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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권 – 2024년

이번 주에 올해 내가 60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는 자랑을 했다. 해마다 50권의 목표를 설정하고, 책 종류와 분야는 특별히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독서를 하는데, 올해도 좋은 책을 많이 읽었고, 현재까지 62권을 읽었으니, 아마도 64권으로 올해를 마무리할 것 같다.

실은 50권의 목표를 설정한 첫해에는 그냥 내가 그 해에 실제로 몇 권을 읽을 수 있을지 실험해 보려고 독서 관련 포스팅을 했는데, 이제 해마다 연말에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글을 쓰는 게 연례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독서에 대한 글을 쓰면 책을 많이 읽으라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하게 되는데, 이건 나에겐 아주 좋은 스트레스다.

생각해 보면 작년도 정말 바빴는데, 올해는 2023년 보다 더 바빴다. 일도 더 많았고, 출장도 더 많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게 올해 나는 더 많은 독서를 했고, 운동도 더 많이 해서,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두 더 건강해졌다. 그래서 나는 바빠서 책을 못 읽었고, 바빠서 운동을 못 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이건 내 의지의 문제이고, 할 수 있다고 하면 할 수 있고, 독서하고 운동하겠다고 계획하면 둘 다 할 수 있다.

이전 포스팅이 현대의 창업가 정주영 씨 이야기였는데, “하면 된다.” 관련해서 이분이 했던 두 개의 명언을 여기서 소개한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면 의심하는 만큼밖에는 못하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하는 데 달려 있다. 적자가 나게 계획하면 적자가 나고, 망하게 계획하면 망하는 법이다.”

내 독서 습관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일단 나는 더 이상 책을 구매하지 않는다. 종이책, 전자책 모두 최근 몇 년 동안 구매한 적이 없고, 빌려만 본다. 내 기본 대여 플랫폼은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이다. 여기에 없는 책은 집 근처 도서관에서 직접 빌려본다. 이 두 개를 효율적으로 잘 사용하면서 중간마다 우리 사무실 구글캠퍼스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서도 책을 대여하면, 1년 365일 손에서 책이 떨어져 있는 날이 없다. 옛날 어른들이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항상 몸에 책을 가까이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좋다. 나는 그냥 항상 부자가 된 느낌인데, 이 느낌은 그 어떤 행위도 대체해 줄 수 없다.

책을 읽은 후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올해 내가 플라이북에서 별 5개를 준 나의 베스트 책들을 가장 최근에 읽은 순서로 나열하자면,

정주영의 ‘이 땅에 태어나서’
아이라 바이오크의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장강명의 ‘열광금지, 에바로드’
임경선의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임경선의 ‘자유로울 것’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
권민창의 ‘잘 살아라 그게 최고의 복수이다’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
김하나의 ‘당신과 나의 아이디어’
세이노의 ‘세이노의 가르침’
데이비드 재럿의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

이렇게 14권이다. 62권 중 14권이면 올해 읽은 책의 22.5%에 별 5개 만점을 준건데, 너무 후하게 준 것 같다. 참고로 작년에는 읽은 책의 12%에 별 5개 만점을 줬었다. 책을 읽을수록 좋은 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예: 장강명, 임경선, 김하나) 책을 무의식적으로 골라서 읽다 보니 별 5개가 많이 나오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계속 실험을 해봐야겠다.

올해 읽은 책들에 특정한 패턴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한국 작가들의 책을 꽤 많이 읽었고,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고, 경영과 비즈니스 관련 서적은 최대한 안 읽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그냥 평범한 에세이나 소설 위주로 독서했다.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은 독서라고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5시간에 걸쳐서 읽는다는 건, 그 책을 쓴 저자의 평생의 경험과 통찰력을 단 5시간 만에 배운다는 건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남는 장사는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없고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변명이다.

내년에도 5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평등한 자본금

올해 나는 꽤 많은 책을 읽었다. 보통 일 년에 50권을 목표로 정하고, 지난 5년 동안 매해 50권 정도의 책을 읽었는데, 올해는 60권을 돌파해서 기분이 참 좋다. 60권 이상 읽은 자랑은 다음 포스팅에서 해보려고 한다.

어제 올해 62번째 책을 완독했는데,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씨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였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구글스타트업캠퍼스에는 작은 사내 도서관이 있는데, 여기에 있는 책 중 하나였고, 그동안 이 책이 진열된 건 여러 번 봤지만, 페이지 수가 조금 많기도 하고, 너무 익숙한 한국 기업 이야기라서 그런지, 선뜻 손이 안 갔다. 드디어, 11월 말, 비행기에서 읽으려고 대여했는데,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실은,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중 하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보라고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현대라는 기업은 한국인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를 가도 현대가 만든 제품을 우린 볼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대단한 기업이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이 회사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성장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주영 씨도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맨손으로 현대를 시작했다는 건 대부분 알지만, 이분이 어떤 철학과 원칙을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했는지 아는 분들은 별로 없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으니까.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현대그룹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현대에 대한 건지, 아니면 정주영 씨에 대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스타트업 창업가와 그 회사를 동일시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겐 둘 다 동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스스로 반성도 많이 했다. 나를 비롯해서 대부분 한국인들은 존경하거나 벤치마킹하고 싶어 하는 기업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한국보단 항상 외국인 CEO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내가 일하는 스타트업 분야에서는 실리콘밸리의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이들이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고, 누구한테 얼마의 투자를 받아서 얼마나 단기간에 유니콘 기업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소셜 미디어에 자주 포스팅을 하고 있지만, 한국 기업의 CEO나 한국의 창업가들에 대한 좋은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덜 보이는 것 같다. 한국에도 대단한 기업과 이 기업을 만든 창업가들이 많은데, 우린 너무 밖에서만 좋은 role model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닌지 반성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내 등잔 밑이 참 어두웠다는 것이다. 정주영 씨의 자서전이긴 하지만, 이분의 인생 자체가 현대였기 때문에 이 책은 현대의 창업 이야기이고, 그 어떤 창업 이야기보다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 이런 면에서는 나는 현대도 엄청난 스타트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세세한 서평을 쓰진 않겠다. 하지만, 스타트업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권장하고 싶다. 아마도 정주영 씨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조각조각 많이 들었겠지만, 이 분이 어떻게 현대를 창업했고, 현대가 어떤 역경과 난관을 극복하면서 한국 최고의 회사가 됐는지, 이 자서전을 통해서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하지만 가장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말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다. 그리고, 본인은 이 평등한 자본금을 열심히 활용한 사람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을 하면서 이게 현대의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이 자본금을 그냥 잘 활용한 게 아니라, 정주영 씨는 정말 오지게 잘 활용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시간이라는 평등한 자본금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부터 더 잘 활용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똥 치우는 사람들

스트롱에는 6명의 투자팀원이 있다. 이 중 스트롱의 리더십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다. 나는 2012년 스트롱을 만든 후 계속 한국 시장에 투자했고, 나머지 두 분은 스트롱에 조인하기 전에 각자 다른 곳에서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의 경험을 쌓았다. 우리 셋 모두 2010년 초중반부터 한국 벤처 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2022년 글로벌 불경기가 오기 전까진 거의 10년 이상 벤처 호황을 경험하고, 이 호황을 누리면서 투자 업무를 했다. 스트롱이 투자를 시작한 2012년부터 2022년, 10년 동안 경기는 약간의 up/down이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불경기가 찾아온 적은 없었고, 나의 첫 10년 VC 인생 중 항상 경기는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세계 경기는 하향 조정되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다른 시니어 동료분들은 VC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불경기를 경험하면서, 돈이 메마르고, 불확실성이 모든 걸 지배하고, 벤처생태계 자체가 공황에 빠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이럴 때 VC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다.

우리의 다른 투자팀원 세 명은 리더십 동료와는 매우 다른 프로필을 갖고 있다. 일단 세 분 모두 다 젊다. 나도 정신적 나이만 따지면 젊지만, 이분들은 물리적인 나이가 모두 20대다. 그리고 스트롱 전에는 모두 학생이었다. 많은 VC들이 경력 없는 신입 직원은 안 뽑는데, 우린 채용 면에서도 남들과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심사역은 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채용하는 걸 선호한다. 공통점이라면, 이 세 분 모두 스트롱에서 6개월 이상 인턴 생활을 했고, 이 기간에 우리도 인턴분들과 합을 맞춰봤고, 인턴분들도 스트롱이 본인들에게 맞는 조직인지를 시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분들은 대부분 2020년 이후에 스트롱에 조인하면서 VC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투자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세계 경기는 좋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안 좋아졌다. 내 기억으론 우리 주니어분들은 우리 포트폴리오가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망가지고 있을 때 투자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분들은 투자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는 대부분 망하고, VC는 투자보단 회사들이 어려울 때 뒤에서 더러운 일 처리하면서 힘든 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박혀 있다.

이런 default mentality의 차이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가 만드는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벤처투자를 시작했던 타이밍은 VC 역사상 최악이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수밖에 없고, 지금의 힘든 상황 때문에 일할 때 항상 더 열심히 하고, 항상 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벤처 투자를 시작하고 첫 10년은 너무나 좋은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VC 업무가 원래는 이렇게 힘들고 더러운 일 뒤치다꺼리 하는 게 아니라는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만, 우리 회사의 20대 심사역들은 180도 다른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VC 업무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마다 거의 다 망하는 게 정상이라는 기본 사고가 깔려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 하루에도 여러 개 – 직접 뒤에서 더러운 일을 하고, 똥을 치워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런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나중에 스트롱의 파트너가 되거나, 다른 VC나 회사의 임원이 되면, 그땐 산전수전 다 겪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주 좋은 리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지식과 경험

흔히 성공적인 VC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투자자가 ‘pattern recognition’에 능해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의 투자 경험을 기반으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됐는지, 반대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 안됐는지, 이 모든 과거의 경험에서 패턴을 찾을 수 있다면, 이 패턴을 잘 분석해서 미래의 투자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아마도 어느 정도 투자를 한 VC라면, 대부분 자신만의 이런 패턴 분석 능력이 있을 것이고, 새로운 창업가와 사업을 볼 때 지속적으로 본인만의 패턴 DB를 참고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할 것이다.

나도 투자를 시작했을 때, 유명한 VC나 내가 잘 아는 선배 VC들이 이런 패턴을 잘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그 말에 많이 동의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나도 투자하면서 경험한 실패와 성공을 바탕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창업가에 대한 패턴을 매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샌 이 pattern recognition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고 나서 보면 “성공하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이런 패턴이 있었죠.”라고 끼워서 맞추는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이런 과거의 패턴을 기반으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는 건 과학적으로 접근해도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린 수학적으로는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즉, 특정한 패턴을 따르지 않는, 그리고 잠재 능력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창업가)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과거의 패턴도 여기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창업가의 전문 지식과 직장 경험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VC는 어려운 AI 사업을 하는 창업가라면 이분이 컴퓨터공학이나 다른 공학 분야의 석사나 박사 학위가 있으면 남들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국내 대학에서 경영학과 학부를 졸업한 창업가와 미국 top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창업가가 둘 다 AI 관련 스타트업을 하면, 대부분의 VC는 후자의 창업가에게 투자할 확률이 더 높다. 이게 일반적인 VC들의 패턴 인식 프로세스이다.
모빌리티 분야에서 창업한 두 스타트업이 있는데, 한 회사는 현대자동차에서 오랫동안 관련 사업을 했던 분이 창업했고, 다른 스타트업은 완전히 상관없는 직장에서 일했던 분이 창업하면, 역시나 현대자동차 출신 창업가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정말 여러 창업가와 회사를 만나면서, 창업가의 학력과 학벌, 그리고 과거 직장 경험은 이 분이 새로 하려고 하는 사업의 성공 여부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는 패턴을 발견했다. 오히려 특정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백그라운드(=학력, 학벌)나 그 분야에서의 직장 경험이 없는 창업가들이 훨씬 더 신선한 시각으로 사업을 바라보고, 그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걸 자주 봤다. 이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너무 많은 공부를 하거나, 너무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던 파괴적이고 참신한 문제 해결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 물론, 잘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법은 실패하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엄청난 솔루션을 찾는 경우도 있고, 이러면 정말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건데,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과 경험이 너무 많으면, “원래 그건 안 돼.” , “내가 오래전부터 해봤는데, 그건 안 되는 거야.” 등의 편견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완전히 백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창업가들은 “방법이 없을까?” , “가능할 것 같아. 방법을 찾아보자.” , “원래 안 되는 건 없어. 왜 꼭 저렇게 해야 할까?” 등의 생각으로 뭐든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패턴 인식 레이다에 잘 안 걸린다.

토스의 이승건 대표는 치과대학을 졸업했고, 실제로 의사 생활까지 좀 했다. 금융업을 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관련 업계에서 일 한 경험도 없다. 하지만, 이 분과의 대화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 그리고 이승건 대표를 잘 아는 다른 분들의 기억에 의하면, 토스를 창업했을 때 대한민국 그 어떤 금융 전문가보다 이 시장의 생리와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금융산업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시도를 했다.

얼마집이라는 모바일앱을 만드는 우리 투자사 한국프롭테크의 송지연 대표도 비슷하다. 이분은 원래 부동산이나 재건축/재개발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했고, 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아파트가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경험했고, 시장의 현실과 앞으로 시장이 가야 할 미래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이걸 직접 해결해 보기로 결심해서 창업했다.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땐, 이 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한 직장인들이나 도시개발이나 부동산학과 교수들보다 훨씬 더 이 시장의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고, 이걸 기술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매우 구체적인 (아직 증명되지 않은)해답을 갖고 있다.

과연 특정 분야의 학업적 지식과 경험이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봤을 땐 별로 안 중요하다. 학업적 지식과 경험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시장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전문성인데, 이건 인터넷 검색과 발품을 팔면 누구나 다 획득 가능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얼마나 집요하게 이 문제를 붙잡고, 얼마나 깊게 파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절박하게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가의 문제이다. 결국, 결승전에서 이기는 건 가장 실력이 좋은 선수가 아니라 가장 간절하게 승리하고 싶어 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영어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장 중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믿을만한 손이 나를 잘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 말을 하는데, 비즈니스 상황 외에 내가 가장 많이 이 말을 들었던 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적진에 침투해서 인질을 구출하면서 안심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도 영어로 대화할 땐 이 말을 꽤 자주 사용하는데, 투자자로서 내가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주로 하는 말이다.

스트롱이 첫 번째 기관 투자를 했다면, 이 스타트업의 대표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투자를 제일 잘하는 VC도 아니고, 우리한테 투자를 받으면 회사가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you are in good hands 입니다. 저희는 회사들이 힘들 때 뒤에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궂은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투자자예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 투자사 중 80% 이상이 우리가 첫 번째 기관투자를 했으니, 대부분의 대표님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봐도 된다.

솔직히 한국어로 “우리랑 같이 하니까 앞으론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영어로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하는 거랑 느낌이나 어감이 많이 다르긴 하다. 영어로 하는 게 임팩트가 훨씬 더 크긴 한데, 어쨌든 이 말은 내가 투자자로서 창업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반대의 상황을 경험했다. 우리가 여러 번 투자한 스타트업의 대표가 나한테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기분이 묘하긴 했다. 기분이 묘했다는 게 나빴다는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항상 불안해하는 창업가분들에게 이 말을 하면, 이분들의 표정이 조금은 더 편해지고, 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것 같았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 이 말을 들으니, 이런 기분이 드네. 좋구먼.”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회사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진 않겠다. 그런데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이 항상 돈은 없고, 항상 사업은 불안하고, 항상 원하는 수치는 안 나오는, 그런 전형적인 초기 스타트업이 대부분 거치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우리는 사업을 직접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창업가들과 워낙 많이 교류하다 보니,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항상 우리의 걱정과 근심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날도 이야기하면서 이런 나의 우려가 표출됐던 것 같은데, 이분이 나를 똑바로 보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말로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아마도 그분은 잘 모를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는 해외 LP 분들이 글로벌 경기, 한국의 경기, 북한, 스트롱의 포트폴리오, 스트롱의 어려운 상황들 등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면, “Don’t worry.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창업가분들이 우리에게 큰 안심을 제공하듯이, 내가 하는 이 말도 우리의 LP들에게 큰 안심을 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