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을 할 때 중요한 마음가짐 중 하나가 바로 유연함이다. 그 어떤것도 – 많은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 생각대로 풀리지 않고, 모든 가설은 틀리기 마련이고, 예측과 예상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그때 상황에 따라서 매우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창업가는 사업을 위한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은 항상 갖고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그냥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계획을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고, 그리고 어떻게 보면 즉흥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특히, 요새와 같이 경기가 안 좋고, 비즈니스 환경이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을 땐, 이런 사고와 행동의 유연함이 더욱더 요구된다. 내가 얼마 전에 구면인 창업가를 아주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분을 마지막으로 2년 전에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당시엔 시장에 돈이 넘쳐흘렀고, 이땐 창업가들이 모든 레버리지를 갖고 있던 seller’s market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었고,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에 투자가 진행됐다. 이 분도 내가 그때 봤을 땐, 현실보단 이상에 가까운 비전과 밸류에이션을 주장했다. 나는 패스했지만, 결국 본인이 원하는 이상적인 조건으로 다른 곳의 투자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만났을 땐, 이상보단 현실에 매우 가까운 비전과 밸류에이션 이야기를 했다. 그때 그 창업가가 맞나 스스로 물어볼 정도로 매우 ‘겸손’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돈이 시장에 넘쳐흐를 때 너무 높은 밸류로 너무 많은 투자를 받았고, 너무 많은 사람을 채용했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돈은 금방 다 썼고, 제품은 아직 제대로 안 나왔고, 결국 대부분의 인력을 정리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꿈과 이상 속에서 붕 떠 있다가 2년 만에 다시 현실이라는 냉혹한 세계로 돌아왔는데, 그래도 내가 놀랐던 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계속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업을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서 최선을 다하는 이 유연함은 높게 평가해 주고 싶었다.

이분과 같이 창업가들은 항상 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딘가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할 때마다 정신력이나 체력이 고갈되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사업이 너무 잘 되거나, 경기가 너무 좋거나, 시장에 벤처 자금이 넘쳐흐를 때는, 저 높이 이상에 더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지만, 요새와 같이 사업도 안 되고, 경기도 안 좋고, 돈줄이 마르고 있을 땐 현실과 매우 가까운 곳으로 기꺼이 내려와야 한다.

사업이라는 게 항상 이렇고, 실은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업과 인생 모두 현실과 이상 그 어딘가에서 계속 분주히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최적의 결과를 가끔은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