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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첫번째 성공

바로 이전 포스팅이 번아웃과 성과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몇 자 더 적어본다. 번아웃 증상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과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게 바로 첫 번째 성과 또는 첫 번째 성공이다.

여러 번의 큰 성공을 달성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첫 번째의 작은 성공에서 모든 성공이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첫 번째 성공을 만들기까진 상당히 많은 실패가 있었고 이로 인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첫 번째 성공 후 두 번째 성공을 맛보는데 걸린 시간은 더 짧았고, 세 번째 성공을 맛보는데 걸린 시간은 더 짧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성공과 성공 사이의 소요 시간이 매우 짧아졌다는 공통점도 있다. 더욱더 많은 성공을 하면 할수록, 경험이 축적되고, 이렇게 축적된 경험은 실패를 최소화하면서 성공을 가속화 한다. 이건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대한 조금 더 정성적인 이유가 나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성공을 하기 위해선 20번, 때로는 100번 이상의 실험과 실패를 해야 하는데,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을 하다 보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실패가 육체와 정신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 또한 점점 더 줄어든다. 이런 이유로 계속 실험을 할 수 있고, 실패를 할 수 있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공하게 된다. 첫 번째 성공은 두 번째 성공으로 이어지고, 두 번째 성공은 더 빠른 세 번째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상당한 자신감이 생기는데, 이런 자신감이 쌓일수록 성공의 훈장도 차곡차곡, 빠르게 쌓이게 된다.

그래서 모든 스타트업 대표들은 직원들이 되도록 빠르게 이런 첫 번째 성공을 경험할 수 있게 업무를 설계하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자원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줘야 한다. 한 20번 정도의 실험과 실패를 반복하다 한 번 정도의 성공을 맛본 업무 담당자는 계속 이런 성공을 반복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고, 이렇게 하면 무조건 두 번째, 세 번째 성공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엔 이분의 인생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다만, 스타트업의 대표나 직원 모두 항상 실험과 실패만 경험하고, 단 한 번도 성공을 경험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게 더 일반적이라서 첫 번째 성공과 성과를 만들기 위해서 모두가 다 노력해야 한다. 이 첫 번째 성공은 크든 작든 상관없다. 아무리 작아도 앞으로의 위대하고 큰 성공으로 가는 추월차선의 역할을 할 것이다.

번아웃도 이기는 성과

작년에 많은 창업가들이 번아웃을 경험했을 것이다. 번아웃의 의미가 워낙 광범위해서 그냥 피곤한 것도 번아웃이라고 하지만, 심각한 공황장애나 우울증 또한 번아웃에 포함된다. 육체가 너무 피곤해서 오는 번아웃 현상은 휴식을 취하면 좋아지지만, 정신이 피곤해서 오는 번아웃 현상은 그냥 쉰다고 바로 개선되진 않는다. 특히, 이런 번아웃 현상이 아주 오랫동안 쌓이기만 했다면, 육체는 물론 정신이 매우 피곤해지는데, 이걸 그냥 방치하고 치료하지 않으면, 심각한 정신병으로 번질 수도 있다.

작년에 이런 번아웃 현상을 호소하는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나는 요새 대표들 만나면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게, “대표님 요새 정신은 괜찮으신가요?”이다. 그리고 전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좀 민망했고, 이런 질문을 받는 분들도 불편해했지만, 이젠 정신병이 감기와 같이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편안하게 이런 정신 건강에 대해서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이렇게 스타트업 대표나 직원들이 번아웃 증상을 호소하면, 일단 좀 쉬어야 한다. 되도록 회사에서 좀 멀어져야 하고, 업무 생각을 하지 말고 필요한 만큼 휴식을 취해야 한다. 어떤 대표는 공황장애가 너무 심하게 와서 가족들과 한 3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하고, 어떤 스타트업 팀장은 우울감이 너무 커져서, 한 달 동안 휴직하고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같은 회사 또는 주변에 이런 경험을 한 분들이 있을 것이다.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일이 인생보다 먼저 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인생이 위험해지면, 일단은 일을 좀 손에서 놓고 무조건 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분들이 공통으로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회사 상황이 어렵거나, 일이 잘 안 돼서 오는 스트레스와 번아웃은 아무리 오랫동안 휴식을 취해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오히려 본인들에겐 일을 안 하고 쉬는 것 자체가 더 큰 번아웃을 유발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한다. 어떤 분은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두 달 동안 가족들과 멀리 강원도로 휴가를 갔고, 이 기간에는 휴대폰이나 노트북을 아예 안 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업무를 하지 않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는 더 큰 공황장애를 유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을 해도 힘들고, 일을 안 해도 힘들어서 돌아버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도 참 안타깝게 들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미안하지만, 스타트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대표나 직원분들의 번아웃을 한 방에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건 바로 성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과는 매출이 될 수도 있고, 유저증가가 될 수도 있고, 엄청난 제품 출시가 될 수도 있고, 또는 대규모 펀딩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이야기했던 많은 분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눈에 띄는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면 많은 스트레스와 번아웃 증상이 순식간에 없어지는 걸 경험했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컬 한 건, 이런 성과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하려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번아웃 증상이 쌓이고 쌓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살아남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규제, 스타트업, 그리고 투자

작년 12월에 산업은행의 KDB넥스트라운드 클로징 행사에 다녀왔다. 이날의 주제는 핀테크였는데 우리가 초기에 투자한 핀다의 이혜민 대표님이 키노트 스피치를 해서 나도 뿌듯했다. 키노트 스피치 끝나고 곧바로 핀테크 관련 패널 토론이 있었는데, 고맙게도 나도 패널리스트로 초청해주셨고, 패널을 진행하신 KDB 팀장님이 나한테 물어본 질문 중 하나가 “핀다는 규제가 엄격한 핀테크 분야의 회사인데, 스트롱은 왜 초기에 투자했는가?” 였다.

내 생각을 나름 정리해서 답은 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2분 정도밖에 안 돼서 아주 짤막하게 했는데, 그날 더 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내 생각을 여기서 조금 더 길게 글로 한 번 설명해본다.

핀다를 비롯해서 규제가 엄격한 분야의 극초기 스타트업에 우리가 투자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런 분야는 규제가 심하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더 보수적으로 시장을 보고, 훨씬 더 엄격한 기준으로 실사한다. 이런 과정에서 대부분 투자하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난 팀이 큰 시장을 공략해도 절대로 법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과는 소수의 투자자만 이런 회사에 투자하는데,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서 투자 수요가 별로 없기 때문에 굉장히 합리적인 밸류에이션에 투자할 수가 있다. 즉, 좋은 밸류에이션에 투자하기 때문에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회사들이 잘 되면, 더 높은 지분율은 더 높은 수익을 만든다.

그런데 규제가 심한 분야에서는 – 특히 핀테크나 모빌리티 같이 규제가 빡센 분야 – 스타트업의 성공 확률이 현저히 낮아지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많은 분들이 갖는다. 나는 이건 절반만 맞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스타트업의 성공 확률은 5% 미만이다. 규제가 심한 분야의 스타트업 성공 확률이 규제가 없는 분야의 스타트업 성공 확률의 20%라고 보면, 성공 확률이 1%인데, 솔직히 이 영역 안에서는 1%나 5%나 비슷하다. 둘 다 낮은 확률이고, 그냥 스타트업은 어렵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런 회사들이 성공한다면, 그냥 성공이 아니라 대박 성공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아주 오랫동안, 아주 심한 규제가 존재하는 산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고 있는 기존 플레이어들은 경쟁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예를 든 핀테크나 모빌리티 분야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핀테크 분야의 대표적인 기존 플레이어라면 우리가 잘 아는 대형 은행들이다. 은행들이 과연 경쟁력이 있냐고 하면, 나는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나 기술적인 경쟁력은 정말 약하기 때문에 토스나 카카오뱅크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나왔을 때 시장에서 열광한 것이다.
모빌리티 분야의 대표적인 기존 플레이어라면 택시회사들이다. 택시야말로 경쟁력이 전혀 없는 대표적인 산업이라고 생각하는데, 타다와 같은 새로운 서비스가 나왔을 때 시장에서 열광한 점, 그리고 카카오택시를 출시하자마자 대한민국 택시 산업을 카카오가 접수한 것만 봐도 기술적인 면이나 서비스적인 면에서 전혀 경쟁력이 없는 산업이다.

안타깝게도 이들의 유일한 경쟁력은 규제 그 자체이다. 규제라는 경쟁력 때문에 거대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규제 때문에 새로운 경쟁사들의 진입이 거의 원천 봉쇄됐기 때문에, 시장은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객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에 이런 규제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바뀌거나, 없어진다면, 경쟁력 없는 기존 플레이어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고,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더 싸고, 더 좋고, 더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들이 수조 원 ~ 수십조 원짜리 시장을 다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개의 유니콘이 탄생한다.

이런 이유로 우린 굉장히 힘들고, 어쩌면 불가능하지만, 규제가 강력한 시장의 스타트업을 응원하고 계속 투자한다. 이렇게 투자한 회사들이 망하면, 그냥 일반적으로 망하는 스타트업과 똑같이 손실이 발생하지만, 잘 되면 그냥 잘되는 게 아니라 만루홈런 스타트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규제를 싫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금융과 모빌리티와 같이 돈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산업에는 규제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인이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규제는 현실을 반영해서 이제 은퇴 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린 2023년도에 살고 있다. 자동차가 스스로 자율주행하고 있고, 하늘을 날고 있는데, 말과 마차가 주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규제는 이제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해야 하는 건데, 용감한 스타트업과 용감한 투자자들이 이 변화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긍정의 단련

올해는 참 어려운 해였다. 그리고 내년은 투자자와 창업가의 인내심과 그릿이 진정한 시험대 위에 오르는 더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 나도 이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말했지만, 지난 3년 동안 사업했던 분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존경스러운 생각을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략 10년마다 큰 불경기가 한 번씩 오고, 이 불경기는 1년~2년 정도 지속되다가 다시 호전되는데, 창업가들이 느끼는 이번 불경기는 아마도 4년, 심지어는 5년이지 않을까 싶다.

비대면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엔 거의 3년이라는 코로나19 기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지만, 아마도 대부분의 회사엔 엄청난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을 것이다. 이 팬데믹 기간이 이들에겐 이미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했던 불경기였을 것이다. 팬데믹 창궐 후, 첫 6개월 동안은 대면, 비대면 서비스할 것 없이 모두 다 당황했던 시기이고, 이후에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시장에 유동성이 넘쳐흘렀던 기간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회사들은 팬데믹 초기에 떨어진 수치와 느려진 성장 때문에 이 기간에도 펀딩하는 데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끝날 기미가 보이면서, 이제 뭔가 좀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10년 만에 오는 제대로 된 불경기가 온 것이다.

최근에 내가 만났던, 힘들어하고 있는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이 공통으로 이런 말을 한다.
“창업하고 한 2년 개고생하다가, 2019년도 말에 product market fit을 찾은 것 같아서, 잘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원점으로 돌아와서 정말 힘들었지만, 잘 버텼고,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가 끝나면서 정말로 제대로 한 번 사업 해보자 했는데, 불황 때문에 펀딩도 못 받고, 정말 돌아버리겠습니다. 이젠 저도 좀 지쳤고, 팀원들도 다 번아웃 돼서 약간 절망적이긴 하네요.”

이런 대표들한테 나는 곧 불경기가 끝나고 다시 좋아질 거니까 계속 열심히 하라는 말을 차마 못 하겠다. 아니, 하고는 싶지만, 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경기가 곧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기 싫었고, 과연 내가 저 대표라면, 이 시점에 다시 한번 모든 걸 불태우면서 열심히 일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라면, 못 할 것 같다. 온갖 고생 끝에 시장에서 인정해주는 제품을 만들었는데, 팬데믹이라는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외부 요소 때문에 3년을 또 고생하고, 이제 정말 제대로 하려고 하는데 10년 만에 오는 지독한 불경기 때문에 한 번 더 숨을 골라야 한다면, 나는 그냥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여기서 자책하면서 포기하는 창업가들이 굉장히 많고, 이분들에겐 비난이 아닌 존경심을 표시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우고 7전8기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긍정을 단련했고, 긍정을 단련하는 게 아예 몸에 밸 정도로 훈련을 한 분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역경 앞에 사업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지만, 어떤 창업가들은 계속해야 하는 단 한 가지의 이유를 찾아서 소중하게 단련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분들이 성공할진 잘 모르겠다. 또다시 고비가 찾아올 수도 있고, 그럴 때 이분들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요새 나는 이런 분들을 존경하다 못해, 사랑하게 됐다.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얼마 전에 한 상장사 대표님과 즐거운 점심을 같이했다. 나는 이 분이 종사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투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젊은 분들이 한 아이디어에 꽂혀서, 처음에는 장난으로 뭔가를 시작했는데, 이게 취미가 되고, 취미가 열정이 되고, 열정이 사업이 돼서 성공한 전형적인 스타트업의 성장 이야기를 이분에게 직접 듣는다는 건 나에겐 영광 그 자체였다. 물론,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에도 이런 이야기들이 충분히 있지만, 창업자들의 founding story는 항상 다르고,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이날의 대화는 내가 올 한 해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 가장 흥미롭고 배움이 많은 대화 중 하나였고, 그 감동과 여운이 며칠 동안 지속됐다.

이분은 지금은 상장한 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많은 직원분과 함께 하고 있고, 사업을 하면서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일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래도 사업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 사업도 잘 안되고 돈도 없어서 허덕이면서 오늘, 내일 하던 그 순간이라고 한다. 그땐 정말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재미있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변태적인 상황인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너무 재미있었다는.

그런데 이 말이 나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왜냐하면, 나도 생각해보면, 이런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도와 2012년도에 나에겐 이런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
LA에서 뮤직쉐이크 북미사무소를 시작했을 때가 2008년인데, 돈이 없는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인 넥슨 아메리카의 작은 방 하나에 조촐한 사무실을 차렸다. 좁은 공간이었고, 모든 가구는 이케아에서 직접 사 와서 조립했지만, 그 방에서 단위 면적당 발산했던 에너지는 세계 최고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네 명은 내일은 없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했다.
그리고 2012년도는 존과 스트롱을 시작했을 때이다. LA 코리아타운의 작은 사무실에서 우린 창을 등 뒤로 하고 나란히 둘이 앉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쉽지 않지만, 그땐 정말로 아무것도 없고, 자신감과 체력만 있었는데, 미국 서부 시간 오후 5시면 한국 시각 오전 9시라서, 오후 5시가 되면 둘이 번갈아 가면서 한국으로 전화를 돌리고,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LA에 있는 스트롱벤처스라는 투자사의 배기홍이라고 하는데요,,,”라면서 우리도 펀딩을 하고 투자할만한 회사들을 발굴했다.

생각해보면, 2008년과 2012년은 나에겐 정말로 힘든 시기였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 자신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현실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죽고 싶을 정도로 짜릿짜릿하게 재미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가끔 그 당시의 생각을 해보면 그때 그 작고 허름한 사무실, 근거 없는 자신감, 그리고 그냥 그때의 분위기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우리의 사정이 훨씬 좋아졌고, 현재 사무실도 너무 좋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뮤직쉐이크와 스트롱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순간, 그 사람들과 그 사무실이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이 이제 5명인 회사가 언제쯤 토스나 당근마켓같이 커질 수 있을지 한숨을 쉬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이분들에게 그런 순간이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도 있으니까, 현재의 순간을 즐기고 꼭 기억하라고 한다. 나중에 성공해서 더 커지면, 5명인 지금의 이 허접하고 힘든 순간이 매우 그리워질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