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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search-1756278_640나는 전화 통화하는 걸 정말 싫어한다. 특히 남이 나한테 전화하는 게 정말 싫다. 그리고 나도 누구한테 전화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런데, 문자나 이메일보다 전화하는 걸 가장 선호하는 상황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뭔가를 사용하다가 잘 안 되거나 문제가 발생해서, 급하게 당장 도움이 필요할 때이다. 미국에서는 이렇게 전화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데, 특정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궁금한 게 있거나, 아니면 뭐가 잘 작동하지 않더라도, 전화를 걸어서 물어볼 수 있는 고객 응대용 전화번호가 아예 제공되지 않거나 찾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냥 바로 전화를 거는 습관이 생겼다. 웬만한 서비스는 고객 응대 전화번호를 제공하고, 회사 웹사이트 하단에 보면 고객이 전화할 수 있는 번호가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전화통화하는게 싫어도, 내가 아쉽고 답답하고, 이메일이나 카톡으로 문의하면 답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그냥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곤 한다. 어떤 회사는 기계 ARS를 몇 단계 거쳐야 하지만, 그래도 미국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실제 사람과 연결이 돼서 불만을 토론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고객 입장에서는 편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이게 악몽이다. 한두 명이 사용하는 서비스면 상관없지만, 하루에 수천 명, 수 만 명이 사용하는 서비스라면, 수백 통의 전화가 걸려 올 수도 있고, 이로 인해서 발생하는 회사의 비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리고 직접 당해보거나, 아니면 직접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이런 고객서비스 관련 통화는 서로에게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고객서비스를 하는 인력의 이탈과 교체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비용 또한 무시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작은 스타트업은 대표이사부터 디자이너까지, 고객의 – 또는, 고객이 아닌 사람들 – 전화응대를 하는 데 업무시간의 절반을 쓰는데, 정말 힘들어한다.

그냥 CS 전화번호를 제공하지 말고, 미국 회사들처럼 이메일로만 문의하게 하거나, 아니면 굉장히 자세하고 잘 만들어진 FAQ(Frequently Asked Questions: 자주묻는질문)를 제공해보라고 하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대표님이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한국 사람들은 성질이 급해서 전화번호 없으면 엄청 화내요.” , “한국 사람들은 이메일을 안 해요.” , 뭐 이런 말들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별로 근거 없는 말들이고, 회사에 오히려 해가 되는 고정관념인 거 같다. 한국 사람들만 급한 게 아니고, 화가 많이 나서 당장 뭔가 필요한 고객은 누구나 다 성질이 급하기 때문에 이건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회사에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이들에게 제공해주면 회사 차원에서는 – 특히, 자원이 부족한 작은 스타트업 – 정말 많은 준비를 하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전화를 걸어서 반대편에 있는 실제 사람과 통화를 해서 본인이 원하는 걸 즉각적으로 물어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한번 익숙해지면, 이보다 더 불편한 카톡이나 이메일이나 FAQ를 통한 문제해결 방법을 대안으로 제안받으면 당연히 싫어하고 욕할 것이다.

미국 스타트업은 아주 잘 만든 FAQ를 제공해주고, 사용자들도 이 방법에 꽤 익숙해져 있는데, 정말 잘 만든 FAQ는 전화를 걸어서 누구랑 통화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걸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워낙 많은 서비스가 존재하지만, 내가 최근에 FAQ를 가장 잘 사용했던 제품/서비스는 미국의 Coinbase이다. 돈과 암호화폐 관련 서비스라서 실은 문제도 많이 발생하고, 궁금한 점도 정말 많지만, 코인베이스는 그동안 쌓인 노하우와 고객의 질문을 잘 취합해서 상당히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FAQ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해결책을 즉각 즉각 구할 수 있었다. FAQ에 내가 원하는 답이 없으면 support 이메일을 통해서 문의하면, 주로 48시간 내로 답이 온다. 한국 사람은 급해서 48시간 못 기다린다고 많은 대표들이 나한테 말을 하지만, 정말로 급하다면, 48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다. 이건 고객을 우리가 어떻게 처음부터 훈련하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서비스를 시작하는 스타트업이라면, 처음부터 고객이 회사에 직접 전화할 수 있는 채널 자체를 원천 봉쇄하고, 대신에 아주 포괄적이고 잘 정리된 FAQ를 제공하라고 나는 조언한다. 카톡을 통한 문의도 가급적이면 업무에 방해가 되니까 초반에는 아예 제공하지 않는 게 좋다. FAQ와 고객지원 이메일 정도만 제공하는 게 가장 좋다. 이미 070 번호나 1688 번호를 통해서 고객이 회사와 직접 통화할 방법을 제공하는 스타트업이라면, 서서히 또는 즉각 이 번호를 없애고 FAQ를 잘 만들어서 제공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처음에는 고객 불만이 발생하겠지만, 금방 잊히고 고객들도 익숙해진다. 실제로 우리 투자사 중 이렇게 아예 고객 응대 전화번호를 없앤 회사들이 있는데, 회사의 실적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실은, 더 좋아진다. 대신, FAQ를 제공하기로 결정했으면, 정말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허접한 FAQ를 제공할 바에는 그냥 전화번호를 제공해서 몸으로 때우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하다.

물론, 나중에 회사가 엄청나게 커지면 별도의 CS 조직을 내부 또는 외부에 두면 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고팍스

우리는 2013년도에 한국 최초의 암호화폐거래소 코빗에 첫 투자를 했다. 스트롱과 비트코인/암호화폐 하면,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한국에서 최초로 비트코인 거래소에 투자한 VC”인데, 우리가 코빗에 투자할 때는 약간 이상하고 정신 나간 투자자 취급을 받았지만, 이후 시장이 생기고, 미친 듯이 과열되고, 그리고 4년 뒤에 넥슨이 코빗을 인수하면서, 이 분야를 잘 아는 VC로 인식이 바뀐 거 같다. 우린 비트코인이 잘되면 큰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코빗 팀이 좋아서 투자했고, 이후에는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다. 타이밍도 당연히 좋았다.

내가 버릇처럼 말하지만, 암호화폐를 나한테 소개해줬고, 이 분야에 대한 내 시각을 넓혀준 코빗에 나는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코빗에 투자하면서 나는 이 분야에 대해서 계속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고, 그동안 이상한 ICO들이 너무 많이 생기면서 시장이 과열되기도 해서, 관심의 수준은 조금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허상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 중 하나가 제대로 된 거래소라고 생각한다. 이 시장의 게이트웨이이자 문고리 역할을 하는 게 거래소이기 때문에, 최신 소식을 접하려면 거래소와 항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우리는 코빗을 완전히 엑싯한 후에, 다른 거래소에 투자하고 싶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거래소야말로 이 시장의 모든 이해관계자가 모이는 교차로이며, 스트롱도 계속 블록체인/암호화폐 쪽에 투자하려면, 거래소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에는 아직도 200개가 넘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존재한다고 한다. 이 중 우리랑 철학과 결이 가장 잘 맞는 팀에 투자하고 싶었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고팍스를 운영하는 스트리미가 가장 맘에 들었다. 실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게 아니라, 투자하고 싶었던 유일한 거래소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다. 이 시장에 대한 믿음이 있고, 거래소에 투자를 해야겠다면, 다른 곳은 고려할 필요도 없고 고팍스에 투자하자는 믿음은 존이랑 나랑 아주 일치했다.

얼마 전에 고팍스 투자 소식이 기사화됐다. 항상 강조하지만, 투자 받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하지만, 거래소에 대한 믿음이 계속 하락하고 있는 이 시점에, 국내외의 좋은 투자자들로부터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된다.

Handshake와 도메인 네임

웹사이트 도메인 네임을 구매해본 경험이 있다면, DNS(Domain Name System)라는 단어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만약에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 블로그에 접속하기 위해서 브라우저에서 thestartupbible.com을 입력했을 텐데, 브라우저는 영문으로 된 thestartupbible.com을 DNS라는 컴퓨터 네트워크로 보내고, DNS는 이 웹사이트 이름을 숫자로 된 IP 주소로 바꾼다. 이 숫자가 마치 주소와 전화번호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 IP 주소를 기반으로 복잡한 인터넷 네트워크에 있는 thestartupbible.com 서버를 브라우저가 찾는 것이다. 실은 이 IP 주소는 아무도 안 외우고, 대부분 관심이 없다. 그냥 브라우저 하나 열어서 가고 싶은 웹사이트 이름을 치면, 그 이후에 브라우저 뒤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관심이 별로 없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터넷의 주소와 이름을 정하는 이 중앙통제된 방법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누군가 이 시스템을 공격하거나, 아니면 정부가 인터넷을 통제하고 검열하기로 마음먹는다면, 한 단체 또는 한 회사만 통제하면 우리 모두의 free internet이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DNS에 대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단체는 LA에 있는 ICANN(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이다. 이 단체가 하는 일은 DNS 서버 네트워크의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DNS 루트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감독하고, .com, .org, .net, 그리고 한국의 경우 .kr과 같은 국가 코드를 할당하는 것이다. 나도 전에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ICANN과 같은 단일 기관이 DNS 루트를 감독하고 도메인 이름을 할당하는 막강한 권력을 갖는다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오래전부터 내왔다. 예를 들면, 미국 정부가 ICANN에 압박을 가해서 DNS에서 특정 단체의 웹사이트 이름을 제거하거나, 특정 단체나 기업에 특정 이름을 할당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 중 대표적이다.

우리가 투자한 Handshake라는 블록체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전에 한번 설명한 적이 있다. 메인넷 출시가 많이 늦어지긴 했지만, 그동안 여기 엔지니어들이 정말 열심히 개발을 해왔고, 이제 몇 달 있으면 메인넷 출시가 드디어 될 것 같다. Handshake Network 프로젝트는 그 어떤 단일 기관이나 개인이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도록, 인터넷 네이밍 시스템을 탈중앙화하려는 대체 인터넷 네이밍 시스템이다. 핸드쉐이크 소프트웨어는 비트코인을 아주 많이 수정/포킹한 코드인데, 제대로 출시가 된다면 그 누구도 소유하지 않고,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DNS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을까 싶다.

실은 Handshake Network는 미국보다는 중국과 같이 정부의 통제가 심한 곳에서 더 큰 빛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웹사이트 소유자 실명인증 제도를 실시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에서 싫어하는 사람이나 기관이라면 그냥 DNS를 통제해서 그 웹사이트를 닫아버릴 수 있는데, 핸드쉐이크가 적용된다면 웹사이트를 익명으로 등록할 수 있고, 특정 서버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서 그 누구도 내 웹사이트를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실은 이런 시도가 전에도 몇 번 있었고, Namecoin이라는 프로젝트가 그중 가장 유명한데, Handshake는 Namecoin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더 다양한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입찰이나 데이터 저장과 같은 중요한 프로세스를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 계획이다.

블록체인, 암호화폐, 그리고 코인과 같은 용어를 요샌 들어보기 힘들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대중과 스타트업의 관심도 식었는데, 그래도 할 사람들은 계속하고 있고, Handshake와 같이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드디어 출시된다는 건 이 기술과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희소식이다.

상장 시장과 비상장 시장

우리는 비상장 초기 회사에 투자하는데, 이 분야에 있다 보니, 여러 가지 딜들을 접하게 된다. 간혹, 상장 바로 전의 회사의 pre-IPO 주식 투자 기회도 시장에서 돌다가 우리한테까지 오는 경우도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상장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그동안 회사에 도움을 줬던 분들한테 보답?의 차원에서 실제 상장 예상되는 가격보다 조금 싸게 투자 기회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인 거 같다. 또는, 상장하기 전에 갑자기 회사가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IPO 예상 가격보다 조금 싸게 투자를 받는 경우도 있다.

실은, 전에 이런 기회가 나한테 주어졌다면, 고민을 좀 했을 거 같다. 우리는 이런 큰 딜과는 거리가 너무 멀지만, 앞으로 우리도 펀드를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펀드에 조금이라도 실적이 일찍 생기면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앞으로 6개월 후에 IPO 예정인 회사의 주식을 조금이라도 싸게 구매한다면, 대박은 아니겠지만, IPO 이후에는 가치가 몇 배 오를 것이고, 그리고 public 시장에서 팔면, 펀드의 LP들한테 조금이라도 수익을 만들어서 돈을 돌려줄 수 있고, 이렇게 하면 꽤 빠른 시간안에 펀드에 약간의 실적이 생긴다(투자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실적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샌 이게 기회인지 아닌지가 좀 헷갈린다. 최근에 IPO 한 유니콘들의 기업가치가 꼬꾸라지고, IPO 자체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걸 보면서, 업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IPO가 회사의 목적이 돼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자금 조달의 측면에서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며, 그 외에 뭔가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또한, 기존 투자자들이 exit하고 유동성을 확보하기에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 투자자들이 IPO를 하라고 압박하는 경우도 있다 – 많은 기업이 IPO를 회사의 큰 마일스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최근에 IPO 한 회사들의 실적을 보면, 명암이 명확하게 갈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비상장 시장의 투자자와 상장 시장의 투자자들이 회사의 가치를 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 매우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새삼 깨닫고 있다. 일단, 잘 알지만, 비상장 시장에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는 매출, 이익, unit economics와 같은 객관적인 지표에 기반하기보단, 창업가의 비전과 회사의 잠재 가능성에 투자자들이 부여하는 가격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그리고 여기에 소프트뱅크 비전펀드와 같은 대형펀드가 등장하면서, 투자자 간에 경쟁이 더해지면, 이 기업가치는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 있다. 손실이 아무리 많이 발생해도, 탄탄한 매출과 이익이 나는 중견 회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밸류에이션을 자랑하는 비상장 회사들이 너무나도 많다. 유니콘들이 대표적이라고 생각된다. 뭐,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이 중 정말 미래에 세상을 바꿀 회사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비상장 시장의 기업가치 산정 방법이 맞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상장 시장의 경우, 투자자들이 기업을 보는 관점은 매우 다르다. 가능성도 당연히 보지만, 이들한테 당장 중요한 건, 아주 명확한 숫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더 빠른 시점에 조금 더 저렴한 밸류에이션에 투자하길 선호하는 우리 같은 VC와는 달리, 더 비싸게 투자해도 상관없으니, 본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매출과 이익이 모두 좋게 나올 때까지, 그리고 본인들이 원하는 가격이 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IPO 이후에 주식가격이 급등해도, 동요하지 않고 가격이 정상화되길 기다리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회사의 비즈니스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 모든 회사에 비슷한 기준과 배수를 적용하는 실수를 범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우버와 같은 택시라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에 온라인 기술을 적용한 온디맨드(=O2O) 회사의 외형적인 수치는 클 수밖에 없지만, 그만큼 손실도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워낙 unit economics를 맞추기 어려우니까. 이와는 반대로 Zoom과 같은 소프트웨어 기반의 SaaS 비즈니스는 우버보단 외형이 작을 수밖에 없지만, 100% 소프트웨어 기반의 비즈니스라서 마진은 O2O 비즈니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하지만, 대부분의 VC는 Zoom보다는 우버의 기업가치를 훨씬 더 높게 평가한다. 상장 시장의 투자자는 회사들이 높은 배수를 원한다면, 그만큼 높은 마진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버와 같은 회사는 현재 상장 시장에서는 고전하고 있지만, 그나마 줌은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실은, 상장 시장의 투자자들이 이런 객관적이고, 감정에 덜 치우치는 기준으로 투자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동안 너무 높은 단위의 투자금과 난무하는 유니콘 때문에 잠시 이런 사실을 잊어버린 게 아니냐는 생각도 들긴 하다. 너무 많은 스타트업이 너무 많은 투자를 받았는데, 손실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외형적 성장에만 너무 집중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고, 실은 우리 같은 VC도 여기에 큰 일조를 했기 때문에 나도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긴 하다.

얼마 전에 이런 농담을 들었다. 실리콘밸리에 호프집이 새로 생겼는데, 개업하는 날 6,000명의 고객이 방문했다고 한다. 이 중 실제로 술은 아무도 사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엄청나게 성공적인 술집이라고 주위에서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젠 그래도 술을 좀 팔아야 하고, 술의 원가보다는 높은 가격으로 팔아야지만 성공적인 술집이라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시장에 형성되고 있는 것 같다.

성장과 배움의 기울기

board-1044088_640전에 내가 이런 내용을 쓴 적이 있다. 초기 스타트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KPI는 회사마다 다르지만, 그 KPI를 매주 5%씩 성장할 수 있다면, 매달 20% 성장할 수 있고, 1년 동안 9배 성장할 수 있고, 이걸 해마다 반복할 수 있다면 투자자들이 제발 투자하게 해달라고 애걸할 것이라고.

많은 유니콘 회사들이 이렇게 성장한다. 이렇게 창업 초기 3년~5년 안에 말도 안 되는 미친 성장을 하는 회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조금은 걱정되기도 한다. 너무 높이 날면, 언젠가는 내려올 수밖에 없고, 요새 이 동네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위워크와 같은 유니콘들의 기업가치가 인정사정없이 깎이는걸 보면 – 그 원인은 다양하지만 – 꼭 미친 성장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성장’ 자체는 스타트업의 존재 이유이자, 투자를 받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점도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성장해야 할까? 나도 이 질문을 자주 받는데, 우리 투자사 중 다른 회사들보다 비즈니스를 잘하는 대표들을 보면, 그 방법이나 형태는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기울기가 일정한 의도된 성장”을 하는 분들이 있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3개월 동안 300% 성장하기보단, 이걸 의도적으로 12개월 동안 300% 성장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진 않다. 일단 무조건 성장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걱정하자가 대부분 창업가가 가진 태도이고, 굳이 3개월에 300% 성장할 수 있는 걸, 왜 일부로 제한을 하느냐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실은 일차원적으로 보면, 이게 맞다. 나도 미국에서 스타트업을 할 때 성장을 의도적으로 컨트롤 하자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무조건 성장할 수 있을 때 성장하자는 전략이었다(그래도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 항상 문제가 생기는 걸 자주 경험했다. 일단 단기간 내에 너무 빨리 성장을 하면, 창업자도 왜 회사가 그렇게 많이 성장했는지 원인 파악을 하기가 힘들다. 그럴 시간도 없고, 원인 파악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성장을 하니까,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행위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게 행복한 고민이긴 한데, 나중에 성장이 멈춘 후에, 과거의 성장을 반복해야 할 텐데, 왜 그렇게 성장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이런 성장 사이클을 반복하지 못하는걸 여러 번 봤다. 그리고 적절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그때마다 적절한 인력이 보강되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성장을 하면, 너무 빨리, 그리고 신중하지 못하게 사람을 뽑는데, 이게 항상 나중에 문제가 되는 걸 봤다. 어떤 성장을 할 때, 어떤 인력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알아야지만, 미래에도 계속 좋은 인재를 채용할 수 있는데, 이걸 생각할 시간도 없고, 고민할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성장의 기울기와 배움의 기울기가 일치해야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시스템을 회사 내부에 만들 수 있다. 성장의 기울기가 너무 가파르면, 배움이 그 기울기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배움의 기울기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만큼만 성장의 기울기를 조정해보라고 권장한다. 물론,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또 하나 나오는 게 성장의 공식이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회사의 성장을 공식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성장을 제한하거나, 또는 더 가속할 수 있는 거 같다. 우리 투자사, 또는 주위에 내가 아는 회사 중, 정말 비즈니스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스타트업은 모두 이런 성장의 공식을 어느 정도 내재화하고 있다. 그래서 목표와 계획보다 성장이 더디면, 이 중 몇 개의 변수를 조정해서 성장을 조금 더 촉진한다. 이와 반대로, 회사 내부 배움의 기울기보다 성장이 너무 가파르다 싶으면, 또 변수를 조정해서 성장을 조금 더 늦춘다. 나는 이런 걸 실제로 봤기 때문에, 가능하면 모든 창업가에게 이런 성장의 공식을 찾아보라고 조언한다.

물론, 이런 성장과 배움의 기울기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내가 아는 많은 VC는 초기에는 무조건 미친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매달 업다운이 심하더라도 일단은 성장할 수 있는 만큼 무조건 성장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유니콘 회사는 없다고 한다.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단 투자자 돈으로 유니콘 되고, 어떻게 돈 벌고, 어떻게 제대로 된 회사를 만들지는 그 이후에 고민해보자는 식의 생각과 태도는 요새 참 위험천만하다고 매일 느끼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