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ing

90% 이기기

며칠 전에 시간과 복리에 대한 글을 썼는데, 오늘 포스팅도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다. 다만, 시간과 복리의 힘은 스타트업이나 사업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 인생 전반에 해당된다는 내용이다.

작년에 한 골프장에서 앞 팀과 몇 번 겹친 홀이 있었는데, 그 팀에는 공을 굉장히 잘 치는 분이 있었다. 앞 팀의 다른 분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70대를 치는 싱글플레이어인데, 어릴 적부터 골프를 쳤던 분이라서 몸도 유연하고 스윙이 너무 좋아서 다른 동료분들은 절대로 이분을 이길 수 없고, 비슷하게라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는 농담을 계속했었다.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이든, 공부든, 일이든, 내 경험에 의하면, 꾸준하게 노력하면 그 어떤 분야라도 나머지 90% 보단 잘 하고, 이길 수 있다. 나머지는 꾸준함과 노력만으로는 이기는 건 힘들다. 어떤 분야든 상위 5%에는 타고난 재능과 DNA를 소유하고 있는, 흔히 말하는 천재와 타고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을 일반인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90%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쉽진 않지만 꾸준함과 엄격한 자기 통제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에 시간과 복리가 적용된다면 그 어떤 분야라도 상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 위에서 말 한 골퍼분들에게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된다. 잘 치는 분이 타이거 우즈와 같은 타고난 천재 골퍼가 아니라면 – 그리고 내가 봤는데, 천재 골퍼는 아니었다 – 누구나 다 꾸준히 연습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 운동량과 근육량을 늘리고, 정신력을 훈련하면 몇 년 안에 이분을 이길 수 있다. 대부분이 그렇게 못 하면서 남의 뛰어남과 자신의 약함을 탓하는 이유는 바로 엄격한 자기 통제와 규칙적인 꾸준함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를 보면 각 분야의 고수들이 소개되고, 이들이 어떻게 이런 달인이 됐는지 이야기해주는데, 이 글에서 내가 말한 내용이 모두 그대로 TV 프로에 나온다. 이 프로의 전편을 다 보진 못했지만, 내가 봤던 분들은 그 누구도 타고난 천재는 아니었다. 대부분 그냥 우연히 일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까 관심이 생겨서, 꾸준히, 열심히, 철저하게 자기를 통제하면서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그 분야의 90%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달인이 된 것이다. 하루, 하루를 보면 이들도 실력이 향상되는 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간과 복리가 가미돼서 몇 년 단위로 보면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그 분야의 고수가 된 것이다.

뭔가를 시작하고 싶고, 이 분야에서 잘하고 싶은데, 워낙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나는 그냥 하라고 권장하고 싶다. 꾸준함, 엄격한 자기 통제, 시간, 그리고 복리만 필요할 뿐이다. 몇 년 정도 하면 이 분야 상위 10%의 전문가가 될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상위 5%를 이기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능과 DNA, 그리고 운이 필요하지만, 그 분야의 90%를 이길 수 있다면, 이 정도만 해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

시간과 복리

같은 사업을 5년 이상 하고 있는 창업가 중, 아직도 product market fit을 제대로 못 찾았거나, 아니면 핏은 찾았지만, 성장이 너무 더디면, 어느 순간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스스로 물어보는 순간이 올 것이다. 스타트업의 생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이런 창업가들에게 5년밖에 안 했는데 너무 빨리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냐면서 그냥 계속하라고 하는데, 이런 분들은 초기 스타트업에서의 5년이 얼마나 처참한지 잘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직접 해보지 않은 분들은 모르는데, 스타트업은 정말 힘들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도 이런 상황에 놓인 분들이 요새 꽤 많다. 야심 차게 시작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돈은 항상 쪼들리고, 제품 출시에 걸리는 시간은 항상 더 오래 걸리고(어떤 팀은 출시도 아직 못하고 있다), 사람 관리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더 어렵다. 말만 대표이사지, 회사의 잡일을 도맡아서 하는 사람이고, 머리로 일하는 줄 알았는데, 초기 몇 년 동안은 머리보단 몸을 더 많이 써서, 퇴근하면 하루 종일 막노동한 것과 같이 온몸이 녹초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매우 많다.

그래도 이들은 회사의 주인이라서 긍정의 힘으로 버티는 걸 자주 봤지만, 오랫동안 큰 성장이나 성과 없이 일하는 직원분들에게 이 상황은 훨씬 더 스트레스풀할 것이다. 뭔가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생각하고 합류했는데, 힘들기만 하고 그만큼의 보람이 없다면 우리 회사가 정말로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심각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여기에 불을 더 지르는 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다니는 스타트업은 투자도 잘 받고, 고속 성장해서, 나만 발전이 없고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런 직원분들이 대표이사에게 계속 불안, 불만과 회의감을 표현하면 대표이사도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방황하는, 길을 잃는 순간이다.

요새 이런 고민을 하는 창업가와 대표들을 나는 많이 만난다. 몇 년 동안 스타트업을 하고 있는데 – 이 글에서는 그냥 “5년”을 기준이라고 했는데, 2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이 될 수도 있다 – 이미 어느 정도의 투자를 받았지만, 아직도 프로덕트 마켓 핏을 못 찾았다면, 이분들에겐 아마도 방향을 잘 못 잡고 있는 거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하지만, 핏을 어느 정도 찾아서 매출도 꾸준히 발생하고 있고 시장에서의 브랜딩도 어느 정도 되어 가고 있지만, 폭발적인 성장 곡선을 수년 동안 만들지 못해서 고민하고 있는 분들에겐 나는 시간과 복리의 힘을 믿어보라고 조언한다.

그냥 단순한 기능 몇 가지 만들어서, 운 좋게 돈 좀 벌고 빠질 계획으로 창업했다면 모르겠지만, 시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서 사업을 해보기 위해서 창업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는 걸 처음부터 인정하고, 하는 일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때마다 이 사실을 스스로 각인시켜야 한다. 스타트업에서는 completing이라는 말보단 building과 shipping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말 그대로 한 번 만들어 놓고 완성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출시하고, 또 출시하고, 그리고 계속 만들고 또 만들기를 반복해야 하는,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을 했고, 뭔가 길을 찾았지만, 성장이 더디다면, 무조건 시간의 힘을 믿어야 한다.

시간의 힘을 믿고 있다면, 복리의 힘 또한 믿어야 한다. 한 번에 대박 나는 건 이 세상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동안의 출시, 노력, 운, 우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융합된 게 차곡차곡, 아주 느리게 쌓이고, 또 쌓이다가, 소위 말하는 임계질량(=critical mass)에 도달하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이게 복리 이자랑 동일한 원리라고 생각한다.

무에서 시작했는데 복리가 쌓여서 폭발하기 위해선 무조건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으면 복리의 원리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가 있다면, 신을 믿어야 한다. 창업을 했다면 시간의 힘을 믿고,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헌신

작년 연말에 오랜만에 미국에 잠깐 다녀왔다. 장기 비행은 항상 지루하고 힘들어서 책도 보고, 잠도 자고, 영화도 좀 봤는데, ‘라멘덕후(Ramen Heads)’라는 음식 다큐멘터리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이 영상을 보면서 느꼈던 점을 나열해 보고 싶다.

일단 이 다큐멘터리는 2011년 작품인 ‘스시 장인: 지로의 꿈’과 비슷한 점들이 많은데, 안 보신 분들이라면 이 영상도 강추한다. 라멘덕후는 2017년 작품인데, 라멘의 본고장 일본에서 세계 최고의 라멘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과 이들의 음식에 대한 헌신, 애정, 집착과 광기에 대한 내용을 영상으로 잘 담고 있다. 실은 영상으로 너무 잘 담아서, 어떻게 보면 아주 흔하고 평범한 음식인 라멘에 대한 경외심까지 갖게 할 정도였다.

여기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다 설명하진 않겠다. 2013년부터 4년 연속 일본에서 ‘올해의 라멘 대상’을 수상한 치바현 마추도라는 곳의 ‘중화소바 토미타’ 식당의 라멘 장인 오사무 토미타씨의 라면에 대한 철학, 애정, 그리고 직업에 대한 헌신이 이 영상의 핵심이다. 이분은 본인이 식당을 운영하는 게 아니라 예술을 추구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고, 매일 먹어도 매일 맛있는 라멘을 만들어서 식당을 찾는 전 세계 손님들에게 단돈 8,000원에 세계 최고/최강의 식사 경험을 제공하는 마음으로 라멘을 만들고 있는 진정한 라멘덕후다.

특히 나에게 울림이 컸던 내용이 몇 개 있었다. 매일 최상의 라멘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점이 그중 하나였는데, 토미타씨는 매일 10시에 출근하고 항상 같은 길을 이용해서 출근한다. 그리고, 본인이 가게 문을 직접 열어야 하고, 일이 생겨서 문을 열지 못하면 그날 영업을 아예 안 한다고 한다. 육수를 확인하는 등의, 출근 후에 하는 작업과 동작 또한 매일 같다. 이렇게 같은 루틴을 반복해야지만, 항상 최상의 라멘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이 마치 최고의 운동선수나 사업가들이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해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내가 라파엘 나달 선수에 대한 글을 썼는데 루틴 관련 내용은 매우 비슷하다. 라멘에서 가장 중요한 면과 육수를 만드는 과정은 무서울 정도의 집착과 광기라고밖에 설명을 못 하겠는데, 정말 모든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라멘을 예술로 승화한 이 장인의 영상을 보면서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현대인이 직업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다. 스스로 라멘에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감동을 주는 라멘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데 나는 과연 내가 하는 투자라는 업에 스스로 미쳐있는지, 그리고 미친 헌신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봤다.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고, 일을 종교와도 같이 믿고,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헌신하는 분들을 나도 살면서 몇 분 만나봤지만, 최근에는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 요새 직업에 헌신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느냐는 생각을 하지만, 토미타씨 같은 사람이 분명히 어딘가에는 있고, 내 주변에도 분명히 이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내 일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충분히 있지만, 집착과 헌신은 또 다른 이야기인데, 헌신을 갖고 투자하는 VC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직업에 대한 회의나 번아웃 증상이 온 직장인들, 또는 창업가분들에게 두 다큐멘터리 모두 권장하고 싶다. 느끼는 게 많을 것 같다. 나는 라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감정이 동요하고 감동을 한다는 게 상상이 안 갔는데, 이날 태평양 상공에서 내가 이랬다.

헌신. 생각날 때마다 요새 생각해보는 단어이다.

긍정의 단련

올해는 참 어려운 해였다. 그리고 내년은 투자자와 창업가의 인내심과 그릿이 진정한 시험대 위에 오르는 더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 나도 이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말했지만, 지난 3년 동안 사업했던 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존경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략 10년마다 큰 불경기가 한 번씩 오고, 이 불경기는 1년~2년 정도 지속되다가 다시 호전되는데, 창업가들이 느끼는 이번 불경기는 아마도 4년, 심지어는 5년이지 않을까 싶다.

비대면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엔 거의 3년이라는 코로나19 기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회사엔 엄청난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 팬데믹 기간이 이들에겐 이미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경기였을 것이다. 팬데믹 창궐 후, 첫 6개월 동안은 대면, 비대면 서비스할 것 없이 모두 다 당황했던 시기이고, 이후에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렀던 기간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팬데믹 초기에 떨어진 수치와 느려진 성장 때문에 이 기간에도 펀딩하는 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끝날 기미가 보이면서, 이제 뭔가 좀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10년 만에 오는 제대로 된 불경기가 온 것이다.

최근에 내가 만났던,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이 공통으로 이런 말을 한다.
“창업하고 한 2년 개고생하다가, 2019년도 말에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것 같아서, 잘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원점으로 돌아와서 정말 힘들었지만, 잘 버텼고,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가 끝나면서 정말로 제대로 한 번 사업 해보자 했는데, 불황 때문에 펀딩도 못 받고, 정말 돌아버리겠습니다. 이젠 저도 좀 지쳤고, 팀원들도 다 번아웃 돼서 약간 절망적이긴 하네요.”

이런 대표들한테 나는 곧 불경기가 끝나고 다시 좋아질 거니까 계속 열심히 하라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 아니, 하고는 싶지만,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경기가 곧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 싫었고, 과연 내가 저 대표라면, 이 시점에 다시 한번 모든 걸 불태우면서 열심히 일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라면, 못 할 것 같다. 온갖 고생 끝에 시장에서 인정해주는 제품을 만들었는데, 팬데믹이라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 요소 때문에 3년을 또 고생하고, 이제 정말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10년 만에 오는 지독한 불경기 때문에 한 번 더 숨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그냥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 자책하면서 포기하는 창업가들이 굉장히 많고, 이분들에겐 비난이 아닌 존경심을 표시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우고 7전8기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긍정을 단련했고, 긍정을 단련하는 게 아예 몸에 밸 정도로 훈련을 한 분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역경 앞에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지만, 어떤 창업가들은 계속해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를 찾아서 소중하게 단련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분들이 성공할진 잘 모르겠다. 또다시 고비가 찾아올 수도 있고, 그럴 때 이분들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요새 나는 이런 분들을 존경하다 못해, 사랑하게 됐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미래를 위한 현실과의 불화

VC마다 다르지만, 검토하는 회사 중 투자하는 회사의 수는 상당히 낮을 것이다. 우리도 해마다 800 ~ 1,000개의 회사를 검토하지만, 실제로 투자하는 회사의 수는 5% 미만이다. 재미있는 건, 투자하는 이유도 다양하지만, 투자하지 않는 이유도 다양하다. 흑백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분야라서 명확한 기준이 있고,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트롱이라는 하나의 VC만 봤을 때도 이렇게 다양한 투자의 기준이 있는데, 다른 VC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다양한 기준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투자의 기준을 조금 더 일반화해보면, VC가 특정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하려고 하는 사업이 현실성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현실성이 없는 사업이라는 말 자체가 발산하는 이미지는 부정적이라서, 투자자의 “팀이랑 대표는 괜찮은데, 사업이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투자는 안 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가보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몇 번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현실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론 현실성이 없다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스타트업 분야에서만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고, 조금만 다르게 본다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장강명 씨의 “책, 이게 뭐라고”의 작가의 숙명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창업가들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이 잘 정리됐다. 아마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업가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제품은 현재에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아이디어와 제품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와 제품을 상상하고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사용자들에게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들에게 욕을 먹는 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스타트업이 현실성이 없다는 건,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현재 세상이 만든 틀에 본인들을 맞추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본인들이 만든 틀에 미래의 세상을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역시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하고, 투자하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비이성적인 미래지향주의자이다.

어떻게 보면, 창업가의 사명은 오히려 현재의 세상과 충돌과 불화를 만드는 데 있고, 우리 같은 투자자는 이런 충돌과 불화를 더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가끔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