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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진화

얼마 전에 꽤 오랫동안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이런저런 글들을 읽고 있었다. 한 글을 읽으면, 이게 또 다른 글로 나를 인도했고, 이 글을 읽으면, 또 다른 유사한 글을 읽게 됐는데, 굉장히 웃기게 내가 2012년 5월에 쓴 ‘씨앗 뿌리기’라는 글이 추천되어서, 이 글을 클릭하고 11년 만에 다시 읽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견고하게 다듬어진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1957년도에 창업된 Fairchild 반도체로부터 시작됐는데, 이 회사에서 성공과 큰돈을 맛본 창업가와 직원들이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이 새로운 스타트업의 성공으로 인해서 수많은 백만장자가 또 탄생했고, 이 백만장자들은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하거나 벤처투자자가 되면서 자본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선순환 고리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생태계인데, 이 생태계의 원리가 마치 오래된 숲의 나무가 씨를 뿌리는 원리와 비슷하다는 내용이다. 오래된 고목은 그 옆의 토양으로 씨를 뿌리고, 이후에 썩어서 죽으면서 새로운 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이 된다. 뿌려진 씨들은 원목이 제공해 준 풍부한 토양을 기반으로 더 크고 강하게 자라고, 다시 씨를 뿌리고 썩어서 토양이 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숲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글을 썼던 2012년은 스트롱벤처스를 시작했던 해이고, 아직 한국에는 이렇다 할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한국에서 이런 좋은 선순환 벤처생태계가 안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로 벤처 1세대들의 과욕을 지적하긴 했는데, 지금 와서 조금 더 성숙한 투자자의 입장에서 이 글을 다시 평가해 보면, 나의 그런 지적은 절반만 맞았던 것 같다. 일부 벤처인들의 과욕이 있긴 있었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그냥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2012년은 이제 막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글을 쓴 지가 이제 11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한국의 벤처생태계에는 엄청난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창업가와 직원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과거와는 달리 이들은 이렇게 축적한 부를 다시 스타트업 생태계로 재투자했다. 어떤 분들은 다시 창업해서 연쇄 창업가가 됐고, 어떤 분들은 후배 창업가들을 양성하는 VC가 되면서 그동안의 경험과 자본의 씨앗을 아낌없이 뿌리면서 자발적으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토양과 비료가 되고 있다.

나는 스트롱도 이런 씨앗 뿌리기 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한다. 우리가 투자한 몇 회사는 그 초기 모습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하면서 아주 믿을만하고 능력 있는 미래의 창업가와 투자자를 배출하고 있고, 이들 또한 아낌없는 씨앗 뿌리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작은 선의들과 행동들이 계속 축적되다 보면, 한국도 그 어떤 나라 부럽지 않을 견고한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최근에 김혼비 작가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에세이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성인이 된 후 운동과는 담을 쌓고 있던 여성 작가분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면서 여성 축구팀 선수가 되는 과정을 작가님 특유의 맛깔스러운 글솜씨로 쓴 책이다. 여성 축구에 대한 책이지만, 하나의 성장 일기이기도 하고, 남녀 차별과 같이 생각해 봐야 할 사회적인 문제도 제기되고, 그냥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나는 상당히 공감하면서 읽었다.

실은 내가 더욱 재미있게 읽었던 이유가 또 있다. 우리 집에 김혼비 작가만큼 축구에 단단히 진심인 여성이 한 분 있기 때문이다. 나의 16년 차 와이프는 약 1년 반 전에 축구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니 축구인 풋살이다. 어느 날 ‘골때리는 그녀들’이라는 프로를 둘이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원래 운동을 잘하는 친구라서, 본인도 제대로 풋살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며칠 내내 하더니 동네 풋살장에 등록해서 레슨을 시작했다.

이 책을 보면 작가님도 첫 축구 연습 모임 가기 전날에 계속 갈까 말까를 고민했고, 괜히 가서 다치거나, 혼자 웃음거리만 되는 게 아닌가 등, 오만가지 걱정을 했다는데, 와이프 또한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자신 있게 풋살 레슨 등록까진 좋았는데, 막상 가려니까 여러 가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너무 나이 많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냐, 다쳐서 뼈가 부러지면 어떻게 하냐, 혼자만 낙오되는 게 아니냐, 등등. 어쨌든 오만가지 고민을 하면서 첫 레슨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표정이 상당히 밝은 걸 보고, 재미있었고 앞으로 몇 번은 더 하겠다는 생각을 혼자 했다.

이후 계속 정기적으로 풋살 레슨에 갔다. 솔직히, 몇 번 하다가 나는 그만 가거나 아니면 띄엄띄엄 할 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체 그룹 레슨은 심화된 개인 레슨으로 이어졌고, 이후에 같은 레슨생끼리 연습 경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몇 달 후부턴 우리가 투자한 소셜 풋살 플랫폼 플랩풋볼을 통한 모르는 사람들과의 랜덤 경기로 확장됐다. 요새 이 친구는 일주일에 최소 3번은 풋살 하고 있고, 많이 할 땐 5번까지 한다. 한 번 할 때 2시간 동안 6경기를 뛰니까, 이제 곧 50살이 될 작은 체구의 여성이 하기엔 쉽지 않지만, 내가 봤을 땐 오히려 체력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다.

풋살 레슨과 시합이 끝난 후 매번 나에게 본인의 좋았던 플레이를 동영상으로 보여주면서 그때그때의 심정을 설명해 주고,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 다른 동료들과의 호흡은 어땠는지를, 굉장히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 그때마다 항상 두 가지에 놀란다. 첫 번째는 갈수록 향상되는 기술과 실력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공 하나 제대로 차지 못 했던 친군데, 이젠 웬만한 고급 기술을 다 익혔고, 생각을 하면서 이런 기술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 몸이 그냥 반응하고 있다는 게 그대로 영상에서 느껴진다. 실은, 그동안 정말 열심히 레슨받고 경기했지만, 이 정도까지 풋살을 잘 할진 몰랐다. 그리고 두 번째로 놀라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식지 않는 풋살에 대한 열정이다. 우린 16년을 같이 살고 있지만, 이 친구가 이렇게 운동에 진심이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아니, 그냥 뭔가에 이렇게 열정이 있던 적이 있었던가를 생각하게 할 정도로 공, 구장, 팀워크, 그리고 풋살에 대한 사랑이 정말 대단하다. 여성 풋살 시합은 주로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서 꽤 먼 구장에서 열리는데, 이 시합을 찾아다닐 정도면 대단한 열정과 사랑이다.

나는 와이프가 체력이 허락할 때까지 계속 이렇게 열심히 풋살을 할 수 있길 응원한다. 여러 가지 면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다. 일단 눈에 띌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원래 우리 부부가 체력이 후진 편은 아닌데, 정성적, 정량적으로 더 좋아졌다. 주로 같이 뛰는 팀원들이 20대~30대가 많은데, 이 친구들보다 훨씬 더 체력이 좋다. 그리고 다양한 연령, 다양한 배경,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과 팀워크를 맞추고, 몸을 부딪치고, 땀을 흘리면서 공을 차다 보면 굉장히 끈끈한 팀워크와 동료 의식이 생기고, 더불어 사회성도 좋아진다. 한 축구 선생님이 와이프의 나이를 듣자 깜짝 놀라면서 “우리 엄마랑 동갑이네요.”라고 했는데, 이렇게 한참 어린 친구들과도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만나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성을 한층 더 잘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냥 뭔가에 이렇게 열정과 에너지를 투입하면서, 건강하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과 한집에서 같이 산다는 게 난 참 즐겁다.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가장 큰 단점은 부상이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성격이 젠틀한 사람이라도 공을 서로 뺏고 빼앗기다 보면 몸이 부딪히게 마련이고, 나이가 있을수록 여러 가지 부상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풋살도 돈을 쓰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실력이 좋아질수록 장비도 비싼 걸 선호하고, 플랩풋볼도 2시간 뛰는데 만 원이지만, 이걸 한 달에 20번씩 하면 꽤 비싼 운동이 된다. 내가 해외 출장 가면, 이제 와이프는 나에게 스포츠용품 가게에 들러서 온갖 공식 유니폼이나 축구 양말을 사달라고 하는데, 이 또한 가격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계속 응원해 주고 싶고, 계속 격려해 주고 싶다. 우아하고 호쾌한 풋살을 계속하길 바란다.

복리효과

며칠 전에 프라이머 23기 워크숍에 잠깐 참석했다. 마지막 날엔 프라이머 파트너들과의 Q&A 세션이 항상 있는데, 이번에도 다른 프라이머 파트너분들과 지금까지 우리가 보고 느끼고 경험한 내용을 진심을 다해서, 이 힘든 시기에 창업해서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창업가분들과 공유했다.

이 세션의 마무리 부분에선 각 파트너분들이 프라이머 창업가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짧게 하는데 나는 매번 똑같은 걸 강조하곤 한다. 그건 항상 “복리(compounding)의 힘을 믿고, 복리의 힘을 잘 활용하세요.”이다. 실은 이 말은 프라이머 창업가분들뿐만 아니라 모든 창업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내 주변 모든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일주일에 20시간을 일 한다고 치자. 아마도 일주일에 20시간만 일하는 창업가들은 없겠지만. 그러면 월요일 하루만 20시간 일하고, 화 ~ 금 쉬는 것 보단, 월 ~ 금 매일 4시간을 정확하게 나눠서 일하는 게 훨씬 좋다. 이 루틴을 1주, 5주, 50주, 100주, 1,000주 반복한 후에 그 결과를 한 번에 몰아서 일했을 때의 결과와 비교해 보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날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똑같은 일을 꾸준히, 그리고 규칙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복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20시간 일하면 일주일 동안의 생산성은 20시간이지만, 5일 동안 매일 4시간씩 일하면 20시간 이상의 생산성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이 일이 습관이 되면서 자기만의 루틴이 만들어지는데, 루틴이 고도화되면 일반인을 전문가의 영역까지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이 현상을 모든 분야에서 관찰할 수 있고, 나는 루틴의 동물인 창업가와 그렇지 않은 분들을 꽤 많이 관찰하면서 성공하는 창업가들은 자기만의 루틴을 통해서 복리 효과를 잘 활용하는 분들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위의 예시에서는 하루 20시간을 일하면 일주일에 한 번의 루틴이 만들어지지만, 5일을 4시간씩 일하면 5번의 루틴이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복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꾸준함이다. 꾸준하지 않으면, 반복하지 못하고, 반복하지 못하면, 루틴을 만들 수 없고, 루틴화 되지 않으면 복리의 힘은 작용하지 않는다.

AI 스타트업 바이블

우리 투자사 마인드로직은 GPT 기반의 대화형 AI 에이전트를 기업에 제공해 주고 있다. 많은 분들이 이미 이런 컨셉에 익숙할 텐데, 웬만한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간단한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챗봇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런 구시대의 챗봇은 제대로 된 답변을 전혀 못 하지만, 마인드로직의 ChatAPI는 높은 IQ의 사람과 비슷한 수준의 답변을 제공하는 새로운 챗봇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솔직히 나는 AI 전문가도 아니고, 그동안 AI 회사들이 너무 과대평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인이었다. 기술을 완벽하게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요새 이 좋지 않은 경기 속에서 AI 회사들이 투자받는 금액과 밸류에이션을 보면, 이 분야에 역시 너무 많은 거품이 있고, 이 거품이 좀 꺼지면 AI 회사들에 본격적으로 투자 검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OpenAI나 Gen AI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기술을 완벽하게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봐도 이들이 하는 작업은 매우 놀랍고, 10년에 한 번씩 오는 큰 흐름의 기술 주기를 봤을 때, 앞으로 10년 동안은 AI가 우리 삶의 많은걸 지배하고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10년 전에 봤던 공상과학 영화 속의 머나먼 미래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됐고, 이런 흐름을 가장 잘 타고 있는 기업 중 하나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전에 했던 이 말이 당시엔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요샌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If the last 20 years was amazing, the next 20 will seem nothing short of science fiction.( 지난 20년이 어메이징했다면, 다음 20년은 공상과학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제품을 개밥 먹기를 하는 차원에서, Gen AI를 계속 공부하는 차원에서, 그리고 내 편의를 위해서 마인드로직의 ChatAPI를 이 블로그에 적용해 봤다. 블로그 하단의 챗 아이콘을 클릭하면 AI 스타트업 바이블이 이 블로그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모두 다 답변해 준다. 물론, 그 답변이 맘에 드냐, 안 드냐는 각자 판단해야 하지만.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트업 바이블 저자 배기홍보다 더 똑똑하고 투자 경험이 많은 인공지능 스타트업 바이블입니다. 이 블로그에 대해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욕설은 거부합니다.”

모두 한번 사용해 보길 권장한다.

피와 땀의 진입장벽

우리 투자사 중에 페이지콜이라는 9년 된 B2B SaaS 스타트업이 있다. 우린 페이지콜에 2017년에 첫 투자를 했고, 그 이후에 몇 번 더 투자했다. 지금은 B2B SaaS 분야가 한국에서도 조금씩 커지고 있지만 당시엔 투자를 업으로 하는 VC들에게도 이 분야는 생소할 정도로 인기도 없고, 한국에는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나 페이지콜은 B2B SaaS 분야에서도 API를 만들어서 기업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데, 창업 초기엔 투자자들이 이 비즈니스를 이해도 못 했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페이지콜은 학원이나 학교의 digital transformation을 돕는 API를 만드는 회사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애매모호한데, 조금 더 쉽게 말하면, 오프라인 사업을 주로 하던 교육업체들이 페이지콜의 제품을 사용하면, 쉽고 자유롭게 본인들만의 온라인 강의실과 강의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 즉, 줌을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더 자유도가 높고, customization이 가능한 온라인 교육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이 회사의 강점은 9년 동안의 피와 땀이 투자된 연구, 개발, 그리고 삽질 위에 구축한 실시간 칠판(=캔버스) 기능인데, 수학과 같이 선생과 학생이 뭔가를 계속 보고 쓰면서 학습해야 하는 과목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어려운 기능이다. 척박한 SaaS와 API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지만, 이젠 이 분야에서는 강자가 됐고 에듀테크 분야에서는 누구나 아는 설탭, 콴다, 대교, 튼튼영어 등과 같은 기업고객에서 페이지콜을 기반으로 실시간 화상 과외 솔루션을 구축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분야에서의 사업, 그리고 펀딩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B2B SaaS 시장을 한국의 투자자들은 회의적으로 보고, 특히나 API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 VC도 많다. 내가 이 회사를 다른 투자자분들에게 소개하면, SaaS나 API를 좀 아는 분들도 항상 하는 질문이 “어차피 WebRTC를 기반으로 만든 거라면, 누구나 다 비슷하게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다. 이분들의 주장은 큰 교육업체라면 개발 인력이 내재화 되어 있을 것이고, 구글에서 오픈 소스로 제공하는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API인 WebRTC를 이용해서 페이지콜과 똑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외주업체에 맡겨도 금방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분들이 하는 말이 틀리진 않다. 누구나 WebRTC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이 API를 기반으로 누구나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비슷한” 제품이다.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페이지콜과 비슷한 제품은 누구나 다 만들 수 있지만, 페이지콜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 사용성에 대해 내가 항상 주장하는 점을 다시 한번 여기서 강조해 본다. 시장에는 비슷한 제품들이 널리고 널렸지만, 이 중 제대로 돈을 버는 제품은 극소수이다. 이 극소수의 제품과 다른 비슷한 제품의 껍데기만을 보면 다 비슷하다. 아니, 대충 보면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제품들도 많다. 하지만, 이 제품들을 조금만 더 깊게 사용해 본 사용자들은 그 차이점을 금방 파악하고 어떤 제품을 돈을 내고 사용할지 결정하게 되는데, 이런 점들이 좋은 제품과 그냥 비슷한 제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소들이다.

이 차이점을 표현하는 완벽한 단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 “사용자 경험의 오너십”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분야만 꾸준히 파고들면서 축적된 수천 ~ 수만 시간의 제품 개발과 운영, 그리고 수십 ~ 수백 명의 고객의 피드백을 다시 제품에 반영한 수백 ~ 수천 번의 product iteration 과정을 통해서 한 제품을 여러 고객이 여러 환경에서 사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이 문제점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이 축적돼야지만 우리의 제품은 사용자 경험을 소유(=own)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껍데기는 다른 제품과 비슷하지만, 사용해 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사용자 경험이 내재화 되어 있는 좋은 제품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페이지콜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API를 만들기 때문에, 인터넷 속도, 사용하는 브라우저, PC나 모바일 플랫폼의 환경,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시스템과의 충돌, 사용자 실수 등, 너무나 많은 변수 때문에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아직도 너무 많다. 하지만, 수년 동안 troubleshooting을 해왔고, 사용자들의 피드백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코드, 기능, UI, UX를 개선해 왔기 때문에 단순히 WebRTC를 기반으로 껍데기만 비슷하게 만든 제품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이 이 분야에 들어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페이지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투자한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이젠 다른 제품과의 “비슷함”을 넘어서 사용자들이 돈을 내는 제품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 이런 제품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는다. 아니, 절대로 나올 수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헌신하는 팀의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데, 쉽게 말하면 노가다가 필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노가다는 피와 땀이 만든 진입장벽이 될 수 있고, 피와 땀이 만든 진입 장벽은 어쩌면 남들이 넘기 힘든 가장 큰 진입장벽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