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전략이 될 때

미국에서 온 친한 VC랑 최근에 투자를 받아서 당장 돈이 필요 없는 벤처가 또 급하게 펀드레이징을 굳이 할 필요가 있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투자를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통장에 현금이 꽤 넉넉하게 있고, 비즈니스도 나쁘지 않게 되고 있는 우리 투자사가 있는데, 나는 이 회사가 당장은 돈 걱정이 없으니까 제품 개발과 고객 발굴에 더 집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돈 떨어지기 한 6개월 전부터 다시 시장에 나가서 투자유치를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내 친구는 투자는 필요할 때 받지 말고, 돈을 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때 받는 게 가장 좋고, 이 회사는 현재 성장도 좋고 지표도 좋으니까, 지금 당장 투자를 받아도 창업가들이 원하는 조건에 투자를 받을 수 있으니, 지금 투자를 받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본을 단순히 돈으로 보지 말고, “자본을 돈이 아닌, 전략으로 사용하자”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얼마 전에 쿠팡이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받은 2조 원을 사례로 사용하면 좋을 거 같다. 실은 나도 인사이더는 아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쿠팡이 원래 필요했던 금액은 이 정도는 아니였다고 한다. 2조 원 까지 유치할 계획이 아니었지만, 소프트뱅크에서 그냥 더 많이 받으라고 주장했던 배경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시장에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돈 엄청 많아. 너네 덤비려면 덤벼봐.” 즉, 자본을 전략으로 사용하는 건데, 다른 경쟁사들이 쉽게 카피할 수 없는 그런 전략 – 혹자는 돈지랄이라고 하는 – 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소식이 시장에 전달되자마자, 쿠팡의 경쟁사들은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스스로 벌어서 그 돈으로 회사 운영하고, 마케팅해야 하는데, 쿠팡은 그냥 쓸 수 있는 돈이 마치 2조 원이나 있으니, 게임 끝났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어떤 회사들은 그냥 백기를 들거나, 핵심 인력이 다른 회사로 갔다고 한다.

그렇다고 쿠팡이 돈이 엄청 많아서 이 투자금이 전혀 필요 없었던 건 아니다. 성장에 집중하면서 계속 손실이 나고 있었기 때문에 큰 투자금이 필요한 건 맞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투자를 받은 배경 뒤에는 자본을 전략으로 사용하는 논리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더 큰 펀드를 운용하고, 나보다 더 큰 시장에서 더 복잡하고 정교한 투자를 하는 VC한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펀드레이징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에도 조금 변화가 생겼다. 돈이 필요하면 투자받지만, 굳이 돈이 필요 없으면 비즈니스에만 집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아직도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사업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경쟁사들이 나랑 경쟁하는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시장에 우리가 이 분야에서 제일 잘 나가는 회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돈 자체를 위한 펀드레이징이 아닌, 전략으로서 펀드레이징을 활용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방법인 거 같다. 물론, 밸류에이션과 같은 조건이 맞다면.

행동의 가치

우리가 올해 투자한 회사 중 유아동복을 리세일(=중고위탁판매)하는 코너마켓이라는 스타트업이 있다. 미국에서는 엄청 커진 thredUP과 유사한 비즈니스다. 얼마 전에 코너마켓 새로 이사한 사무실에 갔다가 개인적으로 생각난 점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

이 회사 김준모 대표님을 처음 만난 건 한 2년 전이다. 내가 벤처파트너로 활동하고 있는 프라이머에 지원했고, 그때 비즈니스는 자전거 관련 사업이었는데, 잘 안 될 것 같았고, 그냥 하다가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프라이머 그다음 배치에 다시 지원했다. 그게 코너마켓 모델이었는데, 이 비즈니스가 좋았다기 보단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업을 하고 있고, 프라이머 탈락했지만 다시 지원해준 게 고맙기도 해서 또 인터뷰를 했다. 나는 미국의 thredUP 이라는 비즈니스를 알고 있었고, 이 시장이 한국도 엄청 클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이 팀은 준비가 되지 않은 거 같았고, 과연 이 비즈니스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온라인/오프라인 실행력이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비즈니스는 좋고, 시장도 좋고, 타이밍도 좋은데, 조금만 더 지켜보자라는 결정을 내렸고, 일단 프라이머 두 번째 도전도 탈락시켰다. 그런데 그다음 배치에 다시 지원했고, 이번에는 코너마켓 모델을 꽤 날카롭게 다듬었고, 긍정적인 초기 시장 피드백을 갖고 왔다. 프라이머 권도균 대표님과 이기하 파트너님과 그때 아마도 내부적으로 “비즈니스는 실력보단 의지가 중요한데, 이 팀의 의지는 좋은 거 같다. 그리고 3번씩 프라이머 지원했으면, 우리가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고 이번에는 선발했다.

그리고 나랑 한 3개월 정도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비즈니스도 다듬고, 여러 가지 기초 작업하는 걸 옆에서 나는 조금 도와줬다. 실은 이게 앞단에서 보면 이커머스지만, 뒷 단에서 보면 노가다가 많이 들어가는 사업이다. 옷을 수거해야 하고, 수거한 옷을 정리하고, 사이트에 올리고, 판매될 때마다 또 배송해야 하기 때문에, 전형적인 물류, unit economics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힘든 비즈니스라서, 돈 없는 작은 스타트업이 하기에는 참 어렵다는 걸 이 비즈니스를 옆에서 보면서 나도 매일같이 느꼈다. 그래도 조금씩, 계속 발전이 있었다. 외형적인 매출도 조금씩 증가했지만, founder들이 비용과 물류에 대한 감을 조금씩 잡아갔고, 아주 작은 operation이었지만, 나름대로의 공식을 찾기 위해서 계속 실험하는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이 회사에 투자를 해야겠다고 결정한 계기는, 수거한 옷이 증가하면서, 작은 창고로 사용할 수 있는 새로 이사한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였던 거 같다. 중랑구 중화동, 1층에 닭강정집이 있고, 3층에 과격한 순복음 교회가 있는 허름한 건물의 4층이었다. 작은 공간이었지만, 물류 과정을 최적화하기 위해서 나름 배치를 잘했고, 두 분의 남매 코파운더가 진흙탕에서(영어로는 shithole이라고도 한다) 구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몸으로 체험하면서 모든 걸 배워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런 프로세스를 자동화하고 더 크게 확장하면 어떤 모습이 될지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그림을 그렸고, 얼마 후에 스트롱에서 조금 투자를 했다.

이후 처리해야 할 물량이 커지면서, 다시 한번 회사는 이사를 갔다. 돈을 아끼면서, 사람도 채용하고, 배송도 고려해서 경기도 남양주의 창고형 사무실로 이사 갔는데, 얼마 전에 내가 방문해서 찍은 사진 몇 개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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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많이 놀랐다. 이젠 제법 옷이 많아져서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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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래는 단층이었던 창고를 김준모 대표가 직접 설계해서 – 과거에 설계를 좀 했었다 – 복층으로 만들었는데, 이 또한 운영의 최적화를 고려한 설계였다.

아직 갈 길이 너무너무 멀긴 하다. 앞으로 투자도 더 받아야 하고, 매출도 더 커져야 하고, 좋은 사람도 많이 채용해야 한다. 그래도 쉽지 않은 사업이다. 하지만, 누가 이미 만들어 놓은 회사에 들어가서, 이미 오랜 세월 동안 하던 일을 배운 팀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경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좋다. 말 잘하는 사람도 멋있고, 말이 창출하는 가치가 있지만, 행동이 만드는 가치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방법, 같은 결과

일을 하다 보면, 또는 그냥 살다 보면, “그건 원래 그렇게 하는 거야”라는 말을 우린 자주 듣는다. 대부분 사람에게는 이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것이고, “아, 원래 그런 거구나”라면서 별 생각 없이 항상 남들이 하던 방식대로,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하던 방식대로 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우리가 만나는 많은 창업가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을 매우 싫어하고, “왜 저럴까? 조금 다른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상당히 많이 하면서, 계속 새로운 방법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대부분 새로운 방법을 찾는 데 실패하지만, 극소수는 성공하고, 여기서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운 좋으면 이 기회는 큰 비즈니스가 된다. 그리고 다른 방법을 찾는 데 실패한 창업가들도 그동안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뭔가 새로운 기회를 찾는 걸 우린 너무 자주 경험하기 때문에 만나는 모든 창업가한테 계속 뭔가 새롭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남들한테는 터무니없어 보이겠지만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하라고 권장한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을 보면, 나는 이렇게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요새 많이 느낀다. 벤처캐피탈의 역사는 비교적 짧지만, 이 또한 남의 돈을 관리하는 업이고, 남의 돈을 관리하는 펀드 운용의 역사는 오래됐기 때문에, 그 오랜 기간 동안 교과서같이 만들어진 펀드 관리 공식과 방법론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하면서 그냥 나도 모르게, “이건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남들도 다 이렇게 해 왔고, 나도 그동안 이렇게 했으니까 그냥 계속 이렇게 하면 돼”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뭐, 그렇다고 이게 틀린건 아니다. ‘원래 그런’ 방식으로도 투자 잘 하고, 돈 잘 버는 VC가 많고, 이렇게 한다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원래 그렇게 하는거니까. 나쁘게 말하면 매너리즘에 빠지고 게으름 피는거고, 좋게 말하면 오랜 세월 동안 증명된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항상 하던 방식으로 하면, 결과 또한 항상 같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면 결과가 더 좋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지만, 같은 방법으로 일을 하면, 결과는 같다. 최근에 우리가 투자 결정한 딜이 있는데, 이걸 어느 펀드에서 어떤 방법으로 투자를 해야 할지에 대해서 존이랑 이야기하다가, 그냥 우리가 원래 하던 방법으로 하자고 내가 주장을 했다. 그냥 익숙한 방법이었고, 과거에도 그렇게 해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뭔가 익숙지 않은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거 자체가 좀 귀찮기도 했던 거 같다. 그때 존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투자사 대표한테 항상 새롭고 열린 시각을 갖고, 항상 다른 방법을 시도하면서 스스로 disrupt 하라고 하는데, 우리도 똑같이 해보자. 이제 이 짓 7년째 하고 있는데, 우리도 계속 새로운 방법 시도하면서 조금씩 스스로 disrupt 하자. 그래야지만 이 게임에서 상위권에 머물 수 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아주 적절한 시점에 필요했던, 훌륭한 지적이자 자극이었다.

클럽딜에 대한 내 생각

얼마 전에 회사를 하나 검토하고 있었는데, 꽤 괜찮은 회사여서 우리 외에 다른 VC도 검토하면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딜을 스트롱이 다 가져가거나, 아니면 같이 투자해도 우리가 더 많은 지분을 가져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떤 젊은 친구가 나한테, “대표님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그냥 5개 VC가 같이 사이좋게 동일한 금액 나눠 가져서 ‘클럽딜’을 하면 되잖아요.”라는 제안을 했다. 무슨 말이냐면, 다 같이 사이좋게 투자하면 좋지 않냐, 그리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초기 투자인데 다 같이 동일하게 투자해서 리스크를 분산하자, 뭐 그런 의미인 거 같다. 그리고 VC 업계에서도 나이가 같은 VC 친구들이 친하게 지내는 모임이 많은데, 이 모임에서 주로 딜 이야기를 많이 하고, 그냥 하우스끼리 친하게 클럽딜을 자주 같이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이런 일방적인 n빵 클럽딜은 VC나 투자사 모두에게 매우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는 스타트업한테는 독이 되고, VC에게는 스스로 제 살 깎아 먹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VC는 기본적으로 업사이드를 극대화하는 비즈니스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VC라도 손대는 회사마다 다 잘 될 수가 없다. 딜 갯수로 따지면, 잘 안되는 투자사가 잘 되는 투자사보다 훨씬 많지만, 나름의 철학을 갖고 좋은 투자를 하다 보면, 소수의 잘 되는 투자사가 다수의 잘 안되는 투자사의 손실을 다 충당할 수 있다. 아니, 엄청난 수익을 만들어서, 실패한 투자로 인한 손실이 까마득한 소수점이 될 수가 있는 흥미로운 비즈니스이다. 이런 특성을 갖다 보니, 정말 좋은 회사라면 내가 이 회사의 지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누군가 같이 사이좋게 클럽딜을 하자고 제안을 해도, 이걸 거절하고 나 혼자 투자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20억짜리 라운드를 5개의 VC가 그냥 사이좋게 4억씩 나눠 갖는 건 이런 엄청난 수익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물론, 클럽딜의 배경은 나도 이해한다. 극초기 회사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위험이 존재하니 이 리스크를 서로 분산시키자는 – 그것도 나랑 개인적으로 친한 투자자끼리 – 의미이지만, 그렇게 리스크가 커서 겁나면 그냥 투자하지 않는 게 더 정상적이다. 심지어 혼자서 다 투자할 수 있음에도, 굳이 클럽딜로 가는 투자자의 성향을 보면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투자전략을 추구한다. 이게 만약에 상장사 주식을 트레이딩 하는 투자자라면,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이 맞지만, 벤처투자자한테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은 의미가 없다. 벤처투자는 수익을 극대화해서 최대한 홈런을 치는 비즈니스이다. 뒤에서는 투자사들이 계속 망하고, 손실이 발생하지만, 앞에서는 손실이 발생하는 경사보다 훨씬 더 가파른 기울기로 수익이 만들어져야 성공할 수 있다. 클럽딜을 너무 좋아하면, 본인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이 투자자를 믿고 돈을 출자한 LP들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은, 클럽딜과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에는 다른 배경도 있긴 하다. 본인이 발굴해서 투자한 딜이 대박이 나도, 파트너가 아닌 주니어 VC는 성공보수를 받지 못하는 구조로 돌아가는 하우스가 있는데, 이런 곳에서 일하면 굳이 내가 아닌 남(=회사 파트너들) 좋은 일만 위해서 수익을 극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 그리고 본인이 밀어서 투자를 했는데, 회사가 잘 안 되면, 이에 대한 책임은 엄청 타이트하게 추궁하는 하우스가 있는데, 이런 곳에서 일하면 당연히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기반으로 투자를 한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VC라면, 제대로 벤처투자를 하기가 너무 힘들 거 같다.

클럽딜은 투자사한테도 최악이다. 누군가 딜을 리드하면서 조건을 정하고, 책임을 지고 라운드를 진행해야 하는데, 여러 투자사가 같은 금액으로 들어오면, 투자자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고, 회사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대표이사는 이걸 어떤 투자자와 상의를 하고 도움을 구해야 할지 매우 당황스럽다. 또한, 이러면 기존 투자자들이 후속 투자를 할 수 있는 구조가 안 만들어져서, 새로운 펀딩라운드가 시작되면, 대표이사는 다시 맨땅부터 투자자를 모집하는 고생을 해야 한다.

투자는 친목사교활동이 아니다. 남의 돈을 갖고 – 그것도 수십억, 수백억 원 – 이 돈으로 큰 기업이 탄생하는 걸 도와주고, 나를 믿고 돈을 준 고마운 분들에게 돈을 많이 벌어다 줘야 하는 비즈니스이다.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일방적인 클럽딜은 이 분야에서는 성공할 수 있는 방정식과 거리가 매우 멀다.

벤처펀드와 헤지펀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운용하는 벤처펀드는 큰 맥락에서 보면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라는 큰 카테고리에 속하는 펀드인데, 얼마 전에 누가 헤지펀드랑 벤처펀드에 대해 물어봐서 – 그리고 이 질문은 꽤 자주 받는 질문이라서 – 대충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이 두 펀드의 차이점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만 몇 자 적어본다.

일단 두 펀드 모두 공모가 아닌 사모를 통해서 LP라고 하는 출자자(=펀드에 투자하는 사람 또는 기관)들로부터 돈을 모집하고, 모집한 펀드에서 투자도 하고, 월급도 받고 비용도 집행한다는 점에서는 같은데, 가장 큰 차이점은 유동성의 차이인 거 같다. 스트롱벤처스와 같은 벤처 펀드는 “약정”의 개념을 사용하는데, A 기관이 우리 펀드에 10억 원을 약정하는 시나리오를 예로 사용해보겠다. 미국 벤처 펀드의 기간은 주로 10년이다. 즉, 나 같은 펀드매니저들이 LP들로부터 약정받은 금액을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투자 집행하고, A라는 기관이 약정한 총 10억 원을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특정 시점에 필요한 금액만큼 달라고 한다. 그리고 펀드에 출자한 LP들은 본인들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본인이 원할 때 이 약정한 금액을 다시 돌려받을 수가 없다. 즉, 벤처펀드는 유동성이 약하다는 의미이다. LP들이 낸 돈을 돌려받는 방법은, 우리가 투자한 회사가 exit을 하면, 그때 이 금액에 따라서 회수할 수 있지만 이 시점을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벤처펀드에 출자하면 최소 10년은 유동성이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실은, 우리 같은 벤처펀드가 이렇게 오랫동안 유동성이 없게 설계된 이유는 창업가들이 비즈니스를 만드는 과정은 매우 리스키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런 비즈니스에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자금을 제공해 주기 위함이다.

헤지펀드는 벤처펀드보다 유동성이 높은 편이다. 헤지펀드 LP들은 주로 출자 1년 후에 투자금 일부 또는 전부를 찾아갈 수 있고, 이와 비슷하게 펀드매니저들은 언제든지 새로운 LP한테 출자를 받을 수 있다. 이런 구조 때문에 – LP들이 계속 돈을 집어넣고, 빼가기 때문에 – “우리 펀드는 얼마짜리입니다”라고 하는 벤처펀드와 달리 헤지펀드의 운용자산규모는 유동적으로 항상 변한다. 그리고 시장이 좋지 않아서 투자금을 회수하거나, 갑자기 LP들이 대거로 출자금을 빼달라고 하면, 헤지펀드 자체를 해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유동성 말고 또 다른점은 아마도 펀드매니저들이 보수를 받는 구조인 거 같다. 일단 벤처펀드나 헤지펀드나, 우리같이 돈을 관리하는 매니저들은 흔히 말하는 2-20의 보수 시스템(전체 펀드의 2%가 관리보수, 20%가 성과보수)을 사용한다. 100억 원짜리 벤처펀드의 예를 들면, 100억 원의 2%인 2억 원의 관리보수로 펀드를 운용하고(월급, 월세, 출장, 경비 등), 투자를 잘해서 펀드의 원금 100억 원을 LP들에 상환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원금을 초과하는 수익의 20%를 성과보수로 가져가게 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VC는 펀드에서 나오는 관리보수가 아니라 성공적인 투자 때문에 받게 되는 성과보수로 돈을 버는 직업이다. 이 2-20 시스템은 벤처펀드나 헤지펀드나 같지만, 벤처펀드의 관리보수는 펀드의 총 약정액을 기반으로 책정되며, 성과보수 또한 주로 총 약정액을 LP들에게 상환한 이후에 적용된다. 즉, 위의 100억 원의 펀드에서 투자한 스타트업의 기업가치가 상승해서 100억 원 펀드의 가치가 1조 원이 되어도 관리보수는 2억 원이며, 종이 상으로는 펀드의 가치가 1조 원이지만, 원금 100억 원을 LP들에게 상환하지 못했으면 성과보수는 0원이다.

헤지펀드는 조금 다르다. 분기마다 펀드의 NAV(Net Asset Value: 순자산가치)를 계산하고, 이 금액을 기반으로 관리보수가 계산된다. 벤처펀드는 펀드의 자산가치와는 상관없이 고정적인 관리보수를 가져가지만, 헤지펀드는 펀드의 자산가치가 높아지면 관리보수도 높아지고, 낮아지면 관리보수도 낮아진다. 헤지펀드의 성과보수는 원금 상환과는 상관없이 해마다 순자산가치의 종이 수익을 기반으로 계산된다. 벤처펀드는 LP들에게 종이 상 수익이 아닌 실제 수익을 배분해야지만 성과보수를 받게 되지만, 헤지펀드는 종이 상 수익이 발생해도 성과보수를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외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지만, 위에서 말한 유동성과 보수가 아마도 벤처펀드와 헤지펀드의 가장 큰 차이 일 거 같다. 그리고 이런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같은 벤처펀드 매니저들은 장기적인 관점의 투자를 할 수 있고, 헤지펀드 매니저들은 단기적인 수익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다. 벤처펀드는 시장의 영향을 덜 받으면서 오랫동안 투자를 집행하는 반면, 헤지펀드는 시장이 변할 때마다 사고팔기를 계속한다. 물론, 두 펀드 모두 LP들에게 큰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데, 투자자의 성향에 따라서 선호도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걸 자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