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롱한 한 해

우리는 매주 화요일 오전에 스트롱이 검토하고 있는 모든 딜들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꽤 긴 전체 미팅을 한다. 처음엔 1시간이면 충분하던 게, 딜 수도 많아지고 각자의 생각과 시각도 다양해지면서 가끔 3시간 넘게 회의할 때도 있다. 다들 아주 바쁘지만, 우리의 존재 이유 자체가 우리 투자사들과 우리가 검토하는 회사들이라서, 화요일 오전만큼은 모두 충분히 시간을 내서 회사 이야기를 많이 한다.

11월에 존이 한국에 출장 나왔을 때 우리 팀은 당일치기로 북촌 한옥 마을 집을 하나 빌려서, 이 전체 미팅을 외부의 방해 없이 여기서 하루 종일 했다. 멀리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하루 이상 시간을 낼 수가 없었고, 하지만, 사무실이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고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1일 워크숍을 했다. 우린 이걸 ‘소풍숍’이라고 한다.

일 이야기도 하루 종일 했지만, 서로 바빠서 그동안 못 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고, 삼청동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다. 거의 2년 동안 화상 미팅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얼굴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번 느꼈다.

2021년 우리 팀은 정말 바빴다. 쓸데없는 일은 웬만하면 다 쳐내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즉, 창업가들과 우리 LP들과 같이 일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투자했지만, 그래도 시간은 항상 모자랐다. 우리 팀원 5명이 올해 한 일을 모두 나열할 순 없지만, 모두 일 당 삼 백의 일을 했다. 이렇게 적은 인력으로, 이렇게 많은 회사에 투자하고, 그 회사들을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그리고 이렇게 적은 인력으로, 이렇게 많은 LP들과 소통하고, 서로가 모두 스트롱해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북촌 워크숍에서 찍은 이 사진을 보면 이 스트롱한 팀이 정말 자랑스럽다.

사진 2021. 12. 1. 오전 7 41 07

우린 엄밀히 말하면 금융업이라기보단, 사람을 연구하는 인문업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인데, 우리가 투자하는 창업가, 우리에게 투자하는 LP, 우리가 어울리는 파트너들, 그리고 스트롱 팀원 모두에게 해당한다. 올해는 정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우리도 많이 배우고, 더 겸손해졌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이 스트롱 팀원들과 후회 없는 2021년을 보내서 영광이다.

Together, We are ALL Strong!

거절하기

얼마 전에 알토스 벤처스 한킴 대표님이 공유한 글을 읽고 몇 자 적어본다. West Point 사관학교의 심리학자가 쓴 책을 요약한 기사인데, 생도들의 번아웃을 방지하기 위한 몇 가지 효과적인 방법이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유용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포인트는 내가 정말 많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바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냥 “No”라고 말하는 것이다.

흔히 이런 기술을 거절의 기술이라고 하고, 내 주위 어떤 분들은 타고난 거절하기 기질이 있고, 어떤 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거절하기를 못 한다. 내 경우를 잠깐 이야기해보면, 나도 내가 하기 싫은 건 웬만하면 모두 거절하고, 아주 솔직하게 그 이유를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내가 거절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그냥 바빠서인데, 단지 바쁘다고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면 대부분은 그냥 핑계라고 생각하면서 매우 기분 나빠한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아무리 바빠도 30분도 할애 못 하냐고 엄청 서운해 하는데, 나는 이런 분들에게도 매몰차게 정말로 바빠서 30분도 할애 못 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해준다. 이분들에게는 30분이지만, 이런 요구와 부탁이 수십 개씩 오는데, 이걸 모두 다 들어주면 내가 정말로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로 없는 시간을 쪼개면 이런 부탁을 들어줄 순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스트레스 레벨이 올라가고, 이미 이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해로운지를 여러 번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내 일정에 무리가 올 정도로 약속을 잡거나 남의 부탁을 들어주는 일을 이제 절대로 하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을 했을 때 오는 스트레스는 그 어떠한 보상으로도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조금 틀어지더라도, 내 건강을 지키고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다. 조금만 더 부연하자면, 이런 부탁을 거절했다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사이라면, 처음부터 별로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긴 한다.

내가 거절을 많이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냥 하기 싫어서이다.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세상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은 세상인데, 굳이 내가 왜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면 그냥 나는 무조건 No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항상 이렇진 않았던 것 같다. 조금 더 어릴 적엔, 나는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내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하면서 주변 분들의 모든 부탁을 들어줬고, 웬만하면 Yes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게 결국엔 스트레스로 쌓이면서, 남들보단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투자하고, 내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된 것 같다.

실은, 거절하기는 정말로 많이 이야기되는 내용이자 기술인데, 말로 표현하는 건 정말 쉽다. “싫으면 그냥 거절해라.” ,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에 대해서 Yes라고 할 필요가 없다”라는 조언을 우리는 자주 듣지만, 이걸 실천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원할 땐 No라고 해야 하고, 위에서 말 한 기사에서도 “거절하는 게 가장 좋은 스트레스 관리 기술”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필요한 기술이 아닐까 싶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 성공한 창업가들의 세미나를 듣는 수업이 있었다. 누군지 지금 기억은 안 나지만, 당시에 꽤 성공해서 은퇴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돈을 벌고 싶었던 이유는, 평생 하기 싫은 일 안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 안 만나기 위해서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을 생각해보면, 평생 스트레스받지 않고 즐겁게 살기 위해서 돈 벌고 싶다는 내용인 것 같다. 좋은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더 좋은 사람되기

얼마 전에 내 파트너 존이 한국에 잠깐 들어왔었다. 우리가 워낙 적은 인력으로 많은 투자를 하다 보니, 우린 모두 divide and conquer 전략으로 일을 한다. 쉽게 말하면 서로 각개전투하고, 각자 본인의 싸움에 집중한다. 특히 존이랑 나는 스트롱을 7년 동안 둘이서만 운영했기 때문에, 서로 할 일 하고, 만나야 할 회사들 따로 만나고, 그리고 중간 중간에 sync 하면서 일하는 스타일에 매우 익숙하다. 요새도 우린 웬만하면 한 미팅에 둘이 같이 참석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서로 따로 두 개의 회사를 만나는 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후에 조인한 조지윤 수석과 신득환 심사역도 마찬가지로, 가급적이면 모두 따로 움직이면서 여러 개의 회사를 만나고 중간 중간에 다 같이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업데이트한다.

그래서 존이 한국에 나와도 서로 얼굴 볼 시간이 많지 않다. 이번에도 너무 바빠서 다시 미국 갈 때쯤 호텔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그동안 얼굴 보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면서 파트너 회의를 했다. 일 이야기를 다 끝내고, 그리고 미국은 Thanksgiving 기간이기도 했고, 연말이기도 해서 서로 각자 올해 고마웠던 사람들과 사건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존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VC라는 업에 대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는데, 그중 제일 고마운 건, 투자를 하면서 나 스스로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이나 하면, 지난 9년 동안 투자를 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이보다 더 다양한 상황을 경험했는데, 이 모든 걸 겪으면서 내겐 그동안 없었던 다양한 능력, 감정, 시각, 그리고 태도가 생겼다. VC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했다면,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별의별 사람을 만났고, 시키는 일만 하는 직업이었다면 절대로 접할 수 없는 별의별 경험을 다 했다. 물론, 좋은 경험도 있었지만, 정말로 스트레스받았던 좋지 않았던 경험도 많았다.

그러면서 나도 참 많이 변했는데, 전반적으로는 아주 좋은 방향을 변한 것 같다. 9년 전의 나보다는 훨씬 더 긍정적이고, 인내심있고, 감사하고, 끈기 있고, 이해심있고, 공감하고, 그리고 이 좋은 특징들은 끝없이 나열할 수 있다. 어쨌든, 투자라는 업무를 하면서 나는 과거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고, 이 부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조금 더 감상적인 말을 해본다면, 우리가 하는 업은 돈을 좇기 보단, 사람을 좇는 일인데,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사람에 대한 불신보단 확신이 많이 생겼다. 즉, 인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게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그리고 이건 좋은 현상이다.

그릿(grit)

Yulip 0

2주 전에 우리 투자사 율립의 새로운 립스틱과 립밤을 받았다. 프리오더는 그 전에 했고, 실제 생산하기까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잘 해결해서 무사히 나 같은 고객에게 배송됐다. 얼마 전에 내가 율립 2.0 이라는 글에서 이 제품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원혜성 대표님을 나는 수년 전부터 알았고, 사업 시작 초반부터 율립을 봤었고, 이번 제품이 얼마나 힘들게 탄생했는지 잘 알기 때문에, 내가 주 고객은 아니지만, 실제 물건을 받아보니 감동이었다.

일단, 이렇게 제품 하나씩 개별 포장되어 배송된다.

Yulip 1

생분해 케이스의 형상은 지구와 생명을 상징하는 씨앗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소셜 미디어에선 로켓과 비슷하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고 있다. 겉 포장지를 벗기고 보니 정말 우주로 날아가면서 케이스가 하나씩 분리되는 로켓과도 비슷하다.

실은 이 포장에도 정말로 많은 고민과 생각이 담겨있다. 잘 보면, 그 어떤 접착제나 테이프 없이 그냥 종이 자체로만 립스틱을 보호하는 포장인데, 율립 팀은 그만큼 환경을 생각하면서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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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는 생분해 소재로 만들었다. 분해 되려면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지구에 영원히 남지 않고 서서히 분해돼서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지는 지속 가능한 소재이다. 생분해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강렬한 색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earth friendly한 파스텔 톤의 케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립스틱을 다 사용하면, 심지만 빼서 버리면 된다. 리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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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는 스타트업이라서 여러 가지 부분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과 절충이 필요했지만, 지속가능성과 ESG에 대해선 율립 팀원분들이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면서 영혼을 갈아넣어 만드는 걸 옆에서 내가 직접 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응원과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이미 소셜미디어에선 아주 긍정적인 반응들이 올라오고 있고, 재활용, 비건, 지속가능성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는 다른 회사의 제품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립스틱이라는 칭찬을 받고 있는걸 보면, 율립 팀의 노력과 그릿(grit)이 헛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주문해서 직접 사용해 보고,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경험하시길.

50권 – 2021

사진 2021. 12. 3. 오전 7 05 22작년 이 맘 때쯤, 1년 독서량 50권을 돌파하면서 이런 을 썼다. 목표를 달성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고, 지식이 쌓이는 것 같아서 더욱더 뿌듯했다. 독서는 남들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 동안 축적한 지식을 짧은 기간 안에 내 지식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너무 쉽고 간단해서, 이렇게 쉽게 지식을 습득하는 게 가끔 미안할 정도이다.

올 초에도 50권을 목표로 세팅했는데, 올해는 이 목표를 조기 초과 달성해버렸다. 해가 다 가기 전에 2권 정도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올해는 이미 52권의 책을 읽었다. 자랑하려고 이런 포스팅을 하는 건 아니지만, 바쁜 일정 속에도 마음의 양식을 많이 먹었다는 점, 그리고 고민 끝에 세운 목표를 계속 달성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스스로 대견해서 나에게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여러 번 쓴 내용이지만, 내 책 읽는 패턴은 단순하다. 소셜미디어, 언론, 그리고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은 책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 앱의 ‘읽고 싶은 책’ 카테고리에 등록한다. 이 책들을 먼저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에서 검색해서, 대여할 수 있으면 여기서 대여하고, 못 찾은 책은 동네 도서관에서 직접 대여한다. 국민도서관에도 없고 동네 도서관에도 없으면, 다른 분들에게 빌려보거나, 아니면 대여 가능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냥 한 권 사서 읽으면 되는데, 나는 더는 책을 사서 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책을 안 산지 한 4년이 넘은 것 같다.

올해는 동네 도서관을 직접 방문해서 책의 냄새를 맡고 – 요샌 마스크를 써서 책 냄새를 맡기가 힘들지만 – 물리적인 도서관만이 줄 수 있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즐거움을 많이 경험하면서, 책 시장은 완전히 이북으로 넘어가진 않을 것 같고, 리테일이 망하고 있다고 하지만 도서관은 망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정신없고 바쁜 일상 속에서 도서관 방문은 나에게 마음의 여유와 정신적 평온을 주는 일종의 성스러운 의식이 되어버린 것 같다.

1년에 50권을 읽으려면,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1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 사람들이 요새 책을 너무 안 읽어서 그렇지, 이게 대단한 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에게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을 잘 활용해야 하고, 가끔 다른걸 희생해야한다. 나는 웬만하면 저녁 약속을 올해도 잡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모일 수도 없었지만, 사람 많은 걸 싫어하고 술도 즐기지 않아서, 그냥 가급적이면 저녁을 집에서 조용히 보냈다. 집에서 저녁도 먹고, TV도 보고, 책도 읽고, 이렇게 하다 보니 일주일에 한 권 정도의 책을 읽게 된 것 같다.

올해도 스타트업이나 비즈니스 관련된 책은 거의 읽지 않고, 소설, 에세이, 그리고 수필 위주로 읽으면서 다양한 글쟁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고, 소소한 내용을 읽으면서 스스로 생각도 정리하고 정화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에게 독서는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훌륭하고 저렴한 최고의 도구이다.

좋은 책을 올해 많이 읽었는데, 홍정욱 씨의 에세이 50에서 발견한 다음 문구가 매우 맘에 들었다.

“5년 후의 나를 결정하는 두 가지는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

Amen to t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