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초기 스타트업들과 같이 일 하다 보면, 많은 걸 매일 배우는데, 그중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유연함이다. 초기 스타트업은 항상 목 마르고, 배고파서, 항상 아쉬운 점들이 많다. 돈이 부족해서 자금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다. 많은 일을 하고 싶지만, 사람이 부족해서 멀티태스킹 할 수 있는 인력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서 하루가 48시간 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다. 이렇게 항상 자원이 부족하지만, 이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게 작은 회사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함이라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 중 단기간에 목표 금액을 투자받는 회사도 있지만, 대부분 투자를 유치하는 데 3개월은 걸린다. 물론, 이보다 더 오래 걸리는 회사도 많은데, 6개월에서 심지어는 1년 동안 펀드레이징을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특히 작년 한 해 코비드19 때문에 실적이 좋지 않았던 회사들은 성장 모멘텀을 일시적으로 잃었기 때문에 투자 받는 게 더욱 어렵다.

어떤 회사는 투자 유치 목표 금액이 50억 원이 넘었고, 우리랑 전략도 잘 만들고, 많은 고민을 한 후에 VC들과 미팅을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했던거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고, 거의 6개월 넘게 이 지루하고 우울한 싸움을 하면서 모두 많이 지쳐버렸다. 실은 이 투자가 성사되지 않으면, 2021년도 목표 매출 달성이 힘들고, 여러 가지 내부 계획 실행도 힘들어지게 된다. 특히 채용을 못 하므로, 회사는 굉장히 어려운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 순간에 이 회사와 경영진의 유연함이 잘 작동하기 시작했다. 굳이 안 되는걸 계속하기 보단, 창업팀은 올 해 외부 투자를 못 받는다는 가정을 하고, 추가 자금 없이 버티고, 심지어는 조금씩 성장할 수 있게 비즈니스 모델과 운영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꿨다. 그리고 50억 원을 한 번에 투자 받는게 아니라, 아주 작게 5억 원 또는 10억 원 단위로 점진적으로 받는 펀드레이징 전략을 다시 수립했고, 여기에 맞춰 사업 KPI도 초단기적으로 잘게 썰어서 전면 수정했다. 수년 동안 해오던 운영 방식과 사업 모델을 이렇게 단시간 안에 바꾸는 건, 유연하지 못하면 정말 할 수 없고, 특히 대기업이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유연함이 정말 좋다.

유연함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나 자신을 언제든지 맞출 수 있는 준비된 자세이다. 자존심 강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찬 창업가들에게 이게 생각만큼 쉽진 않다. 오랫동안 계획한 일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우선순위를 과감하게 조정해야 하는 결정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회사의 모든 자원을 재배치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들과 생각지도 못 했던 일들을 해야 한다. 그래도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연해야 하는데, 이건 아마도 스타트업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