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짧은 기회의 창

창업가들이 투자자와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받는 단골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네이버가 이거 하면 어떻게 되나요?” , “카카오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하던데요?” , “구글이 똑같은 제품을 만들면 우린 그냥 망하는 게 아닌가요?”와 같은 대형 경쟁사들과 관련된 질문이다. 실은, 당연히 누구나 다 물어볼 수 있는 뻔한 질문이고, 이에 대한 정답은 없다. 실은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은 뭔가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창업가들이 그래도 대기업이나 경쟁사들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는지, 대형 경쟁사에 대해서 어떤 논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런 걸 물어볼 확률이 더 높다.

그런데 요새 내가 느끼는, 창업가들이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경쟁은, 대기업에서 우릴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대기업이나 큰 스타트업에서 일을 잘하는 분들이 나와서 우리와 비슷한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것이다. 당근마켓, 쿠팡, 배민, 마켓컬리 같은 회사에서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고, 본인들이 직접 그 성장에 기여를 했고, 이런 경험을 기반으로 퇴사해서 우리랑 경쟁하는 제품을 만들면, 그땐 우린 어떻게 할 것인가? 참고로, 우리 투자사 당근마켓 초기 멤버들은 카카오에서 로컬/동네 관련 서비스를 만들었던 분들이고, 우리 투자사 세탁특공대의 경쟁사인 런드리고의 초기 멤버분들도 배달의민족 출신이라서 비대면 이커머스와 물류에 대한 경험이 많은 분들이다.

이렇게 이미 엄청난 경험을 했고, 그리고 이미 시장에 출시된 제품이나 서비스를 철저히 벤치마킹한 후에,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좋은 경쟁 제품을 이분들이 만드는 게, 그냥 일반 대기업이 우리 제품을 카피하는 것 보단 훨씬 더 무서운 상황과 결과를 야기한다.

나는 우리 투자사가 기존 플레이어를 카피해서 창업한 공격적인 사례도 경험해봤고, 반대로 다른 경쟁사들이 우리 투자사를 카피해서 창업한 방어적인 사례도 경험해봤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는 그때마다 다르지만, 일단, 위에서 말한 대로 빨리 성장한 스타트업에서 엄청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을 무기로, 시장은 크지만, 아직 시장의 그렇다 할 선두 주자가 없거나, 또는 선두 주자가 있지만, 본인들이 봤을 때 잘 못 하고 있을 때, 이들이 경쟁제품을 만든다고 해서 기존 플레이어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보면 쉬워 보이지만, 막상 직접 해보면, 이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기존 플레이어는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경험을 많이 해서, 이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상당히 무서운 진입장벽을 이미 만들었기 때문이다(다만, 직접 해보기 전까진 잘 모른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회사에서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다고 해서 창업하고 더 빠르고, 더 싸고, 더 좋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은, 내가 경험한 건 항상 그 반대였다. 하지만, 이들이 갖는 큰 장점은, 이런 성장 경험은 주로 VC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와서 더 좋은 조건에 더 큰 펀딩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펀딩을 잘 받아서 돈이 많으면, 더 좋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고, 아주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계속 실험하다 보면, 결국엔 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여기에다 선발 주자가 이미 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후발 주자의 특권이 적용되면, 엄청난 제품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펀딩 -> 채용 -> 삽질 -> 또 삽질 -> 펀딩 -> 채용 -> 더 많은 삽질 x 10 -> 엄청난 제품의 탄생, 이런 주기는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리는데, 이 시간이 선발주자의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다. 후발주자가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선발 주자는 이 기회의 창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미친 듯이 제품을 잘 만들고, 미친 듯이 성장하고, 미친 듯이 전진해야 한다. 이걸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경쟁사들이 더 많은 펀딩을 받고, 더 좋은 사람을 채용하는 걸 넋을 놓고 보고만 있다가는, 이런 기회의 창이 닫히면서 완전히 도태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회의 창을 잘 활용하면서 경쟁할 수 있다면, 시장 자체를 같이 키울 수 있고, 결국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엄청난 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나는 많이 봤다.

은인들

우리는 행사를 많이 하는 VC는 아니다. 적은 인력으로 많은 회사에 투자하기 때문에, 우리의 core 기능인 ‘투자’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는 대부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그래도 해야 하는 행사가 몇 개 있는데, 이 중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는 AGM이라는 행사이다. Annual General Meeting의 약자인데, 일반 기업이라면 주주총회이고, 우리 같은 VC에겐 조합원총회라고 한다. 1년에 한 번 스트롱 펀드에 출자해주신 고마운 LP 분들을 모시고, 1년 동안 스트롱이 한 일, 배운 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우리 포트폴리오 대표님들도 모시고 같이 이야기하는 행사인데, 스트롱의 AGM은 딱딱한 주주총회가 아니라 굉장히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총회이다.

올해 우리는 10월 18일, 19일, 이렇게 이틀 동안 AGM을 개최했다. 적은 인력으로 100명 이상 참석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고, 이번에도 스트롱 동료분들이 두 달 정도 엄청나게 고생 많으셨다. 메인 행사는 파트너인 존과 나의 간략한 발표로 시작했는데, 이번에 존은 한국 시장에 대한 내용을 발표했고, 나는 그동안 스트롱의 활약을 숫자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런 발표 자료를 만드는데 별로 소질이 없어서 며칠 동안 이런저런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팀원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발표 자료를 만들 때 드는 기분은 마치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숙제하는 느낌인데, 이번에는 스트롱의 과거 10년 발자취를 되돌아보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취합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나름 재미있고 신선했다. 나도 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됐고, 그동안 우리가 했던 일들에 대해서 감으로만 알고 있었던 내용이 막상 데이터를 보니까 틀린 것도 있었고, 더 자랑해도 되는 것도 있었다.

실제 AGM에는 100명 이상의 LP와 잠재 LP 분들이 참석했는데, 무대에서 발표하면서 이분들을 보니까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들었고, 아주 짧았지만, 우리가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스트롱을 믿어줬던 LP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대에서는 계속 발표를 해야 해서, 이 순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 행사가 다 끝나고 집에서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다시 이 순간을 기억에서 소환했다.

2012년 8월 존과 내가 스트롱을 만들기로 결정했을 땐, 우리는 투자금을 모으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식해서 용감했는지, VC 펀딩을 너무 쉽게 생각했고, 실제로 첫 6개월 동안 단 한 푼도 못 모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실은 포기하려고 했는데, 몇 달만 더 해보고, 그래도 한 푼도 못 모으면 그냥 접자고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기적같이 며칠 후에 우리의 은인이 나타났다. 존이 전 직장에서 알게 된 아르메니아 출신의 부자와 –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rich한 부자이기도 한 – 우린 꽤 친해졌는데, 이분들은 캘리포니아의 Fresno라는 지역에서 호두와 아몬드 같은 농산물을 엄청 크게 유통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이분들은 tech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당시 우리 지인 중 가장 부자 중 하나였지만, 일부러 돈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펀딩이 안 돼서, 그 아들에게 우리가 하고 싶은 걸 잘 설명했고, 우리 처녀 펀드에 출자 좀 해달라고 사정했다(정말로 거지같이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기적같이 아주 흔쾌히 오케이했고, 본인이 출자하는 만큼 아버지도 설득해서 같이 하겠다고 했다. 우리 둘을 그동안 지켜봤는데 잘할 것 같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아주 기쁘게 투자하겠다는 정말 고마운 말과 함께.

이분들의 이름은 Leon(아버지)과 Ago(아들)이고, 스트롱의 첫 번째 LP들이다. 2012년 스트롱 1호 펀드에 이 두 분이 너무나도 고맙게 첫 번째 출자를 했고, 이후 2호, 3호, 4호 펀드에 모두 출자했다(우리 때문에 돈도 많이 벌었다). 이번에 AGM을 준비하면서 오래전 일들을 떠올렸고, 우리의 시작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봤는데, 이들은 우리의 은인들이었다. 이 고마운 캘리포니아 농산물 유통업자들의 믿음과 첫 번째 출자가 없었다면, 스트롱도 지금 없을 텐데, 행사가 다 끝나고 혼자 맥주를 먹으면서 생각해보니 새삼 고마운 느낌이 벅차게 올라왔다.

이번에 이 두 분은 서울 행사까지 날라오진 못 했지만, 앞으로 우리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마운 은인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Cheers and thanks to Leon and Ago.

피치 덱 분석

얼마 전에 피치 덱이라는 글에서 투자받기 위한 자료는 어떤 식으로 만들고, 어떤 내용이 들어가면 좋을지에 대해서 몇 자 적어봤는데, 꽤 많은 분들이 좋은 피드백을 제공했고, 좋은 질문도 개인적으로 많이 해 줬다. 그런데 그 글 쓴지 며칠 후에 TechCrunch에서 이런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한국도 요샌 가끔 Docsend로 피치 덱을 보내는 창업가들이 있는데, 미국은 꽤 많은 분들이 Docsend를 통해서 덱을 보낸다. 이렇게 하면 누가 자료를 봤고, 어디까지 봤고, 어떤 페이지에서 얼마큼 시간을 보냈는지 등의 분석이 가능하다. 드롭박스가 이 회사를 작년에 인수했고, Dropbox Docsend 팀이 수많은 피치 덱과 이 덱을 읽는 VC들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한 내용이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내용이 있는데,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고 이 팀을 만날지 말지 결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더 줄고 있다. 놀랍게도 3분 이상 안 걸린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고, 더 많은 자료가 투자자들에게 발송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평균 시간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실제로, 2021년 대비 2022년에는 투자자들이 피치 덱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이 24% 감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덱은 최대한 간결하게 만들되, 3분 안에 이 팀을 만나야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 수 있도록 아주 임팩트 가득한 내용으로 잘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전 에서 나열한 내용이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하는데,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다.

투자자들이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서 보는 내용도 데이터로 정리해보니까 참으로 흥미롭다. Docsend 팀이 320개의 자료를 분석해보니, VC들이 가장 자세히 보는 내용은 첫 번째가 제품, 두 번째가 비즈니스모델, 그리고 세 번째가 Purpose인데, 우리말로 해석하면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가장 적합한 것 같다. 주로 자료 초반에 있는 우리 사업에 대한 한 줄 설명 또는 엘리베이터 피치와도 비슷한 내용인데, 가장 짧은 내용이지만, 투자자들이 가장 먼저 또는 오랫동안 보는 부분이다. 즉, 전체 슬라이드를 다 보지 않고도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설명하는 이런 내용을 자료에서 찾아보고, 그 짧은 설명 자체가 별로이면, 그냥 미팅조차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나는 이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지만, 자료 초반에 “우리 회사는 X를 위한 Y를 하고 있습니다”라는 명확한 설명이 있으면, 훨씬 더 잘 집중하면서 자료를 완독하는 편이다. 반면에, 자료를 다 읽어도 뭐 하는 회사인지 잘 이해가 안 가면, 이 회사랑 미팅을 안 할 확률이 매우 크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발견은, 투자 유치에 성공하든 안 하든, 320개의 모든 자료에 있는 내용은 팀에 대한 설명인데, 모든 투자자나 창업가나 팀의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만큼 중요하고, 실은 스트롱은 가장 먼저 보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바로 이 팀에 대한 슬라이드다. 우린 위에서 말 한 제품이나 비즈니스모델도 보지만, 우리가 가장 자세하게 보는 부분은 팀이다.

결론은, 창업가들에겐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이라는 것이다. 사업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자료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 짧고 간결하게, 최고의 내용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서 투자자들에게 정성스럽게 보내도 읽힐 확률이 매우 낮고, 읽혀도 3분 이내에 미팅 여부가 결정된다. 그리고 미팅을 해도 실제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더 낮다.

그래도 피치 덱은 중요하니까 신경을 좀 써서 만들어야 한다.

좋은 자양분

얼마 전에 내가 오늘회라는 회사에 대한 을 쓴 적이 있다. 실은, 오늘회에 대한 글이라기보단, 미디어에 나온 내용이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내용을 강조하고 싶었다. 아직도 오늘회의 결말은 잘 모르지만, 이 회사의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최근에 많이 이직한 걸 보니, 회사가 많이 어렵긴 한 것 같다. 비슷한 이야기가 브룽을 운영하는 메쉬코리아, 그리고 산타토익을 운영하는 뤼이드에 대해서 들리고, 이 회사들 직원들이 다른 회사로 최근에 이직했거나, 아니면 창업한 사례를 몇 번 봤기 때문에, full story는 내가 모르지만,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긴 한 것 같다.

무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짧은 시간에 큰 투자를 받으면서 고속 성장했지만, 이후에 회사가 어려워져서 많은 직원들이 퇴사했다는 소식은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스타트업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더 좋지 않은 이미지가 형성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현상이 가져오는, 무시할 수 없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회사가 문을 닫으면, C급 레벨의 인재, 온갖 종류의 개발자, 마케터, 프러덕트 매니저들, 등 아주 좋은 인재들이 시장으로 방출된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인재라는 건, 단순히 투자를 많이 받고 고속 성장한 회사 출신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안에 대규모 투자를 받아서, 고속 성장한 회사라면, 그 기간의 매시간은 엄청나게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이분들은 본인들의 직무, 또는 직무와 상관없는 다양한 일들을 많이 경험했을 것이고, 엄청나게 다양한 내부/외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일하고, 논쟁하고,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상대했을 것이다. 초고속 성장 스타트업에서의 5년 경험은, 그냥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대기업에서의 30년 경험보다도 더 바쁘고, 값지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그만큼 더 많이 배울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내가 대기업에서 30년 일해 본 경험은 없지만, 내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좀 있는데, 솔직히 어쩜 이렇게 일을 못 하는지 가끔 놀랄 때도 많다).

우리는 페이팔 마피아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페이팔에서의 성공 경험을 기반으로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해서 수많은 유니콘을 만든 사람들을 일컫는데, 내가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워낙 유명한 창업가들과 회사들이 많다. 한국의 페이팔 마피아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은 다이얼패드 마피아가 있다고 생각한다. 스트롱 공동대표, 공동파트너 존도 다이얼패드 출신이고, 다이얼패드 출신 분 중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신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많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도 네이버 마피아, 카카오 마피아, 쿠팡 마피아, 토스 마피아, 배민 마피아 등이 탄생할 것이다.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제품을 만들어서 성장한 회사에서 보고, 듣고, 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본인들도 이런 경험을 복제해서 더 대단한 회사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성공한 회사 출신의 창업가들도 잘하지만, 비슷한 이유로 망한 회사 출신 창업가들도 잘한다. 이들은 고속 성장하는 회사에서 치열하게 보고, 듣고, 한 게 많아서, 이러한 배움과 경험을 선별적으로 복제해서 더 좋은 회사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망한 회사 출신 창업가들은 “이렇게 하면 위험하다”라는 시그널들을 잘 읽는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잘 안 된 회사의 경영진, 직원, 그리고 투자자들에겐 안타깝지만, 어쨌든 이 회사 출신의 직원들이 창업하는 걸 보면, 이런 현상은 미래를 위한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역투자자

경기가 좋고, 시장에 돈이 풍부하면, 투자가 쉽게 느껴진다. 이 시기에는 그 어떤 곳에 투자해도 웬만하면 망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빌게이츠가 얼마 전에 말했던 The Greater Fool Theory에 의해서 투자 심리가 움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건 바보지만, 내가 지불한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에 이걸 다시 구매할 더 큰 바보가 어딘가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러서, “현금이 가장 싼 자산이다.”라는 말이 안 되는 말을 너도나도 할 때는, 정말로 바보가 아니면 투자 대상과는 무관하게,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낼 수 있다.

문제는 이 반대의 시장 상황에서 발생한다. 특히나, 전혀 예상치 못 한 방향으로 시장이 흘러가거나,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시장 상황이 악화하면, 위에서 말 한 “더 큰 바보” 이론이 작동하지 않고, “내가 가장 병신이었어” 이론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상황이 이 정도까지 오면, 대중의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지갑을 굳게 닫고 더 이상의 신규 투자는 하지 않고, 이미 투자한 자산은 가격이 더 떨어지기 전에 팔아서 손절하는 것이다.

뭔가 익숙한 시나리오이다. 최근 4개월 동안의 시장 상황이 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올해 4월까진 시장이 과열됐고 이때까진 정말 스타트업이 부르는 게 값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이젠 VC가 부르는 게 값이 되어버렸다. 벤처 생태계에서는, 미국은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투자를 동결하거나,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고, 한국은 아직은 상황이 이 정도로 나쁘진 않지만, 아마도 곧 이와 비슷해지리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VC는 아예 전 직원이 두 달 휴가를 갔는데, 그 기간에는 신규 투자는 아예 안 할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다.

실은, 상황이 이렇다면, 대중을 따라가는 투자자들은 – 그리고, 전체 투자자의 90% 이상이 이런 성향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 다른 투자자들이 다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신규투자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본인들도 그냥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투자자들은 이런 불경기 상황을 역발상적으로 잘 활용해서 좋은 회사에 아주 싸게 투자를 더욱더 많이 하는 노력을 할 것이다. 워렌 버핏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남들이 욕심부릴 때 두려워하고, 남들이 두려워할 때 욕심부려라.”인데, 요새 같은 시장 상황에서 성공할 수 있는 투자자의 태도와 자세를 이 말이 잘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투자자들을 ‘역투자자(contrarian investor)’라고 부른다.

우리도 실은 2020년도 3월 ~ 9월 사이에 이런 역투자자의 전략을 매우 공격적으로 펼쳤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면서, 대부분의 VC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주춤했을 때가 있었다. 당시에 많은 투자자들이 신규 투자는 하지 않고, 기투자사들 관리에 집중했는데, 우린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신규 투자를 했다. 시장에 돈줄이 메말라지자, 대부분의 스타트업이 밸류에이션을 상당히 많이 할인해서 투자유치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너무나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역발상적인 투자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서서히 종식되면서, 큰 성과를 만들고 있다.

이번 불경기도 비슷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도 평소보단 시장을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투자하는 시드 자금을 다 쓰면, 다음 펀딩을 더 큰 VC에게 해야 하는데, 이 자금이 현재 시장에 별로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작은 투자금으로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팀에 선별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밸류에이션이 작년과 올해 초 보단 현저하게 낮아졌고, 장기적인 비전과 방향이 좋은 회사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같은 시기에 투자를 잘하면 나중에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역발상적인 역투자를 나만 알고 있는 건 아니다. 아마도 모든 투자자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대부분 다 입으로는 “이럴 때 투자하면 나중에 대박인데”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막상 그런 투자를 하는 분들은 항상 극소수이다. 즉, 이럴 때 좋은 회사에 싸게 투자를 잘하면, 정말로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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