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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위한 현실과의 불화

VC마다 다르지만, 검토하는 회사 중 투자하는 회사의 수는 상당히 낮을 것이다. 우리도 해마다 800 ~ 1,000개의 회사를 검토하지만, 실제로 투자하는 회사의 수는 5% 미만이다. 재미있는 건, 투자하는 이유도 다양하지만, 투자하지 않는 이유도 다양하다. 흑백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분야라서 명확한 기준이 있고,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투자하지 않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스트롱이라는 하나의 VC만 봤을 때도 이렇게 다양한 투자의 기준이 있는데, 다른 VC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정말로 다양한 기준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투자의 기준을 조금 더 일반화해보면, VC가 특정 회사에 투자하지 않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하려고 하는 사업이 현실성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현실성이 없는 사업이라는 말 자체가 발산하는 이미지는 부정적이라서, 투자자의 “팀이랑 대표는 괜찮은데, 사업이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투자는 안 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가보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몇 번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현실성’이라는 말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일반적으론 현실성이 없다는 말이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스타트업 분야에서만은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고, 조금만 다르게 본다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얼마 전에 장강명 씨의 “책, 이게 뭐라고”의 작가의 숙명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창업가들에 대해서 갖고 있던 생각이 잘 정리됐다. 아마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창업가들이 생각하는 세상과 제품은 현재에 있지만은 않다. 그들은 과거에 어떤 아이디어와 제품이 있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미래를 위한 아이디어와 제품을 상상하고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미래의 사용자들에게 존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의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하고, 이들에게 욕을 먹는 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이런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어떤 스타트업이 현실성이 없다는 건,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현재 세상이 만든 틀에 본인들을 맞추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본인들이 만든 틀에 미래의 세상을 맞추려고 한다. 그래서 역시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하고, 투자하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비이성적인 미래지향주의자이다.

어떻게 보면, 창업가의 사명은 오히려 현재의 세상과 충돌과 불화를 만드는 데 있고, 우리 같은 투자자는 이런 충돌과 불화를 더 응원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가끔은 한다.

50권 – 2022년

해마다 이맘때에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글을 올리고 있는데, 이 글은 책과 독서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새해 결심 같은 건 안 한다. 오랫동안 사는 인생이라서, 그냥 인생 결심이 있을 뿐이지, 해마다 단타성으로 세우는 결심은 안 한 지 20년이 넘은 것 같다. 그래도 유일하게 새해 결심 비슷한걸 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그 해의 독서량이고 매년 50권의 책을 읽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올해도 열심히 읽어서 50권은 돌파했고, 이 페이스로 계속 독서하면 57권 정도로 2022년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얼마 전에 콘텐츠의 최고봉은 텍스트라는 내용의 을 쓴 적이 있는데, 이건 책을 더 많이 읽고, 글을 더 많이 쓸수록, 공감이 더욱더 가는 내용이다. 앞으로 갈수록 바빠져서, 바빠서 못 하는 일들이 생길 것이고, 바빠서 우선순위를 다시 정리하면서 순위에서 밀리는 일들이 생길 것이지만, 운동과 독서만은 항상 우선으로 챙기고 싶은 활동들이다.

내 독서 습관은 항상 같다.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고, 여기에 없는 책은 집 근처 도서관에 직접 가서 빌린다.(항상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평일 저녁에 공공 도서관에 가서 책 냄새를 맡으면서 책을 빌리는 것만큼 육체와 정신이 채워지는 행동은 없는 것 같다.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느낌이다.) 그리고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보관한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플라이북에서 체크해뒀다가 국민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본다. 참고로, 나는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고 그냥 빌려서 본다.

올해 나의 베스트 책을 선정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 이다. 하루키 씨는 남들을 감동하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쓰진 않은 것 같고, 글의 스타일도 드라이하고 밋밋했지만, 읽는 내내 나는 깊은 감동과 감명을 받았다. 이 책은 다른 책에 비해 더 꼼꼼히 읽었고, 곱씹으면서 충분히 소화하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했다.

그리고 서평은 다음과 같이 썼다:

올해 읽은 책 중 one of the best. 솔직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픔을 아직 단 한 개도 안 읽었고, 이 책이 처음인데, 소설은 아니고 하루키의 회고록이라고 하는 게 맞다. 러닝이 주제인 회고록.

소설을 쓰기 위해선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고, 이 체력을 위해서 러닝을 시작했다는 하루키. 책을 쓰는 일이나, 마라톤을 뛰는 건 그냥 똑같은 일을 무한으로 되풀이한다는 점이 유사하고, 내가 하는 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필요한데, 체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그 무엇도 못 하고, 러닝을 매일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항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리셋하는 게 매우 인상적이다.

기억에 남는 quote: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가 하루도 쉬지 않고 꾸준히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면 어떤 엄청난 아웃풋이 나오는지 아주 잘 보여준 책이기도 하지만, 나는 하루키 씨의 습관과 태도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해답을 배웠다. 올해 나도 열심히 살았고, 좋은 일이 많았던 한 해지만, 이 책을 완독한 건 그중 나에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읽었던 모든 책이 감동을 준 건 아니다. 몇 페이지 읽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냥 덮고 완독하지 않은 책도 꽤 있었고, 다 읽었지만 시간 낭비였다고 스트레스받았던 책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한 사람의 경험과 생각을 짧은 시간 안에 간접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책은 모두 피와 살이 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년에도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꼈으면 한다.

유니스트 방문

2주 전에 정말 오랜만에 울산의 UNIST를 방문했다. 이젠 유니스트에서 더 이상 교편을 잡고 있지 않은 강광욱 교수님덕분에 나는 유니스트와 2014년도에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우린 학생 창업팀도 좋아하고, 그동안 꾸준히 투자해 왔고, 이런 전략의 일환으로 팬데믹 이전에는 유니스트에 정기적으로 가서 학생 창업가와 미래의 창업가와 만날 기회를 만들었고, 유니스트 출신 창업팀 3개에 투자했다. 이젠 꽤 큰 회사가 된 클래스101 또한 유니스트 학생팀이고, 울산에서 시작한 회사이다.

이 학교의 창업생태계 형성에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하신 강교수님도 다른 대학으로 옮기셨고,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나는 거의 3년 동안 유니스트에 못 갔지만, 역시 좋은 기업의 실마리는 학생들이라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나와는 학업적으론 상관없는 유니스트에 학생창업가를 만나러 공식적으로 3년 만에 방문했을 땐 마치 모교를 찾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반가웠다. 학교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고, 캠퍼스는 새로 생긴 건물들로 더 꽉 차 보였고, 학생들의 에너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그대로 충만했다. 이번엔 학생 창업센터에서 몇 팀과 함께 도시락 점심을 먹으면서 창업, 사업, 학업, 인생 이야기를 골고루 했다. 그리고, 앞으로 스트롱은 계속 유니스트 출신 팀과 만나면서 좋은 회사에 투자를 지속하겠다는 말을 하고, 내년에는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이 친구들과 친분을 쌓고 교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헤어졌다.

나는 학생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인 이유도 큰데, 나는 대학생/대학원생일 때 내가 직접 창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고, 생각을 했어도 용기를 내진 못했을 것 같아서, 20대 초중반의 학생들이 팀을 만들고 제품을 만들어서 창업하는 걸 보면 너무 부럽고 존경스럽고, 아직도 속으로는 “나는 저 나이에 뭐 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후회하곤 한다. 그래서 팀이나 제품이나 시장은 차치하고, 그냥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술 먹고 놀러 다녔던 저 나이에 회사를 만들었다면, 분명히 이런 생각과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학생창업을 존경하고 응원하는 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학생팀에 투자하면서 좋은 점만 보고 느낀 건 아니고, 학생 창업의 부작용 또한 많이 경험했다. 전에도 내가 쓴 적이 있지만, 학생들에겐 미래의 좋은 옵션이 너무 많다. 창업해서 안 되면 대학원 진학할 수도 있고, 창업했던 경험을 이력서에 잘 포장해서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생팀은 그냥 취업을 위한 전략적인 수단으로서 창업하는 게 너무 뻔히 보이고, 옵션이 너무 많아서인지 스타트업에 올인하지 않는 경우도 너무 자주 봤다. 그리고 한국의 남자 학생들에겐 군 복무라는 큰 걸림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학생팀을 만나면 가장 중요하게 물어보는 건 정말로 이 사업을 하고 싶어서 창업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고 멋있는 스타트업 대표놀이를 하기 위해서인지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내린 결론은 학생 창업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학생은 한국의 미래다.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요새 젊은 애들이 싸가지가 없든, 있든, 이 나라의 미래는 젊은이들의 몫이고, 앞으로 이 학생들 중에 미래의 쿠팡, 토스, 배민, 당근마켓, 마켓컬리를 만드는 창업가가 나올 것이다. 우린 이런 가능성을 찾아서 여기에 작은 불씨만 만들어주면 이들이 엄청난 에너지로 활활 태울 것이다. 좋은 울산 출장이었다.

좋은 친구들

자주 만나고 싶지만, 원하는 만큼 자주 보지 못하는 두 분과 2주 전에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VC에게 ‘은인’은 주로 이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재원을 제공한 LP와 엑싯이라는 큰 선물을 줘서 돈을 벌게 한 창업가들인데, 이 두 분은 우리에게 초반에 좋은 엑싯을 선물해 준 스트롱의 오래된 창업가 은인들이다.

오현석 대표님은 여행업계에서는 매우 잘 성장하고 있는 온다의 창업가이자 대표이고, 김태호님은 당근마켓의 데이터 가치화팀의 리더이다. 실은 우리와 이 두 분의 관계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간략한 버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2012년 6월에 우리 투자사 비석세스가 한국 최초의 제대로 된 테크 컨퍼런스 beLAUNCH 2012를 열었고, 존이랑 나는 마치 우리가 하는 행사처럼 굉장히 깊게 관여해서 행사 준비를 도와줬다. 이 행사에는 스타트업이 피칭하는 세션이 있었는데, 당시에 TakeTalks라는 뉴욕 기반의 한인 스타트업이 지원했다. 지금은 이와 비슷한 서비스가 워낙 많지만, 그땐 거의 없었는데, 미국 현지인을 화상으로 연결해서 온라인 영어 과외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였고, 이 회사의 코파운더가 오현석 대표와 김태호님이었다.

우린 이 회사에 투자하고 싶었는데, 결국엔 투자하지 않았다. 원래 TakeTalks라는 회사는 오현석 대표가 창업한 회사인데, 실은 오대표님은 그전에 전 세계를 여행하는 한인들을 위한 한인 민박 플랫폼 한인텔을 창업해서 꽤 좋은 비즈니스로 성장시켰다. 어떻게 보면 에어비앤비 모델을 에어비앤비보다 더 일찍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조금 더 성장 가능성이 큰 글로벌 사업을 하고 싶어서 한인텔은 다른 분들에게 잠시 맡기고 뉴욕에 와서 TakeTalks를 운영하고 있었고, 대학교 과 후배인 김태호님을 영입해서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사업을 하다 보니 미국에서 스타트업을 한다는게 생각보다 너무 어렵고,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사업이 잘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사업을 접으면서 우리도 투자를 자연스럽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존과 나는 이 두 분과 그동안 이야기하면서 이분들을 너무 좋아하게 됐고, 이런 사람들은 뭐를 해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돼서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일단 오현석 대표님은 다시 한인텔의 대표이사로 돌아갔고, 우린 한인텔에 투자했다. 그리고 김태호님에겐 우리가 투자할 테니 LA로 이사 와서 창업하라고 제안했다. 뭘 할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LA로 와서 생각 좀 하면서 결정하자고 했고, 태호님은 아주 흔쾌히 이를 승락했고 – 자녀들도 있어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 LA로 이사했다. 실은, 스트롱도 당시에 돈이 없었지만 어떤 행사에서 우리 한국 투자사의 피칭을 내가 대신 한 적이 있고, 여기서 대상으로 비행기표를 받은게 있어서, 그 표로 태호님이 뉴욕에서 LA로 날라올 수 있었다.

김태호 대표님은 LA 스트롱 사무실에서 Recomio라는 머신러닝/자연어처리 관련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제품을 만들고 영어를 잘하는 코파운더 서철님을 우리가 소개해줬다. 참고로, 서철님은 나랑 뮤직쉐이크를 같이 했던 내 초등학교 친구다. Recomio는 2년 반 동안 거의 4개의 제품을 만들어서 실제로 출시까지 했지만, 그 어떤 제품도 시장에서 호응을 얻지 못했고, 정말로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결국엔 2014년 말에 쿠팡에 인수됐다. 김태호 대표님이 Recomio를 운영하면서 남긴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데, 모든 창업가/개발자들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내용이 너무 많다.

어쨌든, 김태호 대표님의 Recomio는 스트롱에게 첫 번째 엑싯을 선물해줬다. 이게 없었다면 지금의 스트롱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은 같은 시기인 2014년 말에 옐로모바일에 인수되면서 오현석 대표님의 한인텔은 스트롱에게 두 번째 엑싯을 선물해줬다. 이 두 분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개의 엑싯 훈장을 갖게 됐고, 이런 엑싯이 쌓이면서 우리도 망하지 않고 스트롱의 브랜드를 계속 만들어 갈 수 있었고, 지금도 잘 만들어 가고 있다.

이 두 회사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내가 과거에 이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1/ 두 회사의 이야기 – part.1(Recomio)
2/ 두 회사의 이야기 – part.2(한인텔)

김태호 대표는 Recomio 엑싯 이후, 미국에서 쿠팡과 Lyft에서 근무했고, 한국으로 이사하면서 뱅크샐러드 CTO를 역임했고, 현재는 우리 투자사 당근마켓의 데이터 가치화팀 리더이다.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가 엑싯을 하고, 다시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리더로 돌아온 게 굉장히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회사를 검토할 때, 개발이나 엔지니어링 관련해서 잘 모르는 게 있을 때 태호님에게 물어보곤 한다.
오현석 대표는 한인텔 엑싯 이후, 계속 여행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했고, 온다 창업 후 현재 굉장히 건실하게 회사를 잘 운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여행 관련 회사를 검토할 때, 오현석 대표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곤 한다.

나는 되도록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다. 아무래도 대부분 철이 든 후에 만난 분들이라서 학교 친구들과 같이 거리낌 없이 친해지기엔 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이 두 분과는 마치 오래된 친구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힘든 진흙밭에서 같이 굴렀고, 살아남았고, 그리고 다시 같이 구르고 있는 좋은 동료들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다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반갑고 좋았다.

배우들이 수상하면 무대에서 “아름다운 밤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나는 주로 새벽에 글을 쓰는데, 오늘은 밤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연이 다른 우연을 만들고, 이 우연들이 쌓이면서 또 다른 우연이 만들어지고, 이게 쌓이면서 우리 삶의 일부가 되는,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다.

글 쓰는 훈련

요새 운동할 때 음악과 팟캐스트를 번갈아 가면서 듣고 있는데, 얼마전에 ‘이쓔스, 스타트업 털어주마’에서 아웃스탠딩 조혜리 기자님과 인터뷰 한 내용을 꽤 재미있게 들었다. 페이스북 친구이긴 한데, 직접적으로 아는 분은 아니지만, 이 분이 쓴 기사는 전에 몇 개 읽어봤고, 기자의 본질인 writing을 꽤 잘하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인터뷰 내용을 더 재미있게 들었던 것 같다.

솔직히 나는 테크분야에 대한 이야기보단, 조 기자님의 텍스트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훨씬 더 흥미로웠다. 나는 직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취미생활로 일주일에 두 번씩 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글’이라고 하기에도 약간 민망한 끄적거림 수준이지만,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고, 특정 주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해보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손가락으로 전달하고, 이걸 글로 전환하는 건 어떻게 보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탁월한 특권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한다. 블로그 외에도 나는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글로 한다. 말보다 글은 훨씬 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툴이자 채널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입만 벌리면 발사할 수 있는 말보단, 생각과 정리가 조금 더 필요한 텍스트야말로 상대방을 고려하는 최고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2007년부터 블로깅을 시작했으니, 벌써 15년째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그래도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더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이게 참 어렵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좋을 글을 쓰기 위해선 누구나 다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하는데, 이걸 나도 잘 알기 때문에 글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작가나 기자 분 중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가진 분들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이런 작가들은 외국에도 많지만 요샌 한국 작가 중 내가 좋아하는 분들도 많다. 한국 테크 분야에는 진정성 있는 글을 쓰는 기자들이 유독 없었는데, 요샌 아웃스탠딩 기자들과 같이 제대로 된 콘텐츠를 생성하는 분들이 등장하고 있고, 이건 매우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조 기자님의 말 중 가장 동의했던 부분은 콘텐츠의 최고봉은 텍스트라는 말이다. 숏폼, 동영상, 오디오, 이모티콘, 문자, 카톡 등의 새로운 콘텐츠 포맷과 채널이 요샌 워낙 많아서 콘텐츠의 최고봉은 텍스트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텍스트의 빛이 바래고 있지만, 그래도 콘텐츠의 최고봉은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나도 여러 가지 방법과 채널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다양한 콘텐츠를 생성하고 소비하는데, 텍스트만큼 의미 전달이 가장 확실한 콘텐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텍스트가 더 많이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텍스트는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텍스트 콘텐츠를 생성하려면 꽤 큰 노력, 연습, 훈련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소비하는 입장에서도 모든 감각을 집중해야지만 콘텐츠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인스턴트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의도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제대로 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고, 이런 노력이 들어간 텍스트 콘텐츠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 같은데, 매우 안타깝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텍스트 콘텐츠를 만드는 건 아니다. 15년째 블로깅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엄청나게 고민과 생각을 많이 한다. 아직은 질보단 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정기적으로 텍스트로 된 콘텐츠를 생성하기 위해서 꾸준히 연습하고 노력하고 있다. 일단 뭐라도 좋으니 많이 쓰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하고 있고, 이렇게 하다 보니,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콘텐츠의 최고봉은 텍스트다. 그리고 누구나 다 좋은 콘텐츠를 생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인 노력, 연습, 그리고 엄격한 훈련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