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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가의 미안함

지난 9년 동안 우린 꽤 많은 회사에 투자했다. 이미 투자사 수가 150개를 훌쩍 넘었는데, 정확한 숫자를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워낙 초기 회사에 투자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이 중 많은 회사가 폐업한다. 스타트업의 실패율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연구결과가 있지만, 통상적으로 창업 1년 안으로 10% 정도가 망하고, 2년~5년 안에 70% 정도가 망한다고 한다. 우리같이 초기에 투자하면, 이 실패율은 더욱더 올라간다.

이런 생리를 잘 알고, 매일 이런 사례를 접하기 때문에, 우리 투자사가 폐업한다고 해도 우린 그렇게 놀라진 않는다. 물론, 안타깝고, 우리도 손실 처리를 해야 하는 거에 대한 걱정은 당연히 있지만, 실패와 폐업 자체는 투자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젠 VC 초년 시절같이 스트레스받고, 잠을 설치진 않는다.

하지만, 창업가의 입장에서는 상황은 다를 수가 있다. 우린 이미 이 경험을 9년 동안 많이 했기 때문에 면역력이 어느 정도 생겼지만, 대부분의 창업가들에게는 신체의 일부와 같은 스타트업의 폐업은 창업 인생 최초의 실패이고, 최초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아프다. 창업하고 스타트업 운영하는 거 자체가 큰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의 연속인데, 이게 망하면 그 스트레스는 10배가 된다는 이야기를 우리 투자사 대표들에게 자주 들어서 나도 이게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는 간접적으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우리 투자사 대표랑 이 힘든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고생했고, 이분도 스스로 잘하고, 웬만하면 본인의 힘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나한테 어느 날 할 이야기가 있다고 연락 왔을 때, 직감적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 미팅을 했다. 역시, 그동안 정말 모든 걸 다 해봤지만, 회사는 성장하지 못했고, 펀딩도 안 됐고, 이젠 이 상태에서는 본인이 제대로 된 생활을 못 하기 때문에 그만해야겠다는 말을 했다.

위에서 말 한대로, 내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서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이분이 그 말을 하면서 울먹거리는 걸 보니까 마음이 참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미안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보는데, 순간적으로 나도 속으로 울컥했다. 내 머리와 가슴 속에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을 했던 것 같다. 실은, 우리한테 미안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얼마 되지도 않는 투자금을 날렸다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마음이, 몇 년 동안 본인의 인생을 걸고 한 스타트업이 망했을 때의 엄청난 스트레스를 더 무겁게 한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 같다.

투자를 받고, 이 돈을 헛되게 쓰지 않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사업이 잘 안 됐으면, 창업가들이 투자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결국 우리 같은 투자자는 창업가와 비즈니스를 보고 자신 있게 투자한 것이고, 그 누구도 우리한테 투자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오롯이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가 투자하고 싶어서 돈을 투입했으면, 사업이 잘 안돼서 회사가 망해도 우린 별로 할 말은 없다. 이건 창업가의 잘못도 아니고, 투자자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실패 확률이 훨씬 높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다.

창업가도 최선을 다했고, 투자자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면, 실은 그 누구도 미안할 필요는 없다. 투자자의 입장에서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여기에서의 값진 배움을 기억하고, 다시 사업을 하면 같은 실수를 최대한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면 한다(그런데, 내 경험에 의하면, 같은 실수를 여러 번 반복하긴 한다. 이 또한 스타트업의 일상이며, 인생이다).

티핑 포인트

이미지 출처: 프리이미지 / 크라우드픽

스트롱을 막 시작했던, 9년 전인 2012년 7월에 내가 한국 여자 골프와 박세리 선수에 대한 을 쓴 적이 있다. 당시 24살의 최나연 선수가 US Women’s Open을 우승했는데, 최프로도 완전 first class급 경기를 했지만, 옆에서 도와준 캐디와 다른 선수들의 공도 크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최나연 선수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의 어린 여자 선수들이 골프에 입문하고 세계 무대 재패의 꿈을 꾸게 만든 원동력과 영감인 오리지널 한국 LPGA 인플루언서 박세리 선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한국은 25년 전만 해도 골프 불모지였는데, 1998년 박세리 선수의 ‘양말투혼’ US Women’s Open 우승을 기점으로, 대단한 골프 열풍이 불었고, 이 순간이 한국 여성 골프계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가 됐다고 많은 분이 이야기한다. 당시 한국의 모든 골프 꿈나무들이 박세리 선수의 우승을 보면서 미래의 세계 챔피언 꿈을 키웠고, 정말로 이게 현실화됐다. 1년 중 골프를 칠 수 있는 날이 8개월 정도 밖에 안되는 이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가장 많은 세계 최고 수준의 탑 여성 골퍼들이 배출된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한국은 여성 골프 강대국이 됐다.

그리고 한국 스타트업계에서도 박세리 같은 선수가 나와서 글로벌 벤치마크를 만들어야지만, 더욱더 많은 한국 창업가들이 좋은 글로벌 회사를 만들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이게 9년 전 생각이었는데, 쿠팡이 앞으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박세리 선수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요새 많이 한다. 쿠팡은 사업의 규모, 속도, 밸류에이션 등, 모든 면에서 그동안 너무 작게 생각하고, 너무 소극적으로 실행했던 한국 스타트업에게 큰 깨달음과 자극을 주고 있는 게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단, 상장에 대한 고민을 별로 하지 않았던 많은 회사가 한국이 아닌 미국 시장에서 IPO를 꿈꾸거나, 아니면 준비하고 있다. 내가 아는 회사만 해도 요새 몇 개 있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 회사들 대부분 미국에서 상장 못 하거나, 해도 잘 안 될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이렇게 사고의 스케일 자체가 커진 건 회사와 직원, 그리고 투자자들 모두에게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이 바뀌어야지만, 행동이 바뀌는데, 일단 그중 한 단계는 클리어한 셈이다.

쿠팡의 또 다른 박세리 효과는, 쿠팡에서 많은 긍정적인 경험을 한 분들이 언젠가는 퇴사해서 모두 다시 창업할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회사를 급성장시킨 경험, 빠르게 성장하면서 각 단계에서 적절한 사람을 채용하고 투입한 경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쌓인 노하우, 국민 앱으로 성장한 제품을 만들어본 경험, 이 모든 경험은 성공적인 창업을 위한 값진 자양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모두다 쿠팡 같은 회사가 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이미 성공 경험과 자신감으로 무장한 창업가들은 성공할 확률이 더 높다. 이 회사들이 성장하고 또 성공하면, 앞에서 설명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한국의 창업 생태계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어쩌면 페이팔 마피아처럼, 쿠팡 마피아가 생길지도 모른다.

이미 이 티핑 포인트는 티핑된 것 같다.

어려운 길

4월 초중반은 문서작업이 좀 많아서 쓸데없이 바빴는데, 이후에 스스로에게 휴식을 조금 주기로 했다. 지난주 목, 금은 일부러 미팅을 많이 안 잡아서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도 있었고,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책도 읽고 기사도 읽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그냥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 건물 주변을 배회하면서, 그동안 폰만 보면서 걷느라 놓쳤던 주변의 환경이나 건물을 보면서 스스로 마음챙김을 조금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했던 미팅이 생각났다. 몇 년 전에 투자한 우리 포트폴리오 회사인데, 힘든 사업을 하다가 잘 안돼서 회사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갈림길에 왔다. 창업 초기부터 나는 봤던 팀이고, 영혼을 갈아 넣으면서 모든 걸 시도했던 그 역사를 잘 알기에, 여기서 사업을 접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해봤는데도 잘 안되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폐업하고 그냥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이 분들과 가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자금 손실이 발생하겠지만,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다가 잘 안 됐기 때문에 전혀 아깝거나 아쉽다는 생각은 안 했다. 오히려, 워낙 좋은 개발력을 가진 분들이라서 나는 스트롱의 다른 투자사에 인수되는 옵션을 물색해보거나, 다른 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길을 알아봐 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했다. 그런데 그냥 본인들은 당분간 다른 일 하면서 현금을 만들고, 계속 버티면서 이 사업을 어떻게든 계속 해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무 오랫동안 고생한 분들이라서 완전히 번아웃 됐다고 생각했기에 의지와 똥고집만 너무 강한 게 아닌가 갸우뚱했지만, 본인들이 그렇게 계속하겠다고 하니, 나도 그냥 그 결정을 존중하고 계속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가끔 생존 신고 및 안부 인사만 하다가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정말 버티다 보니 그동안 좋은 일이 있었고, 회사는 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그리고 며칠 전에 정말 오랜만에 이 분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솔직히 사업 이야기 보다는, 그때 그렇게 힘들고 돈도 없었는데, 계속 이 사업을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도대체 그 순간 머리와 가슴 속에 어떤 생각들이 있었는지, 내가 봐도 무모한 그런 결정을 어떻게, 왜 했는지, 뭐 이런걸 물어봤다.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많아서 여기서 모든 걸 공개할 순 없지만, 그냥 어차피 지금까지 힘들었는데 조금만 더 버티다 보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버티다 보니, 정말로 뭔가 좋은 일이 생기더라가 우리 미팅의 결론이었다.

솔직히, 조금만 버티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정말 비현실적인 무모한 생각이다. 내가 이 분들 입장에 있었다면, 나는 그냥 회사 문 닫고 다른 일을 했을 것 같다. 이렇게 근거없는 믿음으로 계속 버티다가, 완전히 망해서 다시는 재기 못 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그래서 다행이지만, 어쨌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미팅 한 날 종일 했다.

이 날의 미팅은, 우리가 매일 만나고, 투자하는 창업가들은 아주 유니크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했다. 잘 생각해보면, 인간이 인생을 사는 목적 중 하나는 내 주변의 다른 인간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는 거다. 그리고 이렇게 칭찬받고 인정 받기 위해서는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는걸 해야 한다. 창업가들은 이걸 완전히 부인하면서, 남들이 좋다고 생각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좋고, 본인이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살면 남에게 인정 받기 힘들고, 칭찬받기 힘들다. 오죽했으면, 우리가 투자한 많은 창업가들이 가족들한테도 손가락질받고 욕먹으면서 창업을 했을까.

어떻게 보면 이런 고통, 스트레스, 힘듦을 즐기는 창업가들은 변태 같은 인간들이다. 이런 인간들을 좋아하고, 이들에게 투자하는 나 또한 변태 같은 놈이다. 그래도 좋다.

오늘도 남들이 틀렸고, 내가 맞는다는 걸,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는 변태 같은 하루가 되길.

현금 대신 스톡옵션

아직도 쿠팡의 50조 원 이상의 시가총액이 맞냐 아니냐는 논쟁을 많은 사람들은 하고 있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특별히 할 말은 없다. 그냥,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하지만, 어쨌든, 쿠팡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생각한다. 쿠팡이 상장한 후에 많은 창업가, 투자자, 그리고 스타트업 직원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걸 내가 요새 직접 몸소 체험하고 있는데, 오늘은 스타트업 직원들과 스톡옵션에 대해서 내가 최근에 느낀 점에 대해서 몇 마디 적고 싶다.

몇 명이 될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쿠팡 출신 백만장자들이 상당히 많이 탄생할 것이다. 쿠팡의 주주명부를 내가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스톡옵션을 받은 직원분들이 꽤 있는 거로 알고 있고,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도 사원으로 조인했지만, 이젠 쿠팡의 임원이 됐는데, 이분들도 스톡옵션을 잘 받아서, 옵션을 행사하고 팔면, 돈을 꽤 많이 벌 것이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스타트업계에 종사하는 파운더가 아닌 다른 분들도 분명히 쿠팡에 일하고 있는 개발자 친구, 프러덕트 오너 친구, 마케터 친구가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술자리에서 이런 친구들 만나면 다들 “너네 회사 망하는 거 아냐?” , “투자자 돈으로 연명하는 회사인데 월급은 제대로 나와?”와 비슷한 농담 섞인 질문을 했었는데, 이 친구들이 갑자기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을 벌어서 집도 사고 좋은 차도 사려고 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많은 걸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스타트업 직원들은 스톡옵션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월급 받고 회사에서 일하는 거지, 이 회사가 나중에 잘 되면 본인이 가진 스톡옵션이 큰돈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된 회사가 한국에 별로 없고, 본인 주변에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연봉 많이 받는 건 봤지만, 스톡옵션으로 대박이 터지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 작은 회사에 조인해서, 몇 년 만에 수백억 원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그냥 저 먼 실리콘밸리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연봉 협상을 할 때는 스톡옵션보단 그냥 현금을 더 선호하는 게 내가 그동안 느꼈던 현실이다.

하지만, 쿠팡이 상장하면서 실리콘밸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 이야기도 아니고, 나랑 친한 고등학교 동창 또는 컴퓨터 공학을 같이 공부했던 대학 동기들이 백만장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망하는 사기 회사에서 일 한다고 손가락질했던 그 친구들이 말이다. 그래서 이젠 많은 스타트업 직원분들도 스톡옵션의 힘을 서서히 믿게 되는 것 같다. 연봉 협상할 때도 현금보단 스톡옵션을 더 많이 달라고 하는 현상이 눈에 띄게 보이고,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 투자사에서도 들리고 있다.

이는 사람이 전부인 스타트업의 창업가/대표들에게는 좋은 현상이다. 좋은 사람 채용하는 게 워낙 어려운데, 요샌 토스나 크래프톤과 같은 큰 스타트업에서 수천만 원의 프리미엄을 더 주고 사람을 채용하거나 기존 인력을 잡아두고 있어서 더욱더 어려워지긴 했다. 하지만, 이젠 더 많은 분들이 스톡옵션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어서, 돈이 없는 스타트업도 조금은 더 스톡옵션의 힘을 쓸 수 있다. 이미 유니콘이 된 토스와 크래프톤도 스톡옵션을 적절히 잘 활용하지만, 지금은 이미 기업가치가 많이 올라갔기 때문에 나중에 돈을 벌어도 그 upside는 그렇게 크지 않을 수 있다. 이제 시작하는 작은 스타트업의 스톡옵션의 upside는 훨씬 더 클 수 있으니, 이걸 대표들은 잘 활용해야 한다.

물론, 회사가 망하면 그냥 휴짓조각이 되는데, 뭐 이건 모든 회사에 적용된다.

유연함

작은 초기 스타트업들과 같이 일 하다 보면, 많은 걸 매일 배우는데, 그중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유연함이다. 초기 스타트업은 항상 목 마르고, 배고파서, 항상 아쉬운 점들이 많다. 돈이 부족해서 자금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다. 많은 일을 하고 싶지만, 사람이 부족해서 멀티태스킹 할 수 있는 인력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서 하루가 48시간 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항상 있다. 이렇게 항상 자원이 부족하지만, 이 부족함을 보충해주는 게 작은 회사만이 가질 수 있는 유연함이라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투자사 중 단기간에 목표 금액을 투자받는 회사도 있지만, 대부분 투자를 유치하는 데 3개월은 걸린다. 물론, 이보다 더 오래 걸리는 회사도 많은데, 6개월에서 심지어는 1년 동안 펀드레이징을 하는 경우도 많이 봤다. 특히 작년 한 해 코비드19 때문에 실적이 좋지 않았던 회사들은 성장 모멘텀을 일시적으로 잃었기 때문에 투자 받는 게 더욱 어렵다.

어떤 회사는 투자 유치 목표 금액이 50억 원이 넘었고, 우리랑 전략도 잘 만들고, 많은 고민을 한 후에 VC들과 미팅을 시작했다. 그런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했던거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고, 거의 6개월 넘게 이 지루하고 우울한 싸움을 하면서 모두 많이 지쳐버렸다. 실은 이 투자가 성사되지 않으면, 2021년도 목표 매출 달성이 힘들고, 여러 가지 내부 계획 실행도 힘들어지게 된다. 특히 채용을 못 하므로, 회사는 굉장히 어려운 방향으로 가게 된다.

이 순간에 이 회사와 경영진의 유연함이 잘 작동하기 시작했다. 굳이 안 되는걸 계속하기 보단, 창업팀은 올 해 외부 투자를 못 받는다는 가정을 하고, 추가 자금 없이 버티고, 심지어는 조금씩 성장할 수 있게 비즈니스 모델과 운영 방식 자체를 완전히 바꿨다. 그리고 50억 원을 한 번에 투자 받는게 아니라, 아주 작게 5억 원 또는 10억 원 단위로 점진적으로 받는 펀드레이징 전략을 다시 수립했고, 여기에 맞춰 사업 KPI도 초단기적으로 잘게 썰어서 전면 수정했다. 수년 동안 해오던 운영 방식과 사업 모델을 이렇게 단시간 안에 바꾸는 건, 유연하지 못하면 정말 할 수 없고, 특히 대기업이라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유연함이 정말 좋다.

유연함은 외부 환경의 변화에 나 자신을 언제든지 맞출 수 있는 준비된 자세이다. 자존심 강하고, 자신감으로 가득 찬 창업가들에게 이게 생각만큼 쉽진 않다. 오랫동안 계획한 일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거나, 우선순위를 과감하게 조정해야 하는 결정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회사의 모든 자원을 재배치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들과 생각지도 못 했던 일들을 해야 한다. 그래도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연해야 하는데, 이건 아마도 스타트업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