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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메이트

추석 연휴를 끼고 약 2주 정도 미국에서 휴가를 즐겼다. 나같이 개를 가족같이 키우는 사람들한테 장기여행은 항상 부담스럽다. 개를 항상 데리고 다닐 수도 없고, 맡기자니 믿고 맡길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 마일로는 이미 한국과 미국을 몇 번 비행했지만, 이젠 나이도 있고 하늘을 난다는 거 자체가 개들한테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가능하면 비행기는 태우고 싶지 않았다. 개를 안 키우는 내 주변 사람들은 그냥 친구나 가족들한테 맡기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집에 혼자 놔두고 2주일 분량의 식사를 개밥그릇에 부어두고 가면 되지 않냐고 하는데, 이건 우리 부부한테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주 짧은 여행이면 가족한테 맡기고 갈 법도 하지만, 기간이 늘어나면 서로한테 스트레스만 쌓이고, 개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한테 맡기면 항상 사고의 위험이 존재한다.

다행히도 나한테는 우리 투자사 도그메이트가 있다. 실은 우리 개를 도그메이트 펫시터한테 이렇게 장기간 위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한, 긴 연휴로 인해 펫시터에 대한 수요가 많아서 우리 집 근처에 위치한 펫시터를 찾는 게 만만치 않았다. 내 개를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한테 맡기면서 발생하는 리스크는 치명적이다. 특히 사람과 달리 말도 못 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 일정하지 않은 동물이기 때문에 개를 잘 모르는 사람한테 장기간 내 개를 맡기면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너무 크다. 이러한 이유로 도그메이트 같이 생명을 다루는 양방향 마켓플레이스 서비스에서 이미 서비스를 사용해본 사용자의 리뷰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펫시터의 리뷰를 우리는 아주 꼼꼼하게 읽었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남양주에 위치한 펫시터 분을 찾아서 예약했다. 예를 들면 마일로는 나이가 많은 큰 개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해서 어린 개를 키우는 펫시터를 우린 선호한다. 또한, 혼자 사는 여성/남성 펫시터 보다는 화목한 가정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집에 맡기면 개가 혼자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개들도 사회성이 있기 때문에 화목한 가정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실은, 우리 부부는 좀 까다로운 편이라서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가 찾은 펫시터 분은 우리의 조건을 다 충족했다.

휴가 떠나기 약 3주 전에 우린 사전 만남을 한 번 했다. 사전 만남을 통해서 마일로가 펫시터분과 궁합이 맞는지, 그리고 그 집의 개와 싸우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과정이다. 다행히 문제가 없었고, 펫시터 분이 개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아시는 분이라서 마음이 놓였다. 미국에 가 있던 2주 동안 펫시터 분은 매일 매일 꼼꼼히 도그메이트 일지를 작성해서 우리한테 공유해주셨고, 각종 사진과 동영상을 지속적으로 보내주시면서 우리와 끊임없이 소통했는데, 나는 이 과정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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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메이트 돌봄일지

덕분에 우리는 미국에서 긴 휴가를 걱정 없이 잘 즐기다 왔고, 귀국하자마자 다시 마일로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실은, 펫시터 분이 너무 잘 해주셔서 혹시 우리 개가 집에 안 오겠다고 하면 어찌할까 하는 걱정까지 할 정도였으니, 대만족이었다. 이렇게 만족한 고객은 펫시터에 대한 좋은 리뷰를 남길 것이고, 이 리뷰는 또 다른 행복한 고객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웬만하면 다른 분보다는 이 펫시터분을 지속해서 이용할 확률이 매우 높다.

도그메이트도 많이 벤치마킹하고, 이제는 Rover라는 회사에 인수된 북미 최고의 펫시터 서비스 DogVacay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애용하던 서비스인데, 우리 투자사도 이런 글로벌 회사의 수준과 맞먹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앞으로 더 안정되고 좋은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길 바란다. 이하영 대표와 도그메이트 팀원들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연못의 큰 물고기

big-fish-little-pond과거에 ‘서울만 중요한가?‘ 라는 포스팅에서 나는 굳이 모든 회사가 서울로 올 필요가 없다는 걸 강조했다. 아직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우리가 투자한 몇 안 되는 지방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항상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내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지방의 열악한 환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이러다 보니, 회사의 위치에 대한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지방에서 완전히 뿌리를 박고, 회사가 커지면 서울에 지사나 사무실을 하나 만들자는 내 주장과 지방에서 시작하지만, 조금만 회사가 성장하면, 본사를 서울로 옮기자는 팀의 주장이 극과 극으로 충돌하고, 답이 없는 대화로 끝난다. 물론, 내가 강압적으로 이런걸 강요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결정은 대표이사와 경영진이 하는 거고, 대부분 회사는 돈을 어느 정도 벌면, 지방을 떠나서 서울로 이사하는 결정을 한다.

그래서,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요인에 대해서 생각해봤고, 이에 대한 내 입장을 한번 정리해본다. 지방에서 창업했는데, 사업 규모가 커지면 서울로 본사를 옮길 생각을 하는 창업가를 지금까지 꽤 많이 만났는데, 이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보, 네트워크, 벤처캐피털, 공간, 그리고 채용이다. 간혹 겉멋에 사업하는 창업가들이 본사 주소가 강남이 아니면 파트너나 고객이 무시한다는 이유로 서울, 그것도 강남으로 이전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가짜 창업가들이다. 우리는 이런 인간들을 주로 fauxpreneur라고도 한다.

하나씩 짚고 넘어가 보자. 지방에 있으면 서울보다 정보의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아마도 다음 항목인 네트워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 같다. 일단, 단순 정보에 대해서는 이건 무조건 틀린 말이다. 대부분 정보가 인터넷에 공개적으로 널려있는데, 서울에 있든 지방에 있든, 그 접근성은 똑같다. 의지만 있다면, 그래서 충분한 시간만 투자하면, 전 세계 모든 정보는 손가락 하나로 접근할 수 있다. 충분한 의지와 끈기만 있다면, 좋은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고도, 구글 검색으로만 노벨상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아마도, 지방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다는 대부분의 창업가는 지방에는 서울과 같은 좋은 네트워킹 모임이나 행사가 없다는 말을 하는 거 같다. 즉,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과 투자자를 만날 수 있는 모임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반만 동의한다. 서울에는 지방보다 네트워킹 모임이 많은 거지, ‘좋은’ 네트워킹 모임이 많은 건 아니다. 솔직히 서울의 네트워킹 행사나 모임 대부분 별로 영양가가 없다. 새로운 사람 또는 이미 아는 사람을 만날 기회가 주어지는 건 맞지만, 이게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나 투자로 이어질 확률은 낮다. 오히려 제품을 만들고, 고객한테 집중해야 할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그러니까 회사를 서울로 옮겨서, 이런 화려한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하면, 갑자기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거라는 순진해 빠진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나만 잘하면, 서울이든 지방이든, 좋은 정보와 좋은 사람에 대한 접근성은 저절로 생긴다. 오히려 이들이 나를 찾아온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시각에서 본 것이다.
지방에는 VC가 거의 없다. 이건 사실이다. 그리고 지방에는 서울만큼 쉽게 투자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방의 스타트업이 투자받을 수 있는 확률이 낮다는 의미는 아니다. 투자자도 좋은 회사 냄새는 금방 맡고, 좁은 투자자 커뮤니티 내에서는 잘 나가는 회사에 대한 소문은 금세 퍼진다. 지방에 있는 회사가 좋은 실적을 내면서 잘 성장하고 있으면, 투자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서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럼 왜 우리 회사는 투자자가 안 찾아올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당신의 회사가 후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은 디캠프, 마루180, 구글캠퍼스, 카우앤독 등 코워킹스페이스가 많은데, 지방은 이런 공간이 전혀 없어서 창업이 활성화되기 힘들어요.”라는 말도 많이 듣는다. 아주 많이 듣는다. 스트롱도 구글캠퍼스 안에 사무실이 있고, 디캠프와 마루180에도 나는 가끔 가는 편인데, 이런 공간이 지방에 없어서 창업하는 데 불리하다는 생각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공간이 있든 없든, 창업은 할 수 있고, 회사를 키울 수 있다. 그리고 혹시나 서울로 이사 오면, 이런 코워킹공간에 누구나 다 입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후진 제품을 만드는 회사는 서울이든 지방이든 대접받지 못한다.

실은, 채용에 대해서만 나는 서울로 오고 싶어하는 창업가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대한민국의 좋은 인재들이 서울로 많이 몰리는 건 사실이다. 좋은 대학교도 서울에 많고, 좋은 직장도 서울에 많기 때문에, 서울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다. 하지만, 그래서 무조건 서울로 와야겠다는 대표이사들은 채용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서울에 너무 꽂혀서, 처음부터 지방대학 출신이나, 그 지역의 인재들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걸 나는 여러 번 느꼈기 때문이다.
채용에 대해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좋은 인재를 데려오려면, 큰 물의 작은 고기가 되기보다는 작은 물의 큰 고기가 돼야 하는데, 이게 서울로 올라오면 쉽지가 않다. 서울에 오면 우리 회사는 수많은 벤처기업 중 하나가 될 텐데, 과연 최고의 인재를 채용할 수 있을까? 한국 최고의 회사, 그리고 간혹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회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에서 우리가 이들과 경쟁해서 더 좋은 인재를 데려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경쟁이 덜 치열하고, 그나마 우리가 남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지역이나 시장에서, 그 지역 최고의 인재들을 채용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CNBC의 2017년도 조사에 의하면, 서울은 전 세계에서 6번째로 물가가 비싼 도시이다. 이 결과의 신빙성은 좀 떨어지지만, 어쨌든 서울은 물가가 높은 도시다. 아직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스타트업이 서울로 이사 오면, 비용 구조는 최악이 된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활주로(runway)가 엄청나게 짧아진다. 이렇게 비싸다 보니, 사무실은 서울에 있지만, 직원들은 서울에서 멀리 살 수밖에 없고, 여기에 서울의 교통지옥이 합쳐지면, 출퇴근 시간이 짜증 나게 늘어난다. 그리고 위에서 이미 언급한 인재 채용의 문제는 실은 지방보다는 서울이 더 심각하다.

그런데도 굳이 우리 회사를 서울로 이사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우리의 본사이고, 내가 제품을 만들고 있는 곳이 우리의 본사라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 Shout It Out Design>

카레클린트 스토리

얼마 전에 신흥 가구업체 카레클린트의 창업스토리에 대한 책을 읽었다. 나는 가구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 졸업생 3명이 만든 국산 가구 브랜드의 초고속 성장 스토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회사인지 궁금했었다. 솔직히 책은 좀 뻔한 내용이었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 3명이 취업보다는 창업을 선택했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이젠 연 매출 100억 원의 어엿한 회사를 만든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를 잘 읽으면서 내용을 곱씹으면, 인사이트와 경험이 넘쳐나는, 그런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창업스토리다.

실은 창업 관련 이야기는 나도 많이 읽어봤고, 내 일 자체가 이 분야에 있다 보니 신선한 건 없었지만, 내가 항상 믿고 있던 내용, 그리고 우리 투자사들이 직접 겪으면서 증명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 두 가지가 있어서 여기서 살짝 공유하려고 한다.

첫째는, 좋은 제품의 중요성이다. 좋은 제품이 최고의 마케팅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아직 시장에서는 보통 이하의 제품을 만들어서 마케팅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절대로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이 전략이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그것도 아주 장기적으로는 좋은 제품만이 좋은 회사를 만들 수 있다. 카레클린트의 경우도 업계에서 입소문을 좀 타니까, 카피캣들이 대거 생겨나면서 비슷하게 생긴 제품으로 한때 가구 시장이 도배되기까지 했다. 소비자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 당연히 비즈니스에 큰 타격을 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회사의 매출은 더 뛰었다. 왜 그랬을까? 제품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이 좋은 제품과 똑똑한 소비자가 만나면, 아무리 카피 제품들이 난무하더라도, ‘최고’의 제품은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 소비자들은 직접 발품을 팔기도 하고, 다른 고객의 리뷰를 꼼꼼히 따져보고, 직접 사용도 해보기 때문에, 정말로 잘 만든 제품이라면, 껍데기만 카피해 놓은 짝퉁이 따라올 수가 없다. 카레클린트의 경우, 오히려 카피 업체들이 이 시장에 대한 파이를 키워놓기만 하고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이들이 만드는 최고의 제품은 최고의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이들은 가구를 디자인할 때 ‘누군가 따라 했을 때 이것보다 예쁘지 못하게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완벽한 제품을 디자인한다. 어떤 시장이라도, 특히 시장이 크다면, 경쟁업체는 존재하며, 그 경쟁업체는 다른 작은 스타트업이 될 수도 있지만, 삼성이나 네이버 같은 대기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리고 넘어설 수 없는, 완벽한 제품을 만들면 시장에서 항상 1등 할 수 있다.

항상 사용자 편의성의 입장에서 제품을 디자인한다는 이들의 철학 또한 배울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기능을 존중한 디자인’이라는 섹션에서 책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써본다.

가구에는 아트 퍼니처(art furniture)라는 예술 영역이 있다. 이처럼 예술적인 가치를 최우선적으로 하는 경우를 예외로 하고, 실용 가치가 있는 제품으로써 가구 디자인을 한다면 기본적으로 기능을 존중해야 한다. 카레클린트의 경우도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가구를 만드는 회사이기 때문에 디자인보다는 기능에 비중을 더 크게 두고 있다. 앉았을 때, 누웠을 때 사용자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형태에서 최고의 디자인을 뽑아내고자 노력한다. 기능을 무시하는 디자인은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용자에게 ‘불편함’을 떠넘기는 것은 제품 디자이너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이런 현상은 가구뿐만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tech 분야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만드는 사람들은 엄청나다고 생각해서 복잡한 UI와 UX를 만드는데, 실제 사용자들한테는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기능들을 누구나 다 한두 번 정도 경험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예술적인 영역에서의 제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내가 알기로는 99%의 스타트업이 예술적인 영역보다는 실용적인 영역에서의 제품을 만든다? 기능을 무시하는 디자인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하지만, 실용적인 기능이 최고이며, 이는 시장과 고객과의 대화로부터 나올 수 있다.

즉,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면, 핵심을 건드리는 좋은 제품을 만들고, 고객을 위한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애벌레와 나비

metamorphosis지난 3주 동안 프라이머 12기 후보 회사 47개와 미팅을 했다. 참고로, 이 47개 회사는 지원한 수백 개 회사 중 서류심사를 통과한 후보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회사와 만나야 하므로, 그리고 나도 바쁜 일정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각 회사와 30분씩만 미팅을 했다. 늦은 오후까지는 나도 항상 다른 일이 있어서 평일은 주로 5시부터 7시까지, 30분 단위로 4개 후보 회사들과 만나고, 금요일은 6~7개 회사와 미팅을 했다. 짧은 미팅이 실은 긴 미팅보다 사전 준비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정말 많았고, 이렇게 하다 보니 지난 3주 동안은 매일 평균 7~8개 팀과 미팅을 한 거 같다. 프라이머 12기 후보 회사, 스트롱 기투자사, 새로운 회사, 이렇게 하루에 많은 미팅을 소화하고 집에 가면, 목은 맛이 가고, 몸은 녹초가 돼서 쓰러질 거 같다. 항상 새로운 회사를 만나고, 뭔가 하려는 창업가들을 만나는 건 즐겁고 흥분되는데, 이번엔 정말 힘들었던 걸 보면, 나이와 함께 체력의 한계도 같이 오는 거 같았다.

미팅 시간이 짧다 보니, Y Combinator 스타일로 딱 다섯 가지만 질문했다:
1/ 우리 회사는 뭘 만드는지
2/ 왜 이걸 만드는지
3/ 우리 제품을 누가 사용할지
4/ 제품이 있다면, 현재 수치들
5/ 어떤 팀인지

매 기수가 특별하지만, 이번 12기 후보 회사도 매우 다양했다. 이미 수천만 원의 월 매출을 달성한 회사도 있었고, 작년 매출이 50억 원인 회사도 있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몰래 창업한 분도 있고, 아직 학생인 창업가, 그리고 40대가 훌쩍 넘은 시니어 창업가도 있었다.

아직 외부 투자를 유치하지 않고, 나름 잘 성장하고 있는 팀 중 자신감이 너무 넘쳐서 자칫 거만해 보이는 팀도 있었는데, 이런 팀한테는 일부러 비즈니스의 여러 가지 허점을 지적했다. 이 정도를 일구었다고, 벌써 자만하는 건 앞으로 비즈니스의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냉정한 현실을 자각시켜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다양한 사업을 시도해봤는데, 지금까지 모두 처참하게 실패한 팀도 있었다. 이런 팀한테는 본인들이 하는 걸 정말로 믿는다면, 계속 시도해보라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정말로 이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만드는 걸 나는 여러 번 목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47번째 마지막 팀과 미팅이 끝났다. 이 중 몇 개가 프라이머 회사가 될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미팅한 모든 회사에 이야기했듯이, 프라이머 선발이 되든, 안 되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좋아하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나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실은 대부분의 회사는 잘 안될 것이다. 확률적으로 거의 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팀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살아가기보다는,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의지는 우리 모두한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소중한 마음가짐이다.

애벌레를 보면, 이렇게 희한하게 생긴 곤충이 나중에 화려한 나비가 될 거라는걸 예측하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같은 극초기 투자자의 역할이 더욱더 크다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고 있다. 수천억 원이나 수조 원의 펀드를 운용하면서, late stage의 회사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펀드도 당연히 중요하고 이들이 만드는 미래는 엄청나다. 하지만, 씨앗을 계속 뿌리면서, 토양을 기름지게 만드는 걸 도와주는 초기 투자자들은 정말로 독특하고 독보적인 존재들인 거 같다.

<이미지 출처 = eFinancialCareers>

DSC와 정기구독 이커머스

이커머스에 종사한다면, LA 기반의 subscription 회사 Dollar Shave Club(DSC)에 대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회사 이름은 못 들어봤어도, 남성 면도기를 팔아서, 창업 5년 만에 다국적기업인 유니레버에 1조 원에 회사를 매각한 청년의 기사는 읽어봤을 것이다. 실은 같은 지역인 LA에서 창업된 이 회사를 처음 접했을 때, 그냥 누가 장난삼아 시작했고, 좀 하다가 그만두겠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런 내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올해 나는 달러쉐이브클럽을 그대로 베낀 비즈니스, 또는 이와 비슷한 카테고리에서 생필품이나 소모품을 정기구독 방식으로 판매하는 한국의 이커머스 스타트업을 많이 만났다. 대부분 강한 욕망을 가진, 아주 똑똑한 창업가였고, 모두 하나같이 “달러쉐이브클럽이라는 비즈니스가 있는데요, 남들이 웃고 넘겼던 비즈니스였지만, 1조 원에 인수됐습니다”라고 말하는 눈빛으로 나와 미팅을 했다.

나도 실은 달러쉐이브클럽의 인수를 접했을 때 많이 놀랐고, 다시 한번 좋은 실행력의 중요성에 대해 깨달았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런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팀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결론적으로는, (아직) 그 어떤 팀에도 투자를 집행하지는 않았는데, DSC 같은 성공적인 정기구독 비즈니스를 만들기 위해서 기업이 꼭 갖춰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실은 내가 이커머스 전문가는 아니라서, 이건 좀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성공적인 subscription 비즈니스를 만들기 위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DSC가 매우 잘 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창업 첫날부터 자체 브랜드를 판매했다. 생필품을 섭스크립션으로 판매하는 대부분의 회사는 일단은 남의 제품을 모아서 판매하는 전략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하다가 어느 정도 규모에 도달하면,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서 판매할 생각을 하는데, 처음부터 자체 브랜드로 시작하는 걸 권장한다. 이렇게 해야지만 고객의 이탈을 방지하면서, 지속해서 재방문율을 높일 수 있다. 브랜드와 제조원이 빤히 노출되는 남의 제품을 유통하면, 고객이 우리를 건너뛰고 맘에 드는 특정 브랜드로부터 직접 구매하는 게 너무 쉬워진다. 특히, 면도기와 같은 소모품은 소수의 브랜드만 존재하고, 웬만한 슈퍼, 편의점, 마트에 가면 쉽게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DSC의 자체 브랜드 전략은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면도기/날로 시작했지만, 이 회사는 다른 남성 제품군으로 확장하고 있다. 물론, 모두 다 자체 브랜드로.

실은, 자체 브랜드가 아닌, 남의 제품을 취합해서 판매하는 전략으로 잘하고 있는 이커머스 스타트업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 회사들을 잘 보면, 내가 이 포스팅에서 썼듯이, 큐레이션에 특별한 강점을 가진 경우가 많다. 즉, 와인이나 맥주같이, 너무나 다양한 제품이 존재하고, 전문가의 통찰력 없이는 내 취향에 맞는 제품을 선택하는 게 어려운 분야의 비즈니스라면, 누군가 나를 위한 제품을 잘 골라준다면, 충분히 계속 돈을 내고 구매할 의향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먹을만한 와인 종류가 30가지 밖에 안 된다면, 큐레이션 섭스크립션 비즈니스는 쉽지 않다. 큐레이션을 통해서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발견만 한다면, 그 이후에는 이 와인을 직접 구매할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다.
우리 투자사 스낵피버는 한국 과자를 정기구독으로 판매하고 있다. 한국 과자는 위에서 말한 와인이나 맥주만큼 종류도 다양하지만, 미국인들이 직접 구매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LA나 뉴욕같이 한인이 많이 없는 지역에는 한국슈퍼가 없기 때문이다. 미주리주의 시골에 사는 백인이 ‘고래밥’을 구매하고 싶어도, 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스낵피버를 계속 이용하는 것이다.

DSC가 또 한 가지 잘 한 점은, 반드시 필요하되, 옵션이 별로 없는 분야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남자라면, 그 횟수야 다르겠지만, 누구나 다 면도를 해야 한다. 면도하는 방법은 dry 면도와 wet 면도 두 가지 뿐이다. 나같이 dry 면도를 선호하면, 전기면도기를 사용하고, wet 면도를 선호하면, 실은 수동 면도기 브랜드의 종류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소수의 경쟁사보다 더 싸고, 좋을 수만 있다면 이길 수 있는데, DSC가 그걸 잘 한 거 같다.

DSC의 고객들이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초기 면도기와 면도날은 한국회사가 제조해서 공급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도루코가 DSC한테 제품을 OEM 공급 했는데, 도루코가 2012년 DSC와 어떤 가격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꽤 좋은 조건이었다고 한다. 즉, 기술력 있는 업체로부터 좋은 가격에 물건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점도 고객 만족과 수익성에 많이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도루코는 혹시 DSC가 물품대금 지급을 못 할까 봐, 안전장치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콜옵션 계약도 체결했는데, 올해 이 콜옵션을 행사해 약 600억 원을 벌었다. 이는 도루코의 작년 영업이익인 472억 원보다 높다.

또 한가지. DSC의 Michael Dubin 사장은 뛰어난 배우이자 마케터였는데, 이 또한 회사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마이클 대표가 직접 출연한 DSC 홍보 동영상 ‘Our Blades are Fucking Great’은 유투브에서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으면서 완전히 바이럴하게 퍼졌다.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가 이 면도날을 홍보했다면, 어쩌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을 수도 있지만, 제품을 직접 만든 대표이사가 “우리 면도날 x나게 좋으니까, 다른 쓰레기 제품은 버리고 우리 제품 사용해봐.” 했던 게 지금까지 시장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호기심을 발동한거 같다. 많은 남성이 저렇게 재미있는 사장이 만든 면도기는 꼭 한 번 사용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한 거 같다.

실은, 내가 나열한 점들 때문에 DSC가 잘 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지만 성공적인 subscription 이커머스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분야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창업가라면 ‘정기구독’의 의미에 대해서 잘 생각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