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여의도에서 하는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 내가 행사같은거 별로 안 좋아해서, 원래 참석을 잘 안 하고, 코로나19 이후로는 아예 사람들 모이는 장소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날 행사에는 내가 평소 좋아하고, 직접 만나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던, 업계의 유명하고, 통찰력 깊은 투자를 한 해외 VC들이 참석해서, 거의 1년 반 만에 30명 이상 참석한 행사에 물리적으로 직접 갔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해외 VC는 직접 참석하는 게 아니라 줌을 통해서 원거리로 패널 토의를 하고, 이 패널토의를 보는 청중만 직접 참석하는 행사였다. 실은, 가서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했던건데,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다. 바쁜 사람들이 굳이 위험하게 2주 격리까지 하면서 이 행사에 오기 위해서 한국으로 올리가 없는데, 내가 너무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초대형 화면을 통해서 멀리 실리콘밸리에 있는 VC들이 줌으로 이야기하는걸 보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화질과 음질 너무 좋았고, 중간에 일시적인 에러가 발생해도, 금방 다시 조절하고, 행사를 진행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화상 행사를 하기 위해서 무대 오른쪽에 마련된 장비를 봤는데, 정말 간단했다. 노트북 한 대가 전부였고, 여기에 연결된 음향 기기는 모두 행사장에 기본적으로 준비된 스탠다드 장비였다.
이걸 보면서,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고,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가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20년 전만 해도 이런 헤비한 화상 행사를 진행하려면, 폴리콤 장비나 시스코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를 구비해야했고, 이걸 운영하고 관리하는 인력 또한 별도로 필요했다. 2000년대 초반 실리콘밸리 보안 스타트업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국의 은행과 컨퍼런스 콜을 자주 했었는데, 큰 회의실 중앙에 시커먼 폴리콤 장비를 통해서 국제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 화상 솔루션까지 도입해서 회의실 하나를 화상회의 전용 룸으로 만들었는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비하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데 혹시나 연결이 끊기거나 에러가 발생하면 즉시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에 기술지원팀 또한 별도로 필요했다. 그리고 회의하는 모든 참석자가 이런 무겁고 비싼 장비가 있어야 했다.
저 멀리 실리콘밸리의 VC가 줌을 통해서 한국 여의도의 청중에게 말하는 걸 보니, 20년 전의 폴리콤 회의실이 계속 떠올랐고, 이젠 이런 거추장스럽고 비싼 장비 대신, 노트북, 헤드셋, 그리고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저렴한 SaaS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이게 가능하다니, 기술이 정말 좋아졌다는 생각을 행사 내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