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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ond Bet Club

VC 업계에는 Second Bet Club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두 번 베팅하는 의미인데,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는 걸 의미한다. 한 창업가에게 투자했고, 이 분이 재창업했을 때 다시 투자하는 VC도 있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사람을 보고 투자하는 업인데 왜 이런 사례가 더 많지 않을까 항상 궁금했지만, 최근에 우리도 두 번 베팅하는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일단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창업하고 엑싯하거나 회사를 폐업하는데 최소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는데, 이후에 또 창업이라는 어려운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이전 사업을 마무리한 후 몇 달 또는 몇 년의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이런 걸 감안하면 VC의 역사가 최소 7년 돼야 같은 창업가에게 두 번 투자할 수 있는데, 아직 7년 이상 된 VC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이 사이클을 못 탔기 때문이다. 물론, 창업하고 1년 만에 폐업하거나 엑싯한 창업가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분들이 재창업하면 다시 투자할만한 분인지 충분히 판단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함께 하면서 서로를 알 수 있는 시간이 워낙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한 창업가에 다시 투자하기 위한 일반적인 전제조건은 이 분의 전 사업의 성공적인 엑싯이기 때문이다. 좋은 IPO나, 높은 가격에 인수돼서 이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지만 이 분이 하는 그다음 사업에도 투자할 수 있는 명분과 논리가 생기는데, 창업가나 투자자나 모두 잘 알듯이 성공적인 엑싯은 확률이 상당히 낮다. 특히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투자하는 대부분의 회사가 성공적으로 엑싯하긴커녕, 창업 수년 후에 문을 닫는 걸 보면, 대부분 VC의 포트폴리오에서 두 번 투자할만큼 성공적인 창업가가 잘 안 나와서 second betting을 못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VC는 망한 창업가에겐 재투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한 창업가에게 두 번 베팅하는 건 흔하지 않지만, 우린 올해 이런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과거에 투자했던 창업가 세 분이 모두 재창업을 했는데, 이 세 분의 새로운 스타트업에 각각 또 투자했다.

위에서 나열했던 내용과 하나씩 비교해보자.
스트롱은 이제 15년 됐다. 우리도 이렇게 나이를 먹다보니 오래전에 투자한 창업가들이 재창업하는 사례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됐다.
스트롱은 그동안 거의 300개의 회사에 투자했다. 이렇게 많이 투자하다보니, 소수의 회사는 좋은 엑싯을 했다. 이 창업가들은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하지만, 우리에겐 성공적으로 엑싯한 회사들보다, 망한 회사들이 훨씬 더 많다. 망한 회사들의 창업가들도 1~2년 쉰 후에 다시 창업했고, 다행히 이들도 우리의 돈을 다시 받아줬다.

Saywise는 14년 전에 Tapas Media를 창업한 김창원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구직자를 위한 AI 에이전트 플랫폼인데, 솔직히 우리는 이 제품이나 시장보단 사람을 보고 두번째 베팅을 했다. 스트롱은 타파스미디어의 첫번째 투자자였는데, 그 당시에도 우리는 김창원 대표님을 보고 투자했다. 창업한지 9년 만에 타파스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 인수되면서 우리에겐 아주 좋은 엑싯이라는 훈장을 안겨줬지만, 그 9년 간의 여정은 똥밭이었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 힘든 과정을 못 견뎠겠지만 우린 이 분이 9년 동안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고, 투자자로서 이 분과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을 매순간 즐겼다. 새로운 스타트업도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SUPERBAND는 한국에서 만든 습윤밴드를 미국에서 판매하는 D2C/브랜드 사업이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약 12년 전에 투자했던 Giblib의 코파운더였던 신지혜 대표님의 새로운 스타트업이다. Giblib이라는 회사는 안타깝게도 잘 되지 않았지만, 신대표님은 약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후 다시 창업에 도전했고, 우리는 이분에게 다시 한번 투자했다. 망한 회사의 코파운더에게 왜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보는 분들이 많은데, 솔직히 사업의 성공은 실력과 운이 결정하는데 초기 스타트업은 실력보단 운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이 분은 똑똑하고 실력도 있는데 첫번째 사업에서 운이 별로 없었다. 두번째 사업은 실패한 첫번째 사업에서 배운점을 잘 적용하면 분명히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이전 사업을 할 때 우리와의 관계와 소통이 매우 좋아서 다시 투자하는 건 솔직히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의 돈을 두 번이나 받아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참고로 이 회사에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도 몰랐던 사실인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반창고, 특히 습윤 반창고를 가장 잘 만드는 나라이다.

PreventiveMD는 개인화된 GLP-1과 펩타이드 치료 요법을 제공하는 미국의 원격의료 플랫폼이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의 Brian 대표는 위에서 말한 SUPERBAND의 신지혜 대표님과 Giblib이라는 이전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Brian과 신지혜님이 공동창업한 Giblib에 12년 전에 투자했고, 이 사업은 망했지만, 두 분은 각자의 스타트업을 다시 했고 우린 이 두개의 스타트업에 다시 또 투자했다. 왜 한 번 망한 파운더에게 다시 투자했는지 물어본다면 똑같은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첫번째 사업은 운이 안 따라줬지만, 두번째 사업은 더 잘할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겐 회사가 좋은 엑싯을 했는지 아니면 망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창업가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와의 관계와 경험이 어땠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엔 이건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long 게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업을 얼마나 오래 할지 잘 모르겠지만, Second Bet Club에 이어 Third Bet Club도 나올 수 있길 바란다.

참 어려운 상장 시장

우리는 쿠팡의 매우 작은 주주이다. 스트롱이 쿠팡에 직접 투자하진 않았지만, 스트로의 포트폴리오였던 Recomio라는 회사가 쿠팡에 주식교환으로 인수되면서 쿠팡의 주주가 됐고, 상장 주식을 대부분 팔았지만 아직 소량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1호 펀드의 포트폴리오인데 이미 이 펀드의 나이는 14살이 되어 간다. 청산 시점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의 LP들이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물어봤던 질문이 남은 쿠팡 주식 처분 시점이다.

이분들에게 나의 한결같은 답변은 “한국에 살면 직접 체감할 수 있는데, 쿠팡은 한국의 이커머스를 완전히 다 먹어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현재 쿠팡 주가는(당시 $30 ~ $35 정도) 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가격이 더 오르면 팔 건데 그게 최소 $50 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였다. 실은 매우 확신에 찬 자신 있는 답변이었다. 솔직히 겉으로는 $50라고 했지만, 내 마음속엔 쿠팡은 $100까지 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개인정보가 유출됐을 때만 해도 잘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쿠팡이 보여준 태도와 중요한 순간에 했던 결정들의 질이 상당히 실망스러웠고, 그 결과 때문에 현재 쿠팡 주식은 $20를 하회하고 있다. 역시 어떤 LP 분들은 나에게 과연 쿠팡 주식이 앞으로 $50 가 될 수 있을지 물어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포트폴리오사가 상장하면, 스트롱은 어떤 기준으로 상장 주식을 처리할지 물어보는 분들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몇 주 동안 시간 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는데, 내 결론은 상장 시장은 참 어려운 시장이고, 비상장 회사에 투자하는 VC에겐 – 특히나 우리 같이 극초기 회사에 투자하는 – 제3외국어와 같이 이해하고 배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쿠팡 사업 자체의 펀더멘탈이 무너져서 주가가 하락한다고 볼 순 없다. 쿠팡의 펀더멘탈은 실은 매우 강하다. 이 정도로 물류 인프라를 잘 운영하고, 이 정도로 세상 온갖 제품을 잘 판매하는 회사는 한국에 없고, 전 세계에도 몇 개 없을 정도로 사업은 잘 한다. 물론, 그 물류와 이커머스 사업의 인프라를 비인간적으로 운영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업 자체만 봤을 땐 굉장히 탄탄한 회사다. 주가가 폭락하는 이유는 시장의 정서와 감정의 문제이고, 흔히 이 바닥에서 말하는 FUDGE(Fear, Uncertainty, Doubt, Greed, Emotion)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번에 미국에서 만난 어떤 투자자는 중국의 VC에 오래전에 투자했는데, 이 VC가 초기 투자했던 중국 회사가 상장하면서 당시의 시총에 의하면 거의 2,000배의 돈을 (서류상으로) 벌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VC는 마치 내가 쿠팡에 대해서 확신했듯이, 그 회사의 펀더멘탈이 강하고 시장이 더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몇 년 후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상장 주식을 안 팔고 계속 보유했다고 한다. 그래서 4년을 더 보유했는데, 그동안 부침이 있었지만, 현재 가격은 4년 전과 똑같다고 한다. 서류상으로 돈을 크게 잃진 않았지만, 이 VC에 투자한 LP들은 4년 동안 실제 배분받은 건 한 푼도 없었고, 막대한 기회비용이 발생해서 굉장히 불만이 많은 것 같다. 실은 이 회사는 그동안 매출은 많이 증가했지만, 중국 정부의 규제와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주가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상장 시장은 비상장 시장과 많이 다르다. 남들은 비상장 시장이 비이성적이라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상장 시장이 더 비이성적인 것 같다. 논리보단 감정, 두려움과 욕심이 주가를 움직이는 시장인데, 솔직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이 비이성적이라서 이게 고스란히 상장 시장에 전체적으로 반영되는 것 같다.

쿠팡 사태로 내가 배운 점은 – 그리고 아직도 이 배움은 계속 되고 있다 –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상장하게 되면,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적당한 시점에 파는 게 어쩌면 VC들에겐 더 맞는 전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계속 보유하면서 상장 시장을 공부하고 예측하는 방법도 있지만,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요소 때문에 상장 시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건 우리 같은 초기 VC들이 잘할 수 있는 게임은 아닌 것 같다.

슈퍼앱의 허상

매우 적지만, 우리도 지금까지 몇 개의 엑싯을 경험한 적이 있다. 쿠팡 같이 IPO를 한 경우도 있지만, 더 큰 회사에 인수되거나 비슷한 규모의 회사와 합병하면서 M&A를 통해 엑싯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많지 않은 M&A를 통해서 내가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좋은 엑싯을 위해서는 회사가 팔려야지, 팔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좋은 회사는 엑싯을 굳이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업만 잘하면, 누군가 연락이 와서 인수의 관심을 표시하리라는 것이다. 안 되는 회사를 억지로 다른 회사에 인수나 합병시키려고 하면 아예 안 되거나, 아주 안 좋은 조건에 딜이 성사된다.

그래서 나는 창업가를 만날 때, 이분이 회사를 시작하자마자 엑싯에 너무 꽂혀 있으면 매력도가 확 떨어진다. 이제 시작했고, 지금 매출 100만 원도 못 하는데, 사업에 집중하지 않고 3년 후에 회사를 네이버나 카카오에 얼마에 팔겠다는 생각만 한다면 이 회사는 금방 망하거나, 헐값에 팔릴 것이다. 반면에 엑싯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주 좋은 사업을 만들고, 매출을 만들고, 고객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창업가들은 언젠가는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회사가 먼저 연락이 와서 인수 의향을 밝힐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본인이 원하는 좋은 조건에 회사가 팔릴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슈퍼앱을 만들겠다는 한 창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M&A에 대한 내 배움이 떠올랐다. 이분의 목표는 그 분야에서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고, 모든 걸 다 가능케 하는 슈퍼앱이었다. 창업 첫날부터 슈퍼앱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고, 회사의 모든 결정의 – 제품, 펀드레이징, 채용 – 기준이 되는 건 슈퍼앱이었다. 아직 제대로 기어다니지도 못하는데, 처음부터 하늘을 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여기에만 꽂혀 있는 것이다. 이분의 슈퍼앱에 대한 야망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자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입을 열고 이 창업가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하나 했다. “대표님, 슈퍼앱은 그렇게 처음부터 만들겠다고 해서 만들기보단, 그냥 작은 기능을 하나씩 완벽하게 만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에요.” 슈퍼앱에 꽂혀서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동시에 만들다 보면, 결과는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C급의 저질 앱이다. 그냥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만들지만, 그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만들다 보면, 복리의 힘이 작용하면서 결국엔 이게 슈퍼앱이 되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이 제품이 슈퍼앱이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슈퍼앱인 네이버와 카카오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슈퍼 앱을 만들겠다고 만든 게 아니다. 검색과 메신저라는 기능을 그 누구보다 뾰족하게 만든 후에, 그리고 다른 분야로 확장하더라도 기반이 되는 이 검색과 메신저 기능을 다른 경쟁사가 절대로 더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그제야 다른 분야로 확장하면서 본인들도 모르게 슈퍼앱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업을 시작했는데, 너무나 슈퍼앱에 꽂혀 있는 창업가들에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슈퍼 앱 이야기를 들은 후, 내게 아직도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항상 비슷한 충고를 한다. 슈퍼앱은 만들고 싶다고 만드는 게 아니라, 작은 것들을 계속 반복하면서 고객들이 좋아하는 작은 기능과 제품을 잘 만들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리고 창업가들이 우리 제품은 슈퍼앱이라고 떠드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우리 제품은 슈퍼앱이라고 명명하면서 왕관을 씌워주는 거라고.

1,000억 원 매출

바로 이전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나는 요새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고, 세상이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그쪽을 꽤 많이 보고 있다. 이렇게 조금 다른 각도로 시장을 보면, 잘 안 바뀌는 분야가 생각보다 많은데, 먹는 것, 바르는 것, 입는 것이 대표적이다. 아무리 터미네이터와 같은 휴머노이드가 길거리에 사람같이 돌아다녀도, 우린 계속 밥은 먹어야 하고, 얼굴과 몸에 뭔가를 발라야 하고, 계절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몇 년 전에 DTC, 브랜드, 이커머스가 크게 유행하던 때가 있었고, 이때 엄청나게 많은 VC 돈이 이 분야에 투입됐는데, 돈 벌기가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요샌 대부분의 VC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나는 이 분야가 돈 벌기가 힘든 이유는 너무 많은 플레이어가 비슷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시장 자체가 돈을 못 버는 습성이 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논리로 시장과 회사에 접근하면, 그 어떤 분야에도 투자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돈 벌기 쉬운 분야와 사업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요새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우린 최근에 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분야에 꽤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사업보다 성장의 기울기가 전반적으로 완만하고, 계속 뭔가를 만들어 팔아야 하므로 한계비용을 낮출 순 있어도 0으로 내릴 순 없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기 전에는 자본 집약적이라는 꼬리표를 피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한다는 점에선 아주 단순하고, 아주 훌륭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2025년 1사분기에 유니콘이 된 Top 10 글로벌 신생 유니콘 중 7개가 AI 관련 스타트업인데, AI가 주 사업이 아닌 나머지 3개 중 유독 내 눈에 띈 회사는 OLIPOP이라는 미국의 프리바이오틱 음료수 회사다. 이 회사의 2023년 매출은 약 2,500억 원이고, 2024년 매출은 이보다 더 클 것이다. 유니콘 기업가치는 약 2.5조 원이었다. 매출의 10배 정도의 밸류에이션을 인정받은 건데, 이 배수는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봐왔던 먹고, 마시고, 입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의 기업가치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것 같고, 이 분야 스타트업의 성공을 위한 magic number는 연 매출 1,000억 원인 것 같다. 매출 1,000억 원을 하면 대부분 5,000억 원 이상의 기업가치에 투자를 받거나, 1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에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사례를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번 봤기 때문이다.

매출 1,000억 원은 어떤 의미일까?

일단 엄청나게 큰 매출이다. 일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제품의 단가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많이 팔아야지 매출 1,000억 원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 매출을 하면 꽤 의미 있는 규모의 소비자들이 이 제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프리바이오틱 소다에 대해 이야기하면 10명 중 4명은 위에서 말한 OLIPOP의 브랜드를 떠올릴 것이다.

또한, 매출 1,000억 원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하면, 그 분야를 수십 년 ~ 수백 년 동안 장악하고 있는 공룡인 대기업들에게 조금씩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아직까진 경쟁사는 아니지만, 대기업이 뭐만 하려고 하면 이 작은 회사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굉장히 불편하고 짜증 나는 존재로 강하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언급했는데, 마하트가 간디의 명언 중 하나인, “처음엔 사람들이 당신을 무시할 것이고, 그다음엔 당신을 비웃을 것이고,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고,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길 것이다”에서 대기업들이 1,000억 매출 하는 스타트업을 대하는 자세는 “다음엔 당신과 싸울 것이다” 바로 그 직전의 상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대부분 이 시점에서 그 분야 1,2등 회사가 1,000억 원 매출의 대략 10배인 1조 원 정도의 가격에 회사를 인수한다. 이 정도까지 매출을 키운 브랜드라면, 대기업이 가진 자원과 유통 채널을 활용하면 장기적으론 이보다 훨씬 더 큰 브랜드로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게 가능하고, 정말로 인수 이후 훨씬 더 큰 브랜드가 되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먹고, 마시고, 바르고, 입는 산업에서는 유통이 가장 막강한 권력이고 큰 회사가 작은 회사보다 항상 잘하는 게 이 유통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미국보다 시장이 작다. 많이 작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TAM(Total Addressable Market)은 한국의 5,000만 명의 잠재 소비자보다 훨씬 더 큰 글로벌 시장이다. 이미 한국이 만드는 먹는 것, 마시는 것, 바르는 것과 입는 것들은 해외 시장을 향해서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다. 이미 많이 있지만, 조만간 한국에도 매출 1,000억 원을 찍는 스타트업들이 더 많이 나오고, 더 많은 글로벌/한국 대기업들이 이 회사들을 높은 기업가치에 인수할 수 있길 바란다. 아니면, 스스로 계속 성장해서 이들이 대기업이 되고, 다른 스타트업을 높은 기업가치에 인수하고, 이 현상이 계속 반복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