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에게 물어보는 매우 흔한 질문 중 하나는 투자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업가의 자질에 대해서이다. 너무 흔한 질문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답도 광범위하다. VC마다 보는 게 다르고, 투자하는 철학이 다르고, 성향도 다르기 때문에 모든 창업가가 다르듯이, VC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업가의 자질 또한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이 천차만별의 자질은 여기에 나열하기에는 너무 많다.
그런데 얼마 전에 존이랑 회사를 검토하면서, 우리가 투자를 시작할 때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그동안 잘 되는 회사와 안 되는 회사를 옆에서 지켜보고 경험한 후에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럼 창업가의 자질 두 가지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창업가의 이런 자질에 대해서도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동의했다.
첫 번째는 펀드레이징 능력이다. 우리가 워낙 초기에 투자하니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 아이디어를 실행해서 뭔가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우리가 지금까지 투자한 회사의 대표들은 대부분 이런 실행력은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실행력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의 작은 투자금으로 흑자 전환이 바로 되는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초기 시장 반응을 테스트하고, product-market fit을 조금 찾은 후에는 더 많은 사람과 자원을 기반으로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데, 이걸 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 이 단계까지 왔다면 일단 창업가가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는 통한다는 게 증명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봤자 매출이나 사용자 수 같은 수치와 실적은 놀랄 정도는 아니다. 즉, 객관적으로 턱없이 부족하고 제한적인 트랙션을 기반으로, 내가 원하는 밸류에이션에 가장 근접한 조건으로 후속 투자유치를 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투자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대표이사의 능력이다. 아마도, 주위를 잘 보면, 실적이 나쁘지 않은 비즈니스를 운영하지만, 이상하게 펀딩을 잘 못 받는 대표가 있는가 하면, 실적이 별로지만 펀딩은 잘 받는 대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점점 더 대표이사의 펀드레이징 능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스타트업이라는게 up and down이 심하고, 어제 허덕거리던 비즈니스가 오늘 갑자기 리바운드할 수 있다는걸 여러 번 경험했다. 그리고 이런 힘든 과정을 계속 버티면서 언젠가 안정적인 비즈니스를 만들려면, 중간 중간에 여러 번 수혈(=투자)을 받아야 할 텐데, VC한테 이상적이지 못 한 실적으로 투자를 받으려면 대표이사의 돈 끌어모으는 능력이 출중해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능력은 단순한 피칭 능력이 아니다. 자료 잘 만들고 피칭 잘하는 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투자자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고, 여러 투자자 사이에서 서로 기분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밀고 당기기를 얼마만큼 잘할 수 있고, 포커페이스로 외줄 타기를 얼마만큼 아슬아슬하게 잘 할 수 있는지, 뭐 이런 종합적인 예술과도 같은 능력을 말한다. 실은, 대표의 펀드레이징 능력은 정량적으로 점수를 매길 수는 없다. 그래서 마치 성격 테스트와 관상을 보듯이 창업가를 정성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우리한테는 오히려 이게 더 쉬운 거 같다.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 사람과 조금 교류를 하다 보면, 펀드레이징을 잘할지 못 할지가 금방 판가름 나는 거 같다.
그래서 스타트업 대표들은 좋은 제품을 만드는 실행력이 뛰어나야 하지만, 그걸 하기 위해서 계속 투자를 받아올 수 있는 펀드레이징 능력도 겸비해야 한다.
또 하나의 자질은 좋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이 중요하고, “당신이 지금 힘들게 채용해서 만드는 team이 바로 당신이 만들 회사 그 자체임을 잊지 말아라”를 나는 항상 강조하지만, 여기서 이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잘 실행하고, 잘 만들면, 회사는 어느 수준까지는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본인이 회사를 시작도 하고, 시작한 회사를 유니콘으로 직접 성장시킬 수 있는 창업과 경영의 능력을 겸비하고 있는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위대한 비즈니스맨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창업가는 회사가 어느 수준까지 커지면, 본인과 다른 경험, 능력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채용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우리 스타트업보다 훨씬 큰 조직에서 더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들을 전쟁터로 데려오기 위해서는 대표이사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 투자사 중에는 회사의 실적도 좋고, 고액 연봉을 줄 수도 있지만 좋은 사람을 채용하지 못 하는 회사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연봉도 많이 못 주고, 회사의 실적도 별로지만, 누가 봐도 좋은 인재를 쉽게 모셔오는 회사도 있다. 이건 전적으로 대표의 능력이다. 이런 대표들을 보면, 좋은 학교에서 공부했고, 과거에 좋은 직장에서 일해서, 동문이나 직장동료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좋은 인재를 채용하는 분들도 있다. 달변가라서 회사의 비전을 잘 팔거나, 삼고초려를 통해서 좋은 인재를 모셔오는 분들도 있다. 또는, 대표가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존경받는 개발자라서, 그냥 좋은 개발자를 자석같이 끌어모으는 분들도 있다. 방법은 상관없지만, 좋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대표는 큰 비즈니스를 만들 수 없다.
펀드레이징 능력과 채용 능력. 전 세계 유니콘 비즈니스를 보면 그 답이 나온다. 그 어떤 유니콘 비즈니스도 이 두 가지 능력이 없는 창업가가 시작하진 않았다.
seso
전 투자자는 아니지만 스타트업 씬에 참여하여 일하다보니 말씀하신 내용이 굉장히 많이 동감가네요. 특히 실행력도 중요하지만 펀드레이징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거에서 매우 깊이 동감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Kihong Bae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Mihee Kim
오늘도 좋은글 정말 감사합니다. 더 많이 생각하고, 반성하게 되네요!
Kihong Bae
고맙습니다^^
잠만보 (@kate20131006)
대표님 글 잘 읽었습니다. 대표의 펀드레이징 능력 관련해서 “성격 테스트와 관상을 보듯이 창업가를 정성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시간 나실 때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피칭과 밀당을 잘하고, 포커페이스이고 등등의 attribute을 가진 창업자들을 어떻게 파악하시나요?
Kihong Bae
안녕하세요. 글에서 말했듯이 이건 뭔가 정량적으로 measure 하는게 힘든거 같아요…(그냥 사람을 많이 만나봐서, 보면 안다고 말씀을 드리면, 이것도 무슨 사기꾼 같구요 ㅎ). 저는 대표의 말, 표정, 행동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내가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내가 많이 알고, 잘 할 수 있다는 걸 언어적, 비언어적 방식으로 상대방한테 전달을 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실은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은 피칭도 잘하고, 밀당도 잘하고, 포커페이스도 갖고 있지만, 그 반대는 항상 성립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Jong-won Lee (Jongwonia)
비단 창업자 뿐만 아니라 연구자가 새겨들어야 할 말씀인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생각 공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Kihong Bae
제가 연구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