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한 상장사 대표님과 즐거운 점심을 같이했다. 나는 이 분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투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젊은 분들이 한 아이디어에 꽂혀서, 처음에는 장난으로 뭔가를 시작했는데, 이게 취미가 되고, 취미가 열정이 되고, 열정이 사업이 돼서 성공한 전형적인 스타트업의 성장 이야기를 이분에게 직접 듣는다는 건 나에겐 영광 그 자체였다. 물론,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충분히 있지만, 창업자들의 founding story는 항상 다르고,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날의 대화는 내가 올 한 해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 가장 흥미롭고 배움이 많은 대화 중 하나였고, 그 감동과 여운이 며칠 동안 지속됐다.

이분은 지금은 상장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많은 직원분과 함께 하고 있고, 사업을 하면서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래도 사업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 사업도 잘 안되고 돈도 없어서 허덕이면서 오늘, 내일 하던 그 순간이라고 한다. 그땐 정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재미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변태적인 상황인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너무 재미있었다는.

그런데 이 말이 나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왜냐하면, 나도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도와 2012년도에 나에겐 이런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LA에서 뮤직쉐이크 북미사무소를 시작했을 때가 2008년인데, 돈이 없는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인 넥슨 아메리카의 작은 방 하나에 조촐한 사무실을 차렸다. 좁은 공간이었고, 모든 가구는 이케아에서 직접 사 와서 조립했지만, 그 방에서 단위 면적당 발산했던 에너지는 세계 최고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네 명은 내일은 없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다.
그리고 2012년도는 존과 스트롱을 시작했을 때이다. LA 코리아타운의 작은 사무실에서 우린 창을 등 뒤로 하고 나란히 둘이 앉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그땐 정말로 아무것도 없고, 자신감과 체력만 있었는데, 미국 서부 시간 오후 5시면 한국 시각 오전 9시라서, 오후 5시가 되면 둘이 번갈아 가면서 한국으로 전화를 돌리고,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LA에 있는 스트롱벤처스라는 투자사의 배기홍이라고 하는데요,,,”라면서 우리도 펀딩을 하고 투자할만한 회사들을 발굴했다.

생각해보면, 2008년과 2012년은 나에겐 정말로 힘든 시기였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자신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죽고 싶을 정도로 짜릿짜릿하게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 그 당시의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작고 허름한 사무실,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그냥 그때의 분위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사정이 훨씬 좋아졌고, 현재 사무실도 너무 좋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뮤직쉐이크와 스트롱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순간, 그 사람들과 그 사무실이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이제 5명인 회사가 언제쯤 토스나 당근마켓같이 커질 수 있을지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분들에게 그런 순간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으니까,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꼭 기억하라고 한다. 나중에 성공해서 더 커지면, 5명인 지금의 이 허접하고 힘든 순간이 매우 그리워질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