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에 ‘마른 수건 쥐어짜기’라는 글을 썼는데, 오늘은 머리 쥐어짜기라는 주제의 글을 써본다. 얼마 전에 어떤 미국 VC와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 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꽤 공감하고, 미팅 이후에 곰곰이 생각했던 그런 내용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계속 살고 있어서 잘 못 보고 못 느끼지만, 한국 밖에서 한국을 보면 이런 것들이 보인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역시 숲 안에만 있으면 나무만 보이고, 숲이 안 보인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월드 클래스이다. 전 세계 어디 가도 한국의 의료보험과 같은 제도는 찾기 힘들고, 집 주변에 이렇게 다양한 병원이 많은 곳도 전 세계에서 찾기 힘들다. 미국에서 의료보험에 가입해 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미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의료보험 시스템은 거의 미래에서 온 제도와 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정기적으로 받는 건강검진은 다른 나라에 사는 외국인들에겐 상당히 생소하다는 점도 많은 한국분들이 잘 모르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프기 전까진, 한국 스타일의 정기 건강검진은 한 번도 받아보지 않는다. 물론, 미국에도 좋은 건강검진 시스템이 있지만, 너무너무 비싸다. 우리는 필요하면 언제나 하는 위/대장 내시경을 미국에서 받아보면 보험에 따라 수백만 원 ~ 천만 원대의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이러다 보니, 미국인들은 의료 보험이 있어도 큰 병에 걸리지 않으면, 웬만하면 병원을 찾지 않는다. 나도 미국 살 때, 꽤 비싼 의료보험이 있었지만 – 근데 나는 아직도 내가 미국에서 어떤 의료 보험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 정도로 복잡하다. – 한국과 달리 보험이 있어도 의사를 한 번 만나면 돈이 너무 많이 깨져서 정말로 아주 아프지 않으면 병원을 아예 안 갔다.

이와 반대로 한국은 병원에 대한 접근성도 좋고, 가격도 저렴해서, 조금만 컨디션이 안 좋아도 병원에 간다. 간단한 건 양병원, 한방병원, 의료원 등, 그 어떤 동네 병원에 가도 간단한 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 받으면 되니까, 한국인들은 병원을 정말 자주 찾는다. 한 약사한테 들었던 1년 365일 매일 병원에 가는 노인의 이야기는 나에겐 충격적이었다. 하루는 양병원, 그다음 날은 한방병원, 등의 순서로 매일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 받는 이런 분들이 한국에 의외로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건 너무 좋은 의료제도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병원을 찾는 인구가 워낙 많아서 의사들이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너무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고, 이로 인한 부작용인 의사들의 만성 피로, 불친절함, 피로도로 인한 의료 사고 등이 있지만, 어쨌든 나는 항상 한국의 헬스케어 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시장을 꽤 잘 아는 이 미국 VC는 나에게 한국의 현재 의료 시스템은 굉장히 발전되어 있지만, 이 시스템에 너무 물들어 있어서 미래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준비를 그 누구도 안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하면서 Neko Health라는 회사를 언급했는데, 이 스타트업은 한국에서는 각각의 전문의들이 하는 건강검진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만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예약도 온라인으로 하고 검진 센터에서 스스로 체크인하고, 사람 크기만 한 캡슐로 걸어 들어가면, 이 안에서 여러 가지 센서와 소프트웨어로 꽤 깊은 건강검진을 할 수 있다. 아직 100% 무인화되진 않았고, 채혈이나 혈압 측정과 같은 검사는 실제 간호사가 하지만, 기술이 더 발달하고 연구를 더 하면 이 모든 게 무인화 및 자동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참 재미있는 게, 내가 이 일화를 한국의 친구한테 하니까, 바로 “야, 뭐 하러 그렇게 복잡한 시스템을 개발해. 한국은 그냥 병원 가면 일사천리로 사람들이 다 해주는데.”라는 답변이 날라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중국의 딥시크가 생각났다. 중국은 GPU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엔지니어들이 머리를 쥐어짜 냈고, 결과적으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단에서 혁신을 만들었다. 왜 미국이나 유럽이나 한국에서는 이런 혁신이 없을까? 위의 내 친구와 같이, 뭔가 너무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면 “야, 뭐 하러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 내? 그냥 엔비디아 칩 돈 주고 사면 되는데.”라는 숲속에서 나무만 보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인구가 급감하고 있고, 의사와 간호사의 숫자도 계속 감소할 것이다. 한국의 의료 제도가 미래에도 지금과 같이 월드클래스 일진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의사/간호사/병원의 수가 감소할 것이고, 의료보험도 예산 부족으로 인해서 훨씬 더 비싸질 것이다. 현재 우리의 의료 시스템은 기술의 질보단 풍부한 인력 위에서 돌아가고 있고, 계속 이 프레임에서 우린 최적화하려고 하는데, 이제부턴 나무도 좋지만, 숲도 봐야 한다. 현재 한국의 의료 시스템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그 누구도 더 창의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그럴 여유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해보니까, 한국의 헬스케어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보면 앞서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민관 차원에서 의대생만 더 배출할 생각만 하지 말고, 더 적은 의사로 어떻게 하면 더 저렴하게 국민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한다. 비대면 진료, 로봇 수술, AI 의료 검사 등,,,할 게 너무 많은데 이 분야에서 더 많은 연구가 돼야 하고, 더 많은 좋은 스타트업이 나와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서 창의력과 파생적 창의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