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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제품

우리가 투자를 시작한 게 2012년인데, 이때부터 ‘한류’라는 말이 있었고, 한국인과 한국 제품이 드디어 한국을 벗어나서 세계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이야기했었다. “Taking Korea global”이라는 말을 지난 10년 동안 너도나도 했지만, 솔직히 지금까진 말만큼 멋지게 실현되진 않았다. “지금까진.”

작년, 그리고 올해 내내 미국, 유럽, 동남아, 일본을 여러 번 다니면서 내가 확실히 느낀 건, 이제 정말로 한국이 세계 시장으로 아주 자신 있게 나갈 수 있는 시점이 됐다는 점이다. 전에 ‘제2의 한류’라는 말을 내가 했는데, 이제 한국은 전 세계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global cultural force가 됐다. 인류 역사상 전 세계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cultural force가 된 국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했고, 그 기간 더 발전해서 더 강대국이 된 사례가 매우 많다. 나는 한국이 이런 기운과 기회를 잘 활용해서 비록 땅덩어리는 작고 인구도 작지만, 엄청나게 잘 살고,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는 초강대국이 되길 바란다.

한국이 global cultural force가 되면서 한국의 창업가들에겐 좋은 기회가 생기고 있고,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 같은 VC에게도 큰 기회가 생기고 있다. 최근에 미국을 2주 정도 돌아다녔는데, 어디 가나 한국 브랜드와 제품이 인기가 많다는 걸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작은 시골 도시에 가도 한국 음악, 드라마, 화장품, 음식, 그리고 자동차에 대한 인기와 관심이 너무 많았는데, 이게 참 놀라웠다.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인기 있는 나라가 됐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여러 번 할 정도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도 참 신기한 게, 전 세계 8,000만 명만 하는 비주류 언어인 한국어로 평생 책을 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한국과 한국어가 대단한 global cultural force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 이렇게 한국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 브랜드를 이렇게 잘 만들까? 나는 이게 한국의 DNA에 깊게 박혀 있는 경쟁과 생존본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아주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에서 5,000만 명이 다닥다닥 붙어 살면서 남들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 정말 빡세게 경쟁한다. 가끔 이 과한 경쟁의식이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지만, 어쨌든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치열하게 살고, 가장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이다. 좋든 싫든, 이건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자 환경이다.

이렇게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만들어졌고, 이 치열한 시장에서 팔리고 있고,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좋은 제품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잘 되는 제품이 미국과 같은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면, 기본적으로 잘 될 가능성이 높다. 엄청 까다롭고, 엄청 치열하고, 엄청나게 경쟁하고, 동시에 엄청나게 잘 사는 소비자들이 많은 한국 시장에서 팔린다면, 제품 자체는 이미 입증된 것이다. 소비자들은 지갑으로 투표하는데, 지갑으로 투표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품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모든 한국의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대박 나지 않나? 왜 일부만 잘 되고, 대부분 실패하는가?
어떤 제품과 회사는 한국에서 증명되기도 전에 너무 일찍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데, 제품도 준비가 덜 됐고, 이 덜 준비된 제품을 마케팅하고 판매할 사람들도 준비가 덜 된 경우가 많다. 이런 회사는 미국 시장에서 백전백패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품질이 증명된 제품도 미국 시장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globalization의 어려움이 작용하는 것이다. 제품은 좋지만, 이걸 다른 시장의 다른 소비자들에게 홍보하고 판매하기 위해서는 미세 조정을 많이 해야 하는데, 미국 시장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이 미세 조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잘 못 잡는다. 이 미세조정에 수백억 원 또는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 결국엔 미국 시장에서 철수한 한국 회사들도 너무 많은 걸 보면, 이게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번에 미국 시장에서 봤던 가능성은, 위에서 말했듯이 Korea라는 나라의 이미지 자체가 너무 좋아지고, 동시에 global cultural force가 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제품과 브랜드가 미국 시장에서 거쳐야 하는 미세조정의 폭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제품은 포장지에 한글이 그대로 적혔는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말만 많고 결과는 별로였던 “Taking Korea global”. 이제 정말 그 타이밍이 온 것 같다. 제2의 한류를 타고 더 많은 한국 회사와 제품이 해외 시장을 – 특히 북미 시장 – 쓰나미같이 강타해서 글로벌 무대를 찢어버리는 이 움직임에 스트롱도 큰 기여를 할 수 있길 바란다.

월급쟁이 VC

얼마 전에 내가 이런 페이스북 포스팅을 했다.

사실의 100%를 내가 모르면, 이렇게 내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이 내용은 꼭 공유하고 싶었고, 나는 이 창업가를 지지한다는 점을 밝히고 싶었다. 많은 분들이 이 포스팅에 대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공유해줬고, 당연히 여러 가지 내용과 의견이 있었다. 이 사태를 어반베이스의 입장에서 보는 분들에겐 신한캐피탈은 악마이지만, 또 그 반대로 신한캐피탈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보는 분들에겐 어반베이스가 멍청한 것이고, 신한캐피탈은 그냥 계약서에 충실한 대기업이라고 하는 분들도 있다.

위의 두 가지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 나는 뭐라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 악마가 천사가 되고, 천사가 악마가 되는 걸 우린 너무 많이 봤다. 그런데 이 다양하고 컬러풀 한 의견 중 내가 내 생각을 다시 한번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투자 담당자는 아무 잘못이 없고 그냥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서 회사가 이상한 거지 그 담당자를 욕하면 안 된다는 의견이다. “전 그냥 월급쟁이예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라는 말을 우린 너무 많이 듣고, 실은 너무 많이 하는데, 난 이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무슨 이야기만 하면 매번 이 월급쟁이 변명을 하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분들은 이 사회를 좀먹는 사람들이다. 참고로, 여기서 내가 강조하는 부분은, 본인의 의지나 힘으로 그 어떠한 노력도 해보지 않고, 매번 이 월급쟁이 변명을 하는 사람들이다. 회사에서 내 의지로 최선을 다해봐도 내 직책과 지위 때문에 일이 안 되는 경우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욕하는 건 아니다.

물론, 난 어반베이스 대표의 주장만을 기반으로 이 상황을 내 시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전체 그림의 일부를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내가 반박할 수 있는 건, 나도 이와 비슷한 일을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이게 어떤 상황인지 꽤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투자사의 대표이사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같은 배를 탔다고 생각했던 – 하지만, 이건 내 착각이었다 – 공동 투자사의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이분이 회사 또는 본인이 주장하는 일련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들에 대해서 회사 내부에서는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고,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월급쟁이입니다.”라는 말을 했을 때 정말 정이 떨어졌다. 본인이 귀찮고, 틀렸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걸 조금이라도 고치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을 때, 한 배를 같이 탄 창업가의 인생이 망가지고, 개인 파산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되고, 가족이 파탄 나고, 최악의 경우 한 생명이 사라지는 최악의 결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런 무책임한 생각과 말을 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사람은 VC로서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좋아하는 계약서대로 했으니까.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완전 실패다. 계약서의 문구 하나하나가 당연히 중요하고, 우린 회사 대 회사가 계약으로 묶여 있고, 큰돈이 왔다 갔다 하는 아주 serious 한 일을 하고 있지만, 결국 이 거래의 본질엔 사람이 있다. 한 명의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를 믿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그런 업을 하고 있는데,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단순히 계약과 돈을 쫓는 매정한 VC이길 선택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욕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회사는 그 회사의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직원이 몇 년 후에 임원이 되고, 그 임원이 회사의 대표가 되는데, 담당자를 욕하지 말고 회사를 욕하라는 의견은 좀 그렇다. 이런 담당자들로 구성된 회사, 그리고 이런 행위를 허용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구성원들 그 자체가 회사라서 나는 더욱더 이런 사람들이 싫어진다. 내가 이런 투자자들과 같이 집합적으로, 그냥 싸잡아서 같은 VC로 분류된다는 게 창피하고 싫어지는 순간이다.

전문지식과 경험

흔히 성공적인 VC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투자자가 ‘pattern recognition’에 능해야 한다고 한다. 그동안의 투자 경험을 기반으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됐는지, 반대로 어떤 창업가와 어떤 사업이 잘 안됐는지, 이 모든 과거의 경험에서 패턴을 찾을 수 있다면, 이 패턴을 잘 분석해서 미래의 투자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의미다. 아마도 어느 정도 투자를 한 VC라면, 대부분 자신만의 이런 패턴 분석 능력이 있을 것이고, 새로운 창업가와 사업을 볼 때 지속적으로 본인만의 패턴 DB를 참고해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할 것이다.

나도 투자를 시작했을 때, 유명한 VC나 내가 잘 아는 선배 VC들이 이런 패턴을 잘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그 말에 많이 동의했고, 이후 몇 년 동안 나도 투자하면서 경험한 실패와 성공을 바탕으로 성공 확률이 높은 창업가에 대한 패턴을 매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샌 이 pattern recognition이 쓸모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나고 나서 보면 “성공하는 창업가들은 모두 다 이런 패턴이 있었죠.”라고 끼워서 맞추는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이런 과거의 패턴을 기반으로 미래의 성공을 예측하는 건 과학적으로 접근해도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린 수학적으로는 절대로 예측할 수 없는, 즉, 특정한 패턴을 따르지 않는, 그리고 잠재 능력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창업가)에게 투자하기 때문에 그 어떤 과거의 패턴도 여기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패턴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창업가의 전문 지식과 직장 경험이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VC는 어려운 AI 사업을 하는 창업가라면 이분이 컴퓨터공학이나 다른 공학 분야의 석사나 박사 학위가 있으면 남들보다 더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국내 대학에서 경영학과 학부를 졸업한 창업가와 미국 top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창업가가 둘 다 AI 관련 스타트업을 하면, 대부분의 VC는 후자의 창업가에게 투자할 확률이 더 높다. 이게 일반적인 VC들의 패턴 인식 프로세스이다.
모빌리티 분야에서 창업한 두 스타트업이 있는데, 한 회사는 현대자동차에서 오랫동안 관련 사업을 했던 분이 창업했고, 다른 스타트업은 완전히 상관없는 직장에서 일했던 분이 창업하면, 역시나 현대자동차 출신 창업가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정말 여러 창업가와 회사를 만나면서, 창업가의 학력과 학벌, 그리고 과거 직장 경험은 이 분이 새로 하려고 하는 사업의 성공 여부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다는 패턴을 발견했다. 오히려 특정 분야에 대한 학문적인 백그라운드(=학력, 학벌)나 그 분야에서의 직장 경험이 없는 창업가들이 훨씬 더 신선한 시각으로 사업을 바라보고, 그 분야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걸 자주 봤다. 이들은 특정 분야에 대해 너무 많은 공부를 하거나, 너무 많은 경험이 있는 분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동안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던 파괴적이고 참신한 문제 해결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다. 물론, 잘 모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방법은 실패하지만, 계속 시도하다 보면 엄청난 솔루션을 찾는 경우도 있고, 이러면 정말 큰 사업을 만들 수 있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건데,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과 경험이 너무 많으면, “원래 그건 안 돼.” , “내가 오래전부터 해봤는데, 그건 안 되는 거야.” 등의 편견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완전히 백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창업가들은 “방법이 없을까?” , “가능할 것 같아. 방법을 찾아보자.” , “원래 안 되는 건 없어. 왜 꼭 저렇게 해야 할까?” 등의 생각으로 뭐든지 새로운 시도를 하기 때문에 위에서 말한 일반적인 패턴 인식 레이다에 잘 안 걸린다.

토스의 이승건 대표는 치과대학을 졸업했고, 실제로 의사 생활까지 좀 했다. 금융업을 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없고, 관련 업계에서 일 한 경험도 없다. 하지만, 이 분과의 대화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 그리고 이승건 대표를 잘 아는 다른 분들의 기억에 의하면, 토스를 창업했을 때 대한민국 그 어떤 금융 전문가보다 이 시장의 생리와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금융산업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시도를 했다.

얼마집이라는 모바일앱을 만드는 우리 투자사 한국프롭테크의 송지연 대표도 비슷하다. 이분은 원래 부동산이나 재건축/재개발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했고, 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아파트가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경험했고, 시장의 현실과 앞으로 시장이 가야 할 미래 사이에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발견하고 이걸 직접 해결해 보기로 결심해서 창업했다.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땐, 이 시장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한 직장인들이나 도시개발이나 부동산학과 교수들보다 훨씬 더 이 시장의 문제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고, 이걸 기술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매우 구체적인 (아직 증명되지 않은)해답을 갖고 있다.

과연 특정 분야의 학업적 지식과 경험이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봤을 땐 별로 안 중요하다. 학업적 지식과 경험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시장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전문성인데, 이건 인터넷 검색과 발품을 팔면 누구나 다 획득 가능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다. 얼마나 집요하게 이 문제를 붙잡고, 얼마나 깊게 파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절박하게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싶은가의 문제이다. 결국, 결승전에서 이기는 건 가장 실력이 좋은 선수가 아니라 가장 간절하게 승리하고 싶어 하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해자(垓字)는 없다

요새 VC들이 소비재 쪽의 사업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검토하거나 아예 투자하지 않는 것 같은데, 우린 이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계속 이 분야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는 창업가들을 만나고, 투자하고 있다. 최근에도 생필품, 의류, 그리고 음식 분야에서 사업하고 있는 여러 창업가를 만났다.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서 직접 고객에게 자사몰, 그리고 다른 온라인 플랫폼이나 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통해서 판매하고 있는데, 대부분 내가 이 에서 말했던 그런 어려움을 사업의 단계와는 상관없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분들과 이야기를 하면, 항상 등장하는 주재가 ‘해자(垓字)’이다. 사업의 종류에 상관없이 VC들이 창업가들에게 물어보는 게 그 사업만의 차별점, 진입장벽, 보호 장벽, 해자 관련 질문인데, “지금까지 비슷한 사업을 여러 번 검토했는데, 모두 다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비즈니스 모델로 같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 같네요. 우리가 다른 경쟁사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우리만의 해자가 있나요?” , “이 사업이 잘되면 분명히 대기업도 같은 사업을 할 텐데요, 그 상황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우리만의 해자가 있을까요?”와 같은 유의 질문이다. 솔직히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투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런 질문을 한 VC는 결국엔 이 사업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비슷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회사들이 투자자를 설득할 만한 명확하고 논리적인 해자를 갖추긴 어렵고 – 특히, 이제 막 시작하는 초기 스타트업은 – 대기업이 이 분야에 진출했을 때 다윗 같은 스타트업이 골리앗 같은 대기업을 이길만한 해자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론적으로 명확하고 논리적인 상상 속의 해자가 있더라도, 아마도 투자자는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기술력이 뒷받침되는 소프트웨어 회사가 아니라, 공장에서 뭔가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브랜드나 D2C 회사들은 이런 해자를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도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한국과 미국 회사에 꽤 많이 투자하면서 이 힘든 현실을 간접적으로 경험했고, 나는 몇 년 전부터 이런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브랜드를 만드는 사업 분야에서 해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받아들이고 있고, 아예 이 분야에서 사업하는 창업가들에겐 본인이 하는 사업의 해자는 무엇인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최근에 우리가 투자한 이런 D2C/브랜드 사업들을 보자: 제주 귤을 원료로 주스와 같은 다양한 시트러스 제품을 만드는 귤메달; 파워레이드나 게토레이드랑 같은 카테고리에 속한 기능성 스포츠 드링크 얼티밋포텐셜을 만드는 어센트스포츠;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한 영양제 페노비스를 만드는 노즈워크. 모두 다 잘하고 있는 스타트업이지만, 다른 스타트업도 충분히 이 분야로 들어올 수 있고, 돈/시간/인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대기업도 진출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규모가 나오는 시장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회사들이 우리 투자사들과 경쟁하기 시작하면 우리 창업가들은 어떤 해자를 만들면서 이길 수 있을까?

정답은, 이들이 구축할 수 있는 해자는 없다. 이 치열한 분야에서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든 합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하고, 되도록 많은 소비자들의 눈에 노출되고, 그냥 무조건 많이 팔아서 매출 잘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많이 팔고, 어떻게 매출을 많이 만들 수 있을까? 이 또한 정답도 없고, 이를 위한 해자라는 것도 없다. 그냥 좋은 제품 만들고, 최대한 많은 채널을 통해서 유통하고, 동시에 마케팅도 잘 해야 한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혹시나 자체 공장을 만들거나 우리 제품을 OEM 제조하는 공장을 인수해서 생산의 전 과정을 수직통합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건 품질관리, 공정관리, 수량 조정, 가격 조정 면에서 우리에게 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체 공장에 대해서 고민하는 단계까지 왔다면, 이미 우린 시장에서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브랜드가 됐을 것이고, 여기에서 말한 대로, 특정 분야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가 됐다면, 이 자체가 엄청난 해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아는 그 강력한 브랜드가 되기 전까지는, 해자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자꾸 우리만의 차별점이나 해자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물건 하나라도 더 팔아라. 대신, 남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너무 깊이 생각하기보단 get things done 전략으로 실행에 집중해라.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영어에서 많이 사용하는 문장 중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믿을만한 손이 나를 잘 잡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다. 다양한 상황에서 이 말을 하는데, 비즈니스 상황 외에 내가 가장 많이 이 말을 들었던 건 미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적진에 침투해서 인질을 구출하면서 안심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나도 영어로 대화할 땐 이 말을 꽤 자주 사용하는데, 투자자로서 내가 우리 투자사 대표님들에게 주로 하는 말이다.

스트롱이 첫 번째 기관 투자를 했다면, 이 스타트업의 대표에게 “우리가 한국에서 투자를 제일 잘하는 VC도 아니고, 우리한테 투자를 받으면 회사가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you are in good hands 입니다. 저희는 회사들이 힘들 때 뒤에서 같이 고민하고 같이 궂은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투자자예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 투자사 중 80% 이상이 우리가 첫 번째 기관투자를 했으니, 대부분의 대표님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봐도 된다.

솔직히 한국어로 “우리랑 같이 하니까 앞으론 걱정하지 말고 안심해도 됩니다.”라고 말하는 거랑 영어로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하는 거랑 느낌이나 어감이 많이 다르긴 하다. 영어로 하는 게 임팩트가 훨씬 더 크긴 한데, 어쨌든 이 말은 내가 투자자로서 창업가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 반대의 상황을 경험했다. 우리가 여러 번 투자한 스타트업의 대표가 나한테 “You are in good hands.”라고 했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기분이 묘하긴 했다. 기분이 묘했다는 게 나빴다는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항상 불안해하는 창업가분들에게 이 말을 하면, 이분들의 표정이 조금은 더 편해지고, 심적으로 안정감을 찾는 것 같았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 이 말을 들으니, 이런 기분이 드네. 좋구먼.”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회사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여기서 말하진 않겠다. 그런데 모든 스타트업이 그렇듯이 항상 돈은 없고, 항상 사업은 불안하고, 항상 원하는 수치는 안 나오는, 그런 전형적인 초기 스타트업이 대부분 거치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우리는 사업을 직접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창업가들과 워낙 많이 교류하다 보니,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항상 우리의 걱정과 근심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다. 그날도 이야기하면서 이런 나의 우려가 표출됐던 것 같은데, 이분이 나를 똑바로 보면서, “걱정하지 마세요.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정말로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아마도 그분은 잘 모를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해 주는 해외 LP 분들이 글로벌 경기, 한국의 경기, 북한, 스트롱의 포트폴리오, 스트롱의 어려운 상황들 등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면, “Don’t worry. You are in good hands.”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창업가분들이 우리에게 큰 안심을 제공하듯이, 내가 하는 이 말도 우리의 LP들에게 큰 안심을 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