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스타트업 베끼는 건 우리한테 매우 익숙한 현상이다. 그리고 최근에 대기업뿐만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한국 스타트업들을 잘 보호하고 육성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정부마저도 스타트업을 베끼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모두 다 안타까운 현상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대기업이 대규모 자본과 언론플레이로 스타트업을 카피하는 현상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항상 주장해왔듯이, 몸집이 크고, 돈이 많다고 해서 작은 회사가 만든 것을 단시간 내에 베끼는 건 쉽지 않다. 물론, 작은 회사가 좋지 않은 제품을 만들었다면 대기업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베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생각은 요새 더욱더 굳혀졌다. 최근에 대기업 임원, 그리고 스타트업으로 시작했지만, 이젠 수조 원의 거래를 일으키는 회사의 임원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들이 틈새시장과 새로운 기회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 자세히 들으면 들을수록, 아직도 작고 민첩한 스타트업들한테는 기회가 너무 많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우리가 개고생해서 힘들게 발견한 이 기회의 시장에 다른 대기업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우린 돈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라는 걱정을 많이 한다. 실은, 이들은 틀린 질문과 걱정을 하는 것이다. 일단 회사가 커지면, 작은 스타트업같이 민첩하게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폭이 매우 적기 때문에, 아무리 특정 시장의 미래 잠재력이 크더라도, 큰 회사의 관료주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서, 올라갈수록 더 깐깐한 결정권자들한테,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앞으로 엄청나게 커질 시장의 가능성을 설득하는 건 담당자의 커리어를 건 의지, 시간, 그리고 내부영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쳐서 내부 승인을 받고, 필요한 자원과 돈을 할당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시장과 기회의 크기가 의미 있어야 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틈새시장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큰 회사의 결정권자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이 기회와 시장과는 객관적으로는 상관없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우리의 메인 비즈니스를 더 잘할 수 있는데, 소중한 자원을 불확실한 신규시장에 투입하는 거 보다, 우리가 잘 하는 쪽에 집중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와 “이거 괜히 내가 하라고 승인했다가, 나중에 잘 안되면, 내 모가지 날아가는 거 아니야?”이다. 실은, 회사의 창업가나 오너가 아니면, 신규 시장 보다는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한 이슈가 된다.
요새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카카오뱅크를 보면서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다. 실은 카카오뱅크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생긴 건 아니다. 이미 수년 동안 준비를 해왔고, 같은 시장에 있는 분들한테는 앞으로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는 불 보듯이 너무나 뻔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전통적인 은행들은 그 어떠한 적극적인 대처도 하지 않고, 지켜만 본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나도 다른 은행에서는 내부적으로 그동안 어떤 대화들이 오갔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분들의 말과 행동들을 종합해서 추측을 한번 해보면, 아마도 “모바일이 대세이긴 하지만, 돈은 조금 다르지. 일단 카카오뱅크 출시되는 거 보고, 그다음에 우리도 뭔가 방향을 정해도 늦진 않을 거야. 우리가 이 업무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왔는데, 뭐가 갑자기 바뀌겠나.”라는 생각을 한 거 같다.
그러니까, 이미 시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안정적인 플레이어는 ‘일단은 두고 봅시다‘ 전략을 취하게 되는 거 같다. 그리고 작은 스타트업이 공략하는, 작지만 가능성이 있는 시장이, 본인들이 생각하는 수준까지 올라오면, 그때 움직인다. 하지만, 공룡이 움직이면 매우 느리다. 한발 디딜 때마다 시간이 걸린다. 큰 회사가 그 시장으로 들어왔을 시점에는, 이미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고, 그 새로운 게임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은 더욱 달라진다. 그리고, 이미 그동안 작은 스타트업은 수천 번의 실험과 product iteration을 통해서,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막상 몸으로 부딪혀 해봤을 때만 느끼는 진입장벽과 해자(moat)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나는 항상 빠르고 민첩한 자들이 승리할 기회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Jiyeon Choe
관점의 차이일수도 있지만 하나의 단면만을 보고 분석한 글인거 같아요.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는 것만 보려는 것.. 초기 스타트업이 하는 고민도 마찬가지고요. 글을 읽으며, ‘그럼 미국 실리콘밸리는 어떤가?’라는 생각으로 대비를 해보게 되네요. 실콘이 정답은 아니지만, 베끼는 행위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 미국 사회와 그렇지 않은 한국에서 소자본 창업자들의 고민은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Kihong Bae
글쎄요…어떤 각도에서 미국은 베끼는 행위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지…저는 오히려 한국만큼 서로 베끼는게 실리콘밸리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베끼는 사람 입장에서, 베끼는거와 인수하는거에 대한 고민을 매우 진지하게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