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곡점과 팀

많은 VC가 ‘사람’과 ‘팀’을 보고 투자한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 미팅하면서 어떤 창업가가 “스트롱은 팀에 투자한다고 들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아주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때 내가 했던 이야기를 여기에 몇 자 적어본다.

일단 우리랑 팀이 인간적으로 서로 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구체적이지 못 하지만, 이 비즈니스는 사람이 사람한테 투자하는 거라서, 서로 잘 맞아야 한다. 어떤 팀이 인간적으로 우리한테 끌리는가를 물어본다면, 이건 정말 과학이라기보단 예술과 감의 영역이라서 여기서 글로 풀어서 설명은 못 하겠다. 그리고 이런 팀은 팀원 대부분이 서로를 오랫동안, 깊게 알고 지냈다. 학교 동창들, 전 직장동료들, 같은 동네 친구들, 친구의 친구들 등등…관계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서로를 잘 알고, 이렇게 서로를 잘 알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일을 함께 겪었던 사람들이다. 대학 동창이면 인간적으로 산전수전 다 겪었고, 직장 동료면 일적으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 이렇게 산전수전을 겪다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 down 시점에 팀워크가 상당히 강하다는 게 특징이다. 웬만한 상황에 부딪혀도 끄떡없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좋은 일이 생겨도 잘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팀원은 웬만하면 깨지지 않는다.

자, 그러면 이게 왜 중요한가? 사업을 하다 보면, up과 down이 많은데, 주로 항상 down, down, down이다. 어쩌다가 운이 좋으면 up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역동적인 나날을 보내면서 열심히 하다 보면, 사업의 변곡점들이 가끔 찾아온다. 내 경험에 의하면, 좋은 팀은 이 변곡점이 온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차리고, 이를 계기로 비즈니스를 그다음 레벨로 가져간다. 그리고 다시 down, down, down, down, up, down, down 뭐 이런 사이클을 거치다가 우연히 또 변곡점이 찾아오면, 이를 또 금방 알아차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러면서 큰 비즈니스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반면에 팀이 후지면, 이런 변곡점이 찾아와도 이게 1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 한다는 걸 나는 많이 봤다. 또는, 알아차려도 이 변곡점을 기회로 활용해서 뭔가 잘 되게 하는 힘이 약한 것도 나는 옆에서 본 적이 많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팀에만 투자한 건 아니다. 스트롱의 투자는 계속 진행 중이고, 우리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른 벤처기업같이 VC의 product-market fit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실수하면서 배우고 있지만, 이런 좋은 팀을 만나면 시장의 크기나 제품을 떠나서, 가능하면 투자하려고 이유를 만든다.

마지막으로…내가 나랑 인간적으로 케미가 맞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하면 많은 창업가가 도대체 저렇게 정량적이지 못 한 기준으로 팀을 판단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투자자인가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으면, 비즈니스의 결과를 떠나서, 같이 일하면서 비즈니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나는 되도록 우리랑 케미가 맞는 팀을 선호한다.

좋을 딜을 위한 나쁜 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북미정상회담은 많은 사람이 원하는 결과로 끝나진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트남을 떠나면서 “나쁜 딜 보단, 노 딜이 낫다”는 너무나 딜메이커다운 말을 남겼는데, 실은 이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 누구도 나쁜 딜을 하고 싶어 하진 않고, 손해 보는 딜을 할 바에야 딜을 하지 않는 게 훨씬 좋다. 우리가 하는 벤처투자도 마찬가지다. 나쁜 투자를 해서 돈을 잃기보단 그냥 투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여러모로 좋다.

그런데 벤처투자는 – 특히, 초기 투자는 – 이게 말처럼 쉽진 않다. VC들끼리 하는 농담 중 하나가, “모든 VC의 첫 번째 펀드는, 그리고 어쩌면 두 번째 펀드까지, 대부분 수업료다”인데, 그만큼 좋은 딜을 발굴하고 투자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내 짧은 경험에 비춰봐도, 벤처 투자를 시작하고 한 4년 정도 이 바닥에서 구르고, 실수하고, 나쁜 판단을 해야지만,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초체력이 만들어지는 게 정말 맞는 말인 거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말한 대로 나쁜 딜 보단, 노 딜이 낫지만, 나쁜 딜을 많이 해야지만 좋은 딜을 할 수 있고, 노 딜만 하다 보면 좋은 딜은 절대로 못 한다. 왜 그럴까? 내가 다른 VC를 대변할 순 없지만,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우리같이 작은 초기 투자자한테 더 잘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일단 초기 투자의 성공은 확률과 운의 게임인 거 같다. 이제 유니콘이 된 회사에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돈을 제공한 투자자들과 사적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해보면 – 공적인 자리에서는 본인들이 그 회사의 미래를 예측했고 창업가의 포텐을 첫 만남에서 알아봤다고 하는 개소리를 가끔 하기 때문에 – 그냥 느낌이 좋았고, 여기에 베팅했고, 그게 운이 좋아서 잘 풀렸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우리 포트폴리오에는 아직 유니콘이 된 스타트업이 없지만, 잘 하는 회사를 보면 나한테도 이 확률과 운의 게임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거 같다. 즉, 많이 투자해야지, 그중에서 확률적으로 잘 될만한 회사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그냥 돈을 막 뿌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험과 통찰력과 네트워크로 만들어진 투자자의 능력이 어느 정도는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 능력이 만들어지려면 역시 많은 투자를 통해서 단맛 쓴맛 모두 경험을 해야한다. 여기에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순 없을 거 같다. 많은 분이 베이브 루스가 홈런왕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삼진도 많이 당했다는 건 잘 모르는 거 같다. 그만큼 배트를 많이 휘둘렀기 때문에 홈런도 확률적으로 많이 칠 수 있었던 거다.

두 번째 이유는, 이렇게 나쁜 딜을 많이 하면서, 가끔 운이 좋으면 좋은 딜도 하고, 뭐 이러면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이 살아남은 실적 자체가 고스란히 투자자의 평판이 된다. 위에서 초기 투자 성공은 운과 확률의 게임이라고 했는데, 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좋은 창업가와 좋은 팀이 알아서 투자자를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VC라도, 그리고 아무리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했더라도, 모든 스타트업을 다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직접 모든 회사를 다 찾아다니면서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본인이 좋은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좋은 딜이 나한테 수동적으로 오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평판이 필요하다. 우리가 잘 아는 미국의 세쿼이아나 앤드리슨호로위츠와 같은 유명한 VC가 좋은 회사에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이유는 중 하나는 바로 좋은 창업가들이 VC의 평판을 믿고 먼저 연락하고 찾아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평판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린다. 아니,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 이 긴 시간 동안 계속 투자를 꾸준히 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쁜 딜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만약, 나쁜 딜을 하지 않으려고, 전혀 투자하지 않으면, 펀드의 원금은 보존하겠지만, 투자자로서의 가치는 떨어지고 평판 자체가 아예 생기지 않는다. 나도 자주 하는 말이지만, VC 평판에 최악의 영향을 미치는 건 나쁜 투자를 많이 한 것보단, 아예 투자하지 않는 것이다. 투자를 아예 안 하면, 창업가 커뮤니티에서 잊히고, 이러다 보면 좋은 창업가들이 아예 찾아주지 않기 때문에 굿 딜을 하는 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나쁜 딜을 많이 해도, 투자를 계속하면, 그래도 딜들이 계속 들어오긴 한다. 물론, 여기서 옥석을 가리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만.

뭐, 결론은…투자는 참 어렵다는 이야기다. 나도 나쁜 딜은 하기 싫고, 나쁜 딜을 할 바에야 아예 딜을 하지 않고 싶지만, 이 다이나믹한 초기 투자 시장에서는 나쁜 딜은 좋은 딜을 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무나도 존경하는 워렌 버핏이 자주 하는 말 중, “공이 지나갈 때마다 휘두르지 마라”라는 말이 있고 나도 이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지만, 초기 투자를 많이 할수록 이 말은 우리한테는 잘 안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외부 의존도가 100% 이면

요새 카카오와 타다/쏘카가 택시 조합과 정부와 싸우는 걸 보면서 정말 한국은 필요 이상의 규제가 너무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규제와 싸우는 것만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지만, 나는 타다가 끝까지 버티면서 싸워주길 개인적으로는 내심 바라고 있다. 모빌리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닌데, 이 분야 말고도 정부의 규제가 스타트업의 발목을 묶는 분야는 상당히 많다. 규제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고 있는 기존 플레이어가 존재하는 분야가 대부분이다. 이걸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겠지만, 나는 정부의 규제가 소비자를 보호하기보단, 그냥 기존 플레이어들을 – 주로 대기업 또는 대량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체 –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요새 더욱더 하고 있다.

규제가 심한 산업에서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에게는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힘도 없는 스타트업은 더 큰 기존 플레이어와 경쟁하는 것도 벅찬데, 여기에 규제까지 골리앗을 돕는다면 작은 회사는 생존의 위협마저 느낄 것이다. 한 1년 전에 이런 규제 때문에 발목이 묶인 산업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대표를 만난 적이 있다. 좋은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지만, 사업을 너무 이상적으로 바라본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고, “정부에서 이것만 해주면…” 이라는 말을 계속했다. 대기업을 보호하고 자기 사업을 가로막는 규제를 정부 부처에서 곧 없앨 것이라는 발표를 했기 때문에, 규제가 없어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고, 이렇게 되면 오랫동안 준비한 사업이 커져서 대박 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가 이 분과 조금 더 이야기해보니, 정부에서 이와 비슷한 발표를 한 건 맞지만, “규제 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라고 말 한 거지 당장 규제를 없애겠다고 말한 건 아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 이후에는 실제로 스타트업한테 유리하게 규제를 완화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거센 반대에 부딪혀서 1년이 넘은 이 시점에도 이분은 제대로 사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계속 정부가 이것만 해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고 자신을 위안하고, 직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분이 바라는 대로 정부가 규제를 곧 완화할까? 1년 동안 아무 변화가 없었는데, 앞으로 과연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정말로 규제가 완화됐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정말로 사업이 대박날까? 실은,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불확실성 투성이인 벤처인데,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을 되도록 최소화하는 게 사업의 목적 중 하나인데, 회사의 존재 자체를 내가 기본적으로 전혀 컨트롤 할 수 없는 남한테 의존해서 잘 된 사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그것도 그 ‘남’이 정부일 경우에는 더욱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회사들을 만나면 “앞으로 어떤 굵직한 일이 외부에서 발생하면, 회사가 크게 성공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하는데, 여기에 대한 답변인 “만약에 이게 되면, 사업이 잘될 것이다”에서 그 일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내부적으로 전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냥 잘 될 거라는 현실성이 부족한 희망이 만든 환상이라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상현실의 현주소와 미래

요새 ‘VR’이라는 말을 하면 마치 석기시대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들릴 정도로, VR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 2014년도에 Facebook이 오큘러스를 거액에 인수했을 때는 곧 세상이 가상현실화될 것처럼 모든 투자자가 VR 회사를 검토하고 하나 정도는 투자했고, 많은 창업가가 VR이 미래라면서 가상현실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실은 이게 오래된 것도 아니고 5년 전 이야기인데, 이후 관심도가 급격히 줄면서, 최근 2년 동안 나는 VR 회사에 대한 피칭 자료는 거의 못 봤고, 이 분야에서 새로 창업한 팀도 많이 못 만나본 거 같다. VR과 엔터테인먼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에, 우리는 LA에 있으면서 VR의 파도를 몸소 체감할 수 있었고, 우리도 이 분야의 상당히 많은 회사를 봤고, 4개에 투자했다. 콘텐츠를 만드는 Penrose Studios, VR 기반의 의료수술을 스트리밍해 주는 GIBLIB,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게임 회사였는데, 한 개는 망했고, 한 개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VR 시장에 대해서는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관점을 갖고 언젠가는 시장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요새도 누군가 VR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면, 관심을 두고 본다. 물론, 이 관심은 VR에 대한 궁극적인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행이 아니라서 남이 관심 두지 않는 분야에 우리만 투자한다는 우리 철학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VR 시장이 올까? 온다면 언제 올까? 이 질문은 아마도 모든 VC가 하는,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2015년 8월에 내가 이 포스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스마트폰이 그랬듯이 앞으로는 –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 가상현실이 대중적인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기기 자체도 지금같이 투박하지 않고 상당히 진화되었을 것이다.
내가 맞을까? 시간만이 알려줄 것이다. 5년 뒤에 이 블로그 포스팅을 재방문해 봐야겠다.”

5년 뒤가 되려면 아직 1년 6개월이 남았지만, 지금 속도와 분위기로는 가상현실이 현실화되긴 힘들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인데, 여기서 내가 그동안 듣고, 읽고, 경험하고, 느낀 점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내 지인 중 VR 기기를 모으는 분이 있다. 이 사람보다 VR 시장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이 사람보다 VR 기기를 더 많이 사용해 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분한테 VR에 관해서 물어보면, 다음과 같은 웃긴 말을 한다. “VR 기기를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많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 번 이상 사용해 본 사람도 거의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만큼 VR 기기를 세팅하고,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그 과정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럽다는 의미이다. 기기가 너무 많고, 대부분 유선 제품이라서, 일단 기기들을 연동하고 세팅하려면, 세팅만을 위한 마음가짐과 다짐이 필요하다. 그리고 작은 아파트나 원룸에 살고 있다면,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에, 계속 연결해놓지 못하고 사용 후에는 다시 정리해놔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특히 다양한 HMD가 본체와의 호환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러 VR 기기를 사용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귀찮음,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 불편한 과정이 이 글에 잘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 이 현상을 “VR은 destination(최종 목적지)”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냥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VR을 쉽게 경험하는 게 아니라, VR이라는 최종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VR을 의식적으로 선택해야 하며,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이 최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VR을 스마트폰과 비교해보면, 스마트폰은 그 자체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다른 목적지로 가는 동안에 항상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accompaniment(동행)”라고 표현한다. 이 destination과 accompaniment를 조금 더 풀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누구나 다 하루에 24시간이 주어진다. 8시간은 침대에서, 8시간은 직장에서, 그리고 한 2~3시간은 삶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하는데 보낸다고 하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5~6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최대한 생산적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VR은 이 소중한 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의식적인 행위인 destination이자, 레알 현실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가상 현실이지만, 스마트폰 대부분의 앱은 이 현실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동시에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행위인 accompaniment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잠잘 때는 못 하지만,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에도 하던 일을 굳이 멈추지 않고도, 상당히 많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근무 시간 중에 VR을 굳이 하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기기를 세팅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나는 VR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우리는 항상 기술이 가져올 수 있는 단기간 내의 혁신은 과대평가하지만, 장기간 내의 혁신은 과소평가하는 성향이 있는데 VR도 이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VR이 대중화되기 위한 인프라가 깔려야 하고, 하드웨어가 더 작고 편리해져야 한다.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는 그 다음 이야기고, 인프라와 하드웨어가 대중화되면 훨씬 더 쉽게 풀릴 수 있다.

회사가 사람을 만든다

바로 전 글에서 사람과 팀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말 나온 김에 사람에 대해 또 몇 자 적어본다. 우리 속담에 “회사가(또는, 자리가) 그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실은, 이 말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좀 다르다. 한쪽에서는, 능력이 별로 특출나거나 머리가 막 뛰어나지 않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좋은 회사에 입사해서, 이 분들로부터 일을 배우고, 좋은 동료들과 교류하다 보면, 그 사람도 모든 면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동화돼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즉, 회사가 사람을 만드는 게 맞다고 한다. 다른 쪽에서는, 회사가 사람을 만드는 건 아니고, 원래부터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만든 회사면, 회사가 잘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마치 회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회사를 만드는 게 맞다고 한다.

나도 요새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잘 되는 회사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 다 너무 능력이 뛰어난 거 같은데 과연 이 모든 사람이 원래 이렇게 특출난 사람들인지, 아니면 좋은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가진 회사라서, 이 회사에는 그냥 웬만한 사람이 들어가도 모두 좋은 시스템을 통해서 기계적으로 좋은 아웃풋이 나오는 것인지. 자세히 찾아보진 않았지만, 조직 행동론적으로 이런 현상을 분석한 논문도 있고, 학문적으로도 다양한 설이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조직이 사람을 만드는 게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보였던 조직이 페이팔, 그리고 페이팔보다 더 오래된 SUN Microsystems 인거 같다. ‘페이팔 마피아’라는 이야기는 이 분야에서 일하면 누구나 다 들어봤을 것인데, 페이팔 출신 사람들이 – 창업가 및 초기 직원 – 모두 쟁쟁한 tech 기업을 만들어서 서로 같이 투자하고 도와주면서 tech 생태계를 형성하는 현상이다. 대표적인 마피아 조직원으로는 LinkedIn의 리드 호프먼, Tesla의 일론 머스크, Founders Fund/제로투원의 피터 틸, YouTube 공동창업자 스티브 첸, Yelp의 제러미 스토플먼, 여러 회사를 만든 천재 엔지니어 맥스 레브친 등이 있다.
Sun Microsystems는 페이팔 마피아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이 회사 출신 동문도 엄청나다. 일단 나도 자주 이야기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VC 중 한 명인 비노드 코슬라가 썬의 공동 창업가였고, 비노드가 직접 채용한 썬의 초기 직원은 다음과 같다. 구글의 대표를 오랫동안 지낸 에릭 슈미트, 오토데스크와 야후!의 대표였던 캐롤 바츠, 그리고 저명한 컴퓨터 학자/작가 빌 조이 등이 모두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출신이다.

실은 페이팔과 썬의 초기 직원 모두 개인적으로는 아주 능력 있는 분들인 거 같다. 하지만, 이 사람들만큼 개인적으로는 능력 있는 사람 또한 나는 많이 봤지만, 페이팔과 썬 동문만큼 잘 하고 있진 않은 거 같다. 이런 단순한 시각으로 보면, 잘 되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그리고 하는 것도 뭔가 다르고, 뛰어난 사람들과 항상 뛰어난 경험을 하기 때문에, 이 과정이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업무 능력도 비약적으로 좋아지고,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하는 구조 자체가 바뀌는 거 같다. 즉, 회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어느 정도 맞는 거 같다.

정리를 하면,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회사를 만들고, 좋은 회사를 만들어 놓으면 또 좋은 사람들이 채용될 확률이 커지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좋은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는 웬만한 직원들은 회사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나중에 회사를 나가서,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걸 기반으로 또 좋은 회사를 만들거나, 다른 회사에 가서 이 회사를 더욱더 좋은 회사로 만드는 거 같다.