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글로벌 벤처 시장 관련 자료를 보면, 시장이 바닥을 쳤고 서서히 반등하는 트렌드가 보이지만, 막상 내가 시장에서 느끼고 있는 건 오히려 이 반대이다. 바닥은커녕 아직도 내려갈 공간이 너무 많아서 2024년 하반기에는 경기가 좀 좋아지지 않겠냐는 개인적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다. 그래서 글로벌 벤처 시장 수치를 조금 자세히 보니까, 전체적인 시장이 리바운드하기보단, 특정 섹터와 회사에 일시적으로 돈이 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특정 섹터가 바로 AI이다.

다른 섹터의 스타트업은 정말 어렵게 펀딩하고 있고, 대부분 펀딩을 못 받고 있는데, AI 분야의 회사는 내가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에 큰 투자를 받고 있고, 이런 트렌드가 전반적인 벤처 시장의 수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다. 테크 분야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 큰 파도를 잘 타면 엄청난 회사를 만들 수 있는데, 1960년 대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왔던 파도들을 보면 반도체, PC, 인터넷, 소셜, 모바일 등이 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파도를 잘 탔던 창업가들과 스타트업들은 이제 어마어마한 기업들이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AI가 이 새로운 파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걸 부인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파도가 블록체인이나 크립토라고 믿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틀린 것 같고, 오히려 나도 AI가 앞으로 10년 동안 엄청난 기회를 만들고 이 기회를 잘 포착한 창업가들은 거대한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요새 만나는 AI 관련 스타트업을 보면, 이런 큰 기회의 파도에 몸을 싣고 과감한 사업을 하기보단, 그냥 AI 분야에 돈이 많이 집중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AI라는 키워드를 잘 활용해서 투자 받아보겠다는 회사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나는 AI 전문가는 아니라서 이 분야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장을 3개의 큰 그룹으로 보고 있다.

가장 바닥에서 인공지능의 초석을 깔고 있는 기업들은 칩을 만드는 회사들이다. GPU의 대명사가 된 NVIDIA와 같은 회사가 대표적인데, 이들이 만든 칩이 없으면 AI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학습이 불가능해진다. 이 기업들은 AI 세상을 위한 배관을 만들고 깔아주는 회사들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매우 어려운 기술과 사업이기도 하다. 대규모 투자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AI를 위한 GPU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에서도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몇 개 있는데, 잘 되길 바란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들이 계속 개발되고 출시되고 있다.

이 칩들 위에 있는 회사들이 AI를 위한 언어모델(LM: Language Model)을 만들고 있는 곳들이다. ChatGPT를 만든 OpenAI가 LLM의 대명사가 됐는데, 구글, 네이버, 카카오, 그리고 중국의 대형 스타트업 등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과 큰 스타트업들도 이 분야에서 맹활약 중이다. 이런 언어 모델이 있어야지만 인공지능이 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언어모델을 만들고 학습시키는 작업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작업 또한 돈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고, 데이터와 엔지니어링 전문가들이 대거 동원되어야 하므로 작은 스타트업이 하기엔 쉽지 않다. 더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을 통해, 사람의 뇌와 더 비슷한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언어모델을 광범위하고 깊게 만들기 위한 전쟁을 이 분야의 회사들은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윗단에는 다른 회사들이 만들어 놓은 언어모델을 활용해서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consumer application을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있다. 굉장히 많다. 아니, 불필요하게 너무 많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AI 스타트업은 여기에 속한다. 실은, 일반 소비자들은 칩이니 언어모델이니,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원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AI의 도움을 받는 거라서, 우린 이 분야에 큰 기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다른 회사들이 만든 모델과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껍데기만 만들어 놓고, 이게 대단한 AI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홍보하는 창업가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게 요새 내가 느끼는 AI 창업가 현황이다. 물론, 이렇게 회사를 포장하고, 공부 좀 많이 한 분들을 회사에 영입하면 그나마 다른 분야의 회사보단 투자는 수월하게 받는 것 같다.

B2C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과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AI 레이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요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회사들은 이 반대의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 일단 AI라는 매력적인 주제로 투자를 받은 후에, 그다음에 제대로 된 사업에 대해서 생각해도 된다는 창업가들이 너무 많은데, 어쩌면 이 사이클이 끝난 후에 남아 있는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