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VC들이 소비재 쪽의 사업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검토하거나 아예 투자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린 이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계속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창업가들을 만나고, 투자하고 있다. 최근에도 생필품, 의류, 그리고 음식 분야에서 사업하고 있는 여러 창업가를 만났다.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서 직접 고객에게 자사몰, 그리고 다른 온라인 플랫폼이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통해서 판매하고 있는데, 대부분 내가 이 글에서 말했던 그런 어려움을 사업의 단계와는 상관없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등장하는 주재가 ‘해자(垓字)’이다. 사업의 종류에 상관없이 VC들이 창업가들에게 물어보는 게 그 사업만의 차별점, 진입장벽, 보호 장벽, 해자 관련 질문인데, “지금까지 비슷한 사업을 여러 번 검토했는데, 모두 다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로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 같네요. 우리가 다른 경쟁사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우리만의 해자가 있나요?” , “이 사업이 잘되면 분명히 대기업도 같은 사업을 할 텐데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우리만의 해자가 있을까요?”와 같은 유의 질문이다. 솔직히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투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질문을 한 VC는 결국엔 이 사업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비슷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회사들이 투자자를 설득할 만한 명확하고 논리적인 해자를 갖추긴 어렵고 –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초기 스타트업은 – 대기업이 이 분야에 진출했을 때 다윗 같은 스타트업이 골리앗 같은 대기업을 이길만한 해자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론적으로 명확하고 논리적인 상상 속의 해자가 있더라도, 아마도 투자자는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기술력이 뒷받침되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라, 공장에서 뭔가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브랜드나 D2C 회사들은 이런 해자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도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한국과 미국 회사에 꽤 많이 투자하면서 이 힘든 현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나는 몇 년 전부터 이런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 분야에서 해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받아들이고 있고, 아예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창업가들에겐 본인이 하는 사업의 해자는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가 투자한 이런 D2C/브랜드 사업들을 보자: 제주 귤을 원료로 주스와 같은 다양한 시트러스 제품을 만드는 귤메달; 파워레이드나 게토레이드랑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 기능성 스포츠 드링크 얼티밋포텐셜을 만드는 어센트스포츠;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한 영양제 페노비스를 만드는 노즈워크. 모두 다 잘하고 있는 스타트업이지만, 다른 스타트업도 충분히 이 분야로 들어올 수 있고, 돈/시간/인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기업도 진출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규모가 나오는 시장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회사들이 우리 투자사들과 경쟁하기 시작하면 우리 창업가들은 어떤 해자를 만들면서 이길 수 있을까?
정답은, 이들이 구축할 수 있는 해자는 없다. 이 치열한 분야에서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하고, 되도록 많은 소비자들의 눈에 노출되고, 그냥 무조건 많이 팔아서 매출 잘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많이 팔고, 어떻게 매출을 많이 만들 수 있을까? 이 또한 정답도 없고, 이를 위한 해자라는 것도 없다. 그냥 좋은 제품 만들고, 최대한 많은 채널을 통해서 유통하고, 동시에 마케팅도 잘 해야 한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혹시나 자체 공장을 만들거나 우리 제품을 OEM 제조하는 공장을 인수해서 생산의 전 과정을 수직통합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건 품질관리, 공정관리, 수량 조정, 가격 조정 면에서 우리에게 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체 공장에 대해서 고민하는 단계까지 왔다면, 이미 우린 시장에서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브랜드가 됐을 것이고, 여기에서 말한 대로, 특정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됐다면, 이 자체가 엄청난 해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그 강력한 브랜드가 되기 전까지는, 해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자꾸 우리만의 차별점이나 해자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라. 대신, 남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너무 깊이 생각하기보단 get things done 전략으로 실행에 집중해라.
익명
공감합니다! 브랜드가 중요한 사업에서 공식이나 기술 논리적으로 설득이 되는 시장 진입 장등은 의미 없는 탁상공론 같습니다. 고객이 가치를 인정하고 영업이익 잘 나오는곳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Kihong Bae
아예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익명
좋은 글 감사합니다! 브랜드 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투자유치 IR을 할 때 ‘대기업이 진출하면 어떻게 경쟁 해자를 만드실 건가요?’ 라는 질문을 엄청나게 받았었는데, 그때 느꼈던 답답한 마음을 배기홍 대표님께 위로 받은 느낌입니다.
코카콜라도 펩시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있고, 명품 시장에서도 루이비똥 그룹과 케링 그룹 등 난다긴다하는 브랜드들이 경쟁하는데, VC 업계에서는 소위 ‘브랜드’ 비즈니스를 너무 ‘기술’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으로 분석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년간의 브랜드 운영 결과, 브랜드 비즈니스의 핵심은 결국 그 브랜드의 가치와 제품/서비스에 열광하는 팬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 지가 가장 중요한 열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모든 기업이 각자의 노하우로 달성하고 있는 것 같고, 오퍼레이션과 더불어 이걸 잘하는 팀인지 이해하는 것이 투자의 중요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투자자의 이성적 관점으로는 100% 이해하기는 어려운 감정과 본능의 영역이 걸쳐있어서 이 분야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는 이런 감정과 본능의 영역에 대한 감도가 높은 사람이어야 할 듯 하네요. 🙂
Kihong Bae
조금이라도 이 글이 위안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브랜드에 투자하는 VC들의 생각과 관점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저희는 특정 사업/제품/시장 보단 창업자들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게 다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고맙습니다.
khlee1108
해자는 결국 인위적으로 만드는게 아니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만들어지는군요. 답은 언제나 단순한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Joseph Lee 님의 의견도 깊이 공감합니다
Joseph Lee
매번 좋은 생각공유 감사드립니다. 관련하여 Square 공동창업자 짐 맥켈비가 쓴 언카피어블 (Uncopyable)이란 책이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당면한 어려운 고객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다가 그것의 총합이 혜자가 되었다는 메시지이고, 스타텁 운영하는데도 많이 참고하고 있어서 공유하고자 댓글 남깁니다.
Kihong Bae
네, 저도 인상깊게 읽었던 책이죠 🙂 작은 노력들이 쌓이다보면 혁신이 되는 것이고, 이 혁신은 uncopyable 하다는 🙂 고맙습니다~ (참고로, 혜자 -> 해자)
익명
네 혜자는 다른 뜻으로 쓰이는데 잘못 적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