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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치우는 사람들

스트롱에는 6명의 투자팀원이 있다. 이 중 스트롱의 리더십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다. 나는 2012년 스트롱을 만든 후 계속 한국 시장에 투자했고, 나머지 두 분은 스트롱에 조인하기 전에 각자 다른 곳에서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의 경험을 쌓았다. 우리 셋 모두 2010년 초중반부터 한국 벤처 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2022년 글로벌 불경기가 오기 전까진 거의 10년 이상 벤처 호황을 경험하고, 이 호황을 누리면서 투자 업무를 했다. 스트롱이 투자를 시작한 2012년부터 2022년, 10년 동안 경기는 약간의 up/down이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불경기가 찾아온 적은 없었고, 나의 첫 10년 VC 인생 중 항상 경기는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세계 경기는 하향 조정되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다른 시니어 동료분들은 VC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불경기를 경험하면서, 돈이 메마르고, 불확실성이 모든 걸 지배하고, 벤처생태계 자체가 공황에 빠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이럴 때 VC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다.

우리의 다른 투자팀원 세 명은 리더십 동료와는 매우 다른 프로필을 갖고 있다. 일단 세 분 모두 다 젊다. 나도 정신적 나이만 따지면 젊지만, 이분들은 물리적인 나이가 모두 20대다. 그리고 스트롱 전에는 모두 학생이었다. 많은 VC들이 경력 없는 신입 직원은 안 뽑는데, 우린 채용 면에서도 남들과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심사역은 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채용하는 걸 선호한다. 공통점이라면, 이 세 분 모두 스트롱에서 6개월 이상 인턴 생활을 했고, 이 기간에 우리도 인턴분들과 합을 맞춰봤고, 인턴분들도 스트롱이 본인들에게 맞는 조직인지를 시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분들은 대부분 2020년 이후에 스트롱에 조인하면서 VC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투자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세계 경기는 좋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안 좋아졌다. 내 기억으론 우리 주니어분들은 우리 포트폴리오가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망가지고 있을 때 투자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분들은 투자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는 대부분 망하고, VC는 투자보단 회사들이 어려울 때 뒤에서 더러운 일 처리하면서 힘든 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박혀 있다.

이런 default mentality의 차이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가 만드는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벤처투자를 시작했던 타이밍은 VC 역사상 최악이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수밖에 없고, 지금의 힘든 상황 때문에 일할 때 항상 더 열심히 하고, 항상 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벤처 투자를 시작하고 첫 10년은 너무나 좋은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VC 업무가 원래는 이렇게 힘들고 더러운 일 뒤치다꺼리 하는 게 아니라는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만, 우리 회사의 20대 심사역들은 180도 다른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VC 업무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마다 거의 다 망하는 게 정상이라는 기본 사고가 깔려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 하루에도 여러 개 – 직접 뒤에서 더러운 일을 하고, 똥을 치워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런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나중에 스트롱의 파트너가 되거나, 다른 VC나 회사의 임원이 되면, 그땐 산전수전 다 겪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주 좋은 리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지식과 경험

흔히 성공적인 VC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투자자가 ‘pattern recognition’에 능해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의 투자 경험을 기반으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됐는지, 반대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 안됐는지, 이 모든 과거의 경험에서 패턴을 찾을 수 있다면, 이 패턴을 잘 분석해서 미래의 투자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아마도 어느 정도 투자를 한 VC라면, 대부분 자신만의 이런 패턴 분석 능력이 있을 것이고, 새로운 창업가와 사업을 볼 때 지속적으로 본인만의 패턴 DB를 참고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할 것이다.

나도 투자를 시작했을 때, 유명한 VC나 내가 잘 아는 선배 VC들이 이런 패턴을 잘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그 말에 많이 동의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나도 투자하면서 경험한 실패와 성공을 바탕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창업가에 대한 패턴을 매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샌 이 pattern recognition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고 나서 보면 “성공하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이런 패턴이 있었죠.”라고 끼워서 맞추는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이런 과거의 패턴을 기반으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는 건 과학적으로 접근해도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린 수학적으로는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즉, 특정한 패턴을 따르지 않는, 그리고 잠재 능력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창업가)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과거의 패턴도 여기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창업가의 전문 지식과 직장 경험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VC는 어려운 AI 사업을 하는 창업가라면 이분이 컴퓨터공학이나 다른 공학 분야의 석사나 박사 학위가 있으면 남들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국내 대학에서 경영학과 학부를 졸업한 창업가와 미국 top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창업가가 둘 다 AI 관련 스타트업을 하면, 대부분의 VC는 후자의 창업가에게 투자할 확률이 더 높다. 이게 일반적인 VC들의 패턴 인식 프로세스이다.
모빌리티 분야에서 창업한 두 스타트업이 있는데, 한 회사는 현대자동차에서 오랫동안 관련 사업을 했던 분이 창업했고, 다른 스타트업은 완전히 상관없는 직장에서 일했던 분이 창업하면, 역시나 현대자동차 출신 창업가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정말 여러 창업가와 회사를 만나면서, 창업가의 학력과 학벌, 그리고 과거 직장 경험은 이 분이 새로 하려고 하는 사업의 성공 여부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는 패턴을 발견했다. 오히려 특정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백그라운드(=학력, 학벌)나 그 분야에서의 직장 경험이 없는 창업가들이 훨씬 더 신선한 시각으로 사업을 바라보고, 그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걸 자주 봤다. 이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너무 많은 공부를 하거나, 너무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던 파괴적이고 참신한 문제 해결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 물론, 잘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법은 실패하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엄청난 솔루션을 찾는 경우도 있고, 이러면 정말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건데,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과 경험이 너무 많으면, “원래 그건 안 돼.” , “내가 오래전부터 해봤는데, 그건 안 되는 거야.” 등의 편견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완전히 백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창업가들은 “방법이 없을까?” , “가능할 것 같아. 방법을 찾아보자.” , “원래 안 되는 건 없어. 왜 꼭 저렇게 해야 할까?” 등의 생각으로 뭐든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패턴 인식 레이다에 잘 안 걸린다.

토스의 이승건 대표는 치과대학을 졸업했고, 실제로 의사 생활까지 좀 했다. 금융업을 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관련 업계에서 일 한 경험도 없다. 하지만, 이 분과의 대화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 그리고 이승건 대표를 잘 아는 다른 분들의 기억에 의하면, 토스를 창업했을 때 대한민국 그 어떤 금융 전문가보다 이 시장의 생리와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금융산업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시도를 했다.

얼마집이라는 모바일앱을 만드는 우리 투자사 한국프롭테크의 송지연 대표도 비슷하다. 이분은 원래 부동산이나 재건축/재개발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했고, 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아파트가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경험했고, 시장의 현실과 앞으로 시장이 가야 할 미래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이걸 직접 해결해 보기로 결심해서 창업했다.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땐, 이 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한 직장인들이나 도시개발이나 부동산학과 교수들보다 훨씬 더 이 시장의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고, 이걸 기술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매우 구체적인 (아직 증명되지 않은)해답을 갖고 있다.

과연 특정 분야의 학업적 지식과 경험이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봤을 땐 별로 안 중요하다. 학업적 지식과 경험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시장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전문성인데, 이건 인터넷 검색과 발품을 팔면 누구나 다 획득 가능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얼마나 집요하게 이 문제를 붙잡고, 얼마나 깊게 파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절박하게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가의 문제이다. 결국, 결승전에서 이기는 건 가장 실력이 좋은 선수가 아니라 가장 간절하게 승리하고 싶어 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영어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장 중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믿을만한 손이 나를 잘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 말을 하는데, 비즈니스 상황 외에 내가 가장 많이 이 말을 들었던 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적진에 침투해서 인질을 구출하면서 안심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도 영어로 대화할 땐 이 말을 꽤 자주 사용하는데, 투자자로서 내가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주로 하는 말이다.

스트롱이 첫 번째 기관 투자를 했다면, 이 스타트업의 대표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투자를 제일 잘하는 VC도 아니고, 우리한테 투자를 받으면 회사가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you are in good hands 입니다. 저희는 회사들이 힘들 때 뒤에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궂은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투자자예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 투자사 중 80% 이상이 우리가 첫 번째 기관투자를 했으니, 대부분의 대표님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봐도 된다.

솔직히 한국어로 “우리랑 같이 하니까 앞으론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영어로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하는 거랑 느낌이나 어감이 많이 다르긴 하다. 영어로 하는 게 임팩트가 훨씬 더 크긴 한데, 어쨌든 이 말은 내가 투자자로서 창업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반대의 상황을 경험했다. 우리가 여러 번 투자한 스타트업의 대표가 나한테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기분이 묘하긴 했다. 기분이 묘했다는 게 나빴다는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항상 불안해하는 창업가분들에게 이 말을 하면, 이분들의 표정이 조금은 더 편해지고, 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것 같았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 이 말을 들으니, 이런 기분이 드네. 좋구먼.”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회사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진 않겠다. 그런데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이 항상 돈은 없고, 항상 사업은 불안하고, 항상 원하는 수치는 안 나오는, 그런 전형적인 초기 스타트업이 대부분 거치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우리는 사업을 직접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창업가들과 워낙 많이 교류하다 보니,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항상 우리의 걱정과 근심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날도 이야기하면서 이런 나의 우려가 표출됐던 것 같은데, 이분이 나를 똑바로 보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말로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아마도 그분은 잘 모를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는 해외 LP 분들이 글로벌 경기, 한국의 경기, 북한, 스트롱의 포트폴리오, 스트롱의 어려운 상황들 등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면, “Don’t worry.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창업가분들이 우리에게 큰 안심을 제공하듯이, 내가 하는 이 말도 우리의 LP들에게 큰 안심을 줄 수 있길 바란다.

바퀴벌레의 길

지난주 화, 수 이틀 동안 우리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조합원총회(AGM: Annual General Meeting)를 서울에서 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투자자분들이 많이 참석했고,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분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참 바쁘기도 했지만, 나도 재미있었고, 우리 모두 의미 있고 보람찬 48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행사에서 나는 해마다 스트롱벤처스가 그해에 했던 일들을 요약해서 투자자분들과 공유하는데, 이번 행사에서도 올해 좋았던 하이라이트와 별로 안 좋았던 로우라이트를 정리해서 발표해 봤다. 올해 내가 뽑은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우리가 투자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이었다. 12년 동안 우리의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과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incredible하고 extraordinary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내가 깊게 존경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이 없으면 스트롱이 존재할 수 없다.

올해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잘 버티면서 사업을 운영하는 우리 창업가분들을 나는 다시 “바퀴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실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바퀴벌레라는 단어가 혐오감을 준다고 싫어해서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우리 창업가들은 바퀴벌레 창업가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다. 물론, 엄청 좋은 의미에서.

바퀴벌레라고 하면 다들 싫어하지만, 이 곤충들은 대단한 특징을 몇 가지 가지고 있고, 신기하게도 우리 창업가들도 아주 비슷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강한 골격 – 바퀴벌레는 아주 견고하지만, 동시에 유연한 골격을 갖고 있다. 우리 창업가분들도 강한 정신력, 그리고 강한 체력을 갖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충격을 완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함도 있다.

2/ 강한 면역력 – 시간이 지날수록 바퀴벌레는 웬만한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우리 창업가들도 웬만한 어려움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갖고 있다.

3/ 강한 적응력 – 바퀴벌레와 창업가 모두 완벽하게 일치하는 속성이다. 바퀴벌레는 외부 환경에 따라서 DNA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실은 우리 창업가들도 외부 환경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목표와 비전은 명확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수정하고, 실행 방법을 계속 바꾸는 게, 마치 자신의 DNA를 외부 환경에 따라서 바꾸는 바퀴벌레랑 크게 다르지 않다.

4/ 강한 생존력 – 바퀴벌레는 오랜 기간 동안 음식이나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우리 창업가들은 음식이나 물 없이 살 순 없지만, 아주 적은 자원으로 매우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어쨌든,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바퀴벌레들은 머리가 날아가도 최대 일주일 동안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뭐, 사람은 이렇게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우리 창업가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5/ 강한 기동력 – 이건 내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바퀴벌레가 빠르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우리 창업가들도 엄청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가끔 이들보다 훨씬 더 돈과 인력이 많은 대기업도 이길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놀라운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바퀴벌레 창업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이다. 이들은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다시 찾아오고, 계속 성장한다. 지난 12년 동안 매일 매일 이런 바퀴벌레 창업가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대단하다는 생각과 존경심이 생긴다.

우리는 이런 바퀴벌레들을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이들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뒤에서 계속 푸쉬한다. 어떤 날은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앞에서 끌어준다. 하지만, 주로 이들이 뒤로 처지지 않고, 번아웃 되지 않게, 옆에서 같이 걷거나 뛰면서 응원해 준다. 나는 어릴 적 바퀴벌레를 정말 싫어했는데, 투자하면 할수록 이들이 대단한 생명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늘도 바퀴벌레같이 절대로 죽지 않고 허슬하는 한국의 모든 창업가들 파이팅하길. Never die!

링에 오르기. 그리고 버티기.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완전히 집중해서 정독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서평은 웬만하면 안 하는데, 정말 좋은 책을 읽은 후에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끔 올리긴 한다. 이전에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간략하게 올리긴 했고,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도 나는 별 5개를 줬고, 이 책 대부분의 내용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하나도 안 읽었지만, 에세이는 많이 읽었다. 에세이들의 주제와 내용은 다르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이 뛰어난 작가의 인생철학과 원칙이 잘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향하는 인생철학, 원칙과 비슷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고, 읽을수록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 명의 작가로서 좋아하게 됐지만, 결국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정의한 하루키의 인생철학과 원칙은 ‘꾸준함’과 ‘복리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매번 강조하는 세상의 모든 큰일은 모두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라고 하면, 회사원보단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하루키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냥 일반 직장인이랑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소설이란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소수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건 오히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 링은 매우 넓고, 로프의 틈새도 넓고 편리한 발판도 있어서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링에 올라가는 걸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빡빡하게 굴지 않아서, 그냥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이 있거나, 연습을 좀 하면 다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소설이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상대적으로)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은데, 이게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쓰고, 소설로 먹고살고, 결국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말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쓴 시점 기준으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신인 작가로 등단하는 것을 봤는데, 이 중 현역 소설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분은 거의 없다고 한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걸 하기 위해선 재능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이 자격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고생하면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강조하는 이 자격이라는 건 바로 꾸준함, 끈기, 그리고 복리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VC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가 될 수 있고,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회사를 찾아서 한두 개의 좋은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링에는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계속 투자하면서, 투자로 먹고살고, 직업으로서의 투자자가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즉, 링에서 버틸 수 있는 투자자는 별로 없다. 하루키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이건 단순히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데, 이 자격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작은 일을 계속 해서 아주 큰 일로 만들 수 있는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트롱도 이제 12년을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의 12년도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계속 이렇게 링 위에 올라가서 오래 버틸 수 있는 뭔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 20년 뒤엔 이게 뭔지 알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몇 년은 투자자로서 링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야겠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한 모든 것은 비단 소설가나 투자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창업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들고, 한 번 좋은 투자를 받고, 한 번 좋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건, 다른 많은 창업가도 하지만, 이걸 계속 연속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하는 건 정말 어렵다.

결국엔 꾸준함과 그리고 그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복리의 힘을 믿고 실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