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서는 그 구성원의 위치, 능력, 재력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즉 1인 1표 원칙이다. 이와는 달리, 그리고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재력이 가장 중요하고, 돈이 표이기 때문에 1원 1표 원칙이다. 한국과 미국 회사에 동시에 투자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한국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게 몇 개 있는데, 그중 가장 바꾸고 싶은 건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내용과 방식이다.
투자는 자본주의 시장의 꽃 중 하나인데, 현재 한국 표준 투자 계약서의 투자자 동의 사항 내용만큼은 자본주의보단 민주주의 원칙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 같다. 쉽게 말하면, 회사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웬만한 사항에 대해서는 모든 주주의 전원 동의를 받아야 하는 1인 1표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 회사에 15억 원을 투자해서 지분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1.5억 원을 투자해서 1.5%를 보유하는 투자자나 회사에 대한 주주의 권리는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게 항상 불만이고, 내 주위의 더 많은 위험을 부담하면서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해서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한 VC들도 불만이다. 회사의 지분을 더 많이 갖고 있으면, 지분이 작은 다른 주주보다 회사에 대한 입김이나 결정권이 더 세야 하는 게 당연해서 현재 시스템의 1주주 1표 원칙은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10년 넘게 한국에 투자했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이걸 지금 이야기하는지 물어본다면, 벤처 시장 상황이 좋아서 돈도 넘치고, 회사들도 (겉으로는) 성장할 땐, 주주들이 회사가 하려는 걸 크게 반대하는 상황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회사 대표가 스톡옵션을 부여하거나, 사업 방향을 바꾸거나,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자산을 매입하거나, 영업에 어느 정도 규모의 자금을 사용하면 그냥 웬만하면 따지지 않고 전원 동의를 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시장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서 대세에 큰 지장이 없는 작은 사항 하나에 대해서도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고, 어떤 주주들은 동의하지 않아서 회사가 힘들어하는 걸 너무 많이 보면서 1인 1표 계약서에 대해 매우 큰 회의감이 들고 있다.
더 많은 투자금을 더 많은 주주로부터 받으면서, 사소한 결정에 대해 모든 주주의 동의를 받기 위해서 사업할 시간도 없는 대표이사가 거의 한 달 동안 시간을 낭비하는 걸 보면서 요새 이런 회의감이 더 커지고 있다. 우리는 주로 투자사의 지분 10% 내외를 확보하는데, 나는 10%를 가진 스트롱과 1%를 가진 다른 투자자의 의견이 달라서 스톡옵션 발행하는데 투자 계약서상 필요한 동의를 받기 위해 두 달이 걸린 경우도 봤다. 투자자의 90% 이상이 동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주주의 권리를 한 번 정리하는 주주간계약서를 작성하게 되고,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주로 가장 최신 라운드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투입하는 투자자의 주도하에 진행되는데, 주로 각각의 투자자가 가진 다른 종류의 주식의 권리를 통일하고, 회사 의사 결정 과정을 더 단순하게 정리하는 게 이 계약서의 목적이다. 미국의 경우 주로 이사회 위주의 경영과 결정, 그리고 웬만한 동의 사항도 이사회에서 결정하거나 지분 과반수 찬성/반대로 주주간 관계를 정리하는 걸 자주 봤다.
한국은 이 주주간계약서를 통일하는 것도 힘들다. 이전에는 1인 1표 체제라서 작은 주주나 큰 주주나 가진 권리가 거의 동일했는데 주주간계약서를 체결한 후에는 작은 주주의 권리는 거의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주주가 주주간계약서 내용에 합의하는 데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고, 어떤 주주는 주주간계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경우도 봤다. 이 회사의 경우, 우리가 최대 주주 중 하나였는데, 결국 최종 주주간계약서 내용을 봤을 때 처음에 머릿속에 그렸던 아주 깔끔한 주주간 교통정리가 잘 안돼서 아쉽긴 했다. 후속 투자를 더 받을 때마다 주주간 교통정리를 하다 보면 점점 더 이사회 중심 경영과 1원 1표의 의사결정 과정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미국에서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새로운 라운드가 진행되면 기존 우선주 주주들은 본인들의 지분이 희석된 만큼 주식을 더 구매할 수 있는 pro rata 권리가 있는데 가장 최근 라운드에 대규모 자본을 투자해서 최대 주주가 된 새로운 VC가 이번 라운드는 본인만 투자하고 기존 주주들은 빠지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후속 투자를 못 한 적도 있다. 어쨌든 지분이 더 많은 투자자의 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게 자본주의의 규칙이고, 계약서상의 우리 후속투자 권리를 계속 주장하면 본인들이 투자하지 않겠다고 협박? 했기 때문이다.
가끔, 같은 라운드에 투자하더라도 돈을 더 많이 투입하는 투자자는 다른 투자자에 비해서 더 많은 권리를 갖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information rights’라는 회사의 재무나 운영 정보를 투자자가 정기적으로 받고, 필요시 추가로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계약서상 이 권리가 없으면, 회사 대표에게 그 어떤 사업 관련 내용을 달라고 할 수 없고, 달라고 해도 회사는 제공할 의무가 없다. 여기에도 1원 1표의 냄새가 매우 강하게 난다.
한국의 경우, 한국벤처투자의 표준계약서 이슈도 있고, 상법도 미국과는 다르지만, 자본가라면 본인에게 불리하고 마음에 안 들더라도 더 많은 투자를 해서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한 다른 주주가 더 막강한 권리를 갖는 1원 1표 원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사이트를 또 이렇게 늘려갑니다. 감사합니다.
100% 공감합니다…! 실제 운영을 하다 보면 전원 동의가 필요한 구조로 인해 의사결정과 등기 일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있어, 대표 입장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물론 투자자 보호 측면에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만, 회사가 더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 구조도 함께 발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을 사업과 매출 성장에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1인 입니다.
투자자의 입장은 다를 수 있지만, 저도 100% 동의합니다 🙂
주식회사가 제대로 주식회사 일 수 없죠
조금 관점을 달리 보면 저는 ‘1원 1표’보다 먼저 ‘1주 1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50%이상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대주주(보통 대표)가 경영권을 가져야 하는데, 갖가지 투자 계약조항에 의해 10%도 안되는 투자자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주총 사항 조차 본인이 결정할수 없는 투자 계약서가 일상화 되어 있는데요.
“그게 싫으면 투자 안받으면 되잖아”라고 말할수 있겠죠. 다만, 현재 국내 현실이, 그렇게 투자 받는 대표의 머리속은 “먼저 받고, 동의 사항들은 나중에 대충 무시하자” 이고, 투자자도 “이 조항이 있지만, 까탈스럽게 하나하나 꼬투리 잡을 필요는 없잖아” 인것 같습니다. 저는 이렇게 양쪽 모두가 투자 계약서에 대한 respect가 없는 형태가 과연 올바른 상태인지 모르겠습니다.
‘1주 1표’가 투자계약서에 의해 무너졌고, 그 상황 자체를 양측 모두가 무시하고 있는 요상한 상태라고 봅니다.
네, 맞습니다. 이 글의 핵심은 1원과 1주가 거의 동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공감되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빨리 개선되었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