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성공적인 VC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투자자가 ‘pattern recognition’에 능해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의 투자 경험을 기반으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됐는지, 반대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 안됐는지, 이 모든 과거의 경험에서 패턴을 찾을 수 있다면, 이 패턴을 잘 분석해서 미래의 투자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아마도 어느 정도 투자를 한 VC라면, 대부분 자신만의 이런 패턴 분석 능력이 있을 것이고, 새로운 창업가와 사업을 볼 때 지속적으로 본인만의 패턴 DB를 참고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할 것이다.
나도 투자를 시작했을 때, 유명한 VC나 내가 잘 아는 선배 VC들이 이런 패턴을 잘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그 말에 많이 동의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나도 투자하면서 경험한 실패와 성공을 바탕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창업가에 대한 패턴을 매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샌 이 pattern recognition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고 나서 보면 “성공하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이런 패턴이 있었죠.”라고 끼워서 맞추는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이런 과거의 패턴을 기반으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는 건 과학적으로 접근해도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린 수학적으로는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즉, 특정한 패턴을 따르지 않는, 그리고 잠재 능력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창업가)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과거의 패턴도 여기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창업가의 전문 지식과 직장 경험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VC는 어려운 AI 사업을 하는 창업가라면 이분이 컴퓨터공학이나 다른 공학 분야의 석사나 박사 학위가 있으면 남들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국내 대학에서 경영학과 학부를 졸업한 창업가와 미국 top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창업가가 둘 다 AI 관련 스타트업을 하면, 대부분의 VC는 후자의 창업가에게 투자할 확률이 더 높다. 이게 일반적인 VC들의 패턴 인식 프로세스이다.
모빌리티 분야에서 창업한 두 스타트업이 있는데, 한 회사는 현대자동차에서 오랫동안 관련 사업을 했던 분이 창업했고, 다른 스타트업은 완전히 상관없는 직장에서 일했던 분이 창업하면, 역시나 현대자동차 출신 창업가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정말 여러 창업가와 회사를 만나면서, 창업가의 학력과 학벌, 그리고 과거 직장 경험은 이 분이 새로 하려고 하는 사업의 성공 여부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는 패턴을 발견했다. 오히려 특정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백그라운드(=학력, 학벌)나 그 분야에서의 직장 경험이 없는 창업가들이 훨씬 더 신선한 시각으로 사업을 바라보고, 그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걸 자주 봤다. 이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너무 많은 공부를 하거나, 너무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던 파괴적이고 참신한 문제 해결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 물론, 잘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법은 실패하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엄청난 솔루션을 찾는 경우도 있고, 이러면 정말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건데,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과 경험이 너무 많으면, “원래 그건 안 돼.” , “내가 오래전부터 해봤는데, 그건 안 되는 거야.” 등의 편견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완전히 백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창업가들은 “방법이 없을까?” , “가능할 것 같아. 방법을 찾아보자.” , “원래 안 되는 건 없어. 왜 꼭 저렇게 해야 할까?” 등의 생각으로 뭐든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패턴 인식 레이다에 잘 안 걸린다.
토스의 이승건 대표는 치과대학을 졸업했고, 실제로 의사 생활까지 좀 했다. 금융업을 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관련 업계에서 일 한 경험도 없다. 하지만, 이 분과의 대화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 그리고 이승건 대표를 잘 아는 다른 분들의 기억에 의하면, 토스를 창업했을 때 대한민국 그 어떤 금융 전문가보다 이 시장의 생리와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금융산업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시도를 했다.
얼마집이라는 모바일앱을 만드는 우리 투자사 한국프롭테크의 송지연 대표도 비슷하다. 이분은 원래 부동산이나 재건축/재개발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했고, 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아파트가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경험했고, 시장의 현실과 앞으로 시장이 가야 할 미래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이걸 직접 해결해 보기로 결심해서 창업했다.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땐, 이 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한 직장인들이나 도시개발이나 부동산학과 교수들보다 훨씬 더 이 시장의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고, 이걸 기술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매우 구체적인 (아직 증명되지 않은)해답을 갖고 있다.
과연 특정 분야의 학업적 지식과 경험이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봤을 땐 별로 안 중요하다. 학업적 지식과 경험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시장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전문성인데, 이건 인터넷 검색과 발품을 팔면 누구나 다 획득 가능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얼마나 집요하게 이 문제를 붙잡고, 얼마나 깊게 파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절박하게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가의 문제이다. 결국, 결승전에서 이기는 건 가장 실력이 좋은 선수가 아니라 가장 간절하게 승리하고 싶어 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익명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Kihong Bae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bluebirdwondrousdcc160418c
창업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의지가 얼마나 간절한지에 대해서 승패가 좌우된다는 말 공감합니다. 제가 만약 투자자 입장이라면 그 창업자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뼈저리게 경험했고 해결을 위해서 얼마만큼 간절한지에 대해서 볼 것 같습니다.
Kihong Bae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Joon
학습능력이 뛰어난 창업가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Kihong Bae
네, 그것도 포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