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치우는 사람들

스트롱에는 6명의 투자팀원이 있다. 이 중 스트롱의 리더십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다. 나는 2012년 스트롱을 만든 후 계속 한국 시장에 투자했고, 나머지 두 분은 스트롱에 조인하기 전에 각자 다른 곳에서 직접 투자와 간접 투자의 경험을 쌓았다. 우리 셋 모두 2010년 초중반부터 한국 벤처 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2022년 글로벌 불경기가 오기 전까진 거의 10년 이상 벤처 호황을 경험하고, 이 호황을 누리면서 투자 업무를 했다. 스트롱이 투자를 시작한 2012년부터 2022년, 10년 동안 경기는 약간의 up/down이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불경기가 찾아온 적은 없었고, 나의 첫 10년 VC 인생 중 항상 경기는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세계 경기는 하향 조정되기 시작했고, 나를 비롯한 다른 시니어 동료분들은 VC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불경기를 경험하면서, 돈이 메마르고, 불확실성이 모든 걸 지배하고, 벤처생태계 자체가 공황에 빠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이럴 때 VC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다.

우리의 다른 투자팀원 세 명은 리더십 동료와는 매우 다른 프로필을 갖고 있다. 일단 세 분 모두 다 젊다. 나도 정신적 나이만 따지면 젊지만, 이분들은 물리적인 나이가 모두 20대다. 그리고 스트롱 전에는 모두 학생이었다. 많은 VC들이 경력 없는 신입 직원은 안 뽑는데, 우린 채용 면에서도 남들과 다른 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심사역은 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채용하는 걸 선호한다. 공통점이라면, 이 세 분 모두 스트롱에서 6개월 이상 인턴 생활을 했고, 이 기간에 우리도 인턴분들과 합을 맞춰봤고, 인턴분들도 스트롱이 본인들에게 맞는 조직인지를 시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분들은 대부분 2020년 이후에 스트롱에 조인하면서 VC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투자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세계 경기는 좋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안 좋아졌다. 내 기억으론 우리 주니어분들은 우리 포트폴리오가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망가지고 있을 때 투자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분들은 투자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는 대부분 망하고, VC는 투자보단 회사들이 어려울 때 뒤에서 더러운 일 처리하면서 힘든 일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박혀 있다.

이런 default mentality의 차이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가 만드는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이 벤처투자를 시작했던 타이밍은 VC 역사상 최악이지만, 앞으로는 더 좋아질 수밖에 없고, 지금의 힘든 상황 때문에 일할 때 항상 더 열심히 하고, 항상 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벤처 투자를 시작하고 첫 10년은 너무나 좋은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VC 업무가 원래는 이렇게 힘들고 더러운 일 뒤치다꺼리 하는 게 아니라는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지만, 우리 회사의 20대 심사역들은 180도 다른 기본 사고 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VC 업무는 원래 힘들고, 투자하는 회사마다 거의 다 망하는 게 정상이라는 기본 사고가 깔려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면 – 하루에도 여러 개 – 직접 뒤에서 더러운 일을 하고, 똥을 치워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런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들이 나중에 스트롱의 파트너가 되거나, 다른 VC나 회사의 임원이 되면, 그땐 산전수전 다 겪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주 좋은 리더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시장, 작은 전략 vs. 큰 시장, 큰 전략

우린 매주 전체 투자팀이 모여서 현재 각자 보고 있는 회사, 같이 검토하고 있는 회사, 그리고 투자 결정을 해야 하는 회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큰 VC들과 같이 심각하고 딱딱한 투자위원회(IC: Investment Committee) 미팅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 우리의 IC 미팅과 결정도 다 한다. 우리 투자팀은 나를 포함해서 6명이다. 이 분야에서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고, 나이도 30대 후반 ~ 50대 초반의 투자팀원이 3명이고, 젊고 상대적으로 투자 경험이 적은 20대 투자팀원이 3명이다. 경험의 차이, 나이의 차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 남녀가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 등, 이 모든 것을 감안해보면 같은 회사와 창업팀에 대해서 각 투자팀원이 보고 느끼는 건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미팅은 다이나믹하고, 컬러풀하고, 재미있다. 모두 성숙한 어른이라서 개인적인 감정싸움으로 가지 않는 범위에서, 같은 사업과 창업가를 이렇게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고,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하면서, 하지만 동시에 나름 직설적이고 투명하게 개인의 생각과 의견을 팀 차원에서 공유하는 건 말 같이 쉽진 않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린 모두 다 더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투자자로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주간 미팅에서 하는 생각이나 발언을 보면, 내가 요새 선호하고 찾는 창업가는 뭔가 거창한 사업을 하겠다는 분들보단, 작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분들이다.

어떤 창업가는 처음부터 거창한 그림과 비전을 제공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엄청난 전략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이들은 처음부터 데카콘을 목표로 창업했고,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큰 포부가 있다. 이런 분들은 작은 사업엔 관심이 없다. 작은 사업을 목표로 했으면 굳이 이 힘든 여정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생각하는 모든 단위 자체가 너무 크다. 원하는 투자금도 크고,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지만, 원하는 밸류에이션도 너무 크다. 이런 분들과 미팅하면 재미있긴 한데, 현실성에 있어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이런 분들이 본인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면 데카콘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완전히 반대의 창업가들도 있다. 이들의 그림은 처음부터 매우 작다. 그림이 작기 때문에 비전이 작거나, 창업 당시에는 비전 자체가 없다. 그리고 뚜렷한 전략도 없다. 즉, 아주 작은 시장에서 아주 작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에게 그럼 이 사업이 아주 잘 됐을 때의 최종 목표나 비전에 대해서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냥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다음 문제를 해결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 과정에서 좋은 제품을 만들다 보면, 뭔가 더 큰 비전이나 그림이 보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나는 요샌 후자의 창업가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당장 존재하는 불편함과 문제를 지금 당장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금액으로 환산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TAM, SAM, SOM 등으로 나눠보면 아주 작다. 하지만, 거창한 비전을 세우고 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신기루에 갇혀서 꿈만 좇고 그 어떤 것도 실제로 만들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큰 시장과 큰 비전을 믿는 창업가들보단, 나는 작은 시장에서, 아주 작지만, 확실한 real problem을 해결하고 있는 사람들을 요샌 선호한다.

이런 마인드로 사업을 하다 보면, 아주 작은 시장 같아 보였던 문제가 생각보다 더 큰 시장이 되는 걸 많이 경험했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쌓이다 보면 아주 큰 문제를 잘 해결하는 것도 많이 봤기 때문이다.

뚝심

나도 몇 번 포스팅 한 적이 있고, 요새도 아주 가끔 읽는 사토시 나카모토의 비트코인 백서는 2008년 10월 31일 발행됐고, 비트코인 자체는 2009년에 이 세상에 처음 소개됐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당시 비트코인 가격은 0원이었다. 최초의 비트코인 랠리는 2010년 10월, 가격이 $0.10에서 $0.20으로 두 배 올라가면서 시작했고, 그 이후로 엄청난 up/down을 거쳤다.

<이미지 출처: Perplexity 검색 결과>

위의 차트는 비트코인 탄생 이후부터 지난주까지의 가격 변동을 보여주는데, 시간을 압축해서 15년을 하나의 차트로 보면 지속적인 우상향 그래프가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3개월이나 6개월 단위로 차트를 쪼개서 보면 그래프가 미친 듯이 위아래로 요동을 친다. 나는 2013년도부터 비트코인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됐고, 이때 코빗에 우리가 투자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비트코인과 다른 디지털자산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까지 소량의 비트코인을 꾸준히 사고 있다.

우리가 하는 초기 투자가 워낙 시간, 복리, 그리고 인내심의 함수라서 그런지, 그리고 내 성향 자체가 뭔가를 그냥 꾸준히 하는 편이라서 그런지, 나는 주식 투자도 사는 전략만 구사하지, 파는 전략을 실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상장 회사 주식도 몇 종류가 안 되는데, 이 주식 중 정말 오래 보유하고 있는 건, 24년째 보유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건, 이 주식은 중간에 한 번도 팔지 않고, 24년째 계속 사고만 있다.

비트코인도 나는 아마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long and hold 전략을 구사할 것 같다. 내가 비트코인을 보유했던 지난 11년 동안 수천만 명 ~ 수억 명의 사람들이 비트코인은 망할 거라고 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때마다 팔았고, 다시 반등하면 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을 샀다. 그럴 때마다 가격은 출렁거렸고, 정말 그때 순간순간을 생각해 보면 나도 인내심과 뚝심이 없었다면 아마도 어느 순간 모든 걸 다 팔았을 것이다. 실은 당시엔 이렇게 하고 싶은 유혹이 있었지만, 원칙이라고 하기엔 좀 개똥이지만, 내가 그동안 배우고 느낀 것들을 기반으로 세운 두 가지 원칙 때문에 계속 보유했고, 가격이 내려가면 오히려 좋은 자산을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더 샀다.

첫 번째 원칙은, 비트코인 자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처음엔 그냥 재미로 샀고, 그 이후엔 계속 가격이 올라가니까 욕심 때문에 추가 구매했다. 그 기간 나는 공부도 많이 했고, 관련 회사도 많이 만났고, 투자도 하면서 이 신기한 신기루 같은 코드로 만든 인터넷 돈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생겼다. 그래서 가격이 폭락하고 남들이 다 팔고, 이제 비트코인은 망했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릴 때 오히려 더 샀다. 워렌버핏의 “남이 욕심부릴 때 두려워하고, 남이 두려워할 때 욕심부려라.”라는 말을 워낙 좋아하기도 해서일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내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인생의 모든 좋은 것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여기엔 인내심, 시간, 복리, 꾸준함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현재 비트코인으로 돈을 번 것도 아니고 잃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팔지 않았기 때문에, 이익도 없고 손실도 없는 상태이다.

어쨌든 이런 여러 가지 고민, 욕심, 두려움, 인내심이 지난 11년 동안 소위 말하는 뚝심이 됐고, 이 뚝심은 비트코인뿐만 아니라 내 인생 모든 것에 적용되고 있다.

Tech 시장만 봐도 매번 이런 열풍이 불 때마다 우린 과한 버블을 목격한다. 비트코인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이후에 왔던 ICO, NFT, 메타버스 등, 모두 다 the next big thing을 꿈꾸면서 여기저기 옮겨 가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렇게 옮길 때마다 매번 하는 말은 “이건 좀 다르다. 이번엔 확실하다.”인데, 솔직히 이런 말 하는 사람치고 그 분야에 2년 이상 있는 사람을 못 봤다. 유행이 지나고, 투자자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가고, 쉽게 돈 벌 수 있는 분위기가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또 그 새로운 분야에서 얄팍한 지식을 쌓은 후에 마치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이게 next big thing이고, 이 분야에서 뼈를 묻을 것처럼 행동한다.

AI 시장에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요새 ‘AI’라는 단어가 안 들어간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다들 AI First 전략을 구사하고, 마치 반복적인 일을 하는 직업은 모두 다 바로 사라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말들을 한다. 과거에 반짝했다가 크게 안 된 메타버스나 NFT와는 좀 다르다고. 뭐가 다르냐고 물어보면 그냥 대부분 “이게 새로운 미래입니다.”라는 영혼 없는 답변들을 한다. 하지만, 역시 대중은 잘 속고, 인류 자체가 건망증의 연속인 것 같다. 모든 관심도 돈은 AI에 몰리고 있다. 나도 AI가 대단하고 이렇게 빨리 바뀌는 기술이 과거에 있었겠느냐는 경외심을 갖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것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과 사업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가 봤을 때, 유행 쫓기의 일인자들은 VC들이다. 뭔가 유행할 때마다, 이 분야의 전문가 행사를 하고, 이 특정 분야에만 투자하는 펀드를 만드는 사람들이 우리다. 이러다 보니 창업가들도 돈을 받기 위해서는 이 분야에서 창업하거나, 전혀 상관없는 사업을 이 분야랑 엮으려고 한다. 여기에 또 속아 넘어가는 투자자들이 있고, 어쨌든 이 역사는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지금 AI를 종교같이 믿고 있는 많은 분들 중 5년, 10년 뒤에도 이 믿음을 가진 분들이 몇 명이나 될까? 과연 이 세상에 뚝심이라는 건 존재할까?

그래도 아직 존재하는 것 같다. 결국엔 이런 사람들이 잘 되는 걸 나는 이제 목격하고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모든 좋은 건 오래 걸린다. Things Take Time.

작은 점

요새 창업가들에게 참 힘든 시기이다. 나도 이 블로그에서 좋지 않은 경기에 대해서 너무 오랫동안, 그리고 너무 많이 포스팅했고, 내가 이런 글을 쓰지 않아도 모든 창업가들과 투자자들은 지난 2년 동안 매일 직접 몸으로 이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나는 이 어려운 시기에 VC라는 업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이 업의 본질에 대해서 배우고 있어서, 힘들지만, 오히려 더 의미 있고 보람찬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무것도 모를 적엔, VC라는 업은 그냥 스타트업에 투자만 잘하면 되는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종류를 막론하고 좋은 투자 대상을 발굴해서 좋은 조건에 투자하는 것이다. 결국 여기서 모든 게 시작되니까.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배우면서 느끼는 건, VC라는 업의 진짜 본질은 투자한 회사가 어려울 때, 그 회사와 같이 싸우고, 경영진들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같이 찾는 것이라는 점이다. 실은, 투자하는 건 VC의 업무 중 가장 쉽고,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이 회사들이 망가지거나,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때 – 그리고 투자를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안다. 힘들지 않거나, 망가지지 않는 스타트업은 없다는 걸 – 같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노력하는 게 가장 어렵고, 오히려 더 중요한 VC의 업무라고 생각한다. 그 누구도 남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하고, 남이 건드리지 않는 똥을 치우고 싶진 않지만, VC의 본질은 바로 이런 일을 솔선수범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실은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이런 궂은일을 안 하려고 한다. 세월이 좋고, 회사가 잘 되면 모두 다 본인들이 잘 투자했고, 잘 관리했고, 그리고 그 회사를 “키웠다”라고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지만,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면 너도나도 모른척하고 도망가기에 바쁘다. 이게 사람의 습성이고, VC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투자사에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면 그냥 모른척하고, 미루고, 도망가고 싶지만, 이렇게 하는 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결국엔 우리 스스로 엄청나게 후회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냥 정면 돌파를 시도한다. 정면 돌파는 참 괴롭고 힘들지만, 하다 보면 문제가 잘 해결되는 운 좋은 경우도 있고, 잘 안되더라도 기분이 찜찜하진 않다.

회사의 대표도 이런 비장한 마음이고, 투자사이자 이사회 멤버인 우리도 비장한 마음으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는 아주 골치 아픈 이슈가 요새 하나 있다. 실은, 나도 이렇게 골치가 아픈데, 우리 투자사 대표는 오죽하겠나. 이분과 이런 회사 이야기를 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분도 요새 스트레스가 커서, 이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집에서 시간 날 때마다 지구본을 본다고 한다.

파란 구슬 같은 지구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 거대한 우주 속에 지구는 정말 작은 구슬 같은 존재이고, 이 작은 지구에서 본인은 정말 작은 점 같은 존재이고, 이 작은 점의 걱정과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건다고 한다. 이렇게 몇 번 지구본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위안을 하면, 그나마 불안이 조금 사라지면서 다시 지옥 같은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고 한다.

이후에 나도 불안과 스트레스가 너무 크면, 지구본을 보면서 “나는 이 지구상에 점과 같은 존재다. 점과 같은 존재가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몇 번 해봤는데, 솔직히 나한테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다. 불안, 스트레스, 그리고 고민의 크기는 상대적이고,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우리 모두 매 순간 우리만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우크라이나랑 중동에선 매일 사람들이 죽고 있고, 그 사람들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비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걱정하냐?”라고 물어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 나한테 닥친 고민이 세상에서 제일 큰 고민거리고, 내가 싸워야 하는 나만의 생사가 걸린 전쟁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 한, 큰 세상의 작은 점 하나가 겪는 더 작은 시련이라는 관점에서 나의 불안을 바라보는 건 스트레스 완화를 위한 괜찮은 방법의 하나인 것 같다. 계속 연습하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워야 한다.

한국 제품

우리가 투자를 시작한 게 2012년인데, 이때부터 ‘한류’라는 말이 있었고, 한국인과 한국 제품이 드디어 한국을 벗어나서 세계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고 이야기했었다. “Taking Korea global”이라는 말을 지난 10년 동안 너도나도 했지만, 솔직히 지금까진 말만큼 멋지게 실현되진 않았다. “지금까진.”

작년, 그리고 올해 내내 미국, 유럽, 동남아, 일본을 여러 번 다니면서 내가 확실히 느낀 건, 이제 정말로 한국이 세계 시장으로 아주 자신 있게 나갈 수 있는 시점이 됐다는 점이다. 전에 ‘제2의 한류’라는 말을 내가 했는데, 이제 한국은 전 세계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global cultural force가 됐다. 인류 역사상 전 세계의 문화에 영향을 주는 cultural force가 된 국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했고, 그 기간 더 발전해서 더 강대국이 된 사례가 매우 많다. 나는 한국이 이런 기운과 기회를 잘 활용해서 비록 땅덩어리는 작고 인구도 작지만, 엄청나게 잘 살고,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는 초강대국이 되길 바란다.

한국이 global cultural force가 되면서 한국의 창업가들에겐 좋은 기회가 생기고 있고, 이들을 지원하는 우리 같은 VC에게도 큰 기회가 생기고 있다. 최근에 미국을 2주 정도 돌아다녔는데, 어디 가나 한국 브랜드와 제품이 인기가 많다는 걸 직접 실감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작은 시골 도시에 가도 한국 음악, 드라마, 화장품, 음식, 그리고 자동차에 대한 인기와 관심이 너무 많았는데, 이게 참 놀라웠다. “한국이 어떻게 이렇게 인기 있는 나라가 됐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여러 번 할 정도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도 참 신기한 게, 전 세계 8,000만 명만 하는 비주류 언어인 한국어로 평생 책을 쓴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건, 한국과 한국어가 대단한 global cultural force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왜 이렇게 한국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 브랜드를 이렇게 잘 만들까? 나는 이게 한국의 DNA에 깊게 박혀 있는 경쟁과 생존본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아주 작은 나라다. 이 작은 나라에서 5,000만 명이 다닥다닥 붙어 살면서 남들보다 더 성공하기 위해 정말 빡세게 경쟁한다. 가끔 이 과한 경쟁의식이 부정적인 결과를 만들지만, 어쨌든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고, 가장 치열하게 살고, 가장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국가이다. 좋든 싫든, 이건 우리의 타고난 기질이자 환경이다.

이렇게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 만들어졌고, 이 치열한 시장에서 팔리고 있고,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좋은 제품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잘 되는 제품이 미국과 같은 해외 시장으로 진출하면, 기본적으로 잘 될 가능성이 높다. 엄청 까다롭고, 엄청 치열하고, 엄청나게 경쟁하고, 동시에 엄청나게 잘 사는 소비자들이 많은 한국 시장에서 팔린다면, 제품 자체는 이미 입증된 것이다. 소비자들은 지갑으로 투표하는데, 지갑으로 투표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품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모든 한국의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대박 나지 않나? 왜 일부만 잘 되고, 대부분 실패하는가?
어떤 제품과 회사는 한국에서 증명되기도 전에 너무 일찍 해외 진출을 시도하는데, 제품도 준비가 덜 됐고, 이 덜 준비된 제품을 마케팅하고 판매할 사람들도 준비가 덜 된 경우가 많다. 이런 회사는 미국 시장에서 백전백패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에서 품질이 증명된 제품도 미국 시장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globalization의 어려움이 작용하는 것이다. 제품은 좋지만, 이걸 다른 시장의 다른 소비자들에게 홍보하고 판매하기 위해서는 미세 조정을 많이 해야 하는데, 미국 시장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이 미세 조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잘 못 잡는다. 이 미세조정에 수백억 원 또는 수천억 원을 투자하고, 결국엔 미국 시장에서 철수한 한국 회사들도 너무 많은 걸 보면, 이게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번에 미국 시장에서 봤던 가능성은, 위에서 말했듯이 Korea라는 나라의 이미지 자체가 너무 좋아지고, 동시에 global cultural force가 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제품과 브랜드가 미국 시장에서 거쳐야 하는 미세조정의 폭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제품은 포장지에 한글이 그대로 적혔는데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말만 많고 결과는 별로였던 “Taking Korea global”. 이제 정말 그 타이밍이 온 것 같다. 제2의 한류를 타고 더 많은 한국 회사와 제품이 해외 시장을 – 특히 북미 시장 – 쓰나미같이 강타해서 글로벌 무대를 찢어버리는 이 움직임에 스트롱도 큰 기여를 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