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존재의 이유

나는 혼자 살진 않지만,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를 즐겨보는 편이다. 2주 전에 배우 이주승 씨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받아서 부산에서 보낸 하루에 대한 내용을 재미있게 봤다. 이분의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팬들이 직접 부산으로 왔고, 팬클럽 회원들과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와 같이 교류하는 장면을 보고 역시 연예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팬들 때문이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이주승 씨 본인도 이런 이야기를 직접 했는데, 아무리 유명하고 연기를 잘해도 팬들이 없으면 배우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 같은 투자자가 존재 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봤다. 우리가 활동하는 생태계를 보면, 3개의 이해 관계인이 있다. 일단 우리 같은 VC에게 돈을 투자하는 LP라는 존재가 있고, LP의 돈을 관리하는 스트롱과 같은 VC가 있고, VC들이 이 돈을 투자하는 창업가가 있다. 이 외에 스타트업 생태계에는 다양한 플레이어와 이해 관계인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3개의 플레이어가 이 생태계를 돌아가게 만든다. 즉, 스트롱 같은 VC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LP들이 있기 때문이고, 이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창업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도 첫 7년은 정말로 초기 스타트업과 같이 운영됐다. 특별한 시스템도 없고, 웬만한 일은 대표인 내가 다 처리하면서, 그냥 되는대로, 그리고 닥치는 대로 두서없이 일을 했다. 이렇게 하면서 점점 더 회사의 체력이 생기고, 좋은 동료들도 조인하면서 우리도 스트롱의 비전과 미션에 대해서 고민하게 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미션 스테이트먼트를 만들었다.

Together, We are ALL Strong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ALL’이다. 스트롱에서 하는 모든 의사결정이 우리의 LP, 스트롱, 그리고 우리의 창업가 모두에게(=ALL) 이익이 되는 결과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철학이자 미션이 그대로 반영된 멋진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3명의 이해 관계인 중에서도 모든 가치는 창업가들이 만들어 낸다. 창업가들이 만드는 가치를 우리는 잘 다듬어서 우리의 LP들과 공유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연예인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팬이듯, 스트롱과 같은 VC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LP와 창업가이고, 굳이 하나만 택하자면 투자자의 존재 이유는 창업가들이다. 창업가가 없으면 우리 같은 투자자가 존재할 수 없다.

한 가지 이유

나에겐 강연 요청이 꽤 들어온다. 다양한 행사와 대기업에서 정기적으로 발표나 강연에 대한 문의가 계속 들어오는데, 99% 다 거절한다. 이런 대중 앞에서 발표와 강연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에 우리 집안 살림(=스트롱)에 신경 써야 하고, 내가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는 걸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꼭 하고, 간혹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참여하는 행사나 강연이 있는데, 미래 창업가인 학생들이 청중일 때, 그리고 내가 정말로 공감하는 주제의 행사일 때이다.

얼마 전에 내가 정말로 공감하는 주제의 소규모 행사에 참여했다.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난 행사였는데, 피곤했지만 집에 올 때 매우 뿌듯했다. 이 행사에서 스타트업에서 현재 일하고 있는 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미팅할 때 좋은 창업가들을 구분할 수 있는, 이들만이 가진 시그널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상당히 좋은 질문이고, 좋은 것만큼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나는 바로 이분에게 답을 했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최근에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그런 내용과 일치했기 때문에 바로 공유할 수 있는 나만의 생각과 답이 있었던 것이다.

우린 엄청나게 많은 창업가들을 만난다. 스트롱에선 일 년에 1,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을 만나는데, 이 중 20~30개에 투자하니까, 우린 웬만하면 잘 투자하지 않는 VC이고, 대부분의 VC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다 보니 많은 투자자들이 특정 회사에 왜 투자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선 모두 도사가 된다. 그 시장은 작아서 안 된다. 그 사업은 이미 과거에 많은 창업가들이 시도해 봤는데 안 됐다. 그 분야에는 이미 경쟁사가 많다. 내가 듣기론 네이버가 똑같은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 창업가는 학벌이 안 좋다. 그 창업가는 과거에 실패의 경험이 너무 크다. 특정 회사에 투자하면 안 되는 이러한 이유는 백만 가지 정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의견들은 모두 논리적이고 똑똑해 보인다.

실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니콘 기업들인 쿠팡, 배민, 토스, 당근마켓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수많은 투자자들이 초기에 투자하지 않았다. 나도 여러 가지 안 되는 이유를 나열하면서 투자하지 않은 회사들이 엄청나게 큰 기업이 되는 걸 자주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안 될 만한 백만 가지 이유를 찾지 말고, 될만한 이유 한 가지만 찾아서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받은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좋은 창업가들을 찾고 싶으면, 여러 가지 잡음을 무시하고, 딱 한 가지의 확실한 시그널을 찾으면 됩니다. 이 사람이 좋은 창업가가 아니라는 백만 가지의 시그널(=잡음)이 보일 텐데요,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사람이 좋은 창업가라는 딱 한 개의 시그널입니다. 이게 있다면, 여기에 베팅하는 게 우리 전략인 것 같아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투자하지 않기 위한 이유는 백만 가지가 있다. 그리고 백만 가지 모든 이유가 굉장히 합리적이고 똑똑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투자를 꼭 해야 하는 딱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면, 우린 여기에 베팅한다.

성장과 수익의 저글링

지난주에 불경기가 왜 어떤 스타트업에겐 평생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인지에 대해서 몇 마디 썼다. 내 블로그를 계속 읽는 분들에겐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오늘은 왜 이게 어쩌면 기회가 아니고 자멸로 가는 길일 수도 있는지에 대한 약간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할땐 – 이건 팬데믹 기간뿐만 아니라 실은 지난 12년 동안이었다 – 모든 스타트업의 전략은 수익성보단 성장성에 기울어졌었다. 기형적으로 많은 돈과 자원이 돈을 벌어서 흑자 나는 회사를 만드는 방향보단, 손실이 발생해도 무조건 외형을 성장시키는 방향에 집중적으로 투자됐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또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무조건 성장하는 전략을 나도 좋아하진 않지만, 이게 맞냐 틀리냐를 따지기 전에, 경기가 좋을 때 당시 시장의 분위기도 감안을 해봐야 한다.

경기가 좋을 땐 정말로 유동성이 풍부했다. 정규 교육을 받았고, 누구나 알만한 회사에서 2년 이상의 직장 경험이 있는 창업팀이라면 웬만하면 투자를 받을 수 있던 시절이다. 워낙 비슷한 서비스가 많이 생겼고, 대부분의 회사들이 수많은 VC들로부터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익성 보단 성장이 중요했다. 그래서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다 적자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고효율의 그로쓰 마케팅에만 집중했다. 돈을 못 벌어도 일단은 고객을 획득해서 락인하면,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 수 있다는 – 지금은 이 사상을 모두 다 정말 싫어하지만 – 전략을 모두 다 진심으로 믿었었다. 우리를 포함해서.

마케팅에 돈을 너무 많이 썼고,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을 뽑으면서, 투자금은 금방 사라졌지만, 상관없었다. 돈이 떨어지면 또 나가서 펀딩하면 됐고, 나쁘지 않은 조건에 후속 투자를 상당히 많은 스타트업들이 제품도 없고 비즈니스 모델도 없는 상태에서 잘 받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돈을 쓰면서 외형만 성장시키는 게 진짜 비즈니스가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서 그 분야에서 일단 1등을 먹으면, 그 이후에 제대로 된 비즈니스를 해도 된다는 것도 모두 굳게 믿고 있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냥 돈이 워낙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되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창업가와 투자자 모두 그냥 앞뒤 생각하지 않고 돈을 막 쓰고, 투자를 막 해도 크게 이상한 시절이 아니었다.

불경기가 찾아오고 유동성이 떨어지자 갑자기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성장하자는 분위기가 수단과 방법을 잘 가려서 돈을 벌자는 것으로 바뀌었다. 거래액이나 매출과 같은 외형을 키우기보단, 크게 성장하지 못해도 비용을 줄이고 수익성을 개선하는 게 요새 대부분 스타트업의 전략일 것이다. 우리 또한 스트롱 창업가분들에게 마이너스 나는 성장은 멈추고, 손익분기를 맞추고, 수익성에 집중하라고 한다. 성장 못 하는 걸 은근히 당연하게 생각하고, 수치가 줄어들어도 일단은 수익성을 맞추라고 강력하게 조언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수익성만 개선하고 성장을 못 하는 비즈니스는 크게 되기 힘들다. 성장이 없는 손익분기는 스타트업의 주 전략일 순 없고, 결국 작은 스타트업이 큰 사업이 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성장이라는 페달을 다시 밟아야 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실 것이다. “언제는 무조건 성장하라고 하고, 언제는 성장 하지 않아도 되니 돈을 벌라고 하고, 이젠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라고 하네. 어쩌라고?”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좀 미안하지만, 이게 변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환경에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대표들이 감수해야 하는 숙명이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 시장에 유동성이 없을 땐, 수익성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그렇다고 성장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꺼버리면 안 된다. 상황이 다시 좋아지면, 언제든지 다시 성장에 초점을 맞출 준비는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성장과 수익성이라는 두 가지의 공을 항상 저글링 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서 하나의 공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주워서 다시 저글링 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

성장형 마인드

우리 투자사 몇몇 대표들을 포함해서, 꽤 많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다른 스타트업과 자신들의 회사를 비교한다. 우리보다 더 잘하는 회사와 그 회사의 창업가를 잘 분석하고 공부해서, 우리가 더 잘하고, 발전할 수 있는 비교를 해도 성공할까 말까, 하는데, 항상 아쉬운 점은, 이와는 반대의 비교를 한다는 점이다.

저 회사는 우리보다 매출도 작고, 손실도 많이 발생하는데, 우리보다 높은 기업가치에 투자받았다면, 그 회사에 투자한 VC들이 병신이고, 그 회사의 대표는 분명히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는 논리를 펼치는 창업가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우리의 경쟁사보다 잘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경쟁사보다 높은 기업가치에 투자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펀딩 할 때마다 매번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고, 기존 투자자들을 답답하게 하는 분들이 많다. 이 회사에 이미 투자한 기존 투자자들도 현재 회사의 대표가 원하는 기업가치와 펀딩의 조건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본인만 계속 이 조건을 고집하고 있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항상 경쟁사의 이야기를 한다. 그 경쟁사는 우리보다 사업을 잘 못한다. 그 경쟁사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회사 내부 분위기가 개판이라고 하더라. 블라인드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그 회사는 곧 망할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보다 두 배의 밸류에이션에 최근에 투자받았으니, 우린 훨씬 더 높은 가치에 투자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신 차리세요.”

이런 분들에게 내가 항상 하는 말이다.

일단 이분들이 알고 있는 다른 경쟁사의 현황은 대부분 잘 못 알고 있는 내용이 많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른 회사가 우리보다 매출이 작고, 손실이 많이 발생하고, 직원들의 만족도가 낮다는 이야기는 거의 다 틀린 소문이거나,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일단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 회사에 대해서 잘 아는 분도 그 회사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을 확률이 높고, 그 회사에 대해서 잘 아는 분의 잘 아는 분도 실제로는 그 회사를 잘 모르는 분일 확률이 상당히 높다.

설령 그 말이 맞는다고 치자. 동일한 비즈니스를 하는 두 회사가 있는데, 매출도 작고, 손실도 크고, 직원들의 수준도 낮은 회사가 더 높은 밸류에이션에 큰 투자를 받았다면, 이건 대단한 것이다. 이 경쟁사를 욕하지 말고, 우린 뭐라도 배울 생각을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우리보다 더 못 한 회사가 왜 시장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대표는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고 공부하고, 그 비결을 파악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시장은 바보가 아니고, 투자자들도 대부분 똑똑한 사람들이다. 우리보다 객관적인 지표가 약한 회사를 더 높게 평가했다면, 뭐라도 우리보다 잘하는 게 많다는 뜻이고, 반대로 지표가 상대적으로 좋음에도 더 낮은 평가를 받는 우리 회사가 뭔가를 크게 잘 못 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에 이런 상황에 부닥쳐 있는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대표라면, 경쟁사와 시장을 탓하지 말고, 왜 그런지 무조건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배움을 이용해서 계속 성장해야 한다. 이런 성장형 마인드는 스타트업 창업가들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이 마인드가 없다면, 더 큰 회사를 만들 수가 없다. 남을 욕하면서 나의 약점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내려갈 일밖에 남지 않았다.

시장이 왜 나의 가치를 못 알아볼까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불평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배워서 성장할 생각을 해라. 시장이 나의 가치를 못 알아보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게 그 어떤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성장형 마인드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벤처 혹한기의 장점

얼마 전에 스트롱의 주주총회(AGM: Annual General Meeting)가 있었다. 글로벌 벤처 시장에 대한 슬라이드를 만들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2021년부터 지금까지 벤처기업에 투입된 글로벌 투자금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돈이 넘쳐흘렀던 2021년에 전 세계 벤처기업에 투입된 자금은 자그마치 $646B 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큰 단위의 돈을 취급하지만, 이 금액은 나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다. 그다음 해인 2022년은 이 수치가 $421B로 35%나 감소했다. 그리고 올해는 또다시 40% 정도 감소한 $260B 정도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이렇게 글로벌 경제가 아직도 반등의 시그널은 안 보이고, 금리 인상과 세상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전쟁은 경기 회복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다. 내년에는 조금 좋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개인적으로 생각했지만, 이건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되니, 우리에게 돈을 주는 LP들도 VC들에게 시원하게 돈을 투자하지 않고,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우리 같은 VC들도 매우 위축되어 있다. 자금의 가뭄 상태가 당분간 계속 지속될 것이고, 결국 이 먹이사슬의 가장 끝단에 있는 스타트업들은 내년에도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벤처 혹한기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수치가 좋아지면서 팀의 자신감이 많이 올라 온 우리 투자사 대표와 미팅을 했다. 이 회사는 작년에 투자 유치를 열심히 했다. 우리도 피드백을 많이 제공한 자료에도 많은 공을 들였고, 이 회사의 업을 이해할 만한 투자자들을 전략적으로 나열해서 아주 체계적으로 펀딩을 시도했는데, 결국엔 잘 안돼서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한 후에 펀딩을 중단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시장에 돈이 없다는 걸 거의 기정사실로 하면서, 외부 자금의 투입 없이 자체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전략을 다시 만들면서 회사의 제품과 방향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줬다. 예상치 못 했던 이 전략 수정의 결과는 현재로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이 회사의 대표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만약에 투자받았다면, 지금쯤 망했을 거예요. 당시의 회사 방향은 지금 생각해 보면, 절대로 돈을 못 버는 전략인데 만약에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투자받았으면, 계속 흥청망청 돈을 쓰고, 사람을 채용했을 테고, 지금쯤 엄청나게 헤매고 있을 거예요. 오히려 그때 투자 못 받은 게 회사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에 투자받지 못 한 창피함에 대한 스스로의 변명일 수도 있지만, 현재 이 회사의 수치와 팀원의 자신감을 봤을 땐, 정말로 그때 투자를 못 받은 게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이 불경기가 어떤 회사들에겐 더 좋은 회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1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없어서 너무 춥고 배고픈 벤처 혹한기다. 많은 창업가들이 어쩔 수 없이 돈을 아끼고, 그동안의 전략을 전면 재수정하고, 현실에 눈을 뜨면서 정신을 바짝 차린다. 이런 분들은 이 불경기를 잘 살아남기만 하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고, 사업의 질 자체가 확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새 오히려 이 불경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