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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텐션

창업가들의 말도 안 되게 높은 텐션과 긍정 에너지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도 내가 자주 썼고, 항상 느끼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스타트업 업계에서 종사하면서 매우 많은 창업가를 만났는데, 이렇게 많고 다양한 창업가들의 공통점 하나만 꼽아보라면, 자발적으로 생기는 최상위 레벨의 에너지와 텐션이다.

일단, 에너지와 텐션이 높지 않으면 창업할 수가 없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틀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데, 비이성적인 사람들은 직접 세상의 틀을 만들고 싶어 하고, 이런 소수의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창업가들은 이런 비이성적인 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샘플인데, 미친 세상에서 미친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높은 에너지와 텐션 레벨이 필요하다. 이들이 하려고 하는 걸 아무도 믿지 않고, 가끔은 본인도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이 외로운 싸움은 하이 텐션이 없으면 절대로 시작도 못 한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창업가들의 높은 에너지와 저세상 텐션은 타고 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타고난 텐션을 지난 사람들이 사업을 하다 보면, 그 레벨이 더 높아진다. 창업하기 전에 이미 성공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일을 벌여야 하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사업을 시작해 보니, 이게 생각보다 더 어렵고 확률이 거의 0%에 가깝다는 걸 매일, 매시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힘내기 위해서 안 그래도 높은 에너지 레벨과 하이 텐션을 더 높게 해야 한다. 투자를 받기 위해서도 텐션을 더 올리고, 좋은 사람들을 채용하기 위해서 더 높은 텐션을 발산한다. 이런 텐션은 다른 동료 직원들에게 전염되고, 우리 같은 투자자에게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전달된다.

이렇게 창업가에게서 시작된 에너지와 텐션은 그 주변으로 확산하고, 여기에 감염된 직원들, 외부 파트너, 투자자 모두 비슷한 레벨의 긍정적인 텐션으로 이 회사와 창업가를 응원한다. 그리고 이런 작은 텐션의 불꽃이 퍼지면서 큰불이 되고, 가끔 우리는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걸 목격한다.

이번 글은 새로운 내용은 없고, 내가 항상 하는 말을 다시 바꿔 말하는 건데, 돈이 아무리 많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무한 자원을 보유한 많은 거대한 기업들이 특정 분야에서는 항상 스타트업에 지는 이유가 바로 이 높은 텐션과 에너지 때문이다. 대기업 직원들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스타트업의 텐션과 에너지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텐션이 너무 높으면 오히려 대기업에서 싫어한다.

이런 최상위 레벨의 텐션과 에너지는 솔직히 돈 주고도 못 산다. 그냥 창업가들과 스타트업분들에게 타고난 소중한 자원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투자자는 이걸 돈 주고 산다. 스타트업에 투자한 후에 이렇게 텐션이 높은 분들과 어울리다 보면 우리의 텐션과 에너지 레벨도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우린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존재의 이유

나는 혼자 살진 않지만,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를 즐겨보는 편이다. 2주 전에 배우 이주승 씨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받아서 부산에서 보낸 하루에 대한 내용을 재미있게 봤다. 이분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팬들이 직접 부산으로 왔고, 팬클럽 회원들과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같이 교류하는 장면을 보고 역시 연예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팬들 때문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주승 씨 본인도 이런 이야기를 직접 했는데, 아무리 유명하고 연기를 잘해도 팬들이 없으면 배우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같은 투자자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봤다. 우리가 활동하는 생태계를 보면, 3개의 이해 관계인이 있다. 일단 우리 같은 VC에게 돈을 투자하는 LP라는 존재가 있고, LP의 돈을 관리하는 스트롱과 같은 VC가 있고, VC들이 이 돈을 투자하는 창업가가 있다. 이 외에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다양한 플레이어와 이해 관계인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3개의 플레이어가 이 생태계를 돌아가게 만든다. 즉, 스트롱 같은 VC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들이 있기 때문이고, 이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창업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도 첫 7년은 정말로 초기 스타트업과 같이 운영됐다. 특별한 시스템도 없고, 웬만한 일은 대표인 내가 다 처리하면서, 그냥 되는대로, 그리고 닥치는 대로 두서없이 일을 했다. 이렇게 하면서 점점 더 회사의 체력이 생기고, 좋은 동료들도 조인하면서 우리도 스트롱의 비전과 미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만들었다.

Together, We are ALL Strong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ALL’이다. 스트롱에서 하는 모든 의사결정이 우리의 LP, 스트롱, 그리고 우리의 창업가 모두에게(=ALL) 이익이 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철학이자 미션이 그대로 반영된 멋진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3명의 이해 관계인 중에서도 모든 가치는 창업가들이 만들어 낸다. 창업가들이 만드는 가치를 우리는 잘 다듬어서 우리의 LP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연예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팬이듯, 스트롱과 같은 VC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LP와 창업가이고, 굳이 하나만 택하자면 투자자의 존재 이유는 창업가들이다. 창업가가 없으면 우리 같은 투자자가 존재할 수 없다.

성장과 수익의 저글링

지난주에 불경기가 왜 어떤 스타트업에겐 평생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인지에 대해서 몇 마디 썼다. 내 블로그를 계속 읽는 분들에겐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오늘은 왜 이게 어쩌면 기회가 아니고 자멸로 가는 길일 수도 있는지에 대한 약간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할땐 – 이건 팬데믹 기간뿐만 아니라 실은 지난 12년 동안이었다 – 모든 스타트업의 전략은 수익성보단 성장성에 기울어졌었다. 기형적으로 많은 돈과 자원이 돈을 벌어서 흑자 나는 회사를 만드는 방향보단, 손실이 발생해도 무조건 외형을 성장시키는 방향에 집중적으로 투자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조건 성장하는 전략을 나도 좋아하진 않지만, 이게 맞냐 틀리냐를 따지기 전에, 경기가 좋을 때 당시 시장의 분위기도 감안을 해봐야 한다.

경기가 좋을 땐 정말로 유동성이 풍부했다. 정규 교육을 받았고, 누구나 알만한 회사에서 2년 이상의 직장 경험이 있는 창업팀이라면 웬만하면 투자를 받을 수 있던 시절이다. 워낙 비슷한 서비스가 많이 생겼고, 대부분의 회사들이 수많은 VC들로부터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익성 보단 성장이 중요했다. 그래서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다 적자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고효율의 그로쓰 마케팅에만 집중했다. 돈을 못 벌어도 일단은 고객을 획득해서 락인하면,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 지금은 이 사상을 모두 다 정말 싫어하지만 – 전략을 모두 다 진심으로 믿었었다. 우리를 포함해서.

마케팅에 돈을 너무 많이 썼고,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을 뽑으면서, 투자금은 금방 사라졌지만, 상관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또 나가서 펀딩하면 됐고, 나쁘지 않은 조건에 후속 투자를 상당히 많은 스타트업들이 제품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상태에서 잘 받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쓰면서 외형만 성장시키는 게 진짜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그 분야에서 일단 1등을 먹으면, 그 이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해도 된다는 것도 모두 굳게 믿고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냥 돈이 워낙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되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그냥 앞뒤 생각하지 않고 돈을 막 쓰고, 투자를 막 해도 크게 이상한 시절이 아니었다.

불경기가 찾아오고 유동성이 떨어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장하자는 분위기가 수단과 방법을 잘 가려서 돈을 벌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거래액이나 매출과 같은 외형을 키우기보단, 크게 성장하지 못해도 비용을 줄이고 수익성을 개선하는 게 요새 대부분 스타트업의 전략일 것이다. 우리 또한 스트롱 창업가분들에게 마이너스 나는 성장은 멈추고, 손익분기를 맞추고, 수익성에 집중하라고 한다. 성장 못 하는 걸 은근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수치가 줄어들어도 일단은 수익성을 맞추라고 강력하게 조언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수익성만 개선하고 성장을 못 하는 비즈니스는 크게 되기 힘들다. 성장이 없는 손익분기는 스타트업의 주 전략일 순 없고, 결국 작은 스타트업이 큰 사업이 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성장이라는 페달을 다시 밟아야 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이다. “언제는 무조건 성장하라고 하고, 언제는 성장 하지 않아도 되니 돈을 벌라고 하고, 이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라고 하네.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좀 미안하지만, 이게 변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환경에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대표들이 감수해야 하는 숙명이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에 유동성이 없을 땐, 수익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렇다고 성장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꺼버리면 안 된다. 상황이 다시 좋아지면, 언제든지 다시 성장에 초점을 맞출 준비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성장과 수익성이라는 두 가지의 공을 항상 저글링 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서 하나의 공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주워서 다시 저글링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진화

얼마 전에 꽤 오랫동안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이런저런 글들을 읽고 있었다. 한 글을 읽으면, 이게 또 다른 글로 나를 인도했고, 이 글을 읽으면, 또 다른 유사한 글을 읽게 됐는데, 굉장히 웃기게 내가 2012년 5월에 쓴 ‘씨앗 뿌리기’라는 글이 추천되어서, 이 글을 클릭하고 11년 만에 다시 읽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게 다듬어진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1957년도에 창업된 Fairchild 반도체로부터 시작됐는데, 이 회사에서 성공과 큰돈을 맛본 창업가와 직원들이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이 새로운 스타트업의 성공으로 인해서 수많은 백만장자가 또 탄생했고, 이 백만장자들은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벤처투자자가 되면서 자본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선순환 고리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인데, 이 생태계의 원리가 마치 오래된 숲의 나무가 씨를 뿌리는 원리와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오래된 고목은 그 옆의 토양으로 씨를 뿌리고, 이후에 썩어서 죽으면서 새로운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이 된다. 뿌려진 씨들은 원목이 제공해 준 풍부한 토양을 기반으로 더 크고 강하게 자라고, 다시 씨를 뿌리고 썩어서 토양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숲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글을 썼던 2012년은 스트롱벤처스를 시작했던 해이고, 아직 한국에는 이렇다 할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국에서 이런 좋은 선순환 벤처생태계가 안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벤처 1세대들의 과욕을 지적하긴 했는데, 지금 와서 조금 더 성숙한 투자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다시 평가해 보면, 나의 그런 지적은 절반만 맞았던 것 같다. 일부 벤처인들의 과욕이 있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2012년은 이제 막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글을 쓴 지가 이제 11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한국의 벤처생태계에는 엄청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창업가와 직원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과거와는 달리 이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다시 스타트업 생태계로 재투자했다. 어떤 분들은 다시 창업해서 연쇄 창업가가 됐고, 어떤 분들은 후배 창업가들을 양성하는 VC가 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자본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면서 자발적으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토양과 비료가 되고 있다.

나는 스트롱도 이런 씨앗 뿌리기 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한다. 우리가 투자한 몇 회사는 그 초기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서 아주 믿을만하고 능력 있는 미래의 창업가와 투자자를 배출하고 있고, 이들 또한 아낌없는 씨앗 뿌리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작은 선의들과 행동들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한국도 그 어떤 나라 부럽지 않을 견고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AI 창업가 현황

요새 글로벌 벤처 시장 관련 자료를 보면, 시장이 바닥을 쳤고 서서히 반등하는 트렌드가 보이지만, 막상 내가 시장에서 느끼고 있는 건 오히려 이 반대이다. 바닥은커녕 아직도 내려갈 공간이 너무 많아서 2024년 하반기에는 경기가 좀 좋아지지 않겠냐는 개인적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불길한 예감이 들고 있다. 그래서 글로벌 벤처 시장 수치를 조금 자세히 보니까, 전체적인 시장이 리바운드하기보단, 특정 섹터와 회사에 일시적으로 돈이 몰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특정 섹터가 바로 AI이다.

다른 섹터의 스타트업은 정말 어렵게 펀딩하고 있고, 대부분 펀딩을 못 받고 있는데, AI 분야의 회사는 내가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밸류에이션에 큰 투자를 받고 있고, 이런 트렌드가 전반적인 벤처 시장의 수치를 왜곡하고 있다는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다. 테크 분야에서 10년마다 한 번씩 오는 큰 파도를 잘 타면 엄청난 회사를 만들 수 있는데, 1960년 대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왔던 파도들을 보면 반도체, PC, 인터넷, 소셜, 모바일 등이 있다. 이 거대한 변화의 파도를 잘 탔던 창업가들과 스타트업들은 이제 어마어마한 기업들이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AI가 이 새로운 파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이걸 부인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 파도가 블록체인이나 크립토라고 믿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틀린 것 같고, 오히려 나도 AI가 앞으로 10년 동안 엄청난 기회를 만들고 이 기회를 잘 포착한 창업가들은 거대한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요새 만나는 AI 관련 스타트업을 보면, 이런 큰 기회의 파도에 몸을 싣고 과감한 사업을 하기보단, 그냥 AI 분야에 돈이 많이 집중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AI라는 키워드를 잘 활용해서 투자 받아보겠다는 회사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나는 AI 전문가는 아니라서 이 분야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시장을 3개의 큰 그룹으로 보고 있다.

가장 바닥에서 인공지능의 초석을 깔고 있는 기업들은 칩을 만드는 회사들이다. GPU의 대명사가 된 NVIDIA와 같은 회사가 대표적인데, 이들이 만든 칩이 없으면 AI를 위한 가장 중요한 학습이 불가능해진다. 이 기업들은 AI 세상을 위한 배관을 만들고 깔아주는 회사들이다.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매우 어려운 기술과 사업이기도 하다. 대규모 투자와 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AI를 위한 GPU를 만들 수 있는 회사가 그렇게 많지 않다. 한국에서도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몇 개 있는데, 잘 되길 바란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들이 계속 개발되고 출시되고 있다.

이 칩들 위에 있는 회사들이 AI를 위한 언어모델(LM: Language Model)을 만들고 있는 곳들이다. ChatGPT를 만든 OpenAI가 LLM의 대명사가 됐는데, 구글, 네이버, 카카오, 그리고 중국의 대형 스타트업 등과 같은 글로벌 대기업과 큰 스타트업들도 이 분야에서 맹활약 중이다. 이런 언어 모델이 있어야지만 인공지능이 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언어모델을 만들고 학습시키는 작업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 작업 또한 돈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고, 데이터와 엔지니어링 전문가들이 대거 동원되어야 하므로 작은 스타트업이 하기엔 쉽지 않다. 더 빠르고 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칩을 통해, 사람의 뇌와 더 비슷한 생각과 결정을 할 수 있는 언어모델을 광범위하고 깊게 만들기 위한 전쟁을 이 분야의 회사들은 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윗단에는 다른 회사들이 만들어 놓은 언어모델을 활용해서 소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consumer application을 만들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있다. 굉장히 많다. 아니, 불필요하게 너무 많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AI 스타트업은 여기에 속한다. 실은, 일반 소비자들은 칩이니 언어모델이니, 잘 모르고, 알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원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AI의 도움을 받는 거라서, 우린 이 분야에 큰 기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다른 회사들이 만든 모델과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껍데기만 만들어 놓고, 이게 대단한 AI 애플리케이션이라고 홍보하는 창업가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게 요새 내가 느끼는 AI 창업가 현황이다. 물론, 이렇게 회사를 포장하고, 공부 좀 많이 한 분들을 회사에 영입하면 그나마 다른 분야의 회사보단 투자는 수월하게 받는 것 같다.

B2C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과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AI 레이어를 만들어야 하는데, 요새 우리가 만나고 있는 회사들은 이 반대의 플레이를 시도하고 있다. 일단 AI라는 매력적인 주제로 투자를 받은 후에, 그다음에 제대로 된 사업에 대해서 생각해도 된다는 창업가들이 너무 많은데, 어쩌면 이 사이클이 끝난 후에 남아 있는 창업가들에게 투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