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Low Burn Rate

비용 절감이라는 말은 우리한테 낯설지가 않다. 집에서도 비용 절감은 중요하고, 대기업에서도 비용 절감은 중요하다. 물론, 돈 없는 스타트업한테는 비용 절감은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대표이사와 경영진, 더 나아가서는 모든 직원이 신조로 삼아야 하는 철칙이다. 흔히 우리는 돈을 ‘태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영어의 ‘burn’에서 나온 말이다. 투자자들이 항상 물어보는 게 “회사의 burn rate가 어떻게 되나요 ?”인데, 한 달에 회사가 돈을 얼마큼 쓰냐라는 말이다.

요새 시장에 돈이 워낙 많이 풀려서 그런지, 많은 스타트업이 burn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같다. 매출이 만들어지려면 제품이 완성돼야 하는데 – 뭐, 그래도 매출이 잘 안 나온다 – 제품의 완성은 아직 요원하지만, 일단 무조건 돈을 쓰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회사들을 최근에 꽤 많이 만났다. 돈 다 쓰면 또 투자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하는 창업가들이 많고, 실제로 시장 분위기도 이런 생각과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물론, 돈 다 쓰면 또 투자를 받아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돈을 쓰기 위해서 비즈니스를 하는 마인드와 또 투자를 받아야 하지만, 최대한 비용을 아끼면서 자생하려는 마인드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특히, 미국은 한국보다 더 심한 거 같다. 소프트뱅크의 비전 펀드 이후 많은 VC가 조 단위 펀드를 만들고 있고, VC뿐만 아니라 사모펀드나 대기업에서도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서 수백억 원 또는 수천억 원 규모의 투자를 아직 제품도 없고 매출도 없는 스타트업에 너무 쉽게 집행하고 있다. 물론, 이런 조 단위 펀드에 기꺼이 출자하는 LP들이 있기 때문에 VC들도 펀드를 쉽게 만드는데, 아마도 시장 분위기와 FOMO가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진 않을 것이다. 시기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돈이 메마를 것이고,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시장은 변한다. 이렇게 되면 스타트업이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투자를 더 받거나, 비용을 줄이는 건데, 시장이 꽁꽁 얼었을 때는 많은 투자자가 회사의 성장성보다는 수익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비용 절감과 burn을 컨트롤하는게 핵심이다. 얼마 전에 YC의 샘 알트먼 대표가 트윗을 날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SAMA-low burn rate

“Burn을 낮추는 게 요새는 한물간 컨셉이지만, 곧 다가올 불경기가 시작되면, 초기 스타트업한테 비용을 절감하는 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모두 다시 금방 기억할 것이다.”

프라이머와 스트롱 회사들은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도 아니고, 가장 돈을 잘 버는 스타트업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 전반적으로 burn 콘트롤을 한국에서 가장 잘한다. 가능하면 적은 투자금으로 자생할 수 있는 비즈니스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돈 다 쓰면 또 투자받으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우리 투자금 자체가 워낙 적고, 그리고 다들 워낙 없이 회사를 운영하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항상 좋고, 비슷한 다른 회사에 비해 생존율은 월등히 높다. 회사 은행 잔액이 많든 적든, low burn rate는 정말 중요하다.

<이미지 출처 = Sam Altman 트위터>

DTC 회사의 밸류에이션

우리 포트폴리오에도 몇 개가 있고, 내가 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프라이머는 조금 더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는 영역 중 하나가 소위 말하는 DTC(Direct-to-Customer) 스타트업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최근 5년 동안 이 분야에 엄청나게 많은 VC 펀딩이 투자되고 있는데, 그냥 간단히 말하면 스타트업이 직접 만든 자체 브랜드를 – 주로 안경, 신발, 옷, 시계와 같은 소비재 – 이커머스 사이트나 앱과 같은 온라인 채널을 활용해서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중간 판매상 없이 직접 고객한테 판매하는 비즈니스다.

우리도 이 분야에 투자했는데, 여성 신발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트라이문, 숙취해소 드링크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82Labs, 유기농 생리대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라엘 등이 있다. 나도 정확한 조사는 안 해봤지만, DTC 스타트업 중 1조 원 이상의 평가를 받는 유니콘 회사들도 많고, 우리 본사가 있는 LA 지역 출신으로는 유니레버가 1.2조 원에 인수한 남성 면도 제품 스타트업 Dollar Shave Club이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한때는 유니콘 회사였지만, 이후 밸류에이션이 많이 깎인 유명 배우 제시카 알바와 한인 Brian Lee가 공동 창업한 유아용 제품 스타트업 Honest Company도 LA 회사이다.

그런데 나도 이 카테고리의 회사를 검토하면서, 이런 회사를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주가 되는 이커머스 회사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그보단 그냥 자체 제품을 더 빠르고, 싸고, 좋게 제조해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마케팅하고, 전혀 다른 채널을 통해서 유통하는 브랜딩/제품 회사로 봐야 하는지, 항상 고민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즈니스의 코어에 소프트웨어가 있냐 없냐에 따라서 이 회사의 확장성(scalability)이 결정될 수 있고, 여기서 회사의 밸류애이션에 큰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Recode의 기사를 읽었는데, 여기에 재미있는 의견 몇 가지가 제시된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인데, 일단 DTC 스타트업은 테크 회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아주 매끈한 이커머스 플랫폼을 직접 만들고, 다양한 마케팅 자동화 기능을 도입하고, 간단한 인공지능 챗봇과 같은 CS 관련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회사도 있지만, 비즈니스의 코어에는 소프트웨어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특히 미국의 Shopify나 한국의 카페24와 고도몰과 같이 이커머스에 최적화된 플랫폼을 싸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플랫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는 건 lean 하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다.

이렇게 테크가 기반이 안 되는 회사의 비즈니스에는 네트워크 효과가 일어날 수 없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가 네트워크 효과 위에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서비스인데, 더 많은 사람이 특정 서비스를 사용할수록, 그 서비스의 가치가 더욱더 빠르게 증가하는 효과다. 나 혼자 사용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만, 더욱더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을 사용할수록, 이 서비스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이 기사에서는 네트워크 효과가 없기 때문에 DTC 스타트업의 밸류에이션이 VC들이 전통적으로 투자하던 소프트웨어 회사만큼 높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회사들의 밸류에이션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는 건, 제대로 된 시장조사나 실사를 하지 않고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VC들과 본인들이 운영하는 회사가 소프트웨어가 코어가 되는 테크회사라고 착각하고 있는 창업가들 때문이라고 한다. 실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좀 뜨끔하긴 했다. 우리는 초기 소액 투자지만, 이런 회사를 평가할 때 일반 소프트웨어 회사를 평가하는 기준을 적용해서 회사의 제품 자체에 큰 밸류에이션을 부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뭐, 어쨌든 밸류에션이 낮은 거 보단 높은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긴 하지만, 이런 DTC 회사한테는 밸류에이션이 높을수록 exit의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게 이 기사의 핵심이다. IPO보다는 다른 더 큰 회사에 인수되는 게 더 현실적인 exit 전략인데, 대부분의 큰 회사는 VC와 창업가가 만들어 놓은 터무니 없는 밸류에이션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직원 10명의 매출 한 푼도 없는 회사를 수조 원 주고 인수하는 현상이 너무 자연스럽지만, 매트리스나 신발을 판매하고 있는 대기업들은 이런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없고,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소비재는 진입장벽이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카피할 수 있고, 카피를 많이 하다 보면,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들어서 판매할 수 있는 회사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고, 비슷한 제품을 만드는 여러 회사 중, VC 투자를 한 푼도 받지 않은 회사가 있을 것이고, 이 회사의 기업가치는 VC 투자를 받은 회사보다 현저하게 낮을 것이다.

그러면, 인수하는 대기업 사장이라면 어떤 회사를 인수할 것인가? 비슷한 수치와 실적이면, 당연히 더 싼 회사를 선호할 것이다. 인수하는 사장의 입장에서는 exit 시점에 그 회사에 투자한 VC가 돈을 벌어야 하므로 굳이 더 비싼 가격을 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 투자를 받지 않은 회사는 자체적으로 돈을 벌어서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수익성과 고객관리를 철저하게 하지만, 투자를 받은 회사는 손실이 나더라도 고객획득과 성장에 주로 집중하기 때문에, 인수한 후에 비용 관리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최근에 보도된 DTC 회사 인수 건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대부분 외부 투자 유치를 하지 않았고, 인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점이다. P&G는 Native라는 천연 데오드란트 스타트업을 1,100억 원에 인수했는데, 창업가가 회사의 90%를 소유하고 있었다. Movado는 MVMT라는 DTC 시계 스타트업을 2,200억 원에 인수했는데, 이 회사는 투자를 한 푼도 유치하지 않았고, 내부에서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었다. 데오드란트와 시계 분야에는 실은 다른 좋은 스타트업도 많았지만, 그중 가장 좋은 회사를 가장 저렴한 가격에 P&G랑 Movado가 인수할 수 있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수한 회사들이 VC 투자를 받지 않아서 가격에 거품이 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뭐, 그렇다고 모든 DTC 회사가 투자를 받지 말고, 밸류에이션도 낮게 책정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회사가 다르고, 모든 시장이 다르고, 모든 제품이 다르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는 비즈니스를 하는 게 맞지만, 그래도 자체 제품을 만들어서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는 창업가라면 한번 곱씹어 보면 좋은 내용인 거 같다.

Fuerte Strong

요새 우리도 새로운 펀드를 만들고 있어서, 많고 다양한 LP를 만나고 있다. 그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미국에서 온 분과 토요일 조찬 미팅을 했는데, 좋은 미팅이었고, 펀드와 투자뿐 아니라, 그냥 스포츠부터 북한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뭐,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스트롱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면서 굿바이를 했다. 펀드가 지금까지 한 일,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다 좋지만, 어쨌든, 존과 내가 회사를 만들고, 이 회사의 이름을 짓는 과정조차도 심사숙고하면서, 좋은 스토리를 만들려고 하는 그런 노력은,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믿음이 간다는 든든한 피드백을 남기고 헤어졌다. 스트롱벤처스는 강한 회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 회사 이름에는 이보다 더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 잘 모르는 분을 위해서 과거 내용을 다시 붙여본다.

[과거글: Strong Ventures 유래]

우리 회사 이름은 Strong Ventures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이름이 그냥 ‘강한(strong)’에서 유래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이보다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다.
(VC들은 잘 아실 텐데 일반인들은 잘 모를 것이다) 대부분의 벤처 펀드들의 이름은 창투사가 위치한 지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거나 창투사 founder들의 이름/학교/지역/고향 등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즉, 대부분의 펀드는 단순한 이름을 넘어서 더 개인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면:
–Sequoia Capital은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Sequoia 나무에서 유래
–Palo Alto Investors는 회사가 위치한 동네 Palo Alto에서 유래
–DFJ는 펀드 창업자 3명의 이름 앞 자에서 유래 (Draper, Fisher, Jurvetson)
–Menlo Ventures는 회사가 위치한 동네 Menlo Park에서 유래

등등 대부분 벤처펀드의 이름을 보면 이런 경우가 많다(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John이랑 나도 펀드를 처음 만들 때 우리랑 개인적으로 연관된 재미있는 게 뭐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둘 다 어릴 적부터 스페인의 까나리아 군도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 글 참고) 여기서 뭔가 영감을 얻자고 했고 이런저런 지명을 생각해 봤다. 우리가 자란 곳의 영문 이름이 Canary Islands이니까 처음에는 Canary Ventures라는 이름을 생각했는데 ‘카나리아’ 새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고 – 조금 약한 느낌 – 한국사람들 한테는 까나리 액젓도 연상되는 거 같아서 pass. 까나리아 군도의 라스팔마스(Las Palmas)라는 도시에 살았으니까 Las Palmas Ventures도 고려해봤지만(영어로는 Palm Trees) “라스팔마스”는 너무 길어 발음하기가 힘들어서 pass.

그러다가 까나리아 군도의 다른 섬들 이름을 생각해봤다(참고로 까나리아 군도는 7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Fuerteventura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의 이름에서 우리 회사 이름이 나왔다. Fuerteventura를 영어로 옮기면 “fuerte = strong” , “ventura = venture(이 번역은 아주 깔끔한 번역은 아니지만 비슷하다)” 라서 Strong Ventures로 정했다.
fuerteventura
다행히도 strongvc.com 도메인이 구매 가능했고(아주 운이 좋았다), “스트롱 벤처스”라는 이름이 누구나 한번 들으면 거의 잊지 않는 이름이며 한국 사람들이 발음/기억하기에도 아주 쉬운 이름이었다. 이게 Strong Ventures 이름의 유래이다.

좋은 판단의 형성

지난 주에 벤치마크에 대해 포스팅했는데, 여기서 언급한 WSJ 기사에서 벤치마크의 파트너 Bill Gurley가 – 참고로, 많은 동료 VC의 존경을 받는 투자자다 –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올바른 판단은 경험에서 나오고, 경험은 틀린 판단에서 나온다(good judgment comes from experience, which comes from bad judgment).”

이걸 내 탐라에 올렸는데, 상당히 많은 호응을 얻었고, 많은 분이 이 말에 동의했다. 실은, 일을 좀 해 본 사람들이라면 – 특히, 스스로 뭔가를 시작한 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창업가 – 누구나 다 경험해 봤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 세련되고 멋진 말로 표현을 못 했을 것이다.

아마도 빌 걸리 본인이 벤치마크에서 좋은 회사에 많이 투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에 그만큼 실수를 많이 했고, 나쁜 투자를 많이 했고, 거기서 나온 통찰력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거 같다. 이 업계에서 “이왕 실패할 거면, 빨리 실패하고, 이왕 할 거면 아무도 모르는 작은 실패보단, 누구나 다 아는 그런 큰(=spectacular) 실패를 해라”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데, 같은 맥락인 거 같다. 실패가 커야지만, 그로 인한 쓰라린 아픔과 기억이 생기고, 이게 몸과 마음속에 남았을 때 소위 말하는 ‘경험’이 되는 거 같다. 그리고 이렇게 힘들게 얻은 경험은 미래의 좋은 결정과 판단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투자를 해 본 분이라면 누구나 다 이런 경험이 있을 텐데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7년 동안 한국과 미국의 90개 이상의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이 중 잘 엑싯한 회사도 있고, 비즈니스를 아주 잘 하는 회사도 있지만, 실은 망한 회사도 많고, 잘 안 되는 회사가 더 많다. 대부분의 펀드 상황은 비슷할 텐데, 우린 극초기 투자라서 그런지 시간이 갈수록 그 편차는 더욱더 커지는 거 같다. 우리 투자사 중 망했거나, 또는 현재 힘든 회사들을 보면 기업이 창업 순간부터 갖게 되는 태생적인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 한 거 같다. 시장의 리스크, 팀의 리스크, 펀딩의 리스크, 기술의 리스크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는 비단 벤처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런 리스크는 누구도 언제, 어떤 강도로 회사에 닥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다가 회사가 잘 안 되면 정말로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판단을 초기부터 잘 못 한 경우도 있다. 개인적인 편견, 과거의 경험, 쓸데없는 고집, 경직된 사고 등으로 인해 잘못된 투자 결정을 해서 이 회사가 잘 안 되는 경우인데,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런 경험이 적다곤 할 수 없다(여기서 구체적인 예를 하나씩 들진 않겠다). 확신을 하고 성공할 거라고 믿은 회사에 투자했는데, 앞에서 언급한 그런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투자 때문에 회사가 망한 경우가 있다. 또한, 확신을 갖고 절대로 안 된다고 판단해서 투자하지 않았는데, 이 회사가 완전 잘 된 경우도 수없이 많다. 이럴 때마다 나는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지”라는 다짐을 하고, 이후 비슷한 회사나 창업가를 볼 때 그 이전의 경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즉, 실수로 인해 경험이 생기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 좋은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런 배움의 과정은 시작과 끝이 없다. 죽을 때까지 계속 반복되면서, 경험이 더 풍부해지고, 이로 인한 판단의 정확도 또한 정교해지는 거 같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투자할 기회가 있었지만, 투자하지 않은 회사가 굉장히 잘 되면, 후회하면서 다음에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그리고 이와 거의 같은 회사를 다시 검토했을 때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투자를 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런데 또 잘 안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똑똑한 투자자라면 왜 이전 회사는 잘 됐는데 이 회사는 안 됐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계속 생각과 연구를 하면서 더 수준 높은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면 완벽한 판단을 할 순 없어도, 나중에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판단에 조금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벤치마크의 길

이 분야에서 일한다면, 특히 VC들은 대부분 읽었거나 알고 있는 내용일 텐데, 얼마 전에 Benchmark Capital의 새 펀드에 대한 기사를 WSJ에서 읽었다. 나는 벤치마크나 여기 파트너들을 개인적으로 잘 알진 못하지만, 울림이 있는 내용이라서 몇 자 적어 본다.

벤치마크 캐피탈은 역사도 깊고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존경받고 명망 있는 VC 하우스 중 하나이다. 몇 가지 숫자를 나열해보면, 2011년 이후에 벤치마크가 투자한 회사 중 10개가 IPO를 했고, 15개가 인수됐다. 엑싯한 이 25개 회사의 총가치는 60조 원 이상이고(2014년 1월 기준), 지난 10년 동안 벤치마크의 8개 펀드는 투자자에게 약 25조 원을 배분했는데 수익률이 1,000%라고 한다. 특히, 2011년도에 만든 5.5억 달러(약 6,000억 원)짜리 펀드는 우버, 스냅, 위워크와 같은 유명한 유니콘에 투자했고, 이 펀드는 투자자들의 돈을 이미 25배나 불려줬다고 한다. 모두 다 부러워하는 벤치마크가 드디어 새로운 펀드를 내년 초에 만든다고 발표했는데, 두 가지 사실이 흥미롭다.

일단 펀드 규모다. 소프트뱅크는 100조 원짜리 펀드를 만들었고, 이 영향으로 대부분의 큰 VC는 펀드 규모를 엄청나게 키우고 있다. 세쿼이아도 미국 VC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9조 원짜리 펀드를 만들고 있고, 다른 VC도 모두 몸집을 키우는 데 집중하고 있는데, 벤치마크는 원한다면 충분히 조 단위 펀드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이번 펀드도 기존 펀드와 비슷한 6,000억 원 수준일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건 타이밍이다. 시장에 워낙 돈이 많이 풀렸으니까, 많은 VC가 기존 펀드를 소진하지도 않고, 계속 신규 펀드를 만들고 있는데, 벤치마크는 서두르지 않고, 기존 펀드를 소진하고 새 펀드를 만드는, 항상 하던 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다. 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왜 벤치마크가 새 펀드를 만들지 않는지가 업계의 관심사였다.

수조 원을 쉽게 모을 수 있지만, 펀드 규모를 키우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벤치마크 6명의 파트너는 본인들이 가장 잘하는 초기 투자와 소수의 투자사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가 위해서라고 한다. VC들의 운용보수가 전체 펀드 규모의 2%임을 고려하면, 펀드 규모를 일부러 키우지 않는 건 스스로 보수를 제한하는 건데, 이것도 참 보기 드문 사례인 거 같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VC는 운용보수를 더 가져가기 위해서 능력도 없는데 일부러 펀드 규모를 키우고 여러 개의 펀드를 만드는데, 이와는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아마도 벤치마크의 파트너는 운용보수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좋은 회사에 투자해서 성과보수로 돈 벌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 거 같다.

모두 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생각으로, 돈이 있으니까 일단 펀드를 키우는데, 벤치마크의 이런 자세는 – 스스로의 철학과 색깔을 유지하면서,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계속 집중하기 – VC인 나도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분위기에 휩싸이지 말고, 나만의 색깔과 생각을 계속 유지하면서 한 우물만 파는 건 일이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