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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게이츠의 소아마비 퇴치 작전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마이크로소프트의 조직은 매우 크고 복잡하다. 워낙 많은 제품을 다양한 시장에 공급하기 때문인데, 특히 마케팅은 다른 조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vertical & horizontal 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각 제품을 담당하는 product marketing 조직 – 즉, Windows OS, Office, Windows Server, SQL Server 등 – 이 있는가 하면 모든 제품을 특정 시장에 마케팅하는 조직 –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Small and Medium Marketing, 대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Enterprise Marketing – 이 존재한다. 나는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는 Mid Market Marketing Manager(M4)라는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매우 challenging하고 회사의 매출과 직결된 중요한 포지션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 그런 직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조직을 분석하려면 제품별 숫자만을 봐야 하는 게 아니라, 특정 market 별 숫자 또한 자세히 분석을 해야 한다. Bill Gates 회장은 임원 미팅에서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경영진들에게 하였다. “내년에 우리가 더 성장하려면 Office나 SQL 서버와 같은 구체적인 vertical 시장에 더 투자 해야 할까요 아니면 특정 제품보다는 대기업, 교육, 공공 분야와 같은 전반적인 horizontal 시장에 집중해야 할까요?”

매우 재미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2008년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손을 뗀 후 340억 달러라는 막대한 기금과 대통령보다도 더 유명한 슈퍼파워를 이용해서 개발도상국의 질병 퇴치와 보건 개선에 앞장서고 있는 게이츠 회장이 바로 똑같은 질문을 세계 보건기구에 얼마 전에 물어보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아마비와 같은 개별 질병을 퇴치하는 데 집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전반적인 건강과 위생 개선책을 – 위생 상태 개선, 예방 접종 확산, 식수 정화 – 추구하는 게 맞을까요? 어떤 게 인류의 건강을 위한 제일 나은 방법일까요?”라는 질문이었다. 정답은 둘 다 해야 하는 게 맞다. 그리고 빌 게이츠 회장과 같은 자선사업가들의 돈을 무기로 세계 보건 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는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들을 불구로 만들고 있는 무서운 병 소아마비에 이러한 총체적인 접근방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질병 퇴치를 하려면 특정 질병을 1대 1로 공격해야 한다는 과거의 방식과는 다른 총체적인 방법은 특정 질병을 퇴치하려면 전반적인 보건 시스템의 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만약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세계 보건 전략은 이러한 총체적 전략을 토대로 운영될 것이지만, 실패한다면 이러한 노력은 인류 보건 역사상 가장 비싼 수업료로 기억될 것이다. 소아마비 하나에만 이미 20년 동안 82억 달러라는 예산이 사용되었고 대부분의 기부자는 그동안 vertical 전략을 선호하였다. 즉, 일정 금액의 기부금을 가지고 특정 질병을 퇴치하는 데 집중하는걸 좋아했다. 이 전략이 성공한 사례가 바로 1979년도에 인류가 유일하게 완벽하게 퇴치할 수 있었던 수두 사례였다. 이와는 반대로 horizontal 전략은 조금은 모호한 접근 방법과 당장 수치화할 수 없는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며, 그 결과 또한 장기적으로 보고 접근을 해야 한다. 어떤 방법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vertical 전략으로 시행된 소아마비 퇴치는 참담하게 실패했고, 빌 게이츠와 세계 보건 기구는 이번에는 vertical & horizontal 전략을 적용하는 모험을 해보기로 하였다.

2010년 초,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이자 세계 최고의 갑부인 빌 게이츠는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 보건 기구(WHO)를 방문했다. WHO의 지하벙커에서 진행된 미팅에서 그가 접한 소식은 전 세계 질병을 퇴치하려는 그의 노력에 브레이크를 거는 나쁜 소식이었다. 바로 그가 8,500억 원이라는 거금을 가지고 퇴치하려고 하였던 소아마비 질병이 아프리카에서는 계속 번지고 있다는 비보였다. 작년 여름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한 소아마비가 2010년 4월에는 19년 동안 소아마비 사례가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던 타지키스탄에서 재발하면서 소아마비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하려는 세계 보건 기구들의 노력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현재 소아마비를 퇴치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기관은 WHO, UNICEF, Rotary International과 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과 같은 헤비급 단체이고, 빌 게이츠가 가장 많이 기부한 분야이기도 하다. 2009년도에 빌 게이츠는 소아마비가 가장 많이 발병하는 아프리카에 여러 번 방문하여 의사, 간호사, 자선단체 담당자 및 부족장들과의 회동을 통해서 이 병을 완전히 퇴치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논의를 한 적이 있다.

빌 게이츠 회장의 아프리카 방문 일정에는 나이지리아의 Sokoto라는 도시 족장과의 간담회가 잡혀 있었다. 아이패드로 책을 보는 세상에서 웬 족장이라고 묻겠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각 마을의 족장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2003년도에 북나이지리아의 이슬람 리더들은 소아마비 예방 접종을 하면 무슬림 여자들의 생식기능이 없어진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소아마비 바이러스가 퍼졌고 궁극적으로는 20개의 다른 개발도상 국가들에 퍼졌다고 WHO는 발표하였다. 전 세계 1,600건의 소아마비 케이스 중 과반수가 나이지리아에서 발병하였으며, 바로 Sokoto의 족장과 같은 사람들과 협심하여야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질병 퇴치 캠페인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 족장 또한 소아마비만을 공략하는 vertical 전략에 대해서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다른 보건과 위생 문제들도 같이 검토가 되어야 합니다. 소아마비를 퇴치하려면 결핵, AIDS, 말라리아, 콜레라 등과 같은 질병들도 같이 총체적으로 퇴치해야 합니다.”라고 그는 빌 게이츠 회장한테 충고하였다.

30년 전 성공적인 수두 근절 이후 대부분의 질병 퇴치 프로그램들은 vertical 전략을 택하기 시작하였으며 소아마비 퇴치 캠페인 또한 이렇게 진행되었으며 초기에는 대성공이었다. Rotary 클럽의 기부금을 가지고 WHO가 진두지휘하였던 이 캠페인은 1988년 350,000건이나 발생하였던 소아마비 발병 수를 2000년도에는 1,000건 이하로 줄였으며 곧 수두와 같이 소아마비 또한 교과서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역사 속의 질병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소아마비는 오늘도 개발도상국에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으며 발병 건수는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Sokoto의 한 보건소를 빌 게이츠가 방문할 때 발생한 일이다; 한 아프리카 아이의 예방접종 기록표를 보면서 그는 “이 아이가 디프테리아 접종을 하였나요?”라고 물어보자 보건소 당국 직원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보건소에는 B형 간염 접종약도 없었고 황열병 접종액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보건소 밖에서는 소아마비 퇴치 캠페인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소아마비 퇴치 캠페인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있었고, 소아마비 접종액도 부족함 없이 원활하게 공급되고 있었다. 그다음 날 나이지리아의 보건당국 국장인 Pate 박사는 이러한 아프리카의 현실에 대한 vertical vs. horizontal 전략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강조를 하였다. 그의 주장은 아무리 소아마비 발병률을 줄여도, 전반적인 위생과 보건 상태를 강화하지 못하면 이러한 노력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소아마비 또한 ‘교육’ , ‘질병 관리’ , ‘위생’ 등과 같이 아프리카가 해결해야 하는 큰 그림 중 하나일 뿐이지 소아마비 질병에 모든 돈과 자원을 투자하는 건 매우 현명하지 못한 전략이라고 지적하였다.

빌 게이츠는 이러한 vertical & horizontal 전략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전 세계의 소아마비 발병 건수가 이제 거의 바닥인 이 시점에서 아프리카는 소아마비 퇴치에 모든 자원을 투자해야 하는 게 맞다고 반박하였다. 일단 시작한 거는 끝을 봐야 하며, 끝이 이렇게 가까운 시점에 중단하는 건 옳지 않으며 소아마비가 완전히 퇴치되면 그만큼 다른 질병과 전반적인 보건에 투자할 수 있는 예산이 풀릴 거라고 하였다. 막상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아프리카 순회를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의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이미 퇴치되었다고 믿고 있었던 소아마비가 다시 발병하면서 특정 질병만을 공략하는 vertical 전략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하기 시작하였다.

2009년 8월에 WHO가 엄선한 질병 전문가들이 앙골라,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와 나이지리아에 파견되어서 소아마비 프로그램에 대한 전반적인 재평가를 하였다. 전문가들의 결론은 소아마비라는 질병 자체가 인간의 배설물과 오염된 물을 통해서 전염되는 병이기 때문에 종합적인 위생과 영양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발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은 빌 게이츠를 비롯한 소아마비 퇴치에 앞장서왔던 많은 단체와 담당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과연 vertical 소아마비 전략이 최상의 방법인지를 모두 다시 한번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10월에 Gates 재단은 UNICEF, 질병관리국과 로터리 재단이 포함된 소아마비 퇴치 운동 기부자들을 시애틀 본사로 긴급 소집하여서 전략회의를 열었으며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곧 WHO의 새로운 전략에 반영될 것이다. 새로운 전략은 2012년 말까지 소아마비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퇴치하는 야심 찬 목표를 설정하였으며 vertical 전략과 horizontal 전략을 적절하게 혼합한 형태의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이 큰 축이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전략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testbed는 나이지리아가 될 것이다. 앞으로 3년 동안 나이지리아와 인접 국가들에서 소아마비가 퇴치되느냐에 따라서 vertical & horizontal 전략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앞으로 3년 동안 이 새로운 소아마비 퇴치 프로그램이 필요로 하는 예산은 대략 26억 달러인데 현재 게이츠 재단에서 할당한 예산은 12억 달러밖에 안 된다. 물론, 빌 게이츠한테 돈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원한다면 개인 재산을 더 투자해도 되고 안 된다면 다시 모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 회장이 세상을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려 하고, 이를 위해서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기꺼이 재산을 기부할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비영리 프로그램을 운영함에서도 영리조직의 경영 방법과 전략들이 적용된다는 게 참으로 재미있는 거 같고 빌 게이츠같이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계속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행동하든지. 닥치든지. – Part 2

행동의 아름다움을 몸소 실천하셔서 나한테 감동을 주신 또다른 분은 내가 지금까지 블로깅을 하던 내용들과는 완전 상반되는 상당히 low-tech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를 맨손으로 일구어내신 분이다. 이 분에 대한 소개를 하기전에 내가 과거에 하였던 비즈니스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필요할거 같다. 뮤직쉐이크에서 일하기전에 나는 불알친구 John Nahm과 투자자문/브로커 회사인 Oceans International을 운영하고 있었다. 실은 뮤직쉐이크도 Oceans의 고객사 중 하나였는데 운이 좋아서 이렇게 엮이게 된것이다. 지금은 뮤직쉐이크때문에 잠시 나는 Oceans에서 손을 땠지만 잘나갈때 우리는 한해에 5-6개 회사의 투자 성사 및 미국 진출을 도와주고 있었다. 브로커라는 일 자체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일이기 때문에 이걸 하면서도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캘리포니아의 호두/아몬드 재배업체와 연결이 되면서 – John이 은행에서 잠시 일했었는데 그당시 고객사 였다 – 이 업체의 한국 진출을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IT라는 무형자산과 넛트라는 유형자산이라는 차이가 있을뿐 본질은 한국사람과 미국사람을 연결해주는 업무였기 때문에 처음 해보는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두려움은 없었다. 좌충우돌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다가 정말로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이 우연한 기회에 대해서 또 이야기하자면 책 한권 정도 분량이 나온다 ㅋㅋ) 한국 호두 시장 점유율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업체의 사장님과 연결이 되어서 우리는 캘리포니아 호두/아몬드를 한국 시장으로 수출하는 브로커 사업을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Oceans International과 구분을 두기 위해서 무역업무만을 처리하는 자회사인 Oceans Exports를 설립하여 이 브랜드를 통해서 무역 업무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조금 현실적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당시만 해도 우리는 Oceans란 브랜드를 삼성과 같은 문어발식 재벌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꿈을 꾸고 있었다 ㅎㅎ (물론 그 꿈은 지금도 매일매일 꾼다. 그러다가 매일 또 깨어난다.)

Anyways, 그렇게 장난삼아 시작하였던 넛트 무역 비즈니스는 해마다 double growth를 기록하였다. 첫해 우리는 한국 시장에 호두와 아몬드를 25만 파운드 정도 수출하였고 작년에는 1백만 파운드를 돌파하였다. 참고로 1백만 파운드는 대략적으로 컨테이너 40개 정도의 분량이다. TV나 자동차와 같이 크고 무거운 제품이 아니라 우리가 즐겨 먹는 너트로 40 컨테이너이니 상당한 분량이다. 아마도 알게 모르게 독자분들이 드시는 호두, 아몬드, 빠리바게트 제품 중 호두가 들어간 빵들, 호두과자 등등에 Oceans가 브로커링을 한 포션이 꽤 될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비즈니스를 하면서 나는 길림양행 이라는 회사의 창업자이신 윤태원 사장이라는 amazing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윤태원 – (주)길림양행 창업자 및 대표이사
내 나이 또래 분들은 아마도 이 CM 송을 기억하실거다. “블루~블루~다이아몬드~~.” 가수 조영남씨가 기타를 치면서 부르던 캘리포니아 블루 다이아몬드 아몬드 선전 CM 송이다. 블루 다이아몬드사 (Blue Diamond Growers)는 미국에서 가장 큰 농업혐동조합 중의 하나이자 세계 최대의 아몬드 공급사이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위치한 본부는 11만평 규모로 20개의 빌딩으로 구성되어 있고 매일 5천500톤 이상의 아몬드를 생산하며 매년 9만톤 이상이 세계 95개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주)길림양행은 블루다이아몬드의 한국독점 에이전트이며 대한민국에 아몬드라는 제품을 처음으로 소개한 무역상사이다. 국내최초로 아몬드를 수입하며 견과류 업계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호두, 건포도 등의 다양한 견과류를 수입 및 제조하여 판매하고 있는 길림양행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오늘날 호두나 아몬드와 같은 넛트를 이렇게 다양한 맛과 형태로 즐기지 못할것이다.

때는 1982년도. 길림양행 설립자 윤태원 사장은 국내 선박회사에서 젊은 임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당시 그는 회사내에서도 일잘하고 영어를 잘하는 직원으로 소문이 나있었는데 자신만의 사업을 언젠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고, 좋은 아이디어나 아이템을 항상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농림수산부에서 근무하는 선배한테 오랜만에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는 전화가 왔다. 그날 저녁 그 선배는 윤사장한테 다음과 같은 귀뜸을 해주었다. “앞으로 미국과 무역관계가 개선되면서 ‘아몬드’라는 제품에 대한 수입허가가 곧 떨어질거 같다. 땅콩이랑 비슷한 넛트인데 캘리포니아에서 많이 재배되며 이미 서양에서는 고단백 저칼로리 저콜레스테롤 건강음식으로 매우 인기가 좋은 제품이다. 너 이거 한번 해볼 생각 없냐?” 재미있는 사실은 그당시 윤사장은 ‘아몬드’라는 제품을 구경한번 해본적이 없었고, 선배가 가져온 사진을 통해서 처음으로 이 요상스럽게 생긴 넛트를 봤다고 한다.

그날 밤 윤태원 사장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수년간 선박회사에서 일한 직감에 의하면 이건 하늘이 자신한테 주신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누가봐도 위험하고 미친짓임에도 틀림없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제품을 – 그것도 사람들이 먹는 식품을 – 수입해서 판다는거는 리스크 그 자체였고 한국 시장이 아직 개방된것도 아니고 아몬드를 미국 어디에서 수입을 해와야하는지도 막막한 미지수 투성이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잘만 된다면 이건 바로 일생일대의 대박기회가 아닌가?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새로운 건강 식품을 수입해서 time to market을 극적으로 줄일 수만 있다면 후발업체들보다 최소한 수개월 앞서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임을 또한 부인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잠을 포기하고 새벽에 미국 아몬드 업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 있었던때가 아니라 그는 미국에 국제전화를 해서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아몬드 재배업체가 Blue Diamond Grower라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 회사가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것도 알아냈다.

밤을 꼴딱 새고 그 다음날 윤태원 사장은 선박회사에 시골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고 일주일 긴급 휴가를 신청하였다. 같은날 몇 시간 후 그는 서울발 캘리포니아행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렌트카를 운전해서 새크라멘토 블루다이아몬드 본사로 찾아간 윤사장은 본인 소개를 하고 앞으로의 한국 시장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블루다이아몬드 아몬드에 대한 한국 독점 유통권을 다짜고짜 자신한테 달라고 하였다. 솔직히 지금같으면 100% 문전박대 당해야하는 황당한 상황이지만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 당시 미국인들한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지금과 같이 눈부신 발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블루다이아몬드 사장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하고 한국에서 단숨에 미국으로 날라온 이 젊은이한테 흔쾌히 한국 독점 유통권을 주었다. 윤사장은 이 계약서를 가지고 한국으로 귀국해서 향 후 몇개월 동안 선박회사를 다니면서 밤에 회사 설립 준비와 아몬드 시장 공부를 틈틈히 하였으며, 선배의 말대로 얼마 안있어 한국은 1982년도에 캘리포니아 아몬드에 대해서 시장을 개방하였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윤사장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길림양행의 모체가 된 (주)길상사를 설립하고 블루다이아몬드로부터 아몬드를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시장이 개방되었지만 전면개방이 아닌 quota 기반의 개방이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양의 아몬드를 수입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 조성되지 않았었다. 그해 길상사는 미국으로부터 블루다이아몬드 아몬드 5 컨테이너를 대한민국 최초로 수입을 하였다.

자, 이제 28년을 앞으로 돌려보자. 2009년도 길림양행은 캘리포니아로부터 약 300 컨테이너의 아몬드를 수입하였고, 매출 400억원을 달성하였다. 아몬드가 땅콩인지 호두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던 젊은이가 28년전에 맨땅에 헤딩해서 설립한 작은 무역상사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결과가 아닌가?

Part 1의 호리 회장도 대단하시지만 길림의 윤사장님은 어떻게 보면 더욱 더 우리에게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걸 잘 시사해주시는 분이다. 지금은 건강상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나셨고 그 아드님이 길림을 경영하고 있는데 올해 매출 500억원은 무난히 달성할거라는 귀뜸을 전에 한번 해주신 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더욱 많지만, 이렇게 훌륭하고 배울점이 많은 분들도 간혹 만날 수 있다는게 인생의 묘미이자 축복인거 같다. 솔직히 넛트 수입해서 가져다 파는건 나나 이 블로그를 읽으시는 독자분들이 involve되어 있는 최첨단 산업과는 완전히 다른 low tech industry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이런 무역업을 하시는 분들을 무식하고 못배웠다고 손가락질하고 욕을 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어릴적에는 그랬으니까. 연봉 1천만원 받아도 무역상사보다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게 내 명예나 가오를 위해서는 훨씬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을때가 있었으니까…

대한민국은 Yoshito Hori나 윤태원같은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특히 요새같은 시대에는 양놈들이 말하는 소위 “walk the walk”를 할 줄 아는 진국들이 더욱 더 필요하기에 이 두분들의 개인적인 인생 스토리를 이 미약한 블로그를 통해서 살짝 소개해봤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행동으로 옮겨라. 그렇게 못할거 같으면 정말 제발 잘난 주둥이는 닥치는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행동하든지. 닥치든지. – Part 1

2008년도 초, 미국에서 뮤직쉐이크 US를 맨땅에서 시작했다. 매출 빵원 회사를 2년만에 월매출 수천만원 회사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super team과 같이 일을 할 수 있었다는점과 아직 그 팀원들과 같이 일을 하고 있다는게 오늘따라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미국에서 2년 반동안 뮤직쉐이크를 운영하는 동안 나는 인터넷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 분야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만났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걸음마 단계의 비즈니스를 두발로 일어설 수 있게 하려고 이사람 저사람 닥치는 대로 연락도 해보고 소개도 해서 만났던 수천명 사람들의 명함을 얼마전에 쫙 정리를 하였다. 그 중에는 지금은 실리콘 밸리에서 상당한 슈퍼스타들이 된 Zynga의 Mark Pincus, 구글의 Marissa Mayer, TechCrunch의 Michael Arrington, imvu의 Cary Rosenzweig, Smule의 Jeff Smith, AdMob의 Omar Hamoui,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흑인 가수 MC Hammer 등이 포함되어 있다. 2년전만해도 즉석에서 연락해서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연락 조차 잘 안되는 잘나가는 유명인사들이 된걸 보면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그동안 뭐하고 있었나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평가를 요 몇일동안 상당히 많이 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내가 미국에서 스타트업 비즈니스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을 모두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입으로 일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는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즉, 말만 많고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들과 겉으로는 show off하지 않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알짜배기 사람들이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내 주위의 99% 사람들은 주둥이만 놀리는 놈들이다. 아마도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거 같다. 인생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만 하지 직접 뭘 할 수 있는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들로 바글바글하니까…오늘도 나는 이런 쓰레기 2명과 미팅을 하였다 (아 씨…시간 아까워).

Mr. A: 아 그사람? 제가 잘 아는 사람이죠. 제 대학 동긴데 학교 다닐때는 별거 아니었는데 지금 엄청 잘 나가요. 우리 외삼촌이 그회사 부사장이라서 그 회사에 대해서는 제가잘 알죠.
(A씨는 주위에 잘나가는 사람들을 대부분 알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거 같다. 문제는 본인은 전혀 못나간다는 점이다. 즉, 지는 별볼일 없으면서 이 사람 저 사람 잘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데서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다.)
배기홍 (속으로): 씨발. 근데 어쩌라고? 너는 모하는데?

Ms. B: 지금 개네가 하는 비즈니스를 내가 5년전에 생각했던 건데. 아 진짜 아깝네…누가 그렇게 잘 될줄 알았을까. 내가 학교 다닐때 친구들이랑 생각했던 아이템이 이건데 바로 똑같은 아이템으로 지금 이 회사가 수백억월을 벌고 있다니까..
(B양은 무슨 회사 이야기만 나오면 그 회사의 아이디어나 아이템을 자기가 전에 생각했던거라고 말을 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다. 즉, 지는 뭐하나 제대로 해본적이 없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배기홍 (속으로): 씨발. 근데 어쩌라고? 그럼 니가 해보지?

내 주위 99%의 사람들이 A씨와 B양과 같은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솔직히 짜증이 좀 많이 난다. 그 잘난 주둥이를 나불나불 거릴 시간에 하나라도 한번 직접 몸으로 해봤으면 지금쯤 훌륭한 사람들이 됬을텐데…오늘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행동하는거란 과연 무엇인가를 솔선수범으로 보여준 나랑 각별하게 친한 두 사람에 대해서 몇마디 적어보려고 한다. 물론, 이 사람들 말고도 이 세상 1%의 행동가 중에는 너무나 훌륭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entrepreneur들이 다 이 1%에 속한 훌륭하신 분들이지만 내가 아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여기서 내가 소개하는 이 두분들이야말로 행동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아주 생생하게 나한테 보여준 분들이며 지금도 나는 일을 할때 항상 이 분들의 젊었을때의 용기와 행동에 대해서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inspiration을 많이 받곤 한다.

Yoshito Hori – Founder and CEO of the Globis Group
나는 요시토 호리 회장을 2000년도 스탠포드 대학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스탠포드 대학 아시아 학생회에서 돌아가면서 아시아 출신의 성공적인 비즈니스맨들과 entrepreneur들을 초청해서 강연의 자리를 마련하는 프로그램의 스피커 중 한명이었다. 그당시에는 글로비스라는 회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지만 이분의 몇가지 강연 내용이 참으로 가슴에 와 닿았었다. 그 중 하나가 글로비스가 일본 회사지만 아시아의 다른 나라로 진출할 기회가 생기면 본사를 일본이 아닌 한국에 설립하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당시 대부분의 회사들은 아시아 본부를 싱가폴이나 홍콩에 설립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는 한국과 한국인들의 근면성과 dynamics에 대한 예찬을 하였다. 한국 사람을 칭찬하는 일본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서 나는 강연이 끝난 후 호리 회장한테 다가가서 나를 소개하고 그 이후 계속 이메일로 연락을 하면서 지냈었다. 그리고 세상이 참으로 좁다는걸 다시 한번 느꼈는데 한국으로 돌아가서 근무하였던 자이오넥스라는 한국의 벤처 기업의 최대 투자자가 요시토 호리 회장이라는 점이었다. 하여튼 호리 회장과 나는 그동안 약 10년동안 알고 지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였고 서로 아는 사람들과 친구들이 직간적접으로 아는 사이고 뭐 이렇게 엮인 부분들이 많았던 분이다.

Anyways, 요시토 호리는 1992년도에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서 MBA를 땄다. 그는 하버드에서 경영학 석사를 공부하면서 대부분의 수업에서 활용되는 Harvard Case Study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 상황에서 벌어졌던 비즈니스 케이스들을 전략, 마케팅, 영업, 리더쉽 등등의 각기 다른 분야로 분류한 후에 학생들한테 케이스를 읽게 만들고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겠니?”라는 질문을 하면서 학생들을 실제 경영자 입장의 위치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이런 방식이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그로써는 매우 신선하였으며 그는 이러한 케이스 방식을 일본의 교육에 접목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매일 하게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그는 HBS 관계자들을 찾아가서 일본에 하버드 경영 대학원 분교를 시작하고 싶다는 제안을 하였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HBS는 호리에게 하버드의 case study에 대한 일본 유통권을 주었다. 물론 그는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HBS에서 분교를 만들기 싫다면 오히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는 미국의 케이스 방식을 활용한 자신만의 일본식 경영대학원을 일본에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유는 바로 일본인들은 한국인들과는 달리 일본에서 직장 생활을 쭈욱 할 계획이면 해외유학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본에서 인맥을 쌓는게 더 중요하기 때문에 중국인이나 한국인들같이 해외 유학을 가는 일본인들은 그렇게 많지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나도 스탠포드나 워튼 다닐때 한국 유학생들에 비해서 일본인들의 수는 매우 적었던게 기억나는데 아마도 이러한 이유때문인가 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굳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휴직을 하고 유학의 길에 오르는거 보다는 일본 현지에서 full-time 또는 part-time으로 다닐 수 있는 MBA 프로그램이 일본인들의 정서와 문화에 더 맞을거라는 생각을 그는 하였다.

하지만 졸업 후 일본으로 귀국한 호리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MBA 학위와 하버드 케이스 스터디 유통권을 제외하고 그가 수중에 가지고 있던 돈은 달랑 $7,000이었다. 특히 시대적으로는 일본의 경기는 망가질대로 망가졌고 젊은이들한테는 꿈조차 없던 암울한 시대에 그는 귀국을 한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일본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을 하고 본인의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선배의 오피스텔을 사무실로 사용하며 Globis MBA (Globis Management School – GMS) 경영 대학원에 대한 찌라시와 브로셔를 직접 손으로 만들어서 당시 일본 대기업의 인사담당자들한테 우편으로 보내고 전화로 follow up을 하였다. 초기 반응은 당연히 매우 부정적이었다. 듣도보지도 못한 젊은이가 경영대학원을 운영한다며 일본 유수 대기업의 임원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니 나같아도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었을거다. 인사담당자들은 유명한 경영대학원 교수들이 하버드 케이스 스터디를 가지고 실전경영학을 가르쳐줄거라고 예상을 하였지만 막상 강사진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면, “제가 직접 가르칩니다.”라는 말을 들으니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브로셔 발송과 cold call을 한 지 몇개월이 지났다. 한명의 학생이라고 나타나기면 하면 성심성의껏 본인이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모두 가르쳐 줄 준비가 되었지만 아직 그 누구한테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물론, 초기 자본금 $7,000은 거의 바닥이 났다. 그래도 호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브로셔와 커리큘럼을 잘 포장하여 대기업 인사담당자들한테 보냈고, 전화를 해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열성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렇게 몇개월을 노력하니…하늘도 이 젊고 포기를 모르는 일본인을 가엽게 여기셨는지 일생일대의 기회를 주셨다. 마침 일본 최대의 통신회사인 NTT의 인사 담당자가 NTT의 경영진들을 대상으로 미국식 MBA 야간 교육 과정을 시작하려고 준비하던 와중에 호리가 보낸 찌라시를 우연한 기회에 보게되었고 그는 Globis에 문의전화를 하였다. 호리가 믿을만한 젊은이임을 확인한 후에 흔쾌히 NTT 중역 20명을 Globis Management School의 첫 수강생으로 등록을 시켰고 호리는 동경 시부야의 작고 허름한 강의실 빌려서 2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그가 지금까지 HBS에서 배운 내용을 죽을 각오로 자신보다 20~30살이나 더 많은 일본 노인네들을 대상으로 강의하였다. 아시아 스타일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하던 NTT의 일본 중역들은 처음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케이스 방식을 접하게 되었으며 호리는 강의실 중앙에서 아주 훌륭한 orchestrator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시부야의 허름한 강의실에서 진행되었던 글로비스의 첫 수업은 대성공이었고 NTT의 인사담당자는 그 자리에서 회사 간부들의 글로비스 경영대학원 장기 계약을 하였다. 글로비스 MBA 프로그램에 대한 입소문이 드디어 일본 전역에 퍼지기 시작하였고, 그 이후부터는 우리가 영어로 흔히 말하는…and the rest is history 이다.

그 이후로 10년을 fast forward 해보자. 2006년도 말 Globis Management School은 한 학기에 2,000명의 학생들이 수강 신청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대기업에서 일을 하면서 파트타임으로 학교를 다니지만 학생 중 10%는 full-time으로 학교를 다니는 개인 사업자들이다. GMS의 학생들은 첫 고객인 NTT를 포함한 약 250여개 일본 대기업의 직장인들이다. 나도 동경 한복판의 금싸가리같은 땅에 위치한 글로비스의 본사를 2번 방문하엿는데 빌딩 시가만해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내가 갔을때는 MBA 수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미국 MBA 강의실을 본떠서 만든 계단형 원형 강의실에서 직접 강연하는 호리 회장과 그를 아주 열정적으로 청강하고 수업에 참여하였던 일본 학생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호리 회장은 그동안 MBA 프로그램과 더불어 다양한 상품을 출시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벤처 캐피탌업이다. 그는 글로비스의 브랜드하에 1996년도에 50억원 규모의 Globis Capital Partners라는 VC을 launch하였고 1999년도에는 영국의 Apax Partners와 공동으로 2,000억원 규모의 fund를 유치하는데 성공하였다. Globis Capital Partners는 1999년도에 일본식 회계 소프트웨어 벤처인 Works Application에 40억원을 투자하였는데 이 회사가 2002년도에 JASDAQ에 상장하면서 투자금액을 11배수에 회수하면서 초대박이 났다. 그외에 Globis Capital Partners는 Afro Samurai 애니매를 제작한 Gonzo Digimation, 일본의 소셜네트워킹 사이트인 Gree 및 Clara Online과 같은 다양한 벤처기업들에 투자를 하였다. 호리 회장은 Globis의 벤처 투자와 성공 케이스를 통하여 더 많은 학생들이 Globis MBA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MBA 학생 중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MBA 강의실 바로 위층에 있는 Globis Capital Partners를 통해서 투자를 받을 기회를 갖을 수 있게 된다. 참고로 그는 MBA와 관련된 책을 또한 몇 권 출간하였는데 이 책들이 모두 일본에서 best seller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entrepreneur 중 한명이자 VC 이기도 하며, 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visionary로 인정받고 있다.

호리 회장의 창업 스토리는 나한테 정말로 많은걸 느끼게 하였다. 인생은, 특히 비즈니스는 이렇게 해야하는거 같다. 호리 회장은 말을 많이 아낀다. 항상 남이 말하는걸 듣는편이지 본인은 정작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으로 우리에게 많은걸 보여준다. 1992년 모두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불가능하다고 욕을 하였던 일본식 경영 대학원의 설립을 혼자서 맨손으로 성공시켰던거와 같이…

나도 맘먹은게 있으면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전에 블로그에서 한번 mention하였지만 한국에서 나는 미수금을 받기위해서 거래처 사장의 면상에 식칼을 들이대민적도 있다. 가끔씩 와이프가 우스개소리로 (I really hope it’s 우스개소리..)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오빠가 내편인게 참 다행이다. 내 매니저나 또는 적이었다면 인생 피곤할거야…” 나랑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가끔씩 이런 말을 한다. “I am glad we are on the same boat. 너를 적으로 두고 비즈니스 해야한다면 인생 정말 우울할거야…”

이 말들이 과연 좋은 말들인가? 좋게 보면 좋은 말들이지만 어떻게 들으면 내가 인생을 참 냉정하고 병신같이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들이기도하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한다.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뭔가를 보여주고싶다면 행동으로 보여줘라. 그렇게 못할거 같다면 잘난 주둥이는 영원히 닥치고 있자.

To be continued…

New Coke의 교훈

Coca-Cola Company는 1985년도에 “New Coke”를 출시하였다. 잘 아시다시피 콜라는 굉장히 단순한 음료수이다. 물에 설탕이랑 색소를 적당히 섞어서 가스를 집어넣은 “탄산 설탕물”이다. (여담이지만 콜라 이야기만 나오면 1983년도에 그 당시 펩시 콜라의 중역이었던 John Sculley를 Apple의 사장으로 스카웃하기 위해서 스티브 잡스가 “나랑 같이 애플에서 세상을 바꾸겠습니까 아니면 평생 펩시에서 설탕 물을 팔래요?”라는 질문을 하였던게 생각난다. 존 스컬리는 이 말 한마디에 혹해서 애플로 넘어왔다). 본질은 설탕물이지만 코라 콜라는 단순한 음료수가 아니라 미국을 상징하는 가장 미국적인 음료수이기도 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인의 자유정신과 개척자 정신이 이 설탕물에 내포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특히 New Coke의 출시는 단순한 신제품의 launch를 넘은 미국 사회와 정치와도 밀접한 상관이 있는 대단히 상징적인 이벤트이기도 하였다. 코카 콜라를 안마시는 인구를 포함하여 코카 콜라가 미국인들의 (그리고 미국인들이 아닌 외국인들조차) 머리와 가슴에 이런 애국적인 이미지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대단한거 같다.

New Coke는 출시하기 전부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이르켰었고, 코카 콜라 중역들이 New Coke에 거는 기대는 대단하였다. 그럴수밖에 없던게 출시 전 사전 시장 조사에서 New Coke에 대한 시장의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었기 때문이다. 눈을 가리고 다른 콜라와 New Coke를 비교하는 blind taste 테스트에서는 모든 소비자들이 New Coke가 펩시 콜라보다 맛이 좋았고 심지어는 Coca-Cola 보다도 맛이 좋다고 하였을 정도로 New Coke의 맛은 신선하였다. 하지만, 사전 테스트와 출시 초반의 판매호조와는 반대로 곧 New Coke에 반대하는 소비자 반대와 데모가 시작되었으며 소규모로 시작되었던 이러한 반대운동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New Coke의 매출은 급격하게 추락하였다. 출시 몇일만에 New Coke는 코칼 콜라 최악의 실패작이 될 운명에 처한것이었다. 솔직히 나중에 이러한 이유들을 분석해보니 New Coke가 맛이 없어서 소비자들이 반대한게 아니라 신제품을 팔기 위해서 미국인들이 사랑하던 Coca-Cola 제품을 가판대에서 치워버림으로써 손상된 미국인들의 정서가 그 주된 이유였다. 어찌되었던간에 회사 절대절명의 위기 순간에 코카콜라의 경영진들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행동을 취하였다. 수조원의 연구개발과 마케팅 비용을 투자해서 만든 신제품 New Coke 출시 77일만에 그들은 미국 전역의 New Coke를 회수하는 동시에 New Coke 브랜드를 죽였다. Yes, 말 그대로 죽여버렸고 그 이후로 다시는 New Cok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Coca-Cola Classic이라는 브랜드로 원래 콜라를 부활시켜서 다시 슈퍼마켓 가판대로 돌려놓았다. 당시 코카 콜라 대표이사였던 Donald Keough씨는 미국 전역 공중파 TV에 나와서 미국인들한테 미안하다고 사죄하였으며, 코카 콜라 경영진들이 큰 실수를 범했다고 순순히 인정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좋은 메시지를 전세계에 전달하였다.

“우리는 정말 바보같이 큰 실수를 저지렀습니다. 그렇지만, 코카 콜라 경영진들은 고객의 목소리를 무시할만큼 병신은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었고 Coca-Cola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미국인들은 오리지날 코라콜라의 귀환을 대환영하였으며, 코카 콜라의 매출은 급등하여 그 해 기록갱신을 하였다. 그래서 몇몇 전문가들은 이 모든게 코카 콜라의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을까라는 의심도 하지만 설마 그정도로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을까…

25년 전에 코카 콜라의 경영진과 대표이사가 자존심과 쪽팔림을 무릅쓰고 TV에 나와서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였던거는 가오 살리기 바쁜 super-ego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한박자 쉬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살다보면 실수할 수 있다. 중요한거는 그때마다 스스로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좋은 교훈을 우리는 New Coke 마케팅 실패사건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아쉬운 사실이지만 오늘날 기업인들, 그리고 특히 정치인들한테는 실수를 인정한다는건 거의 불가능하다는걸 우리는 현재와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트렌드는 더욱 더 확고하게 전세계 구석구석에 바이러스 처럼 번지고 있다. 실수를 인정하는게 그렇게 어려운것일까? 나도 살면서 실수를 많이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실수는 사람을 죽이거나, 인간성을 배신하는 그러한 도덕적인 실수를 말하는게 아니라 그냥 순간적인 miscalculation으로 인한 실수 (주로 비즈니스적인)를 뜻한다. 실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어떠한 의도로 실수를 하였던간에 실수라는건 자신의 모자람과 그릇된 판단의 증거이자 산출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실수가 수만명의 직원들과 그 직원들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회사의 중요한 전략에 관한것이라면, 아니면 더 나아가서 수천만명 국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국가 운명에 대한것이라면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아직도 우리는 국민학생들도 이해할법한 이런 사실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거 같다.

아직도 계속 이슈화가 되고 있는 도요타 자동차의 결함으로 인한 해프닝들과 (참고로 나도 피해자 중 한명이다. 얼마전에 렉서스 brake pad 교체하라는 안내장을 받은적이 있다) 일본 자동차 산업 사상 최악의 사태를 계속 follow 하면서 나는 도요타 자동차와 대표이사 Akio Toyoda씨한테 참으로 크게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인하였던간에, 그리고 그 결함의 크기에 상관없이 도요타 자동차의 안전불감증으로 인하여 문제가 발생한거는 기정사실이다. 특히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어 있는 자동차에서 이런 결함이 발생하였다면 그 회사의 대표이사와 경영진들이 가장 먼저 해야하는 일은 바로 그들을 믿고 제품을 사준 – 그것도 일이백원 하는 껌이 아닌 몇천만원씩 하는 고가의 자동차이다 – 고객들한테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하는 것이다. 도요타같이 세계적인 회사에서 본인들의 실수를 순수히 인정하는거는 회사의 이미지와 일본의 얼굴에 먹칠하는거와 같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자존심 한번 죽이고, 가오 한번 죽이고 잘못을 인정하는게 과연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 언론에 떠밀려 마지못해 사건 발생 한참 후에 공중파를 통해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미마쎙~”하는 도요다 사장의 모습과 얼굴을 보니 그 얼굴에 토라도 해주고 싶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나와 같은 사람은 이런 일들이 대기업의 PR과 매출에 얼만큼의 악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이해 못해서 이런 발언을 한다고 욕해도 상관없다. 이건 분명히 아닌거 같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을 하는 순간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나 그 잘못을 받아들이는 소비자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것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 한화의 김승연 회장과 같은 기업인이나 이명박 대통령, 유인촌 장관과 같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도 25년전 코카 콜라의 경영진이 취하였던 행동으로부터 많은것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지금이라도 조금씩 만들수 있었으면 좋겠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모든 잘못이 용서받을 수 있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속이고, 주위의 가족과 직원들과 고객을 속이는건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면 본인들은 잠이 잘 올까?

Life and Rejections

며칠 전에 김수로 씨가 나온 “공부의 신”이라는 드라마를 다 봤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유치한 장면도 많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봤다. 아마도 나도 한국의 수험생활을 경험하였고 나의 고3 경험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때 상황을 머릿속에 재연해서 더 재미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블로그를 보시는 모든 분은 아마도 인생의 한 시점에 대학 입학시험 (나랑 나이가 비슷한 분들은 학력고사를 보셨을 것이고, 더 어린 사람들은 수능을 봤을 거다)을 봤을 테고, 성적에 따라서 대학교를 갔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는 대학생들이나 대학원생들도 있을 것이다. 머리도 좋고 운도 좋아서 한 번에 원하는 학교에 가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은 재수하거나 아니면 원하는 학교에는 못 들어가서 그냥 차선책으로 다른 학교에 가신 분들도 있을 거다.

실은 나도 그랬다. 나는 유럽에서 초등학교랑 중학교를 거의 다 마치고 중학교 3학년 끝날 무렵에 부모님을 따라서 다시 귀국했다. 일단 우리말도 서툴렀을뿐더러, 그 당시만 해도 한국의 중/고 수학의 난이도는 세계 최고였다 (지금도 다르지는 않다). 외국에서 매일 축구랑 테니스만 하던 내가 하루에 20시간씩 공부만 하는 한국 토종 학생들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솔직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나는 고 2까지만 해도 전교 200등 밖의 최하위 성적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대학을 꼭 가야겠다는 결심을 고2 말에 하였고 고등학교 3학년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서울대는 아니고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중앙대학교가 어디 있는지도 그때는 몰랐다. 서울대나 연세대에 가고 싶었고, 그냥 1년 재수를 해볼까도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렇지만 1년 더 공부해서 성적을 확 올릴 자신도 없었고, 1년 동안 정신적/육체적으로 고생을 하는 거보다 좀 더 일찍 대학생활을 해서 뭔가 자신에게 변화를 빨리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대학 입학 결정을 하였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면 지금쯤 어떻게 인생이 바뀌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중앙대학교 졸업 후 내 인생은 나쁘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 당시 재수를 할지 말지, 생각지도 않았던 학교에 입학할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할 때는 정말 많이 괴로웠고 내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자신을 자책하였던 기억이 난다.

올가을 미국의 대학 신입생 수는 290만 명이 될거라고 한다. 합격 예상자 수가 290만명이면 불합격자 수는 그 이상일것인데 고3때는 대학 불합격 통지서만큼 stressful한 이벤트가 없는거 같다. 나도 그 나이때는 그랬었지만 가고 싶은 학교에서 뺀찌먹었다고 해서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억만장자들, 노벨 수상자들, 대학 총장들, 베스트셀러 작가들, 방송인들, 존경받는 비즈니스맨들 모두 다 인생의 한 시점에서는 이와 비슷한 불합격 경험을 가지고 있다. 워렌 버펫과 “Today” 쇼의 호스트 Meredith Vieira는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하버드 대학을 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의 워렌과 메레딧스를 있을수 있게 한 인생의 스승들을 예상치 못하였던 학교에서 만났다. 노벨 의학 수상자인 Harold Varmus는 하버드 의대에 2번이나 낙방하였고, 그 이후 군입대까지 권장받았다. 그는 차선책이었던 Columbia 의대에 진학하면서 스스로의 능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스승들과 환경을 비로서 찾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흔히 rejection이라고하는 대학입학불합격 통보는 상당히 흔한 현상이다. 하버드 대학교는 해마다 29,000명의 지원자들의 원서를 받지만 그 중 단지 7%만을 합격시키고 스탠포드 대학은 이보다 더 낮은 합격률을 보유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고 인생이 끝날것만도 같았던 그 불합격 통지서로 인해서 전화위복이 된거 같습니다.”라고 버펫 회장은 말한다. “건강 악화를 제외하고는 인생에 있어서 일시적인 좌절은 오히려 장기적으로 연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거 같네요. 일시적인 좌절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현상이지 영구적인 실패가 아니라는걸 일찌감치 깨닫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이런 일시적인 좌절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걸 배우게 된거 같습니다.” 버펫 회장은 19살때 경험하였던 하버드 대학교 불합격 통지는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본인이 하고 싶은 분야와 성향은 하버드 대학과 잘 맞지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하여튼 그 당시에는 무조건 하버드 대학을 입학해야만 하는 인생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시카고에서 진행되었던 하버드 대학 입학 인터뷰에서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때는 상당히 괴로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하버드 대학말고 대안을 찾던 중 그가 평소 존경하던 두명의 투자자들인 Benjamin Graham과 David Dodd가 Columbia 경영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그는 늦었지만 컬럼비아 대학에 지원을해서 막판에 합격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오마하의 현자이자 우리 시대 최고의 투자자인 워렌 버펫 회장의 투자철학의 기본이 되는 핵심 원리들이 바로 이 두명의 선생님들로부터 배운것이다. 하버드 대학의 rejection은 Columbia 대학한테도 큰 횡재를 가져왔다. 버펫회장의 가족은 2008년도에 컬럼비아 대학교에 Susan Thompson Buffett 재단을 통해서 1,2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였다.

Columbia 대학 총장 Lee Bolllinger도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뺀찌를 먹었다.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운명과 잠재력을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나아가야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시골에서 자랐던 Bollinger 총장은 자신보다 교육의 기회가 많은 친구들과 경쟁하려면 스스로 몇배 이상의 노력을 해야한다는걸 어릴적부터 깨달았으며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는 진리를 이미 몸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는 하버드 대학의 리젝션 편지를 받은 후 장학금을 받고 Oregon 대학에 입학하여 하버드 대학에 진학한 동기들보다 더 열심히 인생을 살았고 졸업 후에는 Columbia Law School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Today” 쇼의 진행자 Meredith Vieira씨도 1971년도에 하버드 대학에 원서를 냈다가 불합격 통지를 받은 사람 중 한명이다. 그녀는 하버드에 못간거에 대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서 Tufts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신입생 기간 동안에는 주말마다 Tufts 대학에서 얼마 안 떨어진 하버드 대학 캠퍼스에 놀러가곤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Tufts에서 신문방송학의 대가를 만났고 그 교수를 통해서 방송분야로 입문을 하였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하버드대학에서 Meredith를 받아줬다면 아마도 우리는 오늘 이렇게 재미있는 “Today” 쇼를 즐기지 못할것이다.

유명한 앵커 Tom Brokaw 또한 하버드 대학 불합격 학생 중 한명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인생에서 실패라는걸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하버드 대학 불합격 통보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잘나가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하고 그 이후로 술과 여자를 멀리하고 인생을 진지하게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 리젝션은 큰 쇼크였지만 저를 정신차리게 만든 큰 계기였죠.”라고 Tom은 그당시를 회상하면서 말한다.

뉴욕의 Memorial Sloan-Kettering 암 센터 연구소장이자 노벨 의학 수상자인 Harold Varmus 박사 또한 2년 연속 하버드 의대로부터 퇴짜를 먹고 심각한 충격에 휩싸여있었다. 첫번재 불합격 통보를 받은 그는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학교였기 때문에 의대를 포기하고 대신 문학 수업 몇개를 수강해서 듣기까지 했지만 역시 문학에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다. 1년 뒤 그는 다시 하버드 의대에 지원하였으며 또다시 불합격을 하였다. 입학 인터뷰에서 하버드 의대 총장은 그의 태도와 생각이 유치하고 일정하지 못해서 입학을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하였고 그로부터 의대에 지원하지 말고 그냥 군대나 가라는 치욕적인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하버드 의대와는 달리 Columbia 의대의 교수들은 Varmus 박사의 과학과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관심을 높게 평가하였으며 입학을 허락하였다. Varmus 박사는 대학진학을 생각하고 있는 학생들한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한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보다는 나를 받아주는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세요. 물론 내가 가고 싶은 학교가 나를 받아주는 학교면 금상첨화죠.”

Northwestern Mutual 보험회사의 대표이사인 John Schlifske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Yale 대학으로부터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 그는 차선책으로 미네소타주에 있는 작은 Carleton College로 진학하였으며 거기서 생각지도 못하였던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Yale에 갔으면 만년 후보선수로 벤치에 앉아있어야하는 실력이었지만 Carleton에서는 항상 주전 선수로 미식 축구 경기를 하였다. “누군가 나를 원한다는 그 기분은 참으로 좋은 기분이죠. Carleton 대학이 나를 원하던 것처럼요.”라고 말을 한다. 이런 경험은 John의 아들한테까지 되물림 되었다. 2006년도에 John의 아들인 Dan이 가장 가고 싶었던 Duke 대학으로부터 리젝을 당했을때 그는 아들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준다.”아들아, Duke 대학에서 No를 했다고 네가 갈 수 있는 다른 학교가 없다는건 아니지 않니. 너를 받아주고, 네가 좋은 교육을 받고, 4년을 즐길 수 있는 다른 학교에 가면 된단다.” Dan은 아버지의 충고를 받으들여서 Washington 대학에 진학하였으며 현재 너무너무 행복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 예시로, 나 또한 하버드 경영 대학원으로부터 rejection을 먹은 경험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7년 가을 입학을 목표로 하버드, 스탠포드, 워튼, INSEAD, LBS 등등 최고의 비즈니스 스쿨들에 지원을 하였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는 딱 하나였다. 바로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 Harvard Business School.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 대해서는 수많은 루머와 근거없는 이야기들이 항간에 떠돌고 있다. 해마다 한국 학생들한테는 quota가 적게 주어진다니, 집안에 HBS 출신이 있어야만 입학한다니 또는 재벌집이나 정치인 자녀면 입학이 더 수월하다니…그런데 재수좋게도 나는 인터뷰 초청을 받았다. 평소 인터뷰라면 자신이 있었기에 드디어 나도 하버드 학생이 되는구나라고 혼자 좋아했었는데 아주 보기 좋게 ding 먹었을때는 역시나 대학입학때와 비슷하게 아주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그리고 차선책으로 나는 나머지 비즈니스 스쿨 중 워튼을 선택하였고 비록 졸업은 못해서 MBA 학위는 못 땄지만 UPenn에 간걸 매우 다행이자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하버드 MBA에 갔다면 너무나 가고 싶었던 학교이기 때문에 졸업하는데 연연해서 지금쯤 이런 startup 생활보다는 월가에서 돈을 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워튼에 갔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이런저런 딴짓을 많이 해서 지금 LA에서 뮤직쉐이크를 운영하고 있는걸지도 모르는걸 보면 나도 하버드 떨어진게 잘된일? (ㅋㅋ 그건 아닌거 같고, 오히려 하버드 갔으면 더 잘됐겠지…)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모두 하버드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잘되었다는 말을 하는건 논리의 비약이다. 오히려 하버드 대학에 진학을 했다면 이 사람들은 오히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히 목표하였던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게 인생에 있어서 큰 자극제가 되었음에는 분명한 사실들인거 같다. 생각해보면 나도 서울대와 연고대 진학한 친구들보다 네임브랜드가 떨어지는 중대를 졸업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였던 면도 있는거 같으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진리이다. 실패할때마다 그냥 좋은 경험했다하고 다시 일어서서 아무일 없었던것처럼 새로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Don’t let rejections control your life. To allow other people’s assessment of you to determine your own self-assessment is a very big mistake.”

-Lee Bollinger, Columbia University President who was once rejected by Harvard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