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판매하는 B2B SaaS 제품은 기업에서 기꺼이 돈을 낼 수준까지 완성도를 올리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우리도 30개가 넘는 B2B SaaS 회사에 투자했는데, 대부분 회사는 제대로 된 베타 제품을 만드는데 6개월에서 12개월이 걸린다. 이렇게 열심히 만든 제품을 일반적인 B2C 제품같이 유료 온라인 마케팅을 한다고 고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다니면서 온몸으로 영업해야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영업해서 첫 번째 고객을 확보하는 데에도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우리 투자사들의 경우, 첫 번째 유료 B2B 고객을 온보딩하는데 평균 3개월~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제품을 개발하고 첫 매출을 만들기까지 거의 1년에서 1년 반 정도가 걸리는데, 이 기간에 없는 살림으로 생존하는 건 매우 어렵다.
많은 B2B SaaS 회사들이 이렇게 늦게 발동이 걸리고, 아주 천천히 성장하지만, 나름 좋은 면도 많다. 일단 기업을 대상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한 번 고객이 되면 웬만하면 이탈이 없다. 또한, 기업들이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라서 불경기라도 계속 사용할 확률이 높고, 예측할 수 있는 꾸준한 매출을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점이 B2B SaaS 사업의 매력이라서 시간과 인내심이 많이 필요함에도 오늘도 많은 창업가들이 이 분야에서 좋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판매하고 있는 것 같다.
위에서 말한 이유로 인해서 기업 소프트웨어는 이탈이 쉽게 발생하지 않지만, 최근에 초기 B2B SaaS 스타트업이 골치 아파하는, 그리고 내가 요새 이 분야에서 목격하고 있는 이탈 현상이 있다.
많은 B2B SaaS 스타트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one stop B2B 솔루션인데, 아마도 SAP, 오라클, 또는 세일즈포스를 많은 창업가들이 벤치마킹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처음부터 이런 대형 기업용 솔루션을 만들 순 없기 때문에, 거의 모든 B2B SaaS 창업가들은 아주 좁고 날카로운 기능 위주의 제품으로 micro-vertical을 공략한다. 예를 들면, ERP, SCM과 CRM 제품이 제공하는 이미 거대하고 복잡한 기업용 솔루션에 포함하고 있는 수많은 기능 중 하나인 연락처 관리, 이메일 관리, 영업 대시보드 관리나 문서 관리만을 위한 작은 버티칼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회사원들이 몇 가지 작업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나름 시장에서 인지도가 생기고 돈을 내는 기업 고객이 생긴다.
여기까진 좋은데, 이런 기능 위주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고객 입장에서는 회사 일을 잘하려면, 여러 가지 작업을 잘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러 스타트업들이 개발해서 제공하는 다양한 기능을 유료로 사용하는데, 언젠간 모든 기능들을 연동하고 통합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예를 들면 A 스타트업의 캘린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B 스타트업의 이메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C 스타트업의 알림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 모든 소프트웨어를 통합해야지만 사용자의 회사 생활이 편해지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특정 기능을 만드는 초기 스타트업은 그 기능은 누구보다 완벽하게 만들지만, 다른 제품들과의 통합에 있어서는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B2B SaaS 고객은 결정을 해야 한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업무에 필요한 중요한 기능을 잘 만드는 스타트업의 제품들을 여러 개 사용하고 있고, 각 기능만을 보면 품질이 월등해서 만족하지만, 모든 제품이 각자 따로 돌아가면서 통합이 안 되니 오히려 생산성은 저하 되는 걸 느낀다. 특히 이미 레거시 ERP나 CRM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회사라면, 오래된 코드와 새로운 코드의 통합은 더 어렵다.
여기서 많은 B2B SaaS 스타트업 고객들의 이탈이 발생하는 걸 요새 자주 본다. “너무 좋은데 우리 기간계 시스템과 통합이 안 돼서요.” , “제가 작은 스타트업들의 제품을 정말 많이 사용하는데요, 다들 통합이 안 돼서 그냥 옛날에 사용하던 엑셀이 더 생산성이 좋은 것 같아요.” , 뭐 이런 피드백을 굉장히 많이 듣고 있다.
어렵게 확보한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제품이 제공하는 가치가 너무나 월등하기 때문에, 다른 제품들과 통합이 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사용해야 하는 제품을 만들면 된다. 이 정도의 제품을 만들었다면, 이 기업 고객은 아마도 평생 우리의 고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제품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른 B2B SaaS 제품과의 연동과 통합을 감안해서 설계하고 개발하는 것이다. 다른 제품들을 잘 연구하고 공부해서 고객사가 직접 연동할 수 있는 다양한 API를 제공하면 앞으로 통합성의 문제 때문에 이탈하는 고객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렵게 개발하고, 더 어렵게 확보한 기업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선 아주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기본이고, 다른 제품과의 연동과 통합은 더 중요하다. 안 그러면 결국엔 모두 다 이탈해서 원래 사용하던 아주 오래되고 구닥다리지만, 업무를 위한 많은 기능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제품으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