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하의 현자 Warren Buffett에 대해서 는 내가 이 블로그를 통해서도 여러번 언급을 하였고 개인적으로도 많이 존경하는 투자자이자 entrepreneur이다. 워튼에서 한 학기만 더 했어도 Berkshire Hathaway를 방문해서 버펫 형님과 간담회를 통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을텐데 아쉽게도 그전에 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워렌 버펫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뉴스거리를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자식들에 대한 기사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 만큼은 자주 볼수가 없다. 아니, 버펫의 아들에 대한 소식은 언론을 통해서 전혀 접할수가 없다. 그런데 얼마전에 출간된 “Life is What You Make It”이라는 책은 버펫의 아들인 Peter Buffett씨가 쓴 수필 형식의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아버지인 오마하의 현자가 자식들 한테 물려준 유산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매우 세련된 표현을 썼는데, 그는 19살이 되었을때 아버지가 하고 싶은걸 다 할 수 있을만큼의 유산을 물려주었지만 그렇다 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영어 원문은 “enough to do anything, but not enough to do nothing”이다. 그 유산은 돈이 아니었고 시골의 작은 농장이었다. 당시 스탠포드 대학에 서 공부하고 있었던 대학생인 그는 농장을 팔고 그 돈으로 아버지 회사인 Berkshire Hathaway 주식을 샀다. 그리고 그는 이 주식을 팔아서 약 9만 달러를 현금으로 챙긴 후 학교를 중퇴한다. (당시 9만 달러였던 주식의 오늘날 가치는 참고로 7,200만 달러라고 한다. 하지만 피터는 후회하지 않는다 고 한다. 과연 그럴까?)
학교를 중퇴하고 피터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서 작은 음악 스튜디오를 차리고 거기서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였다. 피아노도 쳤고, 작사도 하고 음악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알바도 뛰고 무상으로도 일을 하곤 하였다. 큰 돈을 벌지는 못하였지만 다행히도 아버지가 주신 유산덕에 어렸을 적부터 꿈이었던 뮤지션이 되기 위해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갔 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혹자는 이 기회가 우연을 가장한 워렌 버펫이 뒤에서 만들어준 기회라고 한다) 당시 설립된지 얼마 되지 않은 MTV라는 음악 채널과 작업을 시작 하였고 그는 MTV와 같이 성장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에미상 수상의 영광을 얻는 유명한 작사/작곡 뮤지션으로써 명성을 쌓을 수가 있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먹고 살기 위해서 음악을 해야했다면 중간에 포기했을겁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아버지가 저한테 주신 유산을 너무너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그는 한다. 이재용씨는 아버지한테 이런 고마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씨한테 이런 고마운 생각을 한번이라도 해봤을까?
워렌 버펫은 그의 아들한테 꿈을 쫓기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그렇지만 평생동안 놀면서 살기에는 부족한 만큼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여기서 나도 한번 생각을 해본다. 과연 우리 아버지가 갑부여서 (확실히 말을 하지만 나는 부잣집 에서 자라지 않았다) 나한테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의 유산을 주셨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regret:후회” 라는 말을 매우 싫어한다.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짧은 삶을 뒤돌아 본다면 “아…그때는 이걸 한번 해볼걸” 이라는 후회는 가끔씩 한다. 나한테 피터 버펫과 같은 기회가 있었다면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는 길을 걸었을 거 같다. 국민학교때 처음으로 잡았던 테니스 라켓…나는 남들보다 테니스에 소질이 있었고 어렸지만 힘들고 고된 육체적 트레이닝을 즐기면서 운동을 하였다. 한국인 최초의 Grand Slammer – 테니스에는 Grand Slam이라는 4개의 메이저 대회가 있는데 열리는 순서대로 나열하면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대영 오픈)과 US 오픈이 있다 – 가 되고 싶었지만 신체적 조건의 열세 (나는 키가 작다)와 한국 부모들의 운동 선수에 대한 달갑지 않은 눈초리, 이러한 복합적인 요소들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를 하고 공부를 해서 일을 하는 방향으로 career path를 전환하였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능력있는 테니스 선수가 못 되었을 경우에 는 먹고 살 방법이 딱히 없다는 우려와 내 스스로의 운동선수의 자질에 대한 불신이었지만 요새도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때 정말로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프로 테니스 선수의 길을 걸었으면 내 인생이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다 시 태어나서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꿈을 쫓을 수 있을 만큼의 유산을 물려주신다면 꼭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테니스 선수.
Jerry Koh
혹 흥미로워하실까해서..
'09.9월에 이재용 부사장(당시 전무)은 캘거리 기능올림픽에서 기자들과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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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무는 '사는 것이 피곤하고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 "저는 사는 게 피곤하다고 불평할 자격이 없다"며 "부담스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운 좋게 좋은 부모를 만나고 훌륭한 선배(경영진)를 만나서 혜택을 많이 보고 있다"고 답했다.
Anonymous
Dude, you sucked any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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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그때 주위/부모님 의견 무시하고 한번 해볼걸하고 요새 참으로 많은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빨리 돈좀 벌어서 senior tour라도 참가할까….
Anonymous
아래 홍콩에서 일한다면서 글 남긴 익명의 사람인데(ㅋㅋ) 저라면 바이올리니스트요. 제가 전공하고 싶다니까 저희 어머니 강력하게 두 마디 하시더라구요. 첫째, 우리집은 돈이 없다 공부해라 둘째, 내가 보기에 너 잘하긴 해도 그냥 딱 나중에 바이올린 선생님 할 정도다 공부해라. 그래도 바이올린 계속 하고, 줄리어드 음대 같은 좋은 학교 나왔더라면 장영주 같은 세계적인 스타는 아니라도 적어도 서울 시향에서 퍼스트 바이올린 파트는 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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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동네 테니스 챔피언으로 부족해…프로해야해…
Bruce1974
기홍아.. 넌 이미 동네 테니스 챔피언이다.. 걱정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