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워낙 다양한 분야의 회사를 만나다 보니, 비슷한 규모의 회사라도 그 밸류에이션은 천차만별인걸 자주 본다. 실은 비상장 회사의 가치는 정해진 산정 공식이라는 게 없어서, 말 그대로 갖다 붙이는 게 밸류에이션이긴 하다. 여기에서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는데, 좋은 회사 또는 펀딩을 잘 하는 회사는 주로 투자하고 싶어 하는 VC들이 많기 때문에, 펀딩 시작할 때부터 이미 밸류에이션은 높고, 한정된 라운드 금액에 많은 분들이 투자하고싶어하기 때문에, 경쟁이 발생하고, 경쟁의 결과로 결국 밸류에이션이 올라간다. 이와 반대로, 수치가 안 좋은 회사 또는 펀딩을 상대적으로 못 하는 회사는 투자하고 싶어 하는 VC가 아예 없거나, 딱 하나가 있다. 그러면, 이 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밸류에이션이 내려갈 확률이 높다. 투자하는 VC도 본인 외에 다른 투자자가 없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밸류에이션을 주로 깎고, 이에 대해서 창업가가 방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펀딩이 잘 안되는 우리 투자사 대표가, 제품도 없고 이제 팀 만들어서 아이디어 하나 있는 주변의 스타트업이 200억 원 밸류에이션에 투자를 받았는데, 왜 우린 제품도 좋고 매출도 나쁘지 않은데 투자 받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건지 하소연을 했다. 이분 말씀대로 이제 한국에서도 제품도 없고 수치도 없고, 이제 막 창업을 했는데 수 백억 원의 밸류에이션에 투자받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회사들을 보면 거의 다 이미 과거에 창업 경험과 나름 성공적인 엑싯 경험이 있는 창업팀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주로 이런 분들은 연쇄창업을 하면서 계속 더 큰 시장을 공략하는 경향이 있는데, 큰 시장과 수많은 up – down을 이미 경험한 창업팀이 만나면 제품과 수치가 없어도, 이 만남 차제로 밸류에이션은 올라간다. 어차피 모든 건 사람이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자금도 이런 좋은 사람에게 투입되기 때문에, 회사의 값을 객관적으로 매길 수 없는, 우리가 일하고 있는 이런 private한 시장에서는 밸류에이션이 높을 수 밖에 없다. 제품, 시장, 회사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경험을 이미 한 창업팀이라면 무조건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내 경험에 의하면, 이게 틀리는 경우도 많지만, 맞는 경우가 더 많았다).
여기에 이미 내가 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없는 회사의 가치가 1,000억 원대를 넘는 경우도 미국에서는 자주 본다. 아직 한국은 이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반대로 이런 경험이 없는 팀이 운영하는 스타트업은 수치가 애매하다면 밸류에이션은 상대적으로 낮고, 펀딩이 녹녹하진 않다. 이런 이유로 어떤 회사는 매출이 어느 정도 나는데도 50억 원 밸류에 투자를 받고, 어떤 회사는 이제 법인 설립 했는데 – 또는, 아직도 법인설립 전인데 – 200억 원 밸류에 투자를 받는 것이다. 이 경우,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오롯이 창업가에 대한 밸류에이션이고, 여기에 제품이 좋고 수치가 나오면, 더 높아진다.
물론, 경험이 있다고 해서 두 번째, 세 번째 창업에 성공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내가 데이터를 분석해보진 않았지만, 이 성공 확률은 50% 또는 이보다 조금 낮을 것 같다. 내가 과거에 몇 번 포스팅한 Quibi라는 회사가 대표적인 케이스인데, 엄청난 밸류에 엄청난 투자를 받았지만, 잘 안 됐고, 이런 사례가 찾아보면 너무 많다.
좋은 제품과 수치가 있는데도 투자를 못 받는데, 이렇게 이제 막 시작하는 다른 회사가 높은 밸류에 투자를 받는 걸 보면 좀 기운이 빠지고, 열 받지만, 이미 말 한대로, 이 게임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