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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의 길

지난주 화, 수 이틀 동안 우리의 가장 큰 연례행사인 조합원총회(AGM: Annual General Meeting)를 서울에서 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투자자분들이 많이 참석했고,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분들도 꽤 많이 참석해서 참 바쁘기도 했지만, 나도 재미있었고, 우리 모두 의미 있고 보람찬 48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 행사에서 나는 해마다 스트롱벤처스가 그해에 했던 일들을 요약해서 투자자분들과 공유하는데, 이번 행사에서도 올해 좋았던 하이라이트와 별로 안 좋았던 로우라이트를 정리해서 발표해 봤다. 올해 내가 뽑은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우리가 투자하는 우리의 창업가들이었다. 12년 동안 우리의 포트폴리오 창업가분들과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incredible하고 extraordinary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내가 깊게 존경하는 분들이다. 이분들이 없으면 스트롱이 존재할 수 없다.

올해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잘 버티면서 사업을 운영하는 우리 창업가분들을 나는 다시 “바퀴벌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실은, 그동안 주위 사람들이 바퀴벌레라는 단어가 혐오감을 준다고 싫어해서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제 나는 우리 창업가들은 바퀴벌레 창업가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닌다. 물론, 엄청 좋은 의미에서.

바퀴벌레라고 하면 다들 싫어하지만, 이 곤충들은 대단한 특징을 몇 가지 가지고 있고, 신기하게도 우리 창업가들도 아주 비슷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강한 골격 – 바퀴벌레는 아주 견고하지만, 동시에 유연한 골격을 갖고 있다. 우리 창업가분들도 강한 정신력, 그리고 강한 체력을 갖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충격을 완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유연함도 있다.

2/ 강한 면역력 – 시간이 지날수록 바퀴벌레는 웬만한 살충제에 대한 내성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우리 창업가들도 웬만한 어려움에 대한 내성이 생겨서 고난과 역경에 대한 강한 면역력을 갖고 있다.

3/ 강한 적응력 – 바퀴벌레와 창업가 모두 완벽하게 일치하는 속성이다. 바퀴벌레는 외부 환경에 따라서 DNA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실은 우리 창업가들도 외부 환경에 따라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목표와 비전은 명확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수정하고, 실행 방법을 계속 바꾸는 게, 마치 자신의 DNA를 외부 환경에 따라서 바꾸는 바퀴벌레랑 크게 다르지 않다.

4/ 강한 생존력 – 바퀴벌레는 오랜 기간 동안 음식이나 물 없이 생존할 수 있다. 우리 창업가들은 음식이나 물 없이 살 순 없지만, 아주 적은 자원으로 매우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어쨌든, 이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바퀴벌레들은 머리가 날아가도 최대 일주일 동안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뭐, 사람은 이렇게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우리 창업가들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5/ 강한 기동력 – 이건 내가 강조할 필요도 없다. 바퀴벌레가 빠르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우리 창업가들도 엄청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가끔 이들보다 훨씬 더 돈과 인력이 많은 대기업도 이길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놀라운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바퀴벌레 창업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이다. 이들은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고, 계속 다시 찾아오고, 계속 성장한다. 지난 12년 동안 매일 매일 이런 바퀴벌레 창업가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대단하다는 생각과 존경심이 생긴다.

우리는 이런 바퀴벌레들을 지원해 주는 사람들이다. 가끔은 이들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뒤에서 계속 푸쉬한다. 어떤 날은 이들이 벼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앞에서 끌어준다. 하지만, 주로 이들이 뒤로 처지지 않고, 번아웃 되지 않게, 옆에서 같이 걷거나 뛰면서 응원해 준다. 나는 어릴 적 바퀴벌레를 정말 싫어했는데, 투자하면 할수록 이들이 대단한 생명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오늘도 바퀴벌레같이 절대로 죽지 않고 허슬하는 한국의 모든 창업가들 파이팅하길. Never die!

링에 오르기. 그리고 버티기.

얼마 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완전히 집중해서 정독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서평은 웬만하면 안 하는데, 정말 좋은 책을 읽은 후에는,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가끔 올리긴 한다. 이전에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어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간략하게 올리긴 했고,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세이도 나는 별 5개를 줬고, 이 책 대부분의 내용이 나에게 큰 울림을 줬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루키의 소설은 하나도 안 읽었지만, 에세이는 많이 읽었다. 에세이들의 주제와 내용은 다르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이 뛰어난 작가의 인생철학과 원칙이 잘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향하는 인생철학, 원칙과 비슷해서 더 재미있게 읽었고, 읽을수록 무라카미 하루키를 한 명의 작가로서 좋아하게 됐지만, 결국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경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정의한 하루키의 인생철학과 원칙은 ‘꾸준함’과 ‘복리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매번 강조하는 세상의 모든 큰일은 모두 작은 일을 계속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보통 소설가라고 하면, 회사원보단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그런데 하루키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그냥 일반 직장인이랑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소설이란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소수만이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건 오히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 링은 매우 넓고, 로프의 틈새도 넓고 편리한 발판도 있어서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링에 올라가는 걸 저지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빡빡하게 굴지 않아서, 그냥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이 있거나, 연습을 좀 하면 다 올라갈 수 있는데, 마치 소설이 이와 비슷하다고 한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상대적으로)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은데, 이게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쓰고, 소설로 먹고살고, 결국 소설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어렵다는 말이다.

하루키는 이 책을 쓴 시점 기준으로 삼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신인 작가로 등단하는 것을 봤는데, 이 중 현역 소설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분은 거의 없다고 한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이걸 하기 위해선 재능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한다. 다행인 점은 이 자격은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고생하면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이 책에서 계속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하루키가 강조하는 이 자격이라는 건 바로 꾸준함, 끈기, 그리고 복리의 힘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하는 투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VC가 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가 될 수 있고, 투자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나 좋은 회사를 찾아서 한두 개의 좋은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링에는 누구나 다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계속 투자하면서, 투자로 먹고살고, 직업으로서의 투자자가 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즉, 링에서 버틸 수 있는 투자자는 별로 없다. 하루키의 말을 그대로 빌려 쓰자면, 이건 단순히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데, 이 자격 또한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고, 작은 일을 계속 해서 아주 큰 일로 만들 수 있는 복리의 힘을 믿어야 한다.

스트롱도 이제 12년을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의 12년도 잘하기 위해서는 좋은 투자자의 재능보단, 계속 이렇게 링 위에 올라가서 오래 버틸 수 있는 뭔가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다.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한 20년 뒤엔 이게 뭔지 알 수 있길 바란다. 앞으로 몇 년은 투자자로서 링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야겠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 한 모든 것은 비단 소설가나 투자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창업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 좋은 제품을 만들고, 한 번 좋은 투자를 받고, 한 번 좋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건, 다른 많은 창업가도 하지만, 이걸 계속 연속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속하는 건 정말 어렵다.

결국엔 꾸준함과 그리고 그 꾸준함이 만들어내는 복리의 힘을 믿고 실행해야 한다.

남의 의견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말 한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 두 가지 중, 잡음을 잘 구분하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에 집중하자는 내용은 내가 요새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나 같이 남의 눈치 잘 안 보고, 남의 의견이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가끔은 내가 뭔가를 하거나 말할 때 “이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가는 곳마다 아주 두껍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새 의식적으로 남의 시선과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내 생각, 감, 의견에 100% 의존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남의 의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고, 정말로 경청해야 할 남의 의견과 조언만 듣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솔직히 이런 의견은 소수의 몇 명만 제공할 수 있다. 이 소수의 몇 명은, 본인들이 나에게 주는 조언, 충고, 그리고 의견의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고 본인들도 그 결과에 대해서 직접 책임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외의 다른 의견은 안 들으려고 노력하고, 꼭 들어야 한다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바로 흘리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뭘,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사냐고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살아야 한다.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 그리고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니까.

조금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본인이 직접 창업하지 않았거나, 현재 적을 두고 있지 않은 회사를 비정기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advisor’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요새 우리 주변에 ‘고문’ , ‘ advisor’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는 분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때 이런 분들은 본인들의 조언에 대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고, 여기에 크게 영향도 안 받는 분들이다. 왜 이런 분들에게 굳이 과한 비용을 지급하거나 돈보다 더 귀한 회사의 지분을 주면서 조언을 받는지 회사 대표들에게 물어봤다. 어차피 풀타임도 아니고, 파트타임 중에서도 슈퍼 파트타임 – 우리 회사를 포함해서 많은 회사의 어드바이저를 하고 있다 –  이고, 솔직히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야에서 오래 일을 했더라도 그건 오래전 일이고, 같은 분야에 있는 회사라도 우리 회사랑 다른 회사랑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차피 이전 경험을 재활용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내가 듣는 대답은, “이분들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요. 나보다 이 분야의 경험이 많고 네트워크가 좋아서,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이분들의 조언이 값질 것 같아서요.”이다. 이런 대표들은 이게 정말 맞는 건지 잘 판단하길 바란다.

우리는 살면서 계속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지 말지, 점심 식사는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부터, 100억 원 짜리 거래를 할지말지까지, 실은 우리 인생 자체가 연속적인 결정의 집합체이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셀 수 없는 결정의 결과를 뒤돌아보면, 안타깝게도 옳은 결정보다 틀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어차피 틀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할 텐데, 남의 의견을 참고해서 틀린 결정을 하기보단, 그냥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틀리는 게 훨씬 더 값진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의 의견이나 조언을 절대로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 판단해서 이 중 잡음을 구분하라는 의미인데, 잘 생각해 보면 남의 의견 중 대부분은 잡음이다. 중요한 결정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거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다. 결국엔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오롯이 내 의견만이 중요하다.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것들

내가 창업가들에게 가끔 물어보는 질문이 있는데, “요새 잠을 잘 자지 못하게 하거나,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들이 있다면 어떤 게 있나요?”이다. 영어로 하면 “What keeps you up at night?”인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조금 어색하긴 하다. 내가 창업가들에게 항상 물어보는 게 아니라, 가끔 물어보는 이유는, 이 질문은 내가 첫 미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상대방을 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만나 본 후에 물어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우리가 그동안 몇 개월 동안 대화를 하고 있던 우리의 잠재 투자자가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나는 이 질문을 그동안 창업가들에게 해 왔었지만, 정작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몇 분 생각을 했었다. 요샌 내가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하거나 괴롭히는 것들은 없지만, 현재 내 가장 큰 고민거리는 지금 만들고 있는 새로운 펀드를 빨리 끝내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보면, 펀드를 하나 새로 만드는 건 힘들고 지루하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불가능한 건 아니라서, 이번 펀드도 그냥 시간이 걸릴 뿐이지, 결국엔 다 만들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건 실은 일시적인 고민이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내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밤잠을 설치는 걱정과 생각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계속 초기 투자를 하면서 스트롱이라는 브랜드가 어떻게 하면 처음과 끝이 항상 같게, 계속 의미 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인데,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초기 투자자로서 계속해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이다. 실은 영어로 말하는 게 제일 정확한데, “how do we continue to stay relevant?”이다. 너무 세상이 빨리 바뀌다 보니, 우리도 외부 변화에 맞춰서 빠르게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뻔한 말이지만, 결국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건 변화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정신없는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항상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다. 이 또한 뻔한 말이지만, ‘원칙’이라는 말에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몇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 그리고 그 원칙을 둘러싼, 계속 바뀌어야 하는 변수들, 이 것들을 제대로 구분해서, 원칙을 변수랑 착각하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우리를 존재하게 했던 것들을 계속 유지하는 고민. 이게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첫 번째 고민이다. 시장에서 의미와 영향력이 사라지면, 우리 같은 VC는 그냥 한 방에 훅 가는 것이라서 아주 심각한 고민이다.

두 번째는, 갈수록 늘어나는 남에 대한 신경과 관심을 끄고, 어떻게 하면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 모든 생각을 집중할 수 있을까이다. 한국은 장점이 너무 많은 나라인데, 단점 또한 많다. 아마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단점은 모두 다 남을 만족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남의 목소리, 남의 의견,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이게 과해지면 본인의 목소리, 본인의 의견, 본인의 시선을 점점 잃어버리면서, 결국 내 인생을 불특정 다수의 남을 위해 살다가 죽게 되는데, 한국 사회가 이렇게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다. 틀린 결정을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된다는 말도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틀린 결정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본인의 생각보단, 항상 남의 의견이 더 중요하니까. 나는 틀린 결정을 하더라도, 남이 결정해서 내가 틀리기보단, 그냥 내가 결정해서 내가 틀리는 걸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남이 아닌 나에게 모든 걸 집중하고 싶은데, 한국에서 투자하면서 이걸 지킨다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다.

며칠 전에도 자기 전에 이 두 가지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잠을 약간 설쳤는데, 그래도 나쁜 고민이라기보단 좋은 고민이고, 뭔가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계속 신경 써야 하는 좋은 점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리고 잠들었다.

제2의 한류

얼마 전에 컴팩트하게 유럽 출장을 다녀왔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3개국을 갔다 왔는데,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하루에 미팅 하나씩하고 다시 귀국했다. 우리는 한국이랑 미국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 유럽에 포트폴리오 회사가 하나 있긴 하지만 –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는 투자자들도 유럽에는 거의 없어서, 일 때문에 유럽 갈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유럽 땅을 밟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유럽에 온 게 2000년도였으니까, 이번에 24년 만에 유럽에 왔다. 특히 어릴 적 살았던 스페인에는 이번에 무려 35년 만에 갔는데, 솔직히 너무 짧은 출장이라서 뭘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뭘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한 나라에 하루도 안 있었지만, 오랜만에 유럽에 와서 나흘 동안 몇 가지 느낀 점이 있는데, 한국과 관련된 점들이고, 대부분 너무 좋은 느낌과 발견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일부와 중학교를 유럽에서 다녔다. 이게 언제였냐면, 1988년 서울 올림픽 전이었는데, 모든 걸 사진같이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정말 못 사는 나라였다. 그 못 사는 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 참고로, 당시엔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이었다. 외국에 나가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고 나가야 하는 시기였다 – 유럽에 오니 어린이의 시각으로 봐도 유럽은 너무나 잘 사는 선진국이었다. 멋진 사회적 인프라, 온갖 맛있는 음식, 비싼 자동차, 옷도 잘 입는 멋쟁이들, 행동 하나하나에 여유가 넘쳐흐르는 선진국 사람들,,,뭐 이런 느낌이었고, 실은 이런 유럽의 선진국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며칠 전 출장 전 까진.

그런데 이번에 출장 와서 내가 보고 느낀 점들은 당시의 느낌과는 정반대였다. 가는 곳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 유럽이 이렇게 후졌었나? 내 기억으론 정말 잘 사는 나라였는데, 별거 아니네.” 심지어는 런던 호텔에서 우연히 대학교 선배를 만났는데, 이분도 나한테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기홍아, 영국이 원래 이렇게 후진 나라였니? 나는 한국이 훨씬 더 좋네.”

한국이 모든 면에서 좋았다. 한국이 인프라도 잘 되어 있고, 솔직히 말해서 음식도 한국이 더 맛있었다.(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더 많겠지만, 이탈리아에서 먹은 파스타보다 한국에서 먹는 파스타가 더 맛있었다). 좋은 자동차는 서울에 훨씬 더 많고, 심지어는 유럽의 멋쟁이들보다 강남과 성수의 한국인들의 패션이 더 시대를 앞서간다고 생각한다.

실은, 내가 이렇게 느꼈던 건, 유럽이 못 살거나, 후져서가 아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아주 잘 사는 선진국인데, 한국이 그동안 너무 발전을 많이 했고, 한국이 너무 좋은 나라가 됐기 때문에 내가 상대적으로 이런 감정들을 느꼈던 것 같다. 이제 한국은 아주 잘 사는 강한 나라가 됐고,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심지어 굉장히 똑똑하고, 정말 열심히 일한다. 유럽 가는 곳마다 투자자들이 나에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한국 사람들 진짜 일 열심히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너넨 잘될 거야.”였는데, 내가 봐도 한국인들 정말 열심히 일한다. 내가 나에 대해서 이런 말 하는 게 좀 웃기지만, 솔직히 나만 봐도 진짜 열심히 일하는 것 같다. 앞으로 유럽 사람들이 계속 지금같이 일하고, 한국 사람들도 지금같이 일하면, 앞으로 10년 후에 한국은 유럽 그 어떤 나라보다 더 잘 사는 나라가 될 게 확실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우린 이미 한류(Korean Wave)라는 말을 지난 몇 년 동안 많이 했는데, 내가 요새 느끼는 건, 이제 제2의 한류(2nd Korean Wave)가 시작되는 것 같다. 제1의 한류 기반이 제조업을 잘하고, 그냥 무작정 열심히 일하는 한국이었다면, 제2의 한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게 포함되어 있다. 이제 외국 사람들의 눈에는 한국은 이미 하드웨어를 잘하는 나라인데, 소프트웨어도 잘하고, 특히나 consumer 제품을 굉장히 잘 만드는 나라가 됐다. 실은 여기서 멈춘다면, 제2의 한류는 없을 것이다. 하드웨어랑 소프트웨어는 그냥 tech인데, tech 자체로만 다른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칠 순 없다. 그런데 한국은 이제 tech를 넘어서, 다른 나라의 문화에 영향을 주고 있고, 이게 시사하는 바는 정말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은 음악도 잘 만들고, 영화도 잘 만들고, 무형의 자산인 콘텐츠 강국이 됐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 외국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 다른 무형의 자산인 음식에서도 한국은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음식이 이젠 정말로 메인스트림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스포츠도 잘한다. 많은 한국 프로 선수들이 전 세계 프로스포츠에서 너무나 잘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이 모두 다 합쳐지면서 한국은 이제 외국인들의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된 나라가 됐다. 이로 인해, 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이는 해외 투자자들의 돈을 한국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다. 과거 대비 해외 투자자들의 한국 회사, 또는 우리 같은 한국에 투자하는 펀드에 대한 관심이 차원이 다르게 바뀌었다는 걸 나는 항상 느끼고 있다.

물론, 이런 내 생각과 의견에 100% 반대하는 분들도 많다. 한국의 미래는 어둡고, 더 이상 한국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한국 VC도 내 주변에 많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는 사람들도 내 주변에는 많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한국은 선진국에서 강대국으로 다시 한번 더 점프할 수 있는 내, 외부 기회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우리 모두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