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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바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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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지회장 / 크라우드픽

얼마 전에 페이스북 친구가 올린 이 기사를 읽고, 굉장히 많이 공감했다. 나는 요새 웬만하면 다 배달 시켜 먹지만, 기다리기 싫고 음식이 식는 게 싫으면, 가끔 집 근처 맥도날드나 버거킹에 직접 가서 음식을 사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터 카운터에서 주문이 안되고, 키오스크를 통해서만 주문하고 결제하는 시스템이 도입됐고, 이걸 직접 해보니까 햄버거 세트 하나 주문하는데 상당히 많은 에너지와 브레인파워를 집중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처음에는 그냥 익숙지 않아서 그렇겠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번 방문해서 여러 번 주문 키오스크를 사용해보고 느낀 점은, 매번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위의 기사의 어머님은 나보다는 고령자이신 것 같고, 나같이 첨단 기술이나 서비스를 매일 접하는 업무를 하는 분도 아닌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키오스크 사용법이 어렵고, 나도 빅맥세트 하나 주문하는데 가끔 몇 분이 걸릴 정도로 어렵다고 느끼는데, 나보다 나이 드시고 이런 시스템에 전혀 익숙지 않은 분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했지만, 키오스크 앞에서 20분 동안 헤매다가 먹고 싶은 햄버거도 주문 못하고, 그냥 끙끙거리면서 고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신 이 분의 이야기는 실은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우리 부모님도 얼마 전에 세상이 왜 이렇게 어려워졌냐는 말씀을 하시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늙으면 그냥 다 죽어야 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게 참 나한테 슬프게 다가왔다. 어쩌면 나의 미래를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실은 나도 지현이랑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기술이 발달하면서 생활이 편해지는 건 맞다. 이건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한국같이 소득수준이 높고 땅덩어리가 작은 나라에서 모바일 기술의 발달은 삶의 질을 혁명 수준으로 올려놨다. 손가락으로 뭐든지 주문할 수 있고, 수 십 분내로 집 앞으로 누군가 이 모든 걸 배달해주는 시스템이 이젠 너무 익숙하지만, 생각해보면 10년 전만 해도 이런 편리함은 없었다. 한국 시장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도 쿠팡 주식을 구매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마존도 하지 못 하는 ‘밤 12시 전에 주문하면 그 다음날 새벽에 배송’하는 이런 매력적인 인프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말 그대로 한국은 손가락 끝에 모든 게 있는, 기술적으로 진보한 편리한 나라로 발전하고 있는 건 틀림없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한 후배 한 명이 그동안 한국은 완전히 앱의 나라가 된 것 같다고 했는데, 완전 동의한다.

하지만,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지털 디바이드, 즉 정보격차 또한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전통적인 정보격차의 의미는 디지털 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이를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지식과 소득 자체가 증가하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발전하지 못해, 원래 존재하던 격차가 더 커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나는 앞으로의 디지털 격차는 디지털 기술 환경에 노출된 중산층 이상의 가정과 그렇지 못한 저소득층 가정 사이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 환경에 충분히 노출된 사람들 간에도 계속 심화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한국은 모든 게 너무 빨리 바뀌는 사회이고, 점진적 변화보단 급진적 변화를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디지털 변화도 급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조금만 이런 최신 트렌드에 관심을 덜 갖거나 소홀히 하면, 격차가 너무 커져서 영영 따라잡지 못 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이 존재한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고학력자이고 경제적 수준도 평균 이상이지만, 쿠팡도 힘들게 사용하시고, 인터넷 뱅킹도 못 하시고, 그리고 맥도날드에서 키오스크로 햄버거를 주문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다. 나도 힘들어하는데, 과연 내가 우리 부모님에게 키오스크 주문을 못 하는 건, 꼰대라서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많은 정치인이 전국의 식당에 이런 최첨단 비대면 키오스크를 설치하고 전국의 언택트화를 통해서 효율성을 제고하고, 소상공인들의 인건비를 절감하겠다는 공략을 발표하고 있다. 다 좋은데, 과연 누구를 위한 기술이고, 누구를 위한 효율성인지 다시 한번 묻고 있다. 그리고 과연 이들은 이런 키오스크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봤는지, 그래서 정말로 이게 그렇게 쉽고 편한 기술이라고 주장하는지도 궁금하다.

나도 더 나이를 먹으면, 미래에는 어떤 기술이 생길지 모르겠지만, 햄버거 하나 시키는데 20분 동안 남들 눈치 보면서 끙끙거리다가 주문도 못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욕적인 경험을 하고 싶진 않다. 누구를 위한 디지털 혁신이고, 누구를 위한 인터넷 강국인지, 우리 모두 한번 더 생각해보면 좋겠다.

문제를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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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ezps / 크라우드픽

빠르면 이번 주에 쿠팡이 티커 CPNG로 NYSE에 IPO를 한다. 아마도 구정 연휴 기간 동안 쿠팡의 상장 신청 소식을 듣고 많은 분들이 놀랐을 것이다. 우리도 쿠팡의 작은 주주이며, 미국에서 IPO를 계획하는 정도까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진행됐고, 그리고 목표 밸류에이션이 $50B인줄은 몰랐다. 나도 이 소식을 접한 후, 적잖게 놀랐고, 우리가 하는 업, 투자하는 회사, 그리고 우리랑 항상 교류하는 창업가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큰 시장을 석권하는 큰 회사를 만들려면, 남들과는 뭔가 다른 자세와 마인드가 필요하고, 미국 친구들이 말하는 go big or go home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쿠팡이 소위 말하는 문샷(moonshot)회사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겠지만, 이 밸류에이션은 한국 기업으로서는 충분히 문샷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에 도전해야 하고, 일반적으로 봤을 때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망하겠지만, 누군가 성공할 것이고, 성공하면 이건 쿠팡같이 엄청난 기업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내 철학은 모든 창업가들이 유니콘 회사를 만들 필요는 없다이지만, 그래도 뭔가 시작을 했다면, 이런 문샷에 도전하는 자세는 모두 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실패할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고, 그 배움은 그대로 다음 창업 또는 다음 도전에 큰 영양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샷 회사 또는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창업가들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누가 봐도 약간 미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 글의 영감을 준 쿠팡의 김범석 대표, 김범석 대표한테 영감을 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그리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엘론 머스크와 같은 기업인들은 회사가 성공하니까 대단한 비즈니스맨으로 존경받지만, 그 과정에서는 모두 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또라이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물론, 지금도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또 다른 공통점은 이런 분들은 특정 문제의 해결책(=솔루션) 보단 그 문제 자체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아니, 그냥 문제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특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에 더 많은 초점을 두면, 아무래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되는 것만 주로 하는데, 문제 자체를 사랑하면,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하고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나는 이 과정에서 문샷 비즈니스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는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실패가 동반된다. 이런 수많은 실패로부터 얻는 배움이 오랫동안 더해지면서 누군가는 문샷 성공을 만들고,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아주 진부한 말을 우린 너무 자주 하지만, 진부한 만큼 이 말에는 뼈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샷 창업가의 대명사인 엘론머스크는 멋지면서도 기능도 좋은 전기자동차 테슬라를 만들고 양산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기자동차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실패한 창업가들이 있다. 엘론과 인터뷰를 해보면, 본인과 대부분의 다른 전기자동차 창업가들은 어릴 적 봤던 영화 백투처퓨처에 등장한 드로리안 자동차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드로리안도 망했고, 다른 많은 전기자동차 창업가들도 망했지만, 이들의 실패 사례를 잘 연구했고, 실패로부터의 배움을 개선하고, 실패한 기술과 사례를 잘 취합해서 그는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걸 하려면, 해결책보단 문제를 사랑해라. 그리고 수많은 실패로부터 배움을 얻어라.

감시당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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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succo / Pixabay

얼마 전에 이런 기사를 읽었다. 어떤 커플이 한 인스타그램 광고를 봤는데, 이 광고의 사진과 배경이 너무나 낯익어서 자세히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얀 스트라입이 들어간 노란색 침구, 베이지색과 옅은 갈색의 커튼류가 본인들의 침실과 닮아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구글홈에 대해 찬양하는 을 내가 썼는데, 요샌 “오케이 구글” 말 하기 전에 약간 망설이긴 한다. 이렇게 기기를 깨운 후에 우리가 말하는 내용만 구글에서 프로세싱하고, 사용자의 음성을 인식하고, 음성인식 기술을 향상하는 데 사용한다고 구글은 강조하고 있지만, 꺼져있을 때도 우리가 하는 말을 모두 다 저장하고 있지 않겠냐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온갖 음모론들이 있는데, 그래도 왠지 구글홈미니는 작동하지 않고 있어도 우리 가족의 모든 대화를 엿듣고 있을 것 같은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아마존이나 구글의 특허를 보면, 음성인식 스피커를 통해서 얻은 고객의 정보를 기반으로 더 많은 제품을 추천하고, 한 가족의 프로필과 생활 패턴을 구성해서, 더 편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기기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걸 하기 위해서는 24시간 고객을 염탐해야하는데, 스피커나 카메라가 매우 적격인 기기이긴 하다.

실은 나는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조금은 관대한 편이다. 내 취향에 맞는 다양한 추천을 자동으로 받을 수 있다면, 개인 정보를 적절한 수준에서 공개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이 개인 정보를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회사가 다른 3자와 같이 공유할 때 커질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온 가족이 여름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게 녹음되고, 이게 해킹되면, 도둑이 이 가족이 집을 비운 동안 침입할 수 있고,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돈에 환장한 이 거대한 기업들이 제 3자에게 우리 정보를 팔지 않거나, 사고로 인해서 제 3자에게 유출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발생했다.

위에서 말한 기사를 읽으니, 이 걱정이 더욱더 현실화 되어 가고 있다. 실은, 기사의 주인공이 한 일주일 전에 현재 침실에 있는 같은 Kartell 캐비닛을 하나 더 구매하자는 이야기를 여자친구와 했다고 한다. 신기한 건, 온라인에서 이걸 검색했다면, 인스타그램에서 캐비닛 광고가 뜨는 게 이해 가지만, 위에서 말한 광고는 가구는 취급하지 않고 리넨만 판매하는 Bonsoirs라는 회사의 광고였다. 즉, 이 인스타그램 광고는 침대 시트 광고였지만, 사진에는 주인공의 침실에 있는 정확한 그 Kartell 캐비닛이 있는 본인의 침실과 너무나 비슷한 침실이 그대로 보였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다. 워낙 방대한 데이터가 있어서, 이 데이터를 기계적으로 조합하다 보면, 특정 사용자의 침실과 같은 침대보, 벽지, 바닥, 그리고 캐비닛으로 구성된 광고가 그 사용자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사를 읽은 후 부턴 조금 조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이 기사의 주인공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잘 때는 폰을 꺼놓거나, 아니면 침실이 아닌 다른 곳에 놔두나 보다.

기본기

Woman's hand opening a gray metallic refrigerator door

이미지 출처: Nassamluv / 크라우드픽

올해는 여행을 거의 못 갔는데, 10월에 여수에서 10일 정도를 보냈다.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에어비앤비 숙소 호스트의 몇 가지 원칙 중 하나가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은 되도록 구색만 갖추고 저렴한걸 갖춰놓는 것이다. 워낙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자기 집이 아니라서 그런지 막 사용하기 때문에, 굳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숙소도 웬만한 건 다 있지만, 대부분 저렴한 제품들이었다. 냉장고도 삼성이나 LG가 아닌, 대우 냉장고였고, 터치스크린이나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최신 제품이 아닌, 그냥 문짝만 달린, 냉장과 냉동이 되는 제품이었다.

그런데 이 냉장고를 내가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냉장이 너무너무 잘 됐기 때문이다. 음료수나 맥주를 이렇게 시원하게 보관하는 냉장고를 최근에 접한 적이 없었다. 우리 집 냉장고는 5년 전에 구매한 건데, 당시에는 최신식 LG 냉장고였다. 아직도 내가 다 사용할 줄 모르는 다양한 기능이 있고, 얼음기와 정수기가 외부로 나와 있고, 터치스크린으로 많은걸 조절할 수 있는, 냉장고 문 3개, 냉동고 문 2개의 아주 어마무시한 스마트 가전이다. LG 전자 매장에서 샀는데, 그때 판매원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이 기능 중 내가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게 거의 없지만, 어쨌든 전자제품도 진화하고 있고,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어쩌면 냉장고와 의미 있는 대화를 하고, 냉장고가 나한테 추천해주는 음료와 음식을 먹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잠깐 했다.

이렇게 비싼 첨단 제품인데, 문제는 냉장고의 가장 기본인 냉장이 아쉽다는 점이다. 온도를 조절해도 음료수나 맥주를 먹으면 내가 원하는 그 시원한 느낌보다 항상 부족한데, 문짝을 너무 많이 만들어서 어딘가에 틈이 있어서 냉기가 조금씩 세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짝에 달린 터치스크린 오류가 가끔 나서 AS 센터에 문의해보니, 그건 문짝 자체를 새로 교환을 해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는데, 좀 황당하긴 했다.

우리 집 세탁기도 비슷하다. 세탁기 또한 5년 전 최신 LG 전자 제품이다. 실은 나는 세탁을 잘 안 하지만, 너무 많은, 필요 이상의 빨래모드, 사이클, 기능이 있다. 그런데 세탁 품질이나 결과물을 보면 그냥 20년 전에 미국 아파트에 있던, 아무런 기능도 없고 그냥 빨래만 되는 동전 세탁기랑 비슷한 것 같다. 실은 이런 다양한 기능을 잘 활용하면 편리하긴 하지만, 냉장고의 기본은 냉장이고, 세탁기의 기본은 세탁이다. 이 기본적인 기능이 잘 돼야지만, “스마트”나 “IoT”와 같은 화려한 기능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샌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가 검토하는 회사도 이런 경우가 가끔 있다. 본업을 그 누구보다 더 잘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 후에, 다른 기능이나 다른 분야로 진출하는 게 더 자연스럽고 맞다고 생각하는데,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기보단, 그 외의 부수적인 부분과 포장에 더 신경을 쓰는 창업가들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제품, 서비스, 음식, 운동 등, 일단, 이 기본기에 충실한 게 좋다. 기본기가 탄탄해야지만, 그 위에 다른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프라이머 18기 미팅

얼마 전에 내가 벤처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국내 1호 악셀러레이터 프라이머 18기 선발 대면 인터뷰를 다 마쳤다. 서류지원 이후 50개+ 회사를 후보로 뽑았고, 이 회사들을 3주 동안 1시간씩 대면 미팅을 했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굉장히 힘들다. 주중에는 나도 일이 많아서 대부분 주말을 이용해서 미팅했는데, 다시 한번 주말에 시간 내주셔서 나랑 미팅한 창업가분들에게 이 포스팅을 빌려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달하고 싶다.

빽빽하게 앞뒤로 잡힌 미팅으로 도배가 된 토/일 캘린더를 보면 실은 스트레스 엄청 쌓이고 한숨까지 나오는데, 이게 또 막상 회사들을 만나보면 오히려 에너지가 충만해져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이번에도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서,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었고, 너무나 뻔한 아이디어지만 시장의 다른 플레이어보다 훨씬 더 잘 하는 창업가들도 많았다. 전형적인 엄친아 창업가, 해외 유명 대학 출신 창업가, 현재 대기업 소속인 스텔스 창업가 등, 다양했다.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분은 부모님 빚을 갚기 위해서 길거리에서 시작한 창업가, 그리고 무명 연습생 생활을 오랫동안 한 창업가였다. 프라이머 선발과는 무관하게 모두 모두 파이팅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젊은이들이 한국에 너무 많고, 이런 친구들 때문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반면에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열심히 사는 젊은 창업가들도 많다는 걸 이번에도 나는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스트롱도 워낙 초기에 투자하지만, 프라이머는 우리보다 더 앞 단계에 투자하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명의 파운더들을 짧은 기간 안에 만나보면 요샌 어떤 서비스와 제품이 시장에서 유행하고 있고, 창업가들은 어떤 트렌드에 민감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MZ 세대는 요새 뭐하고 있는지, 즉 이 시장에 대한 맥을 어느 정도 짚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프라이머 기수를 진행할 때마다 느끼는 점은, 한국의 창업 생태계는 매우 활발하고 앞으로 더 폭발적으로 성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실은, 여러 가지 매크로 지표를 보면, 앞으로 한국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지만, 그래도 유일한 희망이 스타트업 생태계이며, 나도 여기서 일하고 있는 일원인 만큼, 이 분야만이라도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항상 간절하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초기 창업가들을 많이 만날수록 마음의 위안이 된다.

대부분 간절하게 프라이머 투자를 받고 싶어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 선발되지 못한다. 내가 이 분들한테 항상 강조하는 건, 프라이머 투자가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자기만의 사업을 하라고 한다. 이 창업가들이 그 좋은 학교 나와서, 그 좋은 직장 다니다가, 이 어려운 길을 가는 이유가 프라이머 투자 받기 위한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고, 더 큰 의지가 있을 것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힘든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고, 주변에 잡음도 많이 들릴 것이다. 이게 너무 많이 쌓이다 보면, 내가 왜 이 사업을 시작했는지,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한 박자 쉬면서, 항상 이 초심을 생각해보면 좋겠다. 결국, 사업 자체가 좋아서 하는 거지, 투자를 받고, 어떤 투자자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이 지저분하고 힘든길을 가는 건 아니지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