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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가 필요 없는 회사

작년 한 해 동안 스트롱에서 꽤 많은 회사에 투자했다. 어떤 회사 투자소식은 미디어에 보도가 됐지만, 대부분의 투자 관련 소식은 기사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를 비롯해서, 어떤 VC가 몇 건의 투자를 했는지는 – 그리고, 투자를 많이 하냐, 적게 하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공식적으로 관리되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2020년도에 한국에서 가장 많은 투자를 한 VC 중 하나가 우리이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8년 넘게 지금까지 우린 160개 이상의 회사에 투자했다. 5명도 안 되는 인력으로 투자하고 관리하기엔 너무 많은 숫자인데, 이게 실은 우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도 펀드레이징할때 잠재 출자자들이 가장 많이 물어보는 게 그 많은 회사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냐는 질문이고, 다른 동료 VC들도 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많이 투자하면 관리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한다.

이 질문에 나는 주로 두 가지 답변을 드린다. 아마 전에도 내가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일단 나는 우리 투자사 중 힘든 회사와 창업가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이미 잘 하는 회사는 내가 굳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도 잘 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관리가 필요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관리는 필요가 없다. 나보다 더 사업을 오래 한 창업가들이, 자기 비즈니스에 대해서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는데, 내가 굳이 이래라저래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회사의 비즈니스에 방해가 되는 간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회사는, 내가 많이 도와주면, 어쩌면 잘할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 또는, 그렇게 될 거라고 나는 믿기 때문에 – 이런 분들과 적극적으로 같이 고민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아무리 같이 고민하고 같이 옆에서 뛰어주어도 힘든 회사들이 잘 되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많이 경험했다.

관리의 질문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답변은, 바로 우린 관리가 별로 필요 없는 회사와 창업가에게 투자하는 걸 선호한다는 것이다. 우린 투자하기 전에 이 창업가는 어떤 분인지 파악하고 배우는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한다. 우리의 실사는 회사의 서류나 재무제표를 보는 게 아니라, 창업가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나름의 배움과 확신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확신이 생겨서 투자하면, 이분들은 주로 관리라는 게 별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창업가들은 스스로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은, 시장의 변화, 자본의 변화, 경쟁의 변화 등과 같은 요인은 투자자들이 아무리 관리해도 관리가 안 된다. 이런 변화가 발생했을때 – 그리고 스타트업을 하다 보면, 이런 예상치 못한 변화는 매일 발생한다 –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대표와 경영진에 투자하는 게 우리가 보는 성공적인 투자이다. 그래서 나는 관리에 초점을 맞추는 투자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이분들은 본인들이 관리를 잘하면 회사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잘 될 수 있다고 어느 정도 믿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잘되고,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드는 건, 투자자가 관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렇게 관리에 너무 집중하는 투자자일수록, 회사가 잘 되면, “그 회사 우리가 키웠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큰데, 이 역시 내가 술자리나 모임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회사가 잘 안 되서 망했을 때도 똑같이 “그 회사 우리 때문에 망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분들에겐 망하는 건 항상 창업가와 회사의 잘못이다. 잘되면 우리가 키웠고, 안되면 쟤네가 문제 있다는 식의 생각은 그 누구한테도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되도록 우린 관리가 필요 없거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창업가들을 좋아한다.

배움의 한 해

2020년도와 팬데믹은 우리가 죽은 후에 역사책에 길이 남을 큰 사건이고, 후손들은 이 기록을 읽으면서,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코비드19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할 말이 많고, 나도 블로그를 통해서 여러 번 언급했는데, 어쨌든 작년은 바이러스의 한 해였음이 틀림없다.

투자자로서 작년 한 해는 나에게 배움과 겸손의 한 해였던 거 같다. 다른 VC는 모르겠지만, 나는 투자를 하면 할수록, 그리고 경험이 쌓일수록, 자신감이 생긴다기보단, 그냥 계속 겸손해지는 것 같다. 2019년도 그랬고, 2020년도 그랬는데, 이상하게 투자는 하면 할수록 내 예상과는 결과가 다르게 나온다. 수학 공부는 하면 할수록 점수가 오르고, 숫자의 오차가 줄어들고, 뭔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는데, 작년 한 해 동안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면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걸 나는 몸으로 배웠던 것 같다.

일단 가장 대표적인 건 코비드19이다. 2019년 4분기부터 전문가들이 2020년의 트렌드, 뜨는 기술, 지는 기술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발표했고, 많은 분이 이걸 귀담아들으면서 사업계획을 세우고 수정했다. 그런데 작년에 이 계획대로 사업을 하신 분은 거의 없다. 우리도 나름 2020년 투자 계획을 세우고, 되도록 이 계획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뒤돌아보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비행을 하면서 비행기를 조립했던 것 같다. 이렇게 힘든 상황이 온다는 걸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역시 시장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큰 배움이었다.

그리고, 2020년에도 엄청 잘 될 것 같았던 회사들이 의외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망할 게 거의 확실하거나, 잘 안될 게 확실해서 전혀 기대 안 했던 회사들이 결국엔 승자로 한 해를 마무리한걸 보고 다시 한번 겸손해질 수 있었다. 역시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대로 안 흘러가고, 거의 반대로 굴러간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망했다고 생각했던 회사가 갑자기 살아나는 신박한 경험을 지금까지 몇 번 하긴 했지만, 실은 잘 안되는 회사는 계속 잘 안 된다. 그리고 이 중에서 이제 그만하겠다고 하는 곳들이 조금씩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대표님들에게 “조금만 더 해보시죠…”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이 또한 내가 남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이젠 잘 알고 있다. 이 또한 큰 배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VC는 투자할수록 겸손해진다. 더 많이 투자할수록, 더 많은 돈을 관리할수록, 더 많은 사람과 일 할수록, 내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는 걸 계속 깨닫기 때문이다. 많은 걸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만, 오히려 많이 배우고 있기 때문에, 이 업이 좋다. 작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이 배웠고, 올해도 많은 넘어짐과 배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나는 이미 실수로 한 해를 시작하고 있다.

The Startup Bible – 2020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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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jfactory / 크라우드픽

해마다 12월 마지막 주에는 한 해 동안 쓴 글에 대해 정리를 하는데, 마침 오늘이 2020년 마지막 날이라서 이 블로그의 한 해를 정리해본다.

2020년에 난 100개의 글을 – 이 글 포함 – 올렸는데, 이는 3.7일에 한 번씩 블로깅을 한 셈이다. 매주 월요일, 그리고 목요일 포스팅을 하니까, 이 수치는 항상 같다. 100개의 포스팅을 읽기 위해서 The Startup Bible 블로그를 방문한 분은 총 209,450명이다(오늘 방문객 제외). 월평균 17,454명, 하루평균 574명이 방문한 셈이다.

2020년도에 가장 많이 읽힌 Top 10 글은 다음과 같다:

1/ 스트레스 테스트
이 포스팅은 작년에 두 번째로 많이 읽혔던 글인데, 올해는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읽혔다. 모두가 원하는 J 커브 성장을 위해 많은 창업가가 투자금의 많은 부분을 페이스북, 구글, 그리고 네이버에 마케팅비로 집행한다. 성장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계속 이렇게 돈을 쓰는 마케팅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맥락에서 쓴 글인데, 꽤 많은 창업가가 공감한 것 같다.

2/ 한국인들의 7가지 실수
이 포스팅은 2018년도에 두 번째로 많이 읽힌 글이고, 그전에도 꾸준히 읽혔던 all-time 베스트/스테디 글이었는데, 작년에는 20위 권 밖으로 밀렸다가 올해 다시 2위로 올라왔다. 2010년도 9월에 썼으니까, 10년이 넘은 글인데, 내용을 보면 아직도 대부분 공감이 간다. 특히 이메일 주소 부분은. 그리고 이 글은 스타트업 바이블 포스팅 중 가장 많은 댓글이 달린 글인데, 200개가 넘는다. 이 댓글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는 걸 스스로 상기시킨다.

3/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극단적 조치
2020년은 코비드 19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회사 망한다는 각오로 사업에 임했던 한 해였다. 내가 2008년도 미국에서 뮤직쉐이크를 할 때도 글로벌 금융 붕괴라는 큰 위기가 왔었고, 그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힘든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여러 번 했었는데, 당시 내 경험, 생각, 그리고 행동을 공유한 글이다.

4/ 스톡옵션 개론
꽤 오래전인 2014년 10월에 쓴 글인데, 올해 많이 읽혔다는 건 그만큼 스톡옵션에 관한 관심이 한국도 많다는 의미인 것 같다. 전에는 스타트업에 취직하는 분들이 현금을 선호했었는데, 이제 한국 분들도 스톡옵션을 많이 선호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참고로, 5위와 6위 글도 스톡옵션 관련 내용이다.

5/ 직원들의 스톡옵션
이제 한국도 스타트업이 서서히 대세가 되면서, 대기업을 포기하고 힘든 스타트업에 조인한 직원들이 스톡옵션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대표이사의 입장에서도 코파운더가 아닌 일반 직원들에게 부여하는 스톡옵션은 항상 애매하다. 이런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 글이다.

6/ 스톡옵션 가격
이 내용도 많은 창업가와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분들이 즐겨 읽었다. 스톡옵션의 가격을 어떻게 정해야 하는지 많은 분이 궁금해하는데,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한 글이다. 참고로, 작년에도 6위였는데 올해도 6위다.

7/ 콜드콜하기
아무도 모르는 스타트업의 제품을 잠재 고객에게 영업하기 위한 가장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한 콜드콜. 특히 B2B SaaS 제품을 만들어서 기업고객에게 영업하는 스타트업에게 필요한 콜드콜 전략에 대한 글.

8/ 1등 마케팅
가장 완벽한 제품, 그 제품 자체가 최고의 마케팅이라는걸 보여주고 있는 스타벅스의 마케팅 관련 이야기. 스타벅스 광고를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타벅스는 광고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9/ 개밥 핥아먹기
미국의 우리 투자사 Polydrops 이야기. “창업가들이 자신들의 제품을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사용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할 때마다 항상 생각나는 회사이다.

10/ 수평적 vs. 수직적 마켓플레이스
인터넷이 대변할 수 있는 가장 확장성 있는 비즈니스가 수요와 공급을 매칭해주는 마켓플레이스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모든 걸 다하는 수평적 마켓플레이스와 한 가지만 파고드는 수직적 마켓플레이스에 대한 이야기.

이상 2020년에 가장 많이 읽힌 글 10개였다. 이런 순위 매기기에 나는 별로 관심은 없지만, 해마다 이 포스팅을 하다 보면, 왠지 한 해가 잘 정리되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내년에도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Happy New Year!

하드 트레이닝

2015년 6월 3일, 나는 와이프랑 한국에 잠깐 나와 있었는데, 미국 옆집 이웃 브라이언한테 다음과 같은 이메일이 왔다. “집에서 물이 새는 거 같아서 수도국에 전화해서 물 공급을 중단시켰어요. 차고랑 정문 밑에서 물이 나오는 걸 봤는데, 이제 멈췄네요.” 정원 스프링클러가 고장 나서 물이 좀 샜나보다 생각하고 넘겼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한국 나오기 전에 집 키를 맡긴, 같은 동네에 사는 와이프 친구에게 집에 가서 상황 좀 확인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한국 시각으로 밤늦게 이 친구분한테 급하게 전화가 왔고, 와이프가 통화하는 분위기를 보니 뭔가 큰일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를 끊고 와이프 왈, “오빠, 우리 집 x됐어”. 친구분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온 집 안에 물난리가 났고, 당시 거실 사진을 찍어서 보낸준게 있는데,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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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집이었는데, 마루 천장이 무너졌고, 와이프 친구분 말 그대로 온 집에 홍수가 나 있었다. 나는 급하게 한국 일정을 다 취소하고, 그다음 날 혼자서 LA로 돌아왔다. 일단 상황 파악을 하고, 기초적인 건 내가 수습할 계획이었다.

오자마자 주택 보험회사에 전화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젖어 있는 집 구석구석을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 층 안방 화장실에서 원인을 발견했다. 비대와 변기의 물 저장소를 연결하는 호스의 이음새가 약해져서 파열됐는데, 집에 아무도 없었기에 이 상태로 48시간 이상 물이 누수됐고, 이 물이 이 층 바닥의 카펫에 모두 흡수됐다. 그리고 목재로 지은 건물이라서 천장이 물을 흠뻑 먹은 카펫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집 모든 곳에 물난리가 났고, 우리 집 이웃이 수도국에 전화하기 전까지 거의 5일 이상 계속 물이 샜던 것이다.

이 광경을 처음 봤을 때 정말 황당했고, 머리가 하얘지는 거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라서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몰랐지만, 보험 회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하나씩 일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미국은 이런 보험이 비교적 잘 되어 있어서, 2015년 10월 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기 전까지 5개월 동안 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말 힘들었고, 막판에는 거의 번아웃이 됐다(실은 이 사건 때문에 우리의 한국 귀국이 예정보다 빨리 앞당겨졌다). 여기서 다 나열하진 못 하지만, 물에 파손되지 않은 나머지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절반이 분실되고, 이 회사랑 법적 소송까지 갈 뻔했고, 보험금 합의하느라 한국 와서까지도 엄청 많은 에너지 낭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물난리 때문에 3주 동안은 일을 거의 못 하면서 이때 많은 기회비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난리를 다 처리하고, 보험금까지 다 받은 후에, 물난리가 있고 난 뒤 약 1년 후에 이 포스팅의 사진을 와이프랑 다시 보면서, 우린 그래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이 경험에 대해서 서로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처음 겪는 일이라서 정신이 없었지만, 만약에 다시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잘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타지에서 오롯이 둘이서 이 큰일을 하나씩 해결하면서, 이 일이 우리에게는 큰 모험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 하드 트레이닝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 성장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도 실은 이 일을 겪은 후부턴, 웬만한 어려운 일이 발생하더라도 별로 놀라지 않고, 덤덤하고, 침착하게 일을 하나씩 해결하려는 태도로 모든 것에 임한다. 실은, 이 물난리가 났을 때, 첫 일주일은 짐 옮기고, 집을 청소하고 건조하는 인부들을 관리해야해서 보험사에서 마련해줬던 호텔에서 집으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그리고, 세탁기가 있던 다용도실 – 다행히도 이 방은 물 피해가 없었다 – 구석에 있는 세탁기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틈 날 때마다 일을 조금씩 했다. 그 난리 통에 AuditBoard라는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회사가 요새 엄청나게 잘 하고 있다.

2020년도에 아마도 많은 창업가들이 내가 경험한 물난리와 같은, 인생 최악의 경험을 여러 번 했을 것이다. 우리도 워낙 많은 회사에 투자하고, 다양한 회사와 창업가들과 일하는데 코로나 거리 두기 단계가 바뀔 때마다 울고 웃는, 정말 웃지 못할 상황이 끝없이 펼쳐졌던 2020년이었다.

운이 없는 회사는 올해 문을 닫았고,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를 이분들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하지만, 올해 살아남았다면, 그리고 내년에도 계속 싸울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길. 여러모로 봤을 때, 역사상 최악의 한 해였고, 아마도 회사가 경험할 수 있는 나쁜 시나리오는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살아남았다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강해졌을 것이다. 물난리가 나를 하드 트레이닝 했듯이, 코비드19는 창업가들을 하드 트레이닝 했을 것이다. 올해를 잘 살아남았다면 앞으로 겪을 시련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모두 수고했고,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이제 훨훨 날기만 하면 된다.

대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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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오후의사진관 / 크라우드픽

올해 팬데믹이 창궐하기 시작한 2월 말에 조지윤 책임심사역이 스트롱에 조인했다. 우리와는 5년 넘게 알고 지냈고, 스트롱 이전에 이미 다양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수습기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나와 함께 지금까지 9개월 동안 발로 뛰면서 회사 발굴하고, 투자하고, 기존 투자사들을 도와주고 있다. 전에 지윤님과 이야기할 때, 밖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일 하면서 느낀 점은, 스트롱은 파운더들의 ‘대나무숲’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나무숲의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창업가들이 남한테 말 못할 힘든 점을 우리와는 솔직하게 계급장 다 떼고 이야기 할 수 있고, 이런 내용은 외부로 발설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투자사 중 잘 하는 회사는 잘 되는 회사만의 고민을 창업가들이 갖고 있고, 못 하는 회사는 잘 안되는 회사만의 고민을 갖고 있다. 어떤 고민이 더 크고, 문제가 심각한지는 내가 점수를 매길 순 없지만, 그래도 주로 잘 안되는 회사 대표들의 고민이 더 심각하고, 우리의 즉각적인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 해마다 비즈니스는 더욱더 어려워지지만, 올 해는 코비드19 때문에 훨씬 더 어려웠던 한 해였고, 이로 인해 우리도 가장 힘들고, 잘 안되는 투자사 대표들과 더 많이 만나고 이야기하는, 모두 다 고통스러웠지만, 결국엔 힐링되는 시간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USV의 프레드 윌슨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얼마 전에 한 적이 있다. 초기 투자하는 펀드의 실적을 수년 후에 보면, 소수의 회사가 전체 펀드 실적의 90% 이상을 만드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우리도 과거 펀드들을 보면 이와 다르지 않다. 파레토의 법칙은 펀드에도 존재하는데, 초기 펀드에는 이 80:20 법칙이 더 극단적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VC가 이 소수의 잘 될 회사에만 집중하면 안 되는데, 프레드는 이런 현상을 한 반을 담당하고 있는 담임선생님에 비교한다. 내 기억으로는 나 초등학교 시절에도 우리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에서 가장 이뻐했던 최애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반장, 부반장, 그리고 공부 제일 잘하는 학우가 이런 친구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선생님이 이 친구들만 신경 쓰지 않고, 우리 학급 모든 학생에게 골고루 관심을 주면서, 학교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모두를 도와줬다. 선생님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 학생들이 공부도 잘하고 학교생활을 잘 할 때 뿌듯함과 보람을 가장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개인적인 보람은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해야 하는 일은 소수의 학생에게만 관심을 주는 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지도하고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학교 생활에 적응 못 하고, 학습 진도가 더딘 학생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좋은 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스트롱의 수익률은 극소수의 투자사들이 만들고, 우린 이 회사와 창업가들에게 평생 고맙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진정한 일은 수익률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투자사, 창업가와 같이 진흙탕에서 구르면서 이들의 대나무숲 역할을 하는 것이고, 오히려 진정한 보람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