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용어는 아니지만, 부동산 용어 중 “알박기”라는 말이 있다. 사전을 보면 “재개발 예정 지역의 알짜배기 땅을 미리 조금 사 놓고 주변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땅값을 많이 불러 개발을 방해하며 개발업자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내려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내가 일하는 이 분야에서도 알박기와 비슷한 패턴을 최근에 몇 번 봐서 몇 자 적어본다.

어떤 스타트업은 VC 투자 말고 기업들로부터 투자를 받는다. 우리 같은 VC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투자하지만, 많은 기업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투자하고, 한국에서는 이런 투자를 “SI성(Strategic Investment)” 투자라고 한다. VC가 아니라 기업으로부터 투자받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스타트업의 사업이 특정 대기업의 중장기적 사업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면, 투자를 통해서 서로 시너지를 만들고, 대기업보다 자원은 부족하지만, 훨씬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스타트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아서 이런 파트너십이 만들어질 수 있다. 또는, VC로부터 투자를 받지 못해서, 여기저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 대기업이나 스타트업 모두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서로 도움이 되는 비즈니스를 같이 하다가, 결국 인수로 이어지는 경우가 이런 좋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은 exit을 하고, 더 큰 기업의 더 많은 자원을 활용해서 지금과 다른 차원의 비즈니스를 전개할 수 있다. 대기업은 직접 하려면 시간과 돈이 생각보다 많이 필요한 사업을, 그동안 투자도 했고, 호흡을 어느 정도 맞춰본 스타트업을 인수해서 본격적으로 펼쳐볼 수가 있다. 그리고 혹시나 미래에 다른 경쟁기업이 이 스타트업을 인수해서 우리한테 위협이 될 수 있는 리스크를 미리 제거하는 차원에서도 괜찮은 전략이다.

그런데 가능하면 스타트업 입장에서 피했으면 하는 상황도 나는 자주 본다. 매출도 거의 없고, 팀도 과거 창업 경험이 없는데, 기업가치 100억 원에 투자유치를 하는 스타트업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떤 근거로 회사 가격이 이렇게 비싸냐고 물어보니까, 이전 투자자로부터 기업가치 80억 원에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번 라운드는 100억 원 정도가 돼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조금 더 상황을 들어보고, 주주명부도 보니까, 이전에 한 번 투자를 받았는데, 어떤 기업한테 전략적인 투자를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나는 잘 모르는 기업이다. 그리고 이 기업은 밸류에이션은 상관없이 최대 5,000만 원까지만 투자하는 정책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창업팀은 평소 본인들이 원했던 80억 원이라는 밸류에이션에 5,000만 원을 투자받아서, 0.65%라는 매우 작은 지분이 희석됐고, 잘 받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실은, 겉으로 보면 잘 받은 투자가 맞다. 높은 밸류에이션에 지분 희석은 최소였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 투자 받을 때 발생한다. 일단 5,000만 원은 요새 금방 쓰는 돈이다. 다음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수치를 만들어야 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이 적은 금액으로 의미 있는 수치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 특히, 이 회사는 80억 원이라는 기업가치에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후속 투자는 이보다 더 높은 가치로 받아야 하는데, 적은 돈으로 100억 원짜리 회사를 만드는 건 어렵다. 나 같은 VC는 이 회사의 기업가치를 훨씬 낮게 평가할텐데, 그러면 후속 투자가 down valuation으로 진행이 되어야 하고, 이렇게 되면 여러 가지로 회사에 불리하다. 더욱더 골치 아픈 건, 이전에 받은 전략적인 투자계약서를 보면, 후속 투자 주식가격이 더 낮아지면 반드시 기존투자자의 동의를 받아야하고 – 또는, 아예 후속 투자는 더 낮은 밸류에이션에 받지 못하게 하는 계약서도 있다 – 그렇게 될 경우, 스타트업한테는 완전히 불리하게 걸리는 리픽싱이라는 독소조항도 있다. 즉, 주식 가격이 낮아지는 만큼, 그리고 낮아지는 정도에 따라서 이전 투자자들이 회사의 지분을 더 받게 되는 조항인데, 80억 원짜리 회사가 만약에 20억 원의 밸류에이션으로 후속 투자를 받게 되면, 0.65%를 갖고 있던 기존투자자에게 회사 지분이 터무니없이 많게 재할당되는 복잡한 공식이 있다.

겉으로 보면, 밸류에이션 상관없다는 말이 굉장히 창업가나 회사에 우호적으로 들리지만, 이런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이런 상황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투자도 부동산의 알박기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 투자자가 나쁜 마음을 갖고,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면, 결국에 스타트업은 망하거나 아니면 헐값에 전략적 투자자한테 넘어가게 된다.

실은, 위 예시의 숫자는 조금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만들었고, 내가 아는 대기업의 투자자는 이런 분들이 없지만, 이런 상황은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어서 조심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