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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업(大業)

창업과 스타트업이라는 말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는 요새 창업이 큰 화두이다. 정부의 엄청난 지원, 웬만한 대학교마다 볼 수 있는 창업보육센터, 강남을 주축으로 여기저기 생기고 있는 창업 지원공간, 그리고 미디어에서 계속 떠드는 벤처, 스타트업, 청년창업 때문인지 마치 한국이 창업 국가라는 착각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국의 제대로 된 창업 역사는 상당히 짧다. 스타트업 바이블이 2010년도에 출간되었는데, 실은 이 책이 나오기 전에는 ‘스타트업’이라는 단어조차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생소했다. 그 전에는 모두 ‘벤처’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스타트업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온 지가 이제 몇 년도 안 됐을 정도로 한국의 창업 생태계는 걸음마 단계라는 점을 나는 항상 개인적으로 강조한다. 그래서 너무 실리콘밸리와 한국을 비교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도 올 한 해 자주 강조했다. 실리콘밸리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모두 다르지만, 1957년 창업된 Fairchild Semiconductor가 그 시초라는 이야기를 많은 분이 한다. 이렇게 보면, 실리콘밸리의 역사는 60년 정도이며, 우리가 미디어에서 자주 접하는 이 동네 스타트업들은 분명 전통적인 대기업보다는 훨씬 바른 고속성장을 했지만, 이 성장은 실리콘밸리의 60년 시행착오 노하우가 전제된 배움의 성장이다.

솔직히 나는 제대로 된 한국 스타트업 역사는 5년밖에 안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은 자꾸 우리의 성장을 실리콘밸리와 비교하려고 하고,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과 같은 성장 곡선을 따라 하려고 한다. 따라 하는 건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이게 맹목적인 카피가 아니라, 우리보다 역사가 깊고 더 잘하고 있는 회사의 지표나 문화를 우리의 상황에 맞게 변형해서 벤치마킹하는 건 후발주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따라 한다고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회사같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실패하고, 실패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회사가 주저앉을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왜 우리는 실리콘밸리같이 못 할까?”라면서 자신을 너무 자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실리콘밸리보다 역사가 짧고, 그래서 배움도 당연히 짧고 한정되었기 때문에 잘 안되고 실패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계속 도전하고, 잘 안된 원인을 분석하고, 다시는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지만, 개인과 기업은 발전하고, 생태계는 만들어진다.

나는 우리 같은 VC는 금융업이 아니라 건설업에 종사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회사를 만드는 건(=building a company), 땅을 파고, 거기에 토대를 튼튼히 기초공사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건설과 똑같다. 이렇게 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쩌면 평생이 걸리는, 죽을 때까지도 완성하지 못하는 대업(大業)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모든 창업가와,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모두 다 스타트업 생태계를 만들고 싶어 하고, 나도 실은 여기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생태계라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도 한국의 스타트업 생태계는 기초공사도 못 끝낼지도 모른다. 그동안 많은 회사가 생기고, 투자를 받고, 망하고, exit을 하게 될 것인데, 이 모든 게 회사가 성장하고 생태계가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일희일비하지 말고, 길게 보고 가자. 5년 안에 exit 할 비즈니스를 만들기보다는, 평생 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다 보면, 운 좋으면 1년 안에 exit 할 수 있다. 물론, exit 한다는 게 항상 좋은 건 아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길까?

david-and-goliath-shane-robinson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송하는 서비스를 운영하는 많은 스타트업이 MailChimp를 사용한다. 이 분야에서는 워낙 독보적인 제품이라서, 메일침프라는 이름 또는 이 회사의 로고인 침팬지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한때는 메일침프를 자주 사용하다가 최근에 오랜만에 사용해봤는데, 이 서비스의 깊이와 세밀함에는 항상 감동과 감탄을 동시에 한다. 참고로 메일침프는 2001년 4월에 창업된 ‘늙은’ 스타트업인데, 메일침프를 통해서 한 달에 약 100억 개의 마케팅 이메일이 전 세계로 발송된다. 비상장 회사라서 정확한 수치를 찾을 수는 없지만, 년 매출은 약 2,200억 원 ~ 4,4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재미있는 건, 이 회사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투자를 유치하지 않았다.

한때 나는 메일침프를 상당히 깊게 사용하는 유저였는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용자 시나리오를 이보다 더 깊게 고민한 제품이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만든 제품이라고 생각한다. 메일침프를 사용하다 보면 “와, 이런 것까지 생각을 했다니” 라는 감탄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메일침프의 창업자들이 이메일 마케팅의 도사들이라서 창업 초기부터 제품을 설계할 때 이런 예상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고려해서 완벽한 제품을 만든 것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내가 초기 제품을 사용해보지는 않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완성도 높은 제품을 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제품 수정(=product iteration) 과정을 거치면서, 더 좋은 제품으로 진화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유저수가 늘어나고, 여러 가지 사용자 경험과 시나리오들이 발생하면서, 이에 발맞춰서 지속해서 제품을 수정한 결과일 것이다. 이제는 한 달에 100억 개의 이메일, 일 년에 1,200억 개의 이메일을 발송하면서, 이메일 마케팅 관련해서는 상상가능한 웬만한 사용자 시나리오가 이 서비스에 잘 녹아 있을 것이다. 참고로, 메일침프는 아직도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기능도 조금씩 추가하면서, UI/UX도 계속 수정하고 있다.

아직도 대기업의 카피 현상을 두려워하는 창업가들이 시장에 많다. 이 분들의 전반적인 입장은, “우리 서비스가 지금은 월등하지만,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대기업이 맘먹고 카피하려고 하면, 우리는 참 위험해져요.”이다. 우리 주위를 보면, 대기업들이 작은 스타트업의 제품을 그대로 카피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시장성이 있고, 돈이 되면, 누구나 다 같은 시장에서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서 경쟁할 수 있다. 결과를 보면 대기업이 이런 카피 전략을 구사해서 작은 스타트업을 죽이는 사례도 존재하지만, 예상외로 돈과 자원이 훨씬 더 많은 대기업이 그렇지 못하고 고전하는 경우도 있다.

왜 그럴까? 뛰어난 인재와 돈이 넘쳐 흐르는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기업이 작은 회사가 하는 서비스를 금방 카피해서 이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왜 항상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각도에서 봤을 때, 한국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네이버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스타트업이 잘하는 거 같으면 이들을 카피하는 걸 우리는 여러 번 봤다. 성공하는 것도 있지만, 직원 30명 이하의 회사가 운영하는 서비스를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유사 사업을 접는 것도 우리는 목격한 적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메일침프와 같은 다윗이 있으므로 골리앗이 항상 이기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작은 회사들의 엄청 빠른 product iteration, 그리고 그 결과물인 ‘세밀한 사용자 경험의 완벽한 오너쉽’이 바로 대기업도 잘 넘지 못하는 커다란 진입장벽을 만들 수 있다. 실은 메일침프와 같은 이메일 서비스를 시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고, 이를 입증하듯이 이미 비슷한 여러 서비스가 존재한다. 심지어는, 아마존도 더 저렴한 유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만, 사용자들이 정말로 좋아하고, 기꺼이 돈을 내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으로 진화시키는 건 그리 쉽지가 않다. 아니, 정말로 어렵다. 메일침프와 유사한 다른 서비스들은 – 대기업 제품 포함 – 껍데기만을 보면 메일침프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하지만, 메일침프의 경우, 제품을 깊게 사용해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미묘한 섬세함과 사용자 경험이 최적화되어 있다. 아마도 수많은 사용자의 피드백과 제품 사용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계속 기능, UI, 경험을 빠르게 고치기 때문인 거 같다. 그리고 이런 지속적인 iteration이 가능한 속도와 민첩성은 대기업들이 카피하기 쉽지 않다.

이런 게 메일침프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시장이 크고, 이 시장에서 만들 수 있는 매출이 크다면, 수많은 대기업과 스타트업들이 같은 제품을 만들고, 서로 카피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돈, 인력, 그리고 자원이 많은 대기업도 셀 수 없을 정도의 product iteration을 통해 오랫동안 시장과 사용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용자 경험 자체를 완전히 own 하는 스타트업들과 맞짱 뜨는 건 쉽지 않다. 겉으로만 보면, “대량 메일 솔루션? 그거 그냥 우리가 만들면 되잖아”라고 생각하지만 메일침프를 통해 매달 700만 명의 사용자들이 100억 개 이상의 이메일을 보내면서 형성된 관계와 제품에 녹아 들어가 있는 사용자 경험은 아무리 돈과 인력이 있어도 단시간 내에 카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민첩성, 끊임없는 product iteration, 지속적인 피드백 수용, 시장 경청, 과감한 실험.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uefdelhi.wordpress.com/2014/06/19/acromegaly-the-hidden-defect-of-goliaths-gigantism/>

열린 대화

open_minded_comic-a궁금한 걸 물어보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기업 총수들과의 청문회를 보고 많은 걸 느꼈다. 여당, 야당을 막론한 수준 이하의 질문과 발언, 그리고 무조건 모르고 미안하다고 하는 기업인들을 보고 역시 결국 손해 보는 건 국민이라는 생각을 많은 분이 하셨을 거 같다.

특히 나를 좀 거슬리게 했던 건 기본적으로 상대방과의 대화의 준비가 되지도 않고, 그럴 자질이 없던 몇몇 국회의원, 그리고 생산적인 대화를 할 마음이 아예 없던 기업인들이었다. 도대체 이럴 거면 바쁜 사람들 불러서 왜 청문회를 했겠느냐는 질문을, 그리고 결국 하나의 거대한 쇼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청문회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서로의 처지가 다를 수 있다는 태도에 근거해서 열린 대화를 하는 걸 나는 많이 못 본 거 같다. 솔직히 내가 일하고 있고, 그나마 다른 분야보다는 열려있다는 이 스타트업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다. 창업가들과 미팅을 하다 보면, 어떤 투자자들은 이미 자기만의 생각이 너무 굳건해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자기 생각만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해본 창업가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투자자가 질문을 해서, 대답을 하려고 하면, 중간에 말을 끊어버리고 본인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아니면 내가 말한 걸 임의로 해석하면서, “아, 그래서 이렇단 말이죠?”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투자자들과 미팅을 해봤을 것이다. 이런 사람과 대화라는 걸 할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본인은 맞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틀 안에서 모든 생각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랑 어떻게 열린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실은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이랬던 적이 몇 번 있는데,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할 수 있었다.
참고로, 꼭 투자자가 아니라, 나는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창업가도 만나본 적이 있는데, 내가 엄청 화를 내고 미팅을 끝냈던 기억이 난다. 투자자인 나는 이렇게 했지만, 돈이 필요해서 여기저기 피칭하러 다니는 창업가들은 이렇게 화를 내지는 못한다. 그냥 꾹 참을 뿐이다.

이런 열린 대화를 하는 게 한국이 더 힘든 이유는 능력보다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로 결정되는 불평등한 발언권 구조, 그리고 쌍방향이 아닌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 시스템 등이 있는 거 같다. 단기간 내에 바뀔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들이고, 한국 사회가 과연 미국과 같은 수평적 사고 시스템을 얼마만큼 도입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조금씩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지 출처 = http://www.occasionalplanet.org/2013/04/23/are-democrats-more-open-minded-than-republicans/>

돈 보다 신뢰

평판 관련해서 내가 자주 인용하는 워런 버핏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We can afford to lose money – even a lot of money. But we can’t afford to lose reputation – even a shred of reputation(버크셔헤서웨이가 돈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아주 많이 잃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명성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티끌이라도)”

특히 스타트업이나 VC같이 작은 커뮤니티에서는 이 평판과 명성이 더욱 중요한데, 며칠 전에 접한 기사를 보면서 정말 정직하고 투명하게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2010년에 창업된 스타트업 중 Fab.com이라는 이커머스 회사가 있었다. 3,000억 원 이상 투자를 받았고, 한때는 기업 가치가 1조 원이 넘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유니콘 회사 중 하나였지만, 4년 만에 비즈니스는 급격하게 하락했고, 결국 200억 원 정도에 다른 회사에 인수되었다. 한때는 가장 성공적인 유니콘 회사였지만, 결국 가장 크게 망한 스타트업 낙인이 찍혔고, 이 회사에 투자한 엔젤투자자와 VC들은 돈을 거의 다 날렸다. 창업자이자 대표는 Jason Goldberg라는 친구인데, Fab을 비롯 여러 스타트업을 창업했지만, 대부분 잘 안되거나 피봇을 한 크게 성공적이지 못한 연쇄 창업가이다.

그런데 이 친구가 Pepo라는 또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이 회사가 최근에 약 27억 원의 시드 라운드를 유치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Pepo의 투자자들이 대부분 망한 Fab.com에 투자한 투자자들이라는 점이다. 음….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약간 의아해했을 것이다. 3,000억 원을 날린 창업가한테 왜 다시 투자했을까?

TechCrunch에 의하면 제이슨 골드버그는 회사의 경영과 상황에 대해서 매우 투명했다고 한다. 비즈니스가 잘 되면 투자자들과 업데이트 공유가 잘 안 되거나 늦어도 상관없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투명하게 즉각 소통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실제로 제이슨은 Fab.com이 왜 잘 안 되었고, 뭐가 문제였는지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많은 발언을 했고,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여러 번 인정했다. 이런 내용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 초기 시점부터 투자자들과 투명하게 공유하고 소통함으로써 이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었던 거 같다.

창업자들이 투자자와 투명하게 소통하는 건 정말 중요하다. 우리도 투자하면서 항상 부탁드리는 건 회사를 잘 키워달라기보다는 궂은일이 있을 때는 아주 솔직하게 우리한테 너무 늦기 전에 알려달라는 거다.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모든 게 계획대로 안된다. 돈은 항상 부족하고, 제품개발은 지연되고, 고객은 항상 늦게 돈을 준다. 대부분의 VC는 이런 스타트업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일이 생각같이 잘 안 풀려도 충분히 이해하고,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스타트업과 같이 으쌰으쌰해서 어떻게라도 도와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 노력의 정도나 깊이는 VC의 규모 또는 성향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이러므로 회사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투자자들과 상황을 공유하고 해결책을 같이 찾는 노력을 하는 게 모두에게 좋다. 대표이사의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이런 좋지 않은 상황을 숨기다 보면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곪아서 문제가 더 커지고, 최악의 경우 회사가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런 일이 발생하면, 투자자는 이 창업자에 대한 신뢰를 잃고, 신뢰를 잃은 창업자는 평판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한 번 타격을 입은 평판은 절대 회복되지 않거나,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린다.

참고로, Pepo의 초기 수치들이 매우 좋긴 하다. 그래서 투자자들이 다시 투자했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3,000억 원을 날려 먹은 창업자한테 기존 투자자들이 다시 투자한 이 사례에서 우리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창업자와 투자자 모두.

재미있는 인연

우리 투자사 중 오라이츠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출판과 책 분야의 비즈니스인데, 글로벌 출판 시장에 대한 정보를 분석하고 업데이트해주는 서비스이다. 일반인들한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분야이지만, 꽤 의미 있는 규모의 돈을 쓸 준비가 되어 있는 명확한 고객들이 존재하는 시장이다. 이 회사의 공동 창업가는 김혜원 대표와 이정도 이사인데, 오늘은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2009년도 뮤직쉐이크 시절, 콜드 이메일을 받았다. ‘파이카’라는 한국의 신생 출판사인데, 내가 쓰는 블로그 내용을 기반으로 책을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이메일이고, 당시 굉장히 바빴던 시기라서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출판사이길래 나같이 못 나가는 사람한테 책을 쓰자고 할까 궁금했고, 출판사 김혜원 대표가 워튼스쿨 후배라서 한 번 이야기는 해보자는 생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책 출판 의도 자체가 벤처로 성공한 선배 창업가가 후배들한테 “이렇게 하니까 성공하더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같이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동료 창업가가 “나도 같이 구르고 있는데, 미국에서 남들보다 약간 먼저 구르다 보니 이런 경험을 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라서 책을 써보기로 했고, 그 책이 ‘스타트업 바이블(1권)‘이다. 실은 책 내용도 나쁘지는 않지만, 책 제목을 워낙 잘 지었는데, ‘스타트업 바이블’이라는 제목은 파이카 김혜원 대표의 작품이다.

책 출간 몇 개월 후, 파이카에서 연락이 왔다. LA에서 남미 아르헨티나까지 오토바이 종단 여행을 떠난 이정도 씨와 용현석 씨에 대한 소개였는데, 종단을 마친 후에 파이카에서 책을 만들 계획이었다. LA에서 나는 이 젊은 친구들을 만나서 같이 식사도 하고 좋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후 친분을 유지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종단은 성공했지만, 책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얼마 후 파이카의 김혜원 대표와 오토바이 청년 이정도 씨는 스타트업을 공동창업했다. 에브리클래스라는 미국의 Skillshare와 비슷한 비즈니스였는데, 이 회사는 프라이머의 투자를 받았다(Strong이 프라이머 활동하기 전).

에브리클래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이 팀은 글로벌 출판 정보 플랫폼인 Frontlist를 운영하는 오라이츠라는 새로운 서비스로 피봇을 했고, 우리는 이 회사에 투자했다. 그리고 에브리클래스에서 오라이츠로 서비스가 피봇하는 기간 중 김혜원 대표와 이정도 씨는 결혼을 해서 스트롱벤처스가 투자한 3번째 부부창업 스타트업이 되었다. 참고로 에브리클래스에서 오늘의 오라이츠가 탄생하기까지는 거의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는데, 김혜원 대표와 이정도 이사가 스스로 코딩을 공부해서 개발자로 다시 탄생하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오라이츠팀과 미팅을 하고,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가에 대해 생각하다가 참 재미있는 인연이어서 혼자 씩 웃었다. 우리가 투자한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오래 알고 지낸 분들이고, 그만큼 인간적으로 신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