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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팀의 미학

최근에 우리가 6~8년 전에 투자했고, 아직도 생존하고 있고, 투자 당시의 그 비즈니스를 그대로 하는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오랜만에 각각 만났다. 이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고마움, 안타까움, 그리고 걱정, 이 세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 힘든 길을 거의 10년 동안 우직하게 가고 있다는 점, 유니콘 사업은 아직 못 만들었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사업을 만들었고, 어떤 곳은 흑자전환까지 했다는 점은 초기 투자자로서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의 10년이나 했는데 아직 너무 작은 스타트업으로 남아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면 안타까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10년 동안 임계 규모를 못 만들었다면, 앞으로 10년 동안도 못 만들 확률이 더 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우리 투자금은 어떻게 회수할까 현실적인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전 세계의 스타트업을 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큰 성장을 못 했지만, 탄탄한 사업모델을 만든 창업가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엑싯이 만들어지는 걸 꽤 많이 봤고, 실은 우리가 투자한 회사도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곳들이 있다. 이 회사들은 대부분의 사업 성공과 성과가 엑싯하기 전 1~2년 동안 다 만들어졌다. 즉, 창업 후 10년 만에 엑싯을 했다면, 9년 동안은 아무도 모르는 회사로 매일매일 진흙밭을 굴렀고, 마지막 1년 동안 갑자기 급성장해서 모든 성과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런 창업가들은 내가 봤을 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이분들은 최소 5년 이상 사업을 했고, 사업하는 동안 한눈팔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오래 사업을 하면서 성과가 없고, 주변에 많은 동료창업가들이 메타버스나 NFT 같은 아이템에 올인 하기 시작하면 피봇팅을 해볼 만도 한데, 이분들은 그냥 자신이 하던 사업에만 계속 집중했다. 물론, 그 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작은 시도를 엄청 많이 하면서 될 것과 안 될 것을 나름 분류했다.

이렇게 오래 사업을 하다 보면 – 그리고 아예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업이 아닌 이상 – up/down이 있지만, 가끔 아주 잘 될 때가 있다. 이 잘 되는 기간에는 한국 시장의 특성상 수많은 경쟁 스타트업들이 시장에 나온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단기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만드는 게 힘들다고 판단하는 순간 많은 경쟁사가 다른 시장으로 이탈하거나, 너무 이 사업을 쉽게 봤던 스타트업들은 문을 닫는다.

그리고 5년, 7년,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데, 어느 날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서 내 주변을 보면, 그동안 나랑 코피 터지면서 경쟁하던 스타트업들은 다 없어졌고, 어느 순간 나 혼자만 남게 되고 나 혼자만 이 시장에서 잘하고 있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와 비슷하다.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엄청 많고, 등산을 시작할 땐 모두 다 자신감과 의지가 가득 찼지만, 지형이 험해지고, up/down이 심할수록 중간마다 낙오자들이 발생한다. 초반에 너무 페이스를 올렸다가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체력이 약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쳐서 산행을 중단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남 신경 안 쓰고, 꾸준히 나만의 등산을 하는 사람들만 끝까지 남는다. 이분들은 앞만 보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데, 산 정상 근처까지 와서 뒤를 보면, 그렇게 많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혼자 정상에 서게 된다.

스타트업도 비슷한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분야에서 잘 버티던 나만 혼자 이 분야에 남았고, (아직은) 유니콘이 못 됐지만, 어느 순간 이 분야에서 일등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위에서 말한 우리 투자사들이 이런 회사들인 것 같다. 규모는 아직은 작지만,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버티면서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버티칼에서 일등 스타트업이 얼떨결에 되어 있는 것이다. 너무 작은 버티칼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라는 의문도 있지만, 시장이 엄청나게 파편화되어 있는 거지 그렇게 작은 시장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런 오래된 창업가들에게 거는 희망이 크다.

무작정 버티면서 사업하는 게 정답은 아니다. 오히려 오답일 가능성이 훨씬 크고,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버티는 건 병신 같은 짓이다. 하지만, 느리지만 계속 성과가 만들어지고, 시장이 존재하지만 크게 파편화되어 있어서 규모가 안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면, 언젠가는 큰 사업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에는 버텨보길 권장한다. 버팀의 미학은 지금은 너무 고통스럽고 혼란스럽지만, 언젠가는 나를 이 시장의 유일한 절대강자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헤일메리패스는 없었다

미국 운동 경기를, 특히 미식축구, 보면 Hail Mary pass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사전적인 의미는 미식축구에서 매우 긴 앞으로의 패스로, 일반적으로 필사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힘과 도움을 구하는 가톨릭의 “Hail Mary(=아베마리아)” 기도의 Hail Mary가 붙는다. 나는 미식축구를 즐겨 보진 않지만, 응원하는 몇 개의 대학팀이 있어서 가끔 보는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봤던 10개가 안 되는 헤일메리 패스 중 기적적으로 점수로 이어져서 극적인 우승에 기여했던 게 딱 한 개 있었다. 가능성은 작지만, 가능성이 낮은 만큼 이게 성공하면 정말 짜릿하다.

작년에 많은 스타트업이 이런 헤일메리 패스를 시도했다. 우리 투자사 중에도 이런 곳들이 있는데, 대부분 자금이 다 소진됐고, 팀원들이 대부분 나간, 어떻게 보면 그냥 문을 닫는 게 더 정상인 회사들이었다. 어떤 회사는 5년 이상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이제 창업가들도 지쳤고, 직원들도 지쳐서, 그동안 정말 해보고 싶은 아이템이 있었는데 차마 돈이 절대로 안 될 것 같아서 해보진 못했지만, 그냥 마지막 헤일메리 시도로 마지막 피봇팅을 했다. 그동안 이 회사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번 아이템도 안 될 것 같았지만, 당시 내 머릿속은 “오래전에 봤던 그 미식축구 경기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판 헤일메리 패스로 역전승을 거뒀던 걸 내가 두 눈으로 생생해 봤지. 어쩌면 이 회사도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생각과 기대감으로 꽉 차 있었다.

결과는, 이 마지막 헤일메리 시도는 실패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히 확률적으로 이게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헤일메리 시도가 다 실패해서 결국 대부분의 회사들이 무너지는 걸 보면서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고, 그냥 단순히 운이 좋아서 성공하는 스타트업도 없다는 걸 새삼 다시 한번 느꼈다. 그냥 어떻게 잘 되는 사업은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막판에 하늘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우를 범하지 말자. 미식축구도 1시간의 공식 경기 시간이 있고, 이 시간 동안 실력에 의존하면서 최대한 많은 점수를 내서 이기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이다. 스타트업도 평소에 잘하는 게 가장 좋다. 이렇게 하려면 요행을 바라지도 말고, 그냥 어떻게 될 거라는 생각도 말고, 그냥 매일 매일 꾸준히 해야 할 일을, 그리고 해야 할 일만 연마해야 한다.

인생을 걸지 마라

올해는 시장이 반등할까? 아니면 더 안 좋을까? 이런 예측을 내가 할 때마다 매번 틀렸으니, 이번에도 내가 틀린 게 맞는다면, 올해는 경기가 좋아질 것이다. 나는 2024년은 2023년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을거라고 예측하고 있으니.

작년 한 해 동안 꽤 많은 스트롱 투자사가 폐업하거나 우리가 손실 처리를 했다. 이 중 어떤 창업가들은 본인들이 먼저 우리에게 너무 힘들어서 인제 그만 해야겠다고 했고, 어떤 분들은 우리가 먼저 사업을 그만하라고 해서 폐업하기도 했다.

내가 주로 경험한 패턴은 이렇다.

주말이나 평일 밤늦게 이런 문자가 온다. “대표님, 밤늦게/주말에 쉬시는데 죄송한데요, 사업 관련해서 상의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30분 정도만 통화 괜찮을까요?”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일단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본론으로 안 들어가고 핵심을 겉도는 이야기만 한참 한다. 핵심은 요새 사업이 너무 힘들고 본인은 지쳐가고 있다는 내용이다. 내가 이제 막 투자를 시작한 주니어 VC라면, 이 말을 듣고 “파이팅!” 하면서 힘내라고 할 텐데, 그동안 이런 상황을 너무 많이 경험했고, 주로 창업가들이 이런 말을 굳이 평일 밤늦게 또는 주말에 한다는 건, 그만하고 싶은데 투자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동의를 구하고 싶다는 의미라는 걸 잘 안다.

이런 분들한테는 내가 먼저 그만하고 회사 문 닫으라고 제안한다. 우리가 대부분의 회사에 첫 번째 또는 두 번째의 기관 투자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창업가들과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회사의 up/down을 모두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창업가들이 그동안 열심히 사업했고, 없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들이 그만하고 싶다는 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정을 존중하는 게 초기 투자자가 해야 할 올바른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창업가들이 미안한 마음에 차마 본인들이 직접 폐업해야겠다는 말을 못 할 때 그냥 내가 먼저 그동안 최선을 다했는데 잘 안됐으니까 이제 그만 잘 마무리하자는 제안을 한다.

얼마 전 일요일에 어떤 대표님과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오히려 내가 먼저 그만하라고 하니까 전화기 저 너머로 들려오는 이분의 목소리가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 안 하면 사업이 개인의 삶을 완전히 망친다. 우리 창업가 중 자살 시도를 한 분들도 있어서 나는 이걸 잘 알고 있다. 원래 사업은 어렵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사업할 필요는 없다. 이게 뭐라고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 것인가. 사업은 사업에서 끝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업이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바로 주변에 도움을 구해라. 그리고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면 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약을 먹고, 이 마음의 병을 고치면 된다. 물론, 운동도 병행하면 좋다.

인생을 걸고 사업한다는 말은, 진짜 인생을 거는 게 아니라 그만큼 죽을 각오로 사업을 한다는 의미이다. 스타트업에 진짜로 목숨을 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인생은 정말로 소중하니까.

49권 – 2023년

1년 동안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에 대해서 포스팅하는 게, 처음엔 그냥 실험적으로 해봤는데, 이제 해마다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되어 버렸다. 작년에도 50권의 책을 읽는 걸 목표로 정했는데 – 나는 새해 결심을 안 하는데, 유일하게 결심하는 건 독서량이다 – 지난 몇 년 동안, 이 수치를 잘 지키다가 작년은 1권이 모자란 49권을 읽었다.

2023년은 밤에도 외국이랑 미팅하느라 바빴고, 주말에도 일을 많이 해서 여유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는데, 여유시간이 생겨도 머리 스위치를 OFF 하지 못해서, 책 대신 TV나 넷플릭스를 보면서 잠시 머리 스위치를 OFF 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래서 책을 평소와 같이 자주 접하지 못했다.(참고로, TV와 넷플릭스로 머리 스위치를 OFF 하는 노력은 정말 병신 같은 짓이다. 더 뜨거워지고 더 ON이 된다).

대신, 출장을 많이 다녀서 비행기 안에서 독서를 많이 했는데, 그래서 그나마 49권을 읽었던 것 같다. 운동과 독서는 항상 최우선으로 챙기고 싶은 활동인데, 올해는 조금 더 신경을 써서 50권을 채울 생각이다.

내 독서 습관은 한결같다. 우리 투자사 국민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고, 여기에 없는 책은 집 근처 도서관에 직접 가서 빌린다.(평일 저녁에 공공 도서관 가는 게 내 삶의 낙 중 하나다. 조용한 도서관의 책 냄새, 그리고 책과 독서하는 사람들의 풍경만큼 몸과 마음을 힐링시키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은 후 서평은 우리 투자사 플라이북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플라이북에서 체크해뒀다가 국민도서관과 공공도서관에서 빌려보는데, 올해 살짝 바뀐 습관이 있다면, 공공도서관을 더 많이 갔다는 것이다. 국민도서관에서 책을 집으로 배달시키는 건 참으로 편리하지만, 도서관에 직접 가는 행위에서 오는 상쾌함은 이 편리함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거의 5년째 책을 구매하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책을 사지 않고 그냥 무조건 빌려서 본다.

작년에 내가 플라이북에서 별 5개를 준 나의 베스트 책(들)을 선정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김윤정의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박지현의 ‘참 괜찮은 태도’
하재영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이영미의 ‘마녀체력’

이렇게 6권이다. 49권 중 6권이면 작년에 읽은 책의 12%에 별 5개 만점을 준건데, 너무 후하게 주긴 한 것 같지만, 개인적으론 매우 감동도 컸고, 느끼는 것도 많았고, 이 6권의 책들을 완독한 후에 뭔가 내가 더 성숙한 사람같이 느껴졌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죽음에 대한 책을 꽤 많이 읽었다. 나쁜 뜻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내 가족과 내 죽음에 대비하려면 어떤 준비를 지금부터 하나씩 해야 하는지에 대한 건강한 고민을 요새 많이 하고 있다. 작년에 읽은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이런 나에게 상당히 많은 시사점을 던져줬고, 건강한 질문과 고민을 많이 하게 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한국의 새로운 작가들을 많이 알게 됐다. 내가 운동할 때 즐겨 듣는 팟캐스트 ‘여둘톡’의 주인공 김하나와 황선우, 이들과 친한 김혼비, 엄청난 상상력의 정세랑,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최은영, 텍스트의 힘을 강조하는 장강명 등.(존칭은 생략). 나열해 보니 장강명씨 빼곤 여성 작가분들인데, 이분들이 앞으로 한국의 소설과 비소설 분야를 리딩할 것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없고 바빠서 책을 읽지 못 한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변명이다.

올해도 50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아주 긴 하루

2023년은 모두에게 너무나 힘든 한 해였다. 창업가에겐 당연히 힘들었고,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게도 힘든 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후속 투자 받은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들이 두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고, 두 손과 두 발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우리 투자사들이 후속 투자를 못 받았다. 이 중 자연스럽게 문을 닫은 회사도 많고, 우리가 능동적으로 손실 처리한 회사들도 많았다. 스트롱 뿐만 아니라 다른 VC, 그리고 이들의 포트폴리오도 우리랑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 같다. 어려움과 힘듦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돈 없어서 춥고 배고픈 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낸 창업가는 그렇게 많진 않을 것이다.(따뜻하고 배부르게 사업하고 있는 분들에겐 정말로 스트롱한 존경심을 표시하고 싶다).

수년 동안 한 사람의 모든 것이었던 사업을 접어야 하거나, 가족과도 같이 정들었던 직원분들을 해고하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내가 직접 폐업하거나 직원들을 해고하진 않았지만, 이런 일들을 너무나 많이, 너무나 자주, 너무나 가까이서 봤기 때문에 그 어려움과 고통스러움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벤처 생태계에 있는 대부분의 이해관계자들에겐 작년이 아주 터프하기도 했지만, 이 터프함이 끝나지 않았던, 너무나 긴 한 해였을 것이다. 나에게도 터프하고 긴 한 해였는데, 창업가들에겐 얼마나 당황스러운 한 해였을지 상상만 할 수 있다.

그 와중에 내가 밤잠까지 설쳤던, 어떤 우리 창업가분의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분은 작년 한 해가 하루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자고, 다시 일어나서 자기 전에 했던 일을 계속하고, 또 자고, 또 일어나서 일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2023년 365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아주 긴 하루 같다고 했다. 이러니 당연히 작년에 뭘 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나에게도 터프한 한 해였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작년에 언제 내가 뭘 했는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 미팅 후, 사무실의 작은 회의실에 들어가서 이분의 얼굴, 표정, 그리고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봤는데 감정이 복잡해졌다. 1년 365일을 매일 기억하면서 추억을 만들어도 인생은 짧은데, 이분의 이 긴 하루는 아직도 안 끝났고, 어쩌면 내년도 아주 긴 하루가 될지 모르는데, 나는 우리 창업가분들을 대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런 고민이 침대로 이어지면서 잠을 계속 설쳤다.

우리 모두의 하루가 너무 길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너무 길어서 정말 one very fucking never ending long day가 될지라도 올해에도 모두 살아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