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ong

개발자도 회사의 조직원이다

나는 개발을 못 해서 프로그래밍 코드를 들여다보면 나에겐 이건 마치 단어만 몇 개 알고 있는 외국어랑 비슷하다. 하지만,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니, 좋은 개발력을 가진 창업가들을 알아보는 눈은 어느 정도 갖춰졌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회사의 많은 대표들이 개발 능력이 있는 분들인데, 이분들 중 정말 뛰어난 개발자이고, 동시에 뛰어난 창업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이 한 5명 정도 된다. 이런 분들은 개발 능력도 좋지만, 모든 걸 코드로 보는 제한된 시각에서 벗어나서, 모든 걸 비즈니스와 사업으로 보는 시각과 능력까지 겸비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찾기가 쉽지 않다. 사업 능력이 뛰어난 분들은 개발 실력이 아쉽고, 개발 능력이 뛰어난 분들은 비즈니스 감각이 대부분 모자란다.

개발과 사업 능력이 좋은 분과 얼마 전에 오랜만에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 한 스타트업의 개발 조직을 운영한 경험에 대해 많은 배움이 있었던 대화였는데, 이 중 내가 굉장히 공감했던 내용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고 싶다.

개발팀원, 개발팀장, 개발임원, 그리고 직접 창업까지, 많은 역할을 경험한 이 지인이 지적하는 전 세계 개발자들이 간과하는 게 바로 모든 개발자들은 이들이 속한 회사의 조직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소속된 회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돈을 벌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건데, 굉장히 많은 개발자들이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회사의 목표와는 상관없는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은 주로 기술적으로 어렵고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고, 이건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머리가 좋고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난 분들은 당연히 일반인들은 이해도 못 하는,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해서 높은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개발자들이 항상 명심해야 하는 건 바로 이들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솔루션이 본인들이 소속된 기업의 비즈니스 목표와 매출에 직접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할 수 없던 엄청난 기능을 개발했더라도, 이 기능이 회사의 KPI 달성에 전혀 기여할 수 없다면, 이건 시간과 돈 낭비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데, 우리 주변, 또는 우리 회사의 많은 개발자들이 그냥 본인들이 풀고 싶은 문제를 풀고, 본인들이 개발하고 싶은 기능을 개발하고, 단순히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코드로 미화하고 싶어 한다. 단순히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보면 이게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결과물들이 회사의 경영진들이 설정한 핵심 지표와 연관 없다면, 이들은 조직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스타트업을 좀 먹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런 지적을 받았지만,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런 분들은 회사에서 해고해야 한다. 개발자들도 회사의 조직원이고, 모든 스타트업 조직원의 목표는 단 하나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 같은 투자자는 좋은 개발자에게 투자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기술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다. 이 기술과 개발력이 만들 좋은 비즈니스의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다. 비즈니스와는 상관없는 코딩과 기술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일하지 말고 그냥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걸 권장한다. 우리는 이 코드가 만드는 제품, 그 제품이 만드는 사업, 그리고 그 사업이 만드는 매출에만 관심 있다.

개발 그 자체만을 좋아하고, 기술 그 자체만을 좋아하고, 본인이 만드는 코드, 기능, 제품이 회사가 만드는 비즈니스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기여할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지 않는 분들은 창업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조직의 개발팀장이나 CTO 자리에 있다면, 지금 당장 내보내는 게 좋다.

계속 지는 싸움

얼마 전에 스트롱 같이 미국 펀드이지만 한국에 꽤 많은 투자를 하는 친한 몇 분들과 식사 자리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분들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도 했지만, 결국엔 우리가 하는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각자 투자한 회사와 창업가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글로벌(=미국) 시장 진출 관련 대화도 했다.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시장을 오랫동안 관찰한 투자자 각자의 입장에서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에 대해서 듣고 배울 수 있었던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역시나 모두의 관점은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흥미롭고 배움이 많았던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모두가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너무 성급하게 해외 진출을 시도하지 말고, 일단 한국에서 잘해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든 후에 미국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미국 시장 진출에 대해서 내가 자주 하는 비교가 야구 선수 박찬호와 류현진 이야기다. 박찬호 선수는 한양대학교를 중퇴한 후 LA 다저스로 입단하면서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됐다. 한국에서는 프로 선수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글로벌 무대로 진출한 셈인데, 굉장히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류현진 선수도 매우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을 했는데, 박찬호 선수와는 반대로 한국에서 약 10년 동안 프로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최고의 투수가 됐고, 한국 시장을 제패한 후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박찬호 선수는 한국을 스킵하고 처음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류현진 선수는 국내 시장에서 1등을 먹은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한 셈인데, 둘 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 사례를 스타트업에 적용해 보면,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바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 성공한 후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듯이, 글로벌 시장 진출에 하나의 성공 공식이란 없다는 게 과거의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요샌 내 생각이 점점 더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 나는 한국 스타트업은 일단 한국에서 제품을 만들고, 한국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에서 돈을 확실히 번 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게 더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류현진 선수의 방법이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회사들이 상당히 많다. 창업하자마자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고,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만들어서 product market fit을 이제 찾았고, 수치들이 나쁘지 않은데 훨씬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고 싶어 하는 곳들도 있다.

나는 두 부류의 대표님들 모두를 적극적으로 말린다. 이제 시작하는 팀이나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팀이나, 모두 다 돈을 못 벌기는 마찬가지다. 수치가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 마이너스가 나는 회사들이고, 투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돈을 못 버는 회사들이다. 그런데 이런 회사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 미국에서는 초기 몇 년 동안은 더 큰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즉, 스스로 손실을 한 4배로 증가시키는 매우 멍청한 전략이다.(미국은 한국보다 비용이 몇 배나 더 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피를 철철 흘리는 마이너스 나는 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굳이 미국에서도 또 지는 싸움을 하는 건 자살 행위다. 왜 이런 멍청한 결정들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이렇게 무모하게 글로벌 시장 진출을 시도하면, 절대로 이기는 회사를 만들지 못하고, 싸우는 싸움마다 무조건 지고, 결국 금방 망한다.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방법은, 일단 한국 시장에서의 싸움을 이기고 – 즉, 한국에서 돈을 버는 사업을 만들어라 – 그 이후에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대표의 쓸데없는 야망이나 욕심 때문에 계속 지는 싸움을 하지 않길 바란다.

확신과 자기최면

우린 상당히 많은 회사에 투자한다. 그리고 많은 회사에 투자하려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회사를 만나야 한다. 이 많은 회사를 어디서 찾는 것일까? (deal sourcing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동안 이미 260개가 넘는 포트폴리오에 투자했기 때문에, 우리가 투자한 창업가들이 주변에 있는 다른 창업가들을 많이 소개해 주고, 다른 투자자들이 소개해 주고, 데모데이 같은 곳에서도 만나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한다. 그리고 인바운드로 다양한 창업가들이 콜드 이메일로 회사 소개자료를 보낸다.

이런 콜드 이메일로 오는 회사들은 매력도가 그렇게 높진 않지만, 그래도 나는 모든 인바운드 이메일을 읽고, 이 중 재미있는 사업이나 창업가 같으면 한 시간 정도 미팅을 한다. 얼마 전에 이런 미팅을 했는데, 만나서 한 20분이 지났나,,,이 분한테 나는 미안하지만 우린 검토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직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안 됐다고 느꼈고, 더 이상 미팅을 하면 서로에게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아서 조금 더 준비되면, 그때 VC 미팅을 하라고 솔직한 피드백을 줬다.

이분이 나한테 그러면 도대체 투자자는 언제 만나면 되는지 물어봤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내가 말했는데, 그럼, 언제 준비가 되는 건지,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됐다는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지 물어봤다.

투자자를 만날 준비가 됐다는 객관적인 지표는 없지만, 최소한 본인이 하는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투자자를 만나야 한다. 스타트업을 한다고 하면, 실은 그 누구도 창업가를 믿어주지 않는다. 주위 친구들도 말릴 것이고, 가족들도 말릴 것이다.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지인들 10명에게 내 사업 아이디어에 관해서 이야기하면, 10명 모두 망할 거라고 하면서 말릴 것이다. 그 누구도 이 사업을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스스로는 설득되어야 하고, 본인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만났던 이 가짜 창업가는 본인도 자신의 사업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게 온몸을 통해서 느껴졌다.

내 아이디어나 사업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어느 정도의 감과 적당한 데이터를 통한 확신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창업가는 본인이 하려고 하는 게 가능하다는 어느 정도의 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단순한 감과 느낌만으론 본인도 확신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느낌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적당한 시장 조사와 데이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리고 일한 경험이 기반이 되는 감과 이를 보강할 수 있는 시장 조사와 데이터가 있으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냥 자기 최면이다. 잘될 거라는 느낌도 확실치 않고, 조사를 좀 해보니까 데이터도 신통치 않으면 자신감이 확 떨어질 것이다. 이럴 땐 그냥 잘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 최면을 해야 한다. 마치, 어떤 펜싱 선수가 경기 중 계속 “할 수 있다.”라면서 스스로에게 긍정의 최면을 걸었던 것처럼.

이렇게 해서 스스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만약에 본인도 확신이 안 서는 상황에서 투자자를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웬만한 VC는 이런 불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창업가와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해보고, 이분의 눈빛, 동작, 그리고 태도를 자세히 보면 정말로 본인이 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판단할 수 있다.

100% 확신이 있어도 대부분의 스타트업은 실패하는데, 이 기본적인 확신마저 없다면 투자자와 안 만나는 게 좋다. 서로의 시간만 낭비할 것이고, 더 중요한 건, 절대로 투자를 못 받을 것이다.

롱테일 전에 왕테일

롱테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건 아마도 Wired 잡지의 편집장 Chris Anderson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제품들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틈새 상품이 중요해지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뜻하는데, 이걸 그래프로 표현하면 틈새 상품들이 마치 긴 꼬리와도 같아서 long tail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테크 업계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롱테일이라는 말을 상당히 자주 사용한다.

얼마 전에 우리 투자사 중 물리적인 제품을 만들어서 이걸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D2C 기업의 창업가와 만나서 이 힘든 시기를 어떻게 잘 버틸 것인지에 대해서 대화하면서 – 한때는 이커머스와 D2C 스타트업이 활활 타오를 정도로 핫 할 때가 있었지만, 요샌 이 분야에 투자하는 VC가 거의 멸종했다 – 꼬리 이야기를 많이 했다. 롱테일, 숏테일, 팻(fat)테일, 씬(thin)테일 등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뭔가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업을 하면, 롱테일 전략은 필수다. 소수의 제품만으론 큰 매출을 만들기 어렵고,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에는 단일 제품으로 천억 원 대의 매출을 만드는 기업도 가끔 있었지만, 공급망과 제조 기술이 발전하면서 누구나 다 비슷한 제품을 훨씬 더 저렴하게 만들 수 있고, 이 저렴한 제품을 경쟁사보다 더 저렴하게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단일 제품으로 천억 원대의 매출을 만드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이젠 힘들어졌다.

롱테일 전략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단일 또는 소수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면, 이 제품들에 문제가 발생해서 리콜하거나, 또는 유행이 갑자기 바뀌어서 아무도 찾지 않게 된다면, 회사를 일으켰던 이 의존도 자체가 회사를 다시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품의 다각화가 필요하다.

결국엔 다양한 제품과 SKU를 만들어서 롱테일 전략을 구사해야만 장기적으로 살아남으면서 성장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둘이 신나게 했다.

그런데 이 대표님에 의하면 롱테일 전략이 장기적으로 먹히려면, 그 전에 짧지만 두꺼운 왕테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수천억 원 대의 매출을 만드는 단일 제품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매출을 발생시키는 단일 제품, 즉, 이 회사를 대표하는 flagship 제품이 있어야지만, 롱테일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조금 더 물어보니까, 이 의미 있는 왕테일을 먼저 만들어야 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롱테일 전략을 구사하려면, 여러 가지 제품을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중 많은 제품이 실패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회사는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 기본 매출을 깔아주는 대표적인 단일 제품이 있으면, 삽질을 연속적으로 해도 현금을 어느 정도 확보해서 회사가 운영될 수 있다. 그러면서 게임 회사 이야기를 했는데, 넥슨이 이런 플레이를 잘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게임 업계에 있지 않은 분들은 잘 모를 텐데, 절대적인 숫자로 따지면, 넥슨이 출시한 크고 작은 게임 중 망한 게 너무나 많다고 했다. 아무리 작아도 게임 하나 출시하는 데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한데, 이런 게임들이 수없이 망해도 넥슨엔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던파와 같은 대표적인 왕테일 게임들이 있기 때문에 회사가 계속 이런 실험을 하면서 롱테일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롱테일 전에 왕테일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 그리고 이건 나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 임직원들의 자신감과 연관되어 있다. 한 번이라도 베스트셀링 제품을 만들어 본 회사의 임직원들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남들이 하지 못한, 업계를 대표하는 제품을 만들었고, 그 과정과 결과에서 생긴 엄청난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중무장 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신감은 이후에 출시하는 다른 롱테일 제품들이 계속 실패해도 유지된다. 어쨌든 본인들은 남들이 다 구매하는 대표적인 제품을 만들었고, 몇 번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번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마인드로 계속 시도하다 보면, 결국엔 또 다른 히트 상품을 만들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결국엔 롱테일 전략이 중요하지만, 그 전에 더 중요한 건 왕테일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이 대화를 통해서 배웠다.

대량 해고와 저렴한 인수

내가 작년부터 창업가, 우리 펀드에 투자하는 LP, 그리고 다른 VC에게 가장 자주 들었던, 하지만 가장 대답하기에 자신도 없고 무지했던 질문이 바로 경기에 대한 질문이다. 올해 경기는 어떻게 될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그리고 언제쯤 좋아질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냥 별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인데, 이렇게 누구나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바로 현재 경기가 안 좋고, 미래에도 안 좋아질 것 같은 생각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고, 경제 관련 뉴스를 많이 보고 스스로 분석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성향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고 하지만, 굳이 내 개인적인 생각을 알고 싶다면, 나는 작년에도 경기는 안 좋았고, 올해도 안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공유한다. 미국의 벤처 시장 숫자를 보면 작년 3사분기부터 약간의 반등이 보이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자세히 이 수치를 보면 대부분 AI 회사의 거품 펀딩 때문이고, 그 외의 다른 시장은 아직도 크게 좋아지고 있진 않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트렌드를 따라가지만, 그 타이밍은 한 6개월 정도 뒤처지는데, 여기에 자본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금리의 불확실성까지 감안하면 올해도 경기가 크게 좋아질 것 같진 않다. 실은, 나도 한국은행이 금리를 어떻게 할지 매우 궁금하긴 하다. 금리를 낮춰야지 돈이 시장에서 더 원활하게 돌 텐데, 한국은 기업/가계부채가 이미 너무 많아서 이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 금리를 낮추면 더 많은 기업과 개인들이 돈을 빌릴 것인데, 이건 장기적으로 또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크로 경기는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우리 같은 투자자들에겐 중요하지만, 우리 같은 초기 투자자는 그래도 계속 신규 투자를 집행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투자하는 초기 스타트업들은 어차피 5년~7년 후에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고, 우린 7년 후에 제대로 된 가치가 만들어지는 자산에 오늘 할인된 가격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조금 더 큰 관점에서 시장을 보면 매크로 경기와 상관없이 우린 계속 투자해야 하고, 실제로 스트롱은 우리 페이스대로 매달 신규 투자를 1~2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장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전혀 신경을 안 쓸 순 없다. 아주 조심스럽게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있는데, 아직 우린 불경기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대표적인 시그널은 (저렴한)M&A와 (대량)해고 소식들이다.

경기가 좋으면 기업들이 돈이 많기 때문에 M&A가 꽤 활발하게 일어나는데, 경기가 좋지 않아도 M&A 활동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펀딩을 못 받는 돈 떨어진 스타트업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데,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면 할 수 있는 건 그냥 회사 문 닫거나 아니면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것이다. 이미 투자자들이 있고, 직원들이 있다면 다른 회사에 인수되는 게 그냥 폐업하는 것보단 그나마 좋은 선택이지만, 인수 가격을 네고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서 대부분 그냥 인수기업이 부르는 헐값에 팔린다. 우리도 경험해 봤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헐값에 인수되는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반대로 불경기 때 현금이 많은 회사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좋은 인재, 기술, 비즈니스 모델을 아주 싼값에 인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경기가 안 좋아질수록 오히려 저렴한 M&A의 빈도와 건수는 더 증가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의 해고 소식은 작년 내내 들려왔는데, 경기가 악화할수록 해고되는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작년 초만 해도 전체 인력의 10% 해고도 많게 느껴졌는데, 올해는 많은 스타트업이 기본 50%의 인력을 해고하고 있다. 우리 투자사를 통해서, 그리고 해외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는 소식에 의하면 이런 대량 해고를 진행하거나 준비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더욱더 많아지고 있는데, 이건 확실히 더 큰 불경기에 대비하는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실은, 이런 내가 틀려서 올해부턴 경기가 좋아지길 바란다. 그런데 정말로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 그냥 좋은 거고, 일단 경기는 무조건 안 좋다고 가정하고 사업하는 게 2024년에 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