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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 로서의 시행착오

우리가 항상 투자사들한테 하는 말이 있다. 어차피 아무도 안 해봤기 때문에 해보기 전 까지는 모르니, 여러가지 가설을 설정하고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 가설들을 하나씩 입증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천천히 product fit과 market fit을 찾아가면서 자리를 잡는게 가장 이상적인 제품의 개선 과정이지 않을까 싶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또한 영원한 베타의 연속 작업이다. 나는 직접 스타트업을 운영하면서 제품을 개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도 투자자로서 이런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선배 투자자들이 조언해 주신걸 이제서야 나는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데, 솔직히 투자를 하면 할수록 성공적인 투자 기준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진다. 이 업을 시작할때는 굉장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명확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는 회사에 투자를 하면 무조건 대박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좀 달랐다. 너무나 잘 될 거라고 믿었던 회사들이 오히려 잘 안되고, 그냥 적당히 잘 하겠지 라고 생각한 회사들이 굉장히 잘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첫 인상이 별로인 회사들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것도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 실은 지난 몇 년 동안 나도 이런저런 테스팅을 하면서 투자를 했다. 가설을 많이 세우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틀린 가설들을 내 리스트에서 지워나갔다. 한때는 학벌이 좋은 창업팀에 투자를 했고, 한때는 학벌이 좋지 않은 팀에도 투자를 해봤다. 똑똑하고 말을 너무 논리있게 잘 하는 대표이사한테도 투자를 해봤고, 일부러 말을 어리버리하게 하는 대표이사한테도 투자를 해봤다. 비슷한 분야에 있는 회사들에도 투자를 해봤고, 여러 회사 중 가장 잘 할 수 있는 한 회사에 몰빵을 해 본 적도 있다.

수 많은 가설을 테스트해보고 내가 배운 건? 솔직히 별로 없다. 4년 동안 51개의 회사에 투자를 한 후에 내가 배운거라곤 투자라는게 너무나 어렵고, 변수가 워낙 많다보니 정말로 그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나한테 어떤 회사에 투자를 해야지 성공할 수 있냐 라고 물어보면 나는 자신있게 “잘 모르겠어요” 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말로 투자를 하면 할수록 잘 모르고 물음표가 더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운 건 없지만, 크게 느낀게 하나 있다. 기술도 중요하고 제품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바닥에서 남들보더 더 잘해서 성공하려면 뭔가 더 필요하다는걸 항상 느낀다. 그건 아마도 창업팀의 의지인거 같다. 이 비즈니스를 정말로 제대로 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팀인지, 그리고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분명히 계획대로 안 될 것이고 어려움이 닥칠텐데 넘어질때마다 매번 다시 일어나서 싸울 수 있는 그런 팀인지가 성공의 핵심인거 같다. 하지만 이런 의지를 가진 창업팀인지를 판단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내가 이 창업팀을 잘 모를 경우. 우리도 이런 의지를 가진 팀이라고 생각하고 투자를 했는데, 같이 일을 해보니까 형편 없었던 경우도 있고 이와는 반대로 의지가 약한 팀이라고 생각했지만 같이 일해보니까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한(=strong)’ 팀인 경우도 있었다.

그럼 이런 팀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내가 개인적으로 오래 알고 지낸,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위에서 말한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걸 시간을 통해서 내가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그런 팀들한테 투자를 했을때 이 성공 확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많이 경험했다. 얼마전에 우리는 와이파이 기반의 위치 정보 API를 제공하는 로플랫에 투자를 했다. 로플랫의 대표이사 구자형 박사는 내 고등학교 친구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 LG 전자에서 일할때부터 옆에서 봤기 때문에 좋은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는걸 나는 직접 목격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스타트업이 제품을 만들면서 product fit과 market fit을 찾듯이, 우리같은 투자자들도 최적의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통한 실험을 한다. 나도 많이 했고 지금도 계속 하고 있지만, 당분간은 이런 각도로 투자를 하지 않을까 싶다.

El Capitan

storm_widescreen-wide구글캠퍼스에는 엄마들을 위한 Google for Moms 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엄마가 되면서 휴직을 했지만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다시 직업 전선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여성분들 중 창업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한 세션에서 내가 스타트업에 투자를 한다는 건 바로 남의 배에 같이 탑승을 하는 것과 똑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탑승하기 전에는 이것저것 따지지만, 일단 배에 탑승을 하면 그 이후에는 선장과 그의 선원들에게 내 목숨을 맡겨야 한다. 그냥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들과 내가 평소 했던 생각들을 ‘배와 선장’의 프레임워크 안에서 비유하면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지난 주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이게 굉장히 좋은 비유라는걸 깨달았다.

투자하기 전에 스타트업에 대해서 실사하고, 시장 조사를 하고, 레퍼런스 체크를 한다. 실사는 마치 배를 타고 항해를 떠나기 전에 배는 어떤 재질로 만들었는지, 튼튼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거와 비슷한다. 시장 조사는 이 배가 항해할 바다의 기류는 어떤지, 항해하는 동안 풍량과 풍속은 어떤지, 가는 곳에 해적선이 출몰하는지를 조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레퍼런스 체크는 이 선장과 선원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인지, 과거의 항해 기록은 어떤지에 대해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알아보는 것과 같다. 배를 타려면 운임을 내야하는데 과연 그 비용이 합당한지, 혹시 너무 비싼건 아닌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네고하는건 마치 밸류에이션을 정하는것과 비슷하다. 어떤 배를 타고, 어떤 선장과 선원들과 항해를 떠날지 결정하는건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래 고민을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다. 바다로 들어가는 그 순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건 거의 없고 내 목숨을 이 배와 선장한테 맡겨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를 직접 만들거나, 몰아보지 않은 사람들은(=대부분의 투자자들) 아무리 사전 조사와 준비를 많이 해도 별로 소용이 없다. 배를 봐도 이 배가 튼튼한 배인지 모르고, 바다를 아무리 봐도 파도를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직접 배를 타 본 사람들이라도 바다와 날씨는 워낙 변덕스럽기 때문에 항해를 할 때마다 사정은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 배를 항해할 사람들한테 베팅을 한다.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선장한테 모든걸 맡긴다. 배가 아무리 조잡하더라도 능력있는 선장은 선원들을 설득하고 통제하면서 험한 바다를 뚫고 목적지까지 손님들을 무사히 모시기 때문이다.

우리같은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스타트업 경험이 없고, 실제 경험이 있더라도 이 바닥이 워낙 빠르게 변하고 변수가 많기 때문에 투자자가 스타트업을 성공으로 안내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시장조사를 하고 고민을 많이 해도 투자가 집행된 그 순간 부터는 우리는 남의 배를 타고, 대표이사인 그 배의 선장한테 목숨을 맡기는 것이다. 모든 투자자들은 잠잠하게 항해해서 목적지까지 무난하게 가길 원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태풍이 올 것이고,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해적선들은 우리 배에 올라와서 모두 죽이려고 할 것이다. 실은 성공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확률은 매우 낮다. 대부분의 배들은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침몰해서 전원 사망할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항해를 해야한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그 항해를 어떤 용감한 이들은 몸으로 부딪히면서 계속 도전한다. 우리같은 투자자들은 이런 선장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배를 타려고 한다. 침몰하면 어쩔 수 없이 다 같이 죽는다. 하지만, 침몰할때는 침몰하더라도 아주 멋있고, 흥분되고, 짜릿한 그런 항해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행복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친 바다 위에서 한 배를 탄 모든 사람들이 대동단결 하면서 고난을 극복하는 그러한 과정 자체가 의미가 있다.

오늘도 태풍속으로 무모하게 돌진하는 우리들의 capitan 들을 위해서.

<이미지 출처 = http://blindedbythelightt.blogspot.kr/2013/01/the-perfect-storm-how-increase-in.html>

창업 대회 채점하기

최근에 스타트업들을 심사하는 자리에 몇 번 참석했는데, 관련해서 전부터 내가 느꼈던 점에 대해서 좀 써보고 싶다. 대부분의 피칭이나 경진대회 심사를 보면, 한 장 짜리 점수표를 기반으로 스타트업들을 평가하도록 되어 있다. 점수표는 매우 그럴싸하게 만들어져 있다. 창업가의 창업성, 제품의 시장성, 매출근거의 타당성, 글로벌 진출 가능성, 기술의 독창성 등과 같은 기준들을 기반으로 이 팀을 0점에서 10점까지 각 항목에 대해서 평가 채점 해야한다.

특히 정부기관들의 행사 심사는 모두 이런 포맷의 채점표를 사용한다. 워낙 많은 회사들이 피칭을 하고, 이 회사들의 선정여부를 결정하려면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근거가 존재해아하기 때문에 나도 처음에는 이런 채점표를 가지고 평가하는게 맞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항상 채점을 끝낸 후에 전체적으로 점수들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낄때가 많다. 느낌이 굉장히 좋은 대표이사가 가능성이 많은 비즈니스에 대해서 피칭을 해서 이런 회사라면 투자검토 해볼만하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점수표를 보면 굉장히 낮게 나오고, 이와는 반대로 형편없는 비즈니스라고 생각을 했지만 점수는 상당히 높게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발생하다보면 내가 괜찮다고 생각했던 회사들한테 더 높은 점수를 주기 위해서 다시 채점을 하고 점수를 조정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스코어카드 기반의 피칭 대회의 채점 방식에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점수를 가지고 스타트업들을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현재 보다는 보이지 않는, 또는 보기 쉽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가지고 이 회사들을 평가해야하기 때문인거 같다. 지금은 볼품 없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이 높은 회사들을 점수로 평가한다는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또 다른 이유는 – 그리고 이건 점수를 가지고 채점해야하는 모든 대회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 누군가의 능력을 숫자로 표현하는건 굉장히 애매모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회사의 글로벌 가능성은 4점이고, 다른 회사의 글로벌 가능성은 6점인데 이 2점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6점을 받은 회사가 4점을 받은 회사보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가? 글로벌 시장 진출이 그렇게 흑백으로, 그리고 점수로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나는 오히려 이런 점수보다는 그냥 심사위원들이 토론을 통해서 스타트업들을 선정하는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수치는 좋지 않고, 시장에 경쟁이 치열하지만, 이러이러한 이유로 이 회사가 잘 할 수 있을거 같다.” 뭐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와 토론을 하다보면 조금은 더 피칭 대회의 의도와 맞는 방향으로 우수한 스타트업들을 선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굳이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점수표가 있어야 한다면, 시간을 많이 들여서 채점 항목들을 다시 한번 만들어 보는 방법도 있을거 같지만 나도 어떤 항목이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런 점수위주의 채점 방식이 나쁘고 틀렸다는건 아니다. 너무 주관적인 방법으로 스타트업들을 선정하면 나중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이 존재한다. 특히 공공기관에서는 더욱 그렇다. 혹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분들 중에 단순한 점수보다는 조금 더 효과적인 채점 방식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공유해 주시기 바란다.

수치에 대해서

6-common-questions-hr-metrics-answered2000년도 초에 나는 스탠포드 대학원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제 1차 벤처 거품이 터지기 바로 직전이었는데, 이 때는 사업계획서 만으로도 펀딩을 받는 회사들이 주위에 꽤 있었다. 워드로 만든 50장 – 100장 짜리 사업계획서를 읽다보면 이 회사가 정말 잘 될 거 같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 정도로 자세하고 잘 만들어진 자료들이었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이런 소설같은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투자자들을 만나는 창업가들은 거의 없다. 투자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 보다는 행동이 더 효과적이라서 다들 실제 제품을 개발하고 고객을 만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고, 이렇게 하는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비즈니스를 누가 하고 있고, 어떤 시장을 공략하고 있고, 어떻게 현존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할지에 대한 간략한 자료는 준비하는게 좋다. 나도 지겹도록 회사소개서들을 많이 보는데, 한정된 시간 동안 너무 많은 비즈니스들을 보다보니 글씨보다는 그림이나 수치들을 선호한다. 창업을 하고 제품을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시장에서 실행을 해 본 팀이라면 누구나 다 기본적인 수치를 갖고 있을 것이다. 모바일 제품이라면 DAU, MAU, 체류시간 등과 같은 수치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웹서비스라면 UV, PV, 리텐션, 재방문율 등의 수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론 매출이나 ARPU와 같은 수치는 기본이다.

소개자료에 이런 수치들이 들어가 있다면,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게 있다. 각 수치에 대한 정의를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수치들의 기본적인 의미는 정의되어 있지만, 운영하는 서비스와 회사의 기준들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나기 때문이다. 가령, 50%의 재방문율이라는 수치가 나한테 크게 와 닿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전체 유저의 절반이 매일 재방문을 하는건지,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이상 방문을 하는건지, 아니면 일 년에 한 번 이상 방문을 하는건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사용자의 절반이 매일 재방문을 하는 제품이라면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한 달에 두 번 방문을 하는 거라면…뭐, 서비스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다.

매출도 마찬가지이다. 쿠팡이나 지마켓과 같이 다른 업체들이 입점해서 물건을 판매하는 오픈마켓의 경우, 어떤 회사들은 전체 ‘거래액’을 ‘매출’로 잡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하면 매출이 조 단위가 나온다. 하지만, ‘판매수수료’를 ‘매출’로 잡는 회사들은 매출이 수 백억원 또는 수 천억원 단위로 잡힌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수치를 말할때는 정확한 정의도 설명해줬으면 좋겠다.

또 한가지는, 회사와 서비스의 성격에 따라서 그 비즈니스한테 중요한 수치들이 다를텐데, 이 또한 창업가들이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같은 전자상거래 회사라도 비전과 카테고리에 따라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수치들은 다를 수 있다. 모든 걸 판매하고 규모의 성장을 중요시 하는 전자상거래 업체라면 전체거래액이나 절대적인 사용자 수를 우선시 할 수 있지만, 특이하고 한정적인 제품만을 판매하는 전자상거래 업체한테는 절대적인 사용자 수 보다는 – 어차피, 비싸고 특이한 제품을 구매하려는 고객의 수는 많지 않으니까 – 사용자 당 평균 구매액이나 재구매율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창업가들은 회사 설립을 하자마자 우리 회사한테 가장 중요한 수치들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이 수치들을 종교와도 같이 열심히 측정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 http://www.halogensoftware.com/ae/learn/centers-of-excellence/hr-metrics>

서로에 대한 존중

스트롱벤처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VC는 아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VC도 아니다. 아직 역사도 짧고, 우리는 정말 잘 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우리보다 더 잘하는 훌륭한 투자사들이 너무 많다. 개인적으로도 나는 최고의 투자자는 아니다. 실은 실적으로 보나, 인간적인 성품으로 보나, 이와는 거리가 많이 멀다. 잘 하고 싶고, 최선을 다 한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알파고가 아니라서 항상 틀리고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디가서 막 욕을 먹지는 않는다(그런거 같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신뢰와 존중을 가지고 일 하고, 이 바닥에서는 잘 될 때보다는 잘 안 될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기 때문에 항상 투자사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리고 상식 밖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할 필요도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VC 들이 많다. 창업자들한테 VC는 아주 중요하고, 어떻게 보면 생명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VC가 자기 돈을 가지고 투자하는 건 아니지만, 어쨋든 회사의 생명줄인 돈줄을 잡았다 폈다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 보여야 하고 VC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항상 최선을 다한다. 이런 창업가들은 우리같은 VC들 한테는 매일 만나는 수 많은 스타트업 중 하나이지만, 창업가들에게 VC는 정말로 만나기 힘들고,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짧은 미팅을 위해서 몇 일을 고민하고 준비해야하는, 그런 존재이다.

우리 투자사들도 요새 펀드레이징 한다고 정말 바쁘다. 운이 좋아서 순조롭게 진행되는 회사들도 있지만, 대부분 잘 안되고 힘들어 한다. 이 중 한 회사가 어떤 VC에게 최종 발표를 했다. 한국에서는 이걸 최종 IR 미팅이라고 하는거 같다. 그 창투사의 사장을 포함한 모든 임원들이 참석했고, 우리 투자사 대표는 혼신을 다해서 만든 자료를 열변을 토하면서 발표했다. 모든 임원들이 좋아했고 okay를 했는데, 단 한 명이 – 대표이사가 – 반대를 해서 결국 통과하지 못 했다. 아무리 대표이사라지만, 다른 임원/파트너들이 다 찬성을 하는데 혼자 반대한다고 투자가 성사되지 않는것도 좀 희한하지만, 뭐 회사의 방침이 다 다르니 이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대표이사가 왜 반대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그냥 무조건 싫다고 하는데, 이건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임원들도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대표이사가 반대해서 안 되니, 미안하고 그동안 고생했다 하면서 그냥 그렇게 투심 미팅은 종료되었다.

이게 첫번째 미팅이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동안 오래 이야기를 했고, 여러 번 만났고, 내부적으로 괜찮으니 전체 파트너쉽 투심 미팅을 하게 된 거다. 여기에 우리 투자사 대표가 쏟아부은 시간, 노력, 노심초사, 마음고생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최종 투자 미팅에서는 당연히 찬성과 반대가 있을테고, 반대가 많으면 딜이 성사가 안 되는 건 당연하다. 내가 화가 나는 건 투자가 성사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최종 미팅까지 왔는데 투자가 결렬되면, 최소한 왜 안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창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아주 잘 설명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목숨을 바쳐서 일을 하고, 이 미팅을 위해서 정말 혼신의 힘을 다 바친 이 젊은이에게 우리 같은 투자자들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아니, 이건 투자자 대 창업가가 아니라 그냥 같은 인간 대 인간의 기본적인 에티켓이다. 그냥 이렇게 끝내는 건 정말 아니라고 본다.

우리 투자사 대표는 이제 VC 들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될 것이다. 좋지 않은 소문은 빠르게 퍼지고, 이렇게 되면 나는 한국의 전체 벤처 생태계에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은 투자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VC 투자를 돈 따먹기로 생각한다면 가능하겠지만, VC 투자는 단순한 돈 따먹기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투자자와 창업가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갖고 일을 해야한다. 위에서 말 한 대로 나도 존경받는 대단한 VC는 아니지만, 이런 투자자들 때문에 우리같이 선량한? 투자자들도 싸잡아서 욕을 먹는다. 참고로, 이 업계에는 나쁜 VC 보다는 좋은 VC 들이 훨씬 많다는 이야기는 해주고 싶고, 운이 좋지 않았던 우리 투자사 대표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면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