그 많은 회사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냐는 질문이고, 다른 동료 VC들도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많이 투자하면 관리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한다.

이 질문에 나는 주로 두 가지 답변을 드린다. 아마 전에도 내가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일단 나는 우리 투자사 중 힘든 회사와 창업가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미 잘 하는 회사는 내가 굳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도 잘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리가 필요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관리는 필요가 없다. 나보다 더 사업을 오래 한 창업가들이, 자기 비즈니스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는데, 내가 굳이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회사의 비즈니스에 방해가 되는 간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회사는, 내가 많이 도와주면, 어쩌면 잘할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 또는,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믿기 때문에 – 이런 분들과 적극적으로 같이 고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아무리 같이 고민하고 같이 옆에서 뛰어주어도 힘든 회사들이 잘 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많이 경험했다.

관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답변은, 바로 우린 관리가 별로 필요 없는 회사와 창업가에게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는 것이다. 우린 투자하기 전에 이 창업가는 어떤 분인지 파악하고 배우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 우리의 실사는 회사의 서류나 재무제표를 보는 게 아니라, 창업가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배움과 확신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확신이 생겨서 투자하면, 이분들은 주로 관리라는 게 별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창업가들은 스스로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은, 시장의 변화, 자본의 변화, 경쟁의 변화 등과 같은 요인은 투자자들이 아무리 관리해도 관리가 안 된다. 이런 변화가 발생했을때 – 그리고 스타트업을 하다 보면, 이런 예상치 못한 변화는 매일 발생한다 –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대표와 경영진에 투자하는 게 우리가 보는 성공적인 투자이다. 그래서 나는 관리에 초점을 맞추는 투자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이분들은 본인들이 관리를 잘하면 회사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잘 될 수 있다고 어느 정도 믿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잘되고,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투자자가 관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관리에 너무 집중하는 투자자일수록, 회사가 잘 되면, “그 회사 우리가 키웠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큰데, 이 역시 내가 술자리나 모임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회사가 잘 안 되서 망했을 때도 똑같이 “그 회사 우리 때문에 망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분들에겐 망하는 건 항상 창업가와 회사의 잘못이다. 잘되면 우리가 키웠고, 안되면 쟤네가 문제 있다는 식의 생각은 그 누구한테도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되도록 우린 관리가 필요 없거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언제 팔아야 할까?

얼마 전에 USV Fred Wilson의 트위터에서 한참 논쟁이 됐던 주제가 투자자들이 투자사 주식을 언제 매도하냐이다. 내 생각으로는 프레드는 비트코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트위터 이벤트를 보면 코인 뿐만 아니라 일반 스타트업 지분에 대한 좋은 이야기와 논쟁이 많았다.

우리는 역사가 오래되지 않아서, 엑싯할 기회가 아직 많진 않지만, 이런 기회가 간혹 발생하면, 우리도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이 트위터 이벤트 내용과 비슷한 이야기를 내부적으로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보다 투자를 더 오래 했고, 더 많은 엑싯을 통해서 다양한 경험을 한 다른 글로벌 VC들의 의견을 자세히 읽어봤는데, 역시 주식을 팔아야 하는 시점에 대한 정답은 없고, 이 또한 회사의 전략과 철학, 타이밍, 그리고 그 시점의 여러 가지 내, 외부 요인에 의해서 그때그때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 트윗의 주인공 프레드 윌슨의 철학은, 투자한 회사(또는 비트코인)의 가치가 올라갔고, 이 주식을 팔 기회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원금은 회수한다는 원칙이다. 본전은 일단 뽑고, 나머지 수익을 계속 보유했을 때 최적의 결과를 경험했다는 게 그의 논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최적의 결과는 수익을 극대화했다는 게 아니다. 일단 본전을 뽑았으니, 원금을 날리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펀드의 출자자들에게도 미안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덜 받고, 그래서 잠도 더 잘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나중에 이 회사가 대박 나면, 그때 왜 팔았을까 후회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후회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낮은 결과에 너무 의존하다가 원금까지 모두 날리게 되면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재미있고,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들은 대부분 엑싯에 대해서는 100% 틀리거나(=돈을 다 날림), 또는 100% 맞는(=대박) 전략을 취해야지만 홈런을 쳐서 소수의 엑싯으로 전체 펀드를 돌려줄 수 있다는 입장이고, 너무 일찍 엑싯을 해서 후회를 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투자자도 있다. 좋은 회사라면 절대로 팔지 말고, 끝까지 갖고 있으면 항상 최고의 수익이 발생한다는 철학을 가진 투자자도 있다.

나도 이런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이 쌓이지 않을까 싶지만, 정답은 없는 것 같다. 펀드의 규모, 펀드가 투자하는 회사의 종류, 펀드의 만기일, VC들의 성향, 회사의 철학 등에 따라서 이런 엑싯 전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펀드에 출자하는 LP, 이 돈을 굴리는 우리 같은 VC, 그리고 우리가 투자하는 포트폴리오 회사 경영진들의 엑싯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일치할 때 제일 좋은 결과가 발생한다는 점인 것 같다.

베이브 루스 vs. 스즈키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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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Nchuccida / 크라우드픽

조지 허먼 루스 주니어는 베이브 루스(Babe Ruth)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메이저 리그 야구의 전설적인 홈런왕이었다. 베이브 루스는 메이저 리그에서 22시즌을 뛰며 통산 714개의 홈런을 쳤다.
우리한테 조금 더 친숙한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 선수는 현역때 별명이 ‘안타제조기’ 였는데, 일본과 미국에서 친 안타는 총 4,367개이다. 이걸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 의견이 다르지만, 일단 숫자로만 따지면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안타를 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안타를 잘 치는 선수라서 홈런은 베이브 루스보단 한참 떨어지는 118개를 쳤다.

나는 야구 보는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록을 다 외우면서 특정 구단과 선수를 응원하는 그런 열성 팬은 아닌데, 오늘 이렇게 베이브 루스랑 이치로 선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야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요새 내가 계속 생각하는 것과 야구 선수들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몇 자 적어보고 싶어서이다.

누군가 스트롱은 어떤 스타일, 전략의 투자를 하냐고 물어보면, 이 질문의 의도에 따라서 답은 다양해진다. 이 업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한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우린 이치로의 안타 전략 보단 베이브 루스의 홈런 전략에 더 가까운 스타일이라고 한다. 실은 투자를 시작할 때부터 존이랑 나랑 스트롱은 무조건 홈런을 치는 전략으로 투자하자고 합의를 본 건 아니다. 실은 그땐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좋은 tech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서 펀드를 만들어서 시작했고, 다른걸 떠나서 우린 창업가 그 사람 자체에 투자하는 게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투자라는 생각을 해서, 가급적이면 좋은 창업가에게 아주 초기에 소액을 투자하는 초기 투자를 했다(물론, 그렇게 했던 또 다른 이유는 돈 모으기가 힘들어서, 펀드가 작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투자를 시작했고, 막 크진 않지만, 펀드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우리도 투자 전략이라는 게 조금씩 만들어져 갔다. 전략이라고 하면 좀 거창하지만, 우리는 소액의 자금을, 초기 단계의 회사에, 그리고 비즈니스/시장/숫자보단 창업팀을 보고 투자하는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정확한 숫자를 세어보진 않았지만, 우리가 지난 8년 동안 투자한 150개가 넘는 회사 중 절반 이상의 회사에 스트롱이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기관투자를 했고, 심지어 어떤 회사는 우리 투자금으로 법인 설립을 할 정도로 우린 일찍 투자했다. 이 전략이 맞아떨어지면, 회사가 exit 할 때의 배수 자체가 어마어마하다. 워낙 일찍, 상대적으로 싸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exit이 많진 않았지만, 몇 개의 사례를 보면 모두 남들이 갸우뚱 할 때 우린 초기에 들어가서 회사가 잘 됐을 때 엄청 높은 배수의 위닝을 했다. 바로 위에서 말한 베이브 루스의 홈런 전략이다.

그런데 이렇게 투자해야 하고, 우린 너무 잘한다는 자랑을 하는 게 아니다. 실은 이렇게 투자하는 건 그만큼의 리스크가 동반된다. 베이브 루스가 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는데, 공을 치기 위해서는 무조건 배트를 휘둘러야 하고, 그는 이 말에 충실해서 홈런도 많이 쳤지만, 친 홈런의 두 배 이상인 1,300개 이상의 삼진 아웃을 당했다. 우리도 크게 다르진 않다. 홈런 exit이 하나 나오려면, 일단 exit이 가능한 회사가 많아야 한다. 그래서 그만큼 많은 회사에 투자하고 있는데, 현실은 이 중 많은 회사가 망한다. 그래도 계속 공을 제대로 보면서, 열심히, 힘껏 배트를 휘두르다 보면 언젠간 홈런을 칠 수 있고, 이렇게 믿고 계속 배트를 휘둘러야 한다. 투자를 보는 관점도, “여기 투자했다가 잘 못 되면 어떻게 하지”가 아니라 “여기 투자해서 잘 되면 엄청나겠는데”라는 쪽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이 베이브 루스 전략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니다. 규모가 더 큰 투자를 하는 분들은, 오히려 큰 홈런보단, 작은 안타를 더 많이 치는 게 회사의 전략과 맞다. 이건 회사와 파트너의 성향, 펀드의 규모, 투자 철학 등과 맞물리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 티끌 모아 태산 전략을 선택하면 이치로와 같은 안타 전략이 더 맞고, 크게 벌려고 하면 크게 휘둘러서 홈런을 치는 베이브 루스의 홈런 전략이 맞다.

수평적 vs. 수직적 마켓플레이스

1594372376716먹거리 관련 이커머스 하는 창업가들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이거 쿠팡이나 마켓컬리가 하면 우린 그냥 망하는 거 아닌가요?”이다. 당연히 쿠팡이나 마켓컬리가 할 수 있고, 돈도 더 많고 사람도 더 많기 때문에 이 두 회사가 맘먹고 뭔가 시작하면 상당히 무서운 상대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와 이 전문가의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수직적 마켓플레이스(vertical marketplace)를 시작하는 창업가들이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숨고와 같은 앱에도 이 동일한 카테고리가 있는데, 후발주자로서 경쟁할 수 있겠어요?”이고, 특정 분야에서 중고거래 서비스를 시작하는 창업가들이 많이 받는 질문은, “당근마켓같이 폭풍성장하고 있는 중고거래 서비스가 있는데, 이게 되겠어요? 당근마켓 들어가 보면 비슷한 게 이미 있는데요.”이다.

실은, 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고, 이제 갓 시작한 스타트업이 이미 product market fit을 찾았고, 이 fit을 더욱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자도 많이 받았고, 좋은 인재도 많이 채용한 쿠팡, 숨고, 당근마켓과 같은 회사를 이기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쉽지 않은 거와 못 하는 거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무리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시장의 강자가 있어도, 이들보다 더 잘 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숨고당근마켓은 전형적인 수평적 마켓플레이스다. 숨고는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공급자와 이들의 서비스를 필요로하는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웬만한 분야의 서비스를 모두 다 제공한다. 지금 숨고에 들어가 보면 각종 레슨, 홈/리빙, 이벤트, 비즈니스, 디자인/개발, 건강/미용, 알바 등과 같은 카테고리가 있는데, 결국 모든 분야에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수평적 마켓플레이스다. 당근마켓도 비슷하다. 지역기반이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사고팔 수 있다. 즉, 세상의 모든 제품을 공급자와 수요자가 중고거래할 수 있는 수평적 마켓플레이스다. 두 플랫폼 모두 수평적으로 모든 걸 다루기 때문에, 커버하는 분야가 광범위하고, 이렇게 광범위 하므로, 겹치는 분야에서 사업을 하면 이 글 초반에 언급했던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하는 것이다.

수평적 마켓플레이스는 모든 분야의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기 때문에, 볼륨의 싸움에서는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약점 또한 많은데, 대표적인 약점이 전문성의 부재이다. 즉, 너무 많은 분야에 있는, 너무 많은 사용자를 수용하다 보니, 각 분야의 특성을 고려한 마켓플레이스를 만들기보단, 한 번에 모든 산업/시장/공급자/수요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보편적인 마켓플레이스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즉, 수평적 마켓플레이스에 존재하는 모든 수직마켓에 하나의 통일된 공식을 적용하는 게 이들의 비즈니스이다. (내가 직접 해보진 않았지만)예를들면, 숨고에서 반려견 산책해 줄 사람을 구하면, 숨고의 일반 프로세스를 따라서, 펫시터들이 견적을 보내고, 내가 견적을 수용하면 둘이 날짜와 시간 등의 세부사항을 채팅으로 조율한 후에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숨고의 다른 카테고리를 사용해도 공급과 수요를 매칭하는 프로세스는 동일하다.

그런데, 펫시터만을 매칭해주는 도그메이트라는 수직적 마켓플레이스가 있다. 도그메이트를 사용해보면,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프로세스가 훨씬 더 정교하고 전문적이라는걸 알 수 있다. 개가 몇 살인지, 어떤 종인지, 대형견인지 소형견인지,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 다른 개들과 잘 어울리는지 등등 기본적으로 나한테 가족 같은 반려견을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맡길 때 최대한 사고가 안 나고, 서로의 경험이 유쾌할 수 있도록, 상당히 전문적으로 매칭 프로세스를 설계했다. 또한, 펫시터들이 반려견을 산책시키거나 돌봐주면서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반려일지까지 공유하게 하는 아주 세심한 프로세스가 플랫폼에 녹아 있다. 반려견돌봄이라는 특정 버티컬에서 요구되는 이런 중요한 전문성이 도그메이트라는 수직적 마켓플레이스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숨고와 같이 큰 수평적 마켓플레이스가 존재해도, 도그메이트와 같은 전문적인 수직적 마켓플레이스가 잘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당근마켓도 비슷하다. 당근마켓을 보면 중고명품을 사고파는 공급자와 수요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수천만 원짜리 명품시계를 사고파는 프로세스가, 1,000원 짜리 잡화 사고파는 프로세스랑 동일하다. 위의 숨고와 같이 모든 분야에 하나의 통일된 프로세스를 적용하는 수평적 마켓플레이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새 많이 생기고 있는 중고명품 앱들을 보면, 고가의 명품을 안심하고 사고팔 수 있게 최적의 프로세스와 사용자 경험을 제공해준다. 예를 들면, 직접 명품을 수거하거나, 진품 여부를 검증해주거나, 또는 위탁 판매해주거나 하는, 모든 걸 다 거래하는 수평적 마켓플레이스가 절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수직적 마켓만을 위한 플랫폼 경험을 제공한다.

시장 규모가 작은 수직적 마켓도 있겠지만, 여기서 언급한 반려동물 돌봄 또는 중고명품과 같은 시장은 어마어마하게 큰 시장이다. 그래서 수평적 마켓플레이스와 수직적 마켓플레이스 사이에 존재하는 균열을 – 그리고 수평적 마켓플레이스가 수평적으로 더 확장할수록 이 균열은 커지고, 균열이 클수록 기회는 커진다 – 잘 활용하면 좁지만 아주 깊은 시장에서 큰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다.

*완전공시: 숨고, 당근마켓, 도그메이트는 스트롱 투자사입니다.

<이미지 출처 = 크라우드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