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바이블 QA

세상의 모든 큰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한인이 창업했고, 창업 5년 만에 한화로 거의 1조 원에 인수된 화장품 회사 Hero Cosmetics(Hero)의 팟캐스트를 얼마 전에 흥미롭게 들었다. 창업가들의 이야기는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항상 배울 점들이 많아서 재미있고, 한국에 사는 분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여드름 패치 하나로 시작해서 1조 원짜리 회사를 만들어서 Church and Dwight에 매각한 이야기도 웬만한 케이드라마보다 더 흥미로웠다.

이 팟캐스트를 며칠에 걸쳐 아침에 운동하면서 계속 들었는데, 그 기간 우리 투자사 대표와 미팅하면서, 이분이 하는 사업은 화장품 분야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Hero가 고민하고 거쳐 온 과정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나름대로 고민의 공통점들을 찾고 해답도 같이 찾는 이야기를 꽤 많이 했다.

Hero는 Mighty Patch라는 여드름 패치 제품 하나로 시작했고, 한국에서 만든 이 제품을 온, 오프라인 상점에서 팔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지나서 이 카테고리에서는 거의 1등 제품이 됐다. 1등 제품이긴 했지만, 없던 시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일단 시장 자체가 작았고, 투자도 받고 사람도 더 고용하기 위해서 회사는 계속 성장을 해야 했다. 여기서 Hero의 창업가들은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해서 여드름 패치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반 화장품 분야로 확장하는 고민을 했다. 어차피 큰 카테고리로 보면 모두 다 화장품과 뷰티 분야였고, 다른 화장품도 한국의 공장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제조사 소싱도 용이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는 일반 화장품/뷰티 쪽으로 확장하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성장 공식이라서 여드름 패치 판매 시작 1년 후에 이런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일단 여드름 패치 분야에만 당분간 집중하는 것이었다. 여드름 패치 분야에서 더 많은,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판매해서 아예 다른 경쟁사들이 넘보지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1등이 되고, 미국에서 말하는 소위 category dominator가 된 후에 다른 화장품 분야로 확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같은 여드름 패치를 다양한 색상, 다양한 용도, 그리고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서 SKU를 다각화했고, 판매 채널 또한 온, 오프라인 모든 곳으로 확장했다. 이렇게 한 결과, 여드름 패치로만 연 매출 수백억 원대를 달성할 수 있었고, 이 정도의 매출을 하니 이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1등이 됐고, 이 category dominator 해자(垓字)를 구축한 후에 다른 화장품 분야로 조금은 더 수월하고 편하게 진출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우리 투자사 대표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꽤 많은 창업가들이 이런 고민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아주 힘들게 한 분야를 열심히 팠고,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반을 닦아 놓으니, 이 분야에서 돈을 내는 고객도 생기고, 아주 빠르진 않지만, 고객에게 서서히 입소문이 나면서 어느 순간 이 분야에서 꽤 알아주는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된 경우를 우린 자주 본다. 그런데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시장보다 훨씬 더 큰 수천억 원 ~ 수조 원짜리 시장에서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서, 완전히 다른 시장, 또는 같은 시장에서 다른 카테고리를 계속 기웃거리는 창업가들이 꽤 많다.

이분들에게 내가 주로 하는 조언은 항상 비슷하다. Hero의 전략으로 가라고 한다. 즉, 내가 시작한 분야가 아무리 작아도, 고객이 존재하고, 우리가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어서 알만한 사람들은 이미 아는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면, 일단 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해서 category leader를 넘어선 category dominator가 되라고 조언한다. 그 이후에 다른 곳으로 확장하라고 한다.

예를 들며, 내가 지금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기반을 잘 닦아 놓은 시장의 전체 크기가 100억 원이라면, 일단 이 시장에서 최소 30억 원의 매출을 해서 시장의 30%를 장악하라는 뜻이다. 한 시장의 30%를 장악하면 그 시장의 확실한 category dominator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꽤 재미있는 건, 이런 고민을 하는 대표들이 대부분 그 100억 원짜리 시장은 항상 너무 작다고 하면서도, 막상 본인들은 이 작은 시장에서 매출 1억 원도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들에게 일단 우리가 만들어 놓은 시장에서 작은 것부터 야금야금 먹자고 한다. 시장에서 압도적인 1등이 된 후에 다른 시장으로 진출하는 게 여러모로 봤을 때 훨씬 더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Hero와 같이 현재 시장에서, 현재 제품을 조금 더 다각화할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 보라는 조언을 한다. 전에도 한 번 내가 포스팅 한 적이 있는데, 일단 따기 쉬운 과일을 먼저 따먹는 전략이다.

이런 조언을 열심히 해도, 두 마리의 토끼를 쫓거나, 아니면 우리 토끼보다 더 큰 다른 토끼를 쫓는 창업가들이 더 많다. 누가 맞고 틀렸다는 문제는 아니라서, 더 큰 카테고리로 지금 당장 진출하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했을 때 조심해야 할 점은,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 둘 다 놓칠 수도 있고, 더 큰 토끼를 쫓아서 힘들게 잡았는데 막상 보면 엉덩이면 커서 뒤에서만 봤을 때 큰 토끼일 가능성도 있고, 실은 내가 지금 잡고 있는 토끼가 나중에 엄청나게 커질 수 있는데 다른 토끼를 쫓다가 내 토끼를 다른 회사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무모한 전략을 계속 고집하는지 물어보면, 대부분의 창업가들은 더 짧은 기간에 더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고 한다. 이분들에게 내가 한결같이 다시 해주는 조언은 세상의 모든 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100만 원 매출이 1,000만 원이 되고, 1,000만 원이 1억이 되고, 이런 느린 사이클을 타면서 언젠간 1조 원 매출이 된다. 한 번에 1,000억씩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혹시 있다면 나한테 DM 부탁한다. 그땐 내가 VC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

고객에게 미친 사람들

창업하려면 약간 미쳐야 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해 보면, 이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키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은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키기 때문에, 모든 변화와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환경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고 하는 것 차제가 약간 미친 짓이고, 미치지 않으면 그냥 세상에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살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길로만 다닌다는 것인데, 내가 아는 창업가들은 대부분 비이성적이라서, 본인들이 만든 길에 세상을 적응시키려고 한다.

우리 투자사 대표들도 모두 다 약간 미쳐 있는데, 나는 이분들에게 이왕 미치려면, 다른 곳에 미치지 말고 일단 고객에게 미치라고 한다. 영어로 하면 being crazy about customers이다. 부정적인 게 아닌, 아주 좋은 의미에서 미치라는 의미인데, 항상 고객의 목소리, 의견, 행동, 그리고 시장의 신호를 예의주시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냥 예의주시만 하는 게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게 있다면, 그리고 그 요구가 우리가 봐도 합당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무조건 제공하고 만족시켜 주라는 의미다.

우리가 지금까지 280개 정도의 한국과 미국 회사에 투자했는데, 이 많은 회사 중 고객의 목소리에 집착하는 팀은 10개 남짓한 것 같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 포트폴리오 중 5%가 안 되는 작은 숫자다. 재미있는 건, 대부분의 나머지 회사들도 우리랑 미팅 할 땐, 모두 다 고객에게 집착하고, 고객에게 미쳐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외부에서 본인들도 그렇게 홍보하고 다닌다. 그런데 현실은 대부분의 회사들이 고객에게 집착하는 대신, 다른 곳에 더 많은 신경을 쓴다. 어떤 대표는 경쟁사에 미쳐있다. 24시간 경쟁사의 동향에만 집중하고, 경쟁사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한다. 어떤 대표는 PR에 집착한다. 어떤 대표는 펀딩에만 집착한다. 펀딩, PR, 경쟁사, 실은 모두 다 중요하지만, 고객 없는 비즈니스는 존재할 수 없고, 고객이 지갑을 닫거나, 우리를 멀리하는 그 순간 사업은 죽기 시작하기 때문에 모든 스타트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고객에게 미쳐 있어야 한다.

고객에게 집착하는 회사들은 주로 product-driven 회사들이다. 하루 24시간 고객들의 목소리를 듣고, 이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서 제공해 주려면, 정말로 좋은 제품을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들은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고객에게 미쳐 있는 만큼 본인들이 만드는 제품에 미쳐 있다. 벤치마킹할 수 있는 외국 제품이 있다면, 이 제품을 1에서 100까지 전부 다 써보고, 전부 다 분석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고객이 새로운 요구를 할 때마다, 배운 것을 응용해서 제품을 업데이트한다. 그러므로 고객에게 미친 팀은 하루에도 여러 번 제품을 업데이트한다. 이건 이들이 뭔가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완벽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의지가 제품 업데이트로 표출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고객에게 제대로 미치려면, 개발력이 압도적으로 좋아야 한다.

고객에게 집착하는 회사들은 고객 응대(CS: Customer Support)도 너무 잘 한다. 고객의 전화, 이메일, 카톡, 문자, 심지어 회사로 방문까지, 모든 소통 채널을 열어 놓고 24시간 고객과 대화한다. 고객에게 미쳐 있는 회사는 전 직원이 번갈아 가면서 고객 응대를 하는데, 운영팀이든 개발팀이든, 고객의 요구라면 그 어떤 시간에도 즉각 응대할 수 있는 ‘5분 대기조’ 마인드가 전사적으로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우리 투자사 중 고객에 미친 회사치고, 잘 안되는 회사가 별로 없다. 반대로, 정말 잘 되는 회사는 그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고객에게 미쳐있다. 고객에게 집착하지 못하는 회사는 고객이 지갑을 여는 제품을 만들 수 없고, 이게 안 되면 회사는 절대로 커지지 못한다.

The Startup Bible – 2024 정리

해마다 12월 마지막 주에는 한 해 동안 쓴 글에 대해 정리하는데, 2024년도 이제 거의 다 끝나서 이 블로그의 한 해를 정리해 본다.

이 글을 포함, 2024년에 난 98개의 글을 올렸는데, 이는 3.7일에 한 번씩 포스팅을 한 셈이다. 매주 월요일, 그리고 목요일 포스팅을 하니까, 포스팅 수치는 거의 같다. 긴 휴가를 가거나, 월요일과 목요일이 공휴일이면, 새 글을 잘 안 쓰기 때문에 약간의 차이는 날 수 있다. 98개의 포스팅을 읽기 위해서 The Startup Bible 블로그를 방문한 분은 오늘을 기준으로 총 131,494명이다. 월평균 10,957명, 하루 평균 360 명이 방문한 셈이다. 작년 대비 11%정도 트래픽이 증가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냥 더 많이 읽히는 글을 포스팅하면, 더 많이 공유되어 자연스럽게 많은 트래픽이 유입되는 것 같다. 가끔 예상치 못하게 많이 읽히고 공유되는 글이 올라오면, 일 트래픽이 5,000까지 뛰는 걸 봤다. 올해도 바빠서 더 자주 포스팅할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매일 글을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더 긴 글을 쓸지 생각해 본 적도 있는데, 이건 시간과 여유의 문제라기 보단, 내 스타일의 문제라서, 나는 그냥 비교적 짧은 글을 내 페이스에 맞춰서 계속 올릴 계획이다.

2024년도에 가장 많이 읽힌 Top 10 글은 다음과 같다:

1/ 개발자도 회사의 조직원이다
난 이 글이 이렇게 많은 댓글을 기록하고, 스타트업 업계에 이렇게 큰 센세이션을 일으킬 줄 상상도 못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개발자들을 싸잡아서 욕할 의도는 전혀 없었고, 겉으로 보면 회사에서 돈 버는 기능과 가장 먼 곳에 있는 개발팀과 개발자들을 일례로 든 포스팅이다.

2/ 회사는 놀이터가 아니다
1번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과 댓글을 보고, 이에 대한 내 생각을 추가로 설명한 글인데, 역시 이 글도 꽤 격하고 극단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참고로, 회사 와서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위한 일을 하다가 집에 가는 사람들은 월급 받을 자격이 없다는 내 생각은 변함없다.

3/ 작은 시장, 작은 사람들, 큰 결과
우리가 오래전에 투자한 LA의 한인 창업 B2B SaaS 스타트업 AuditBoard의 드라마 같은 창업 이야기, 성장기, 그리고 exit 이야기. 난 아직도 이 회사의 엑싯이 현실 같지가 않다. TTT(=Things Take Time).

4/ 워라밸은 없다
요새 내 주변 스타트업 창업가들이나 직원들 보면 정말 일 열심히 안 한다. 오후 6시 이후에 아직도 불이 켜진 스타트업을 요새 유니콘이라 할 정도로 너무 일들을 안 한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워라밸을 외치는 이 현실이 정말 불만인데, 이 불만을 토로한 글이다.

5/ 월급쟁이 VC
최근에 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한캐피탈 vs. 어반베이스 사건 때문에 영감을 받아서 쓴 글이지만, 이 글의 결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투자자들에 대한 내용이다.

6/ 제2의 한류
우리가 올 한 해 해외 투자자들에게 가장 많이 강조했던 표현이 바로 “The Second Korean Wave(제2의 한류)”이다. 그만큼 한국이 자랑스럽고, 한국이 전 세계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cultural force가 됐다는 너무나 자랑스러운 현실이다. 하지만, 이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조속히 해결되길 바란다. 걱정되고, 부끄럽고, 하여튼 여러모로 좀 그렇다.

7/ 벌이는 놈, 말리는 놈, 치우는 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상적인 창업팀의 구성. 일을 벌이는 놈이 있어야 하고, 이놈을 말리는 놈도 필요하고, 결국 일을 벌이면, 이 일을 뒤에서 잘 치우는 놈이 있어야 한다. 이런 세 명으로 만들어진 창업팀은 상당히 오래 가더라.

8/ 개 같이 일하기
4번의 ‘워라밸은 없다’와 일맥상통하는 포스팅이다. 스타트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똑똑하게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고, 개 같이 일하지 않으면 개 같이 실패할 것이다.

9/ 스타트업의 지분 할당
참 신기한 게, 이 글은 2023년도에는 가장 많이 읽혔던 No.1 포스팅이다. 솔직히 글을 쓴 사람인 나에게 물어보면, 이 글은 그냥 특색 없는 평범한 글이다. 그런데 많이 읽힌 걸 보면, 회사가 성장하면서 어떤 인재를 영입해야 하고, 이들을 채용할 때 스톡옵션이나 회사의 지분을 어떻게 부여하는 게 최선의 방법인지 고민하는 창업가들이 많다는 긍정적인 신호인 것 같다.

10/ 헛똑똑이들
매주 화요일마다 하는 우리 내부 전체 회의를 하면서 느꼈던 생각을 짧게 정리해 본 글. 너무 많은 VC들이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헛똑똑이 치장과 분장에만 집중한다.

이상 2024년에 가장 많이 읽힌 글 10개였다. 2023년과 2024년 탑텐 글을 비교해 보면, 겹치는 글이 딱 한 개밖에 없는데, 몇 년 전만 해도 해마다 겹치는 글이 5개 이상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그땐 좋았던 글이 지금은 아닐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사람들의 취향이 이젠 너무 최신 것만 선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올해도 이렇게 1년 동안 쓴 글들을 분석하면서 스타트업 바이블의 2024년을 마무리해 본다.

Happy New Year everyone!

다시 성장모드로

2022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약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부분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이 2년은 인생 최악의 지옥 같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투자를 시작한 게 2012년인데, 이후 세계 경제는 나쁘지 않았고, 아주 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대부분의 투자자는 실적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 돈이 충분히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실적이 나오고 성장 가능성이 증명되면 지속적으로 후속 투자를 받는 게 가능했던, 영어로 말하면 the good old days였다. 이 기간에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수익성보단 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엄청난 손실을 감행하면서도 성장에 집중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계속 투자를 받아서 성장할 수 있었고, 그렇게 이상하게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이 사업은 시장에서 일등이 될 수 있었고, 그 이후엔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 분위기가 완전히 180도 바뀌면서 그동안 성장에 초점을 맞췄던 모든 창업가는 돈을 버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냥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를 줄이면서 건강하게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면서 잠시 성장이라는 페달에서 발을 놓았다. 돈이 없는 회사는 사람을 해고하면서 그냥 런웨이를 늘리면서 생존하는 쪽으로 회사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VC들도 태도를 180도 바꾸면서 비즈니스의 성장보단 건강, 그리고 성장보단 생존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기가 좋을 때나 안 좋을 때나 어느 정도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호경기일 때도 성장에만 너무 집중하지 말고 제대로 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결국 사업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걸 강조했고, 지난 2년 불경기 동안에는 성장은 안 해도 된다고 하고 일단 돈 까먹지 말고 핵심 KPI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걸 강조했다. 이렇게 해도 우리의 많은 투자사들이 그동안 사라졌고, 사라지지 않은 회사들도 엄청 힘든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다.

하지만, 이 힘든 과정을 잘 견디면서 버텼던 몇몇 회사들엔 다시 한번 재도약과 성장의 기회가 오고 있다. 그동안 어떤 창업가들은 돈을 제대로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고, 이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데 집중해서 오히려 우리가 투자했을 때보다 더 견고하고 건강한 사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어떤 창업가들은 그냥 열심히 버티다 보니, 그동안 경쟁사들이 다 망해서 어쨌든 그 분야에서 상위권에 드는 회사가 됐다.

내년에는 시장의 상황이 어떻게 될진 잘 모르지만, 그동안 2년 넘게 숨만 고르고 내실을 다지던 창업가들은 이제 다시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창업가분들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던지는 주제가 그동안 돈을 버는 사업의 모습을 잘 만들어놨으니, 이젠 다시 한번 가속 페달을 밟아서 성장 모드로 전환해보자는 내용이다. 사업의 본질은 돈을 버는 것인데 이제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은 어느 정도 준비가 됐고, 스타트업은 결국 짧은 기간 안에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우리 투자사 대표님 몇 분과 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 명확하게 갈리는 게 재미있었다.
한 부류는 안 그래도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제 다시 가속 페달을 밟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다시 펀딩도 알아보고, 사람도 더 채용하고, 외부 활동도 조금씩 하면서 그동안 웬만하면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았는데, 이제 일을 좀 벌여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거의 매달 조금이라도 흑자를 만들었는데, 이젠 성장에 집중할 것이라서 (제어 가능한)마이너스가 조금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를 했다.
다른 부류는 그동안 성장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했고,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뗀 지 너무 오래돼서 다시 성장 모드로 스위치 하는 게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우려를 표시했다. 이들에겐 다시 투자를 받고, 사람을 충원하고, 마케팅 비용을 쓰고, 새로운 사업을 벌이는 게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됐고, 성장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워진 것 같다.

나는 작년 말에 2024년 경기가 조금 좋아질 거로 예측했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제 금리도 조금씩 내려가고, 상장 시장도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내년에는 그나마 올해 보단 나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게 맞다면, 그동안 아주 조용히 내실만 다지던 많은 창업가 분들이 이제 다시 재도약과 성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텐데, 다시 성장모드로 전환하려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준비 과정에서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안 쓰던 성장 근육을 잘 스트레칭하고 다듬기를 바란다. 아무래도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남의 의견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올렸는데, 이 글에서 말 한 내 잠을 설치게 하는 고민 두 가지 중, 잡음을 잘 구분하고 남의 목소리가 아닌 내 목소리에 집중하자는 내용은 내가 요새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고민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정말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나 같이 남의 눈치 잘 안 보고, 남의 의견이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가끔은 내가 뭔가를 하거나 말할 때 “이거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사회적 분위기가 가는 곳마다 아주 두껍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요새 의식적으로 남의 시선과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내 생각, 감, 의견에 100% 의존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남의 의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고, 정말로 경청해야 할 남의 의견과 조언만 듣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솔직히 이런 의견은 소수의 몇 명만 제공할 수 있다. 이 소수의 몇 명은, 본인들이 나에게 주는 조언, 충고, 그리고 의견의 결과에 직접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고 본인들도 그 결과에 대해서 직접 책임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외의 다른 의견은 안 들으려고 노력하고, 꼭 들어야 한다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바로 흘리는 노력을 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뭘,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사냐고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 텐데,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살아야 한다. 내 시간은 소중하니까. 그리고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니까.

조금 다르지만,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본인이 직접 창업하지 않았거나, 현재 적을 두고 있지 않은 회사를 비정기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advisor’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요새 우리 주변에 ‘고문’ , ‘ advisor’라는 명함을 갖고 다니는 분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때 이런 분들은 본인들의 조언에 대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고, 여기에 크게 영향도 안 받는 분들이다. 왜 이런 분들에게 굳이 과한 비용을 지급하거나 돈보다 더 귀한 회사의 지분을 주면서 조언을 받는지 회사 대표들에게 물어봤다. 어차피 풀타임도 아니고, 파트타임 중에서도 슈퍼 파트타임 – 우리 회사를 포함해서 많은 회사의 어드바이저를 하고 있다 –  이고, 솔직히 우리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야에서 오래 일을 했더라도 그건 오래전 일이고, 같은 분야에 있는 회사라도 우리 회사랑 다른 회사랑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어차피 이전 경험을 재활용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내가 듣는 대답은, “이분들의 의견이 듣고 싶어서요. 나보다 이 분야의 경험이 많고 네트워크가 좋아서,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이분들의 조언이 값질 것 같아서요.”이다. 이런 대표들은 이게 정말 맞는 건지 잘 판단하길 바란다.

우리는 살면서 계속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날지 말지, 점심 식사는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부터, 100억 원 짜리 거래를 할지말지까지, 실은 우리 인생 자체가 연속적인 결정의 집합체이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셀 수 없는 결정의 결과를 뒤돌아보면, 안타깝게도 옳은 결정보다 틀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어차피 틀린 결정을 훨씬 더 많이 할 텐데, 남의 의견을 참고해서 틀린 결정을 하기보단, 그냥 내가 스스로 결정해서 틀리는 게 훨씬 더 값진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남의 의견이나 조언을 절대로 듣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잘 판단해서 이 중 잡음을 구분하라는 의미인데, 잘 생각해 보면 남의 의견 중 대부분은 잡음이다. 중요한 결정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거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다. 결국엔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오롯이 내 의견만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